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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1. 참전(3)
‘아킬레우스. 내 너에게만큼은 늘 부족함 없게 하였지. 네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네 손에 쥐어 주었단다. 이런 나를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잖니.’
‘그러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일라, 그 여종을 제게서 치워 주십시오.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제까짓 게 감히 저를 감시하는 것 같아 꼴도 보기 싫단 말입니다.’
테티스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냉담한, 어딘가 표독한 말투로.
‘사람이라고 생각지 마렴. 그러면 되는 일이 아니니. 네가 걱정되어 어미가 곁에 둔 물건 정도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일이란다.’
그 대화를 엿듣고 만 이후로 주제를 파악하기란 쉬웠다. 허나, 어린 날의 가슴속에 뭣 모를 허망함이 들어찬 것도 같았다.
‘나 같은 건 절대 그분의 곁에 설 수조차 없어. 그분은…….’
더 이상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에 그녀는 부러 생각의 고리를 끊었다. 어쨌든 테티스 님의 관심은 오롯이 아킬레우스 님의 안위뿐. 허나 어릴 적부터 그 흔하디흔한 상처 하나도 달고 살지 않는 데다가 완연한 성인이 된 아킬레우스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곁에 둔다는 것은 퍽 이상한 일 아닌가.
하지만 여종은 궁금해하는 위치가 아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그분께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어.’
그리 생각하는 아일라의 손을 테티스가 다시금 맞잡아 왔다.
“여전히 착하구나. 그렇게 항상…… 내가 너를 데려온 것을 잊지 마렴 아일라.”
“예. 테티스 님.”
“그럼 이제 나가서 네 할 일을 하면 되겠구나.”
자신이 할 일. 아일라는 고개를 들어 다시 테티스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어 보이는 테티스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아일라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동이 트기 전에 아킬레우스 님을 모셔 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
한 주인을 평생 모셔 오다 보면 제 주인에 대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식성이라던가, 옷이나 장신구의 취향, 항상 곁에 두고 필요로 하는 물건들, 귀하게 여기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자주 가는 장소와 심지어는 성적 취향까지.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대체로 그 범위 내를 벗어나지 않는 주인이었다. 아일라는 은근히 단순한 제 주인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 아킬레우스 님이 가실 만한 곳은 그곳밖에 없지.’
그리고 아일라는 그런 제 주인을 잘 아는 종이었다. 아일라는 걸음을 옮기며 손가락으로 셈을 해 보았다. 아킬레우스 님이 더운 여름에 태어나셨고 이듬해 겨울에 테티스 님께서 나를 거두어 데려오셨으니…….
‘……나도 성년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구나.’
저도 더 이상 적지 않은 나이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전쟁이 무섭다는 둥의 핑계를 대며 어리광을 피우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물론 피울 사람도 없지만, 아일라는 약간 두려운 마음에 조금 침울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목적지를 지나칠 뻔한 아일라는 다행히 한 화려한 술집 앞에서 멈추어 섰다. 밤에도 환히 불을 매단 이곳에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모여 있었다.
호객행위를 하던 반쯤 벗다시피 한 여인들이 새초롬한 눈으로 아일라를 훑어보다 이내 비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멋쩍음에 괜스레 코를 만지작거렸다.
제 주인 때문에 자주 오게 되는 곳이지만 올 때마다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는 곳임은 분명했다.
“저런, 또 아킬레우스 님을 찾으러 오셨나 보군요.”
“그, 그렇습니다.”
“……안으로 드시죠.”
아일라는 자신을 알아본 술집 여종의 안내를 받아 내부로 들어섰다. 이미 취해 있는 혹은 취해 가는 이들을 지나치고, 깊고 깊은 미로처럼 몇 번의 귀퉁이를 돌고 나서야 가장 커다랗게 마련된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빈 포도주병은 이미 발바닥에 채일 정도로 많았고, 진득한 기름 냄새가 풍기는 음식들과 새콤한 향이 나는 제철 과일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서로 엉켜 있는 수많은 남녀들. 그 사이의 제 주인이 보였다.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금발과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강건해 보이는 몸을 가진 그는 자신의 옆에 앉은 무희의 입술을 거칠게 탐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무희에게 농밀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입맞춤을 받아 내는 무희의 등이 점점 뒤로 밀려간다.
시선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저절로 손끝과 발가락 끝이 곱아드는 느낌에 아일라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으음…….”
