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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1. 참전(4)
“어머니가 찾으신다니.”
“…….”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군.”
무리의 중심에서 몸을 일으킨 아킬레우스가 저벅저벅