잇새로 흥분에 찬 신음을 흘리던 남자가 결국 무희의 드러난 가슴을 한껏 그러쥐었다. 그가 삐그덕 소리를 내는 기다란 나무 의자 위에 무희의 몸을 눕히고 검은 머리의 무희가 그의 목에 팔을 걸어 막 끌어당기던 그때였다.
“……아일라?”
그녀를 알아본 파트로클로스의 말 한마디에 아킬레우스의 움직임이 단숨에 멎었다.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아래에 깔려 있던 무희는 제 가슴을 움켜쥔 남자의 손에 와락 힘이 들어가자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애무가 아니었다. 분노를 채 삼키지 못한 듯 반듯한 미간을 신경질적으로 찌푸린 그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아킬레우스 님.”
아일라는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며 제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제 여종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저리 부르는 것이야 뻔했다. 테티스 님이 찾으신다 하겠지. 멍청한 여종이 하는 말이라고는 그런 것이 다일 테니까.
그는 몸을 일으켜 제게 허리를 숙인 여종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필리포스.”
“응?”
아킬레우스는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 동석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 역시 한 여인을 옆에 끼고 마음껏 희롱하는 중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부름에 그가 여인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의 취한 눈동자는 잔혹한 빛을 띠었다.
“……너는 처녀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환장하지.”
괴롭혀 주면 색다른 반응을 하거든. 그리 덧붙이며 필리포스가 샐쭉 웃었다.
“그럼 저는 싫으신 거예요. 필리포스 님?”
여인의 물음에 필리포스는 킬킬거리며 여인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적나라한 광경에 아일라는 언제나처럼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더운 여름밤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내 여종은 나를 따라다니느라 바빠 평생 코레(처녀)일 텐데.”
“…….”
“필리포스. 네가 괜찮다면 내 여종과도 한번 놀아 주는 게 어떤가.”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할 법한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이마에 절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것을 슬쩍 쓸어내리며 아일라는 자신을 다독였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주인님께서 지금 좋은 시간을 방해한 내게 화가 많이 나셨고 그래서 나를 겁주려고, 괜한 말을 하시는 것일 테다.
아일라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키지 않으려 허리를 곧게 핀 그 순간, 여종과 주인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줄곧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테티스 님의 눈동자보다 짙은 파란색의 눈동자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아일라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진심이신 걸까.’
평생 함께한 여종의 순결 따위 대수롭지 않게 바닥에 던져 줄 만큼 깊은 경멸과 혐오가 느껴지는 눈빛. 저 눈빛을 그녀는 익히 알고 있다. 아일라는 저절로 눈을 내리떴다. 눈꺼풀이 긴장감에 떨려 왔다.
“음?”
필리포스는 게슴츠레한 눈을 들어 조금 멀찍이 서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묘한 분위기의 여자는 다른 여인들보다 몸집이 작아 퍽 가냘파 보였다. 이런 곳이 익숙지 않은 듯 움찔거리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키톤 아래로 드러난 흰 어깨뼈는 힘주어 안으면 부러질 듯하다. 하지만 저런 여자들은 확실히 눈길이 간단 말이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필리포스가 제 입술을 핥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여자는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차마 자신을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바들거리는 꼴이 우스우면서도 그에게 저열한 우월감을 가져다주었다.
“고개를 들어.”
“저, 저는 아킬레우스 님을…… 윽!”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 생각한 필리포스가 거칠게 아일라의 머리채를 잡아채 제 얼굴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가까이서 마주한 여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응?”
생각지 못한 수확이다 싶은 필리포스가 킬킬거리며 아일라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 살폈다. 겁에 질린 검은 눈동자. 끝이 가는 눈꼬리와 긴 속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과 도톰한 입술은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예상외로 꽤나 취향인 터라 그는 샐쭉 웃었다.
‘제발…… 제발 자비를.’
우악스러운 손아귀로 틀어쥔 뒤통수가 뜨겁고 아렸다. 남자의 흐리멍덩한 눈빛을 마주하자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절로 몸이 덜덜 떨린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지할 사람은 제 주인밖엔 없었기에 아일라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아킬레우스 님!”
맑고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필리포스는 즐겁게 내려다보았다. 울먹이자 발개지는 눈가가 어쩐지 색정적인 터라 단숨에 흥분한 필리포스는 아킬레우스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는 조금 더 대담해지기로 했다. 그는 아일라의 한쪽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아!”
그 누구도 대놓고 만진 적 없는 가슴에 손이 닿자 아일라는 머리채를 잡힌 채 움찔 몸을 떨었다. 그토록 울고 싶지 않았건만, 결국 가득 고였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슴을 틀어잡힌 것보다도 흘려 버린 눈물이 더욱 수치스러웠다.
“뭐야. 애처럼 작길래 덜 자란 줄 알았더니. 이거 진짜 재밌네.”
한손에 적당히 들어차는 말랑한 가슴을 좀 더 느낄 새도 없이 아일라가 세게 필리포스를 밀쳤다. 순간 아일라를 놓친 필리포스 때문에 그녀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하하하하!”
그 꼴을 바라보며 필리포스가 크게 웃기 시작하자 그곳에 모인 모두가 아일라를 손가락질하며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개중 웃지 않는 이는 아일라와 그의 주인뿐이었다.
“아킬레우스 님…….”
고개를 푹 숙인 아일라가 그의 이름을 조용히 속삭이다 이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 중 제 주인의 것을 마주했다.
여전히 무감정한 눈. 아일라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여종 따위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을 뱉었다.
“……아킬레우스 님.”
“…….”
“테티스 님께서 차, 찾으십니다.”
“응? 뭐야. 나는 안 찾으시고?”
필리포스였다. 그녀를 따라 주저앉은 필리포스가 드러난 아일라의 하얀 다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인다. 아일라는 퍼뜩 놀라 키톤 자락을 내렸으나 남자가 우악스러운 손속으로 그녀의 손을 저지했다.
“으으…….”
아일라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남자의 커다랗고 거친 손이 제 무릎을 지나 넓적다리 안쪽으로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아일라는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려 제 작은 얼굴을 가렸다.
그를 즐겁다는 듯 바라보며 필리포스가 아일라의 입술 쪽으로 제 얼굴을 가까이 하던 그때였다.
1. 참전(3)
‘아킬레우스. 내 너에게만큼은 늘 부족함 없게 하였지. 네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네 손에 쥐어 주었단다. 이런 나를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잖니.’
‘그러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일라, 그 여종을 제게서 치워 주십시오. 어딜 가든, 무얼 하든! 제까짓 게 감히 저를 감시하는 것 같아 꼴도 보기 싫단 말입니다.’
테티스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냉담한, 어딘가 표독한 말투로.
‘사람이라고 생각지 마렴. 그러면 되는 일이 아니니. 네가 걱정되어 어미가 곁에 둔 물건 정도로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일이란다.’
그 대화를 엿듣고 만 이후로 주제를 파악하기란 쉬웠다. 허나, 어린 날의 가슴속에 뭣 모를 허망함이 들어찬 것도 같았다.
‘나 같은 건 절대 그분의 곁에 설 수조차 없어. 그분은…….’
더 이상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에 그녀는 부러 생각의 고리를 끊었다. 어쨌든 테티스 님의 관심은 오롯이 아킬레우스 님의 안위뿐. 허나 어릴 적부터 그 흔하디흔한 상처 하나도 달고 살지 않는 데다가 완연한 성인이 된 아킬레우스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곁에 둔다는 것은 퍽 이상한 일 아닌가.
하지만 여종은 궁금해하는 위치가 아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그분께 쓸모 있는 존재이고 싶어.’
그리 생각하는 아일라의 손을 테티스가 다시금 맞잡아 왔다.
“여전히 착하구나. 그렇게 항상…… 내가 너를 데려온 것을 잊지 마렴 아일라.”
“예. 테티스 님.”
“그럼 이제 나가서 네 할 일을 하면 되겠구나.”
자신이 할 일. 아일라는 고개를 들어 다시 테티스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어 보이는 테티스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아일라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동이 트기 전에 아킬레우스 님을 모셔 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
한 주인을 평생 모셔 오다 보면 제 주인에 대해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식성이라던가, 옷이나 장신구의 취향, 항상 곁에 두고 필요로 하는 물건들, 귀하게 여기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 자주 가는 장소와 심지어는 성적 취향까지.
그리고 아킬레우스는 대체로 그 범위 내를 벗어나지 않는 주인이었다. 아일라는 은근히 단순한 제 주인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에 아킬레우스 님이 가실 만한 곳은 그곳밖에 없지.’
그리고 아일라는 그런 제 주인을 잘 아는 종이었다. 아일라는 걸음을 옮기며 손가락으로 셈을 해 보았다. 아킬레우스 님이 더운 여름에 태어나셨고 이듬해 겨울에 테티스 님께서 나를 거두어 데려오셨으니…….
‘……나도 성년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구나.’
저도 더 이상 적지 않은 나이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전쟁이 무섭다는 둥의 핑계를 대며 어리광을 피우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다. 물론 피울 사람도 없지만, 아일라는 약간 두려운 마음에 조금 침울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목적지를 지나칠 뻔한 아일라는 다행히 한 화려한 술집 앞에서 멈추어 섰다. 밤에도 환히 불을 매단 이곳에는 여러 인간 군상들이 모여 있었다.
호객행위를 하던 반쯤 벗다시피 한 여인들이 새초롬한 눈으로 아일라를 훑어보다 이내 비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멋쩍음에 괜스레 코를 만지작거렸다.
제 주인 때문에 자주 오게 되는 곳이지만 올 때마다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는 곳임은 분명했다.
“저런, 또 아킬레우스 님을 찾으러 오셨나 보군요.”
“그, 그렇습니다.”
“……안으로 드시죠.”
아일라는 자신을 알아본 술집 여종의 안내를 받아 내부로 들어섰다. 이미 취해 있는 혹은 취해 가는 이들을 지나치고, 깊고 깊은 미로처럼 몇 번의 귀퉁이를 돌고 나서야 가장 커다랗게 마련된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빈 포도주병은 이미 발바닥에 채일 정도로 많았고, 진득한 기름 냄새가 풍기는 음식들과 새콤한 향이 나는 제철 과일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서로 엉켜 있는 수많은 남녀들. 그 사이의 제 주인이 보였다.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금발과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강건해 보이는 몸을 가진 그는 자신의 옆에 앉은 무희의 입술을 거칠게 탐하는 중이었다. 수많은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무희에게 농밀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입맞춤을 받아 내는 무희의 등이 점점 뒤로 밀려간다.
시선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저절로 손끝과 발가락 끝이 곱아드는 느낌에 아일라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으음…….”
잇새로 흥분에 찬 신음을 흘리던 남자가 결국 무희의 드러난 가슴을 한껏 그러쥐었다. 그가 삐그덕 소리를 내는 기다란 나무 의자 위에 무희의 몸을 눕히고 검은 머리의 무희가 그의 목에 팔을 걸어 막 끌어당기던 그때였다.
“……아일라?”
그녀를 알아본 파트로클로스의 말 한마디에 아킬레우스의 움직임이 단숨에 멎었다.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의 아래에 깔려 있던 무희는 제 가슴을 움켜쥔 남자의 손에 와락 힘이 들어가자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었다.
애무가 아니었다. 분노를 채 삼키지 못한 듯 반듯한 미간을 신경질적으로 찌푸린 그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아킬레우스 님.”
아일라는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며 제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제 여종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저리 부르는 것이야 뻔했다. 테티스 님이 찾으신다 하겠지. 멍청한 여종이 하는 말이라고는 그런 것이 다일 테니까.
그는 몸을 일으켜 제게 허리를 숙인 여종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필리포스.”
“응?”
아킬레우스는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 동석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 역시 한 여인을 옆에 끼고 마음껏 희롱하는 중이었다. 아킬레우스의 부름에 그가 여인의 가슴에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의 취한 눈동자는 잔혹한 빛을 띠었다.
“……너는 처녀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환장하지.”
괴롭혀 주면 색다른 반응을 하거든. 그리 덧붙이며 필리포스가 샐쭉 웃었다.
“그럼 저는 싫으신 거예요. 필리포스 님?”
여인의 물음에 필리포스는 킬킬거리며 여인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적나라한 광경에 아일라는 언제나처럼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더운 여름밤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내 여종은 나를 따라다니느라 바빠 평생 코레(처녀)일 텐데.”
“…….”
“필리포스. 네가 괜찮다면 내 여종과도 한번 놀아 주는 게 어떤가.”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할 법한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이마에 절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것을 슬쩍 쓸어내리며 아일라는 자신을 다독였다. 아니다, 아닐 것이다. 주인님께서 지금 좋은 시간을 방해한 내게 화가 많이 나셨고 그래서 나를 겁주려고, 괜한 말을 하시는 것일 테다.
아일라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들키지 않으려 허리를 곧게 핀 그 순간, 여종과 주인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줄곧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테티스 님의 눈동자보다 짙은 파란색의 눈동자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아일라는 왠지 울고 싶어졌다.
‘진심이신 걸까.’
평생 함께한 여종의 순결 따위 대수롭지 않게 바닥에 던져 줄 만큼 깊은 경멸과 혐오가 느껴지는 눈빛. 저 눈빛을 그녀는 익히 알고 있다. 아일라는 저절로 눈을 내리떴다. 눈꺼풀이 긴장감에 떨려 왔다.
“음?”
필리포스는 게슴츠레한 눈을 들어 조금 멀찍이 서 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묘한 분위기의 여자는 다른 여인들보다 몸집이 작아 퍽 가냘파 보였다. 이런 곳이 익숙지 않은 듯 움찔거리는 가느다란 손가락과 키톤 아래로 드러난 흰 어깨뼈는 힘주어 안으면 부러질 듯하다. 하지만 저런 여자들은 확실히 눈길이 간단 말이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필리포스가 제 입술을 핥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여자는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 차마 자신을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바들거리는 꼴이 우스우면서도 그에게 저열한 우월감을 가져다주었다.
“고개를 들어.”
“저, 저는 아킬레우스 님을…… 윽!”
자신의 말을 무시한다 생각한 필리포스가 거칠게 아일라의 머리채를 잡아채 제 얼굴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가까이서 마주한 여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더…….
“괜찮은데? 응?”
생각지 못한 수확이다 싶은 필리포스가 킬킬거리며 아일라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 살폈다. 겁에 질린 검은 눈동자. 끝이 가는 눈꼬리와 긴 속눈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과 도톰한 입술은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었다.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예상외로 꽤나 취향인 터라 그는 샐쭉 웃었다.
‘제발…… 제발 자비를.’
우악스러운 손아귀로 틀어쥔 뒤통수가 뜨겁고 아렸다. 남자의 흐리멍덩한 눈빛을 마주하자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 절로 몸이 덜덜 떨린다. 이런 상황에서도 의지할 사람은 제 주인밖엔 없었기에 아일라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 아킬레우스 님!”
맑고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필리포스는 즐겁게 내려다보았다. 울먹이자 발개지는 눈가가 어쩐지 색정적인 터라 단숨에 흥분한 필리포스는 아킬레우스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을 눈치채고는 조금 더 대담해지기로 했다. 그는 아일라의 한쪽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아!”
그 누구도 대놓고 만진 적 없는 가슴에 손이 닿자 아일라는 머리채를 잡힌 채 움찔 몸을 떨었다. 그토록 울고 싶지 않았건만, 결국 가득 고였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슴을 틀어잡힌 것보다도 흘려 버린 눈물이 더욱 수치스러웠다.
“뭐야. 애처럼 작길래 덜 자란 줄 알았더니. 이거 진짜 재밌네.”
한손에 적당히 들어차는 말랑한 가슴을 좀 더 느낄 새도 없이 아일라가 세게 필리포스를 밀쳤다. 순간 아일라를 놓친 필리포스 때문에 그녀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하하하하!”
그 꼴을 바라보며 필리포스가 크게 웃기 시작하자 그곳에 모인 모두가 아일라를 손가락질하며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개중 웃지 않는 이는 아일라와 그의 주인뿐이었다.
“아킬레우스 님…….”
고개를 푹 숙인 아일라가 그의 이름을 조용히 속삭이다 이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 중 제 주인의 것을 마주했다.
여전히 무감정한 눈. 아일라는 여전히 그리고 영원히 여종 따위일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을 뱉었다.
“……아킬레우스 님.”
“…….”
“테티스 님께서 차, 찾으십니다.”
“응? 뭐야. 나는 안 찾으시고?”
필리포스였다. 그녀를 따라 주저앉은 필리포스가 드러난 아일라의 하얀 다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인다. 아일라는 퍼뜩 놀라 키톤 자락을 내렸으나 남자가 우악스러운 손속으로 그녀의 손을 저지했다.
“으으…….”
아일라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남자의 커다랗고 거친 손이 제 무릎을 지나 넓적다리 안쪽으로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아일라는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려 제 작은 얼굴을 가렸다.
그를 즐겁다는 듯 바라보며 필리포스가 아일라의 입술 쪽으로 제 얼굴을 가까이 하던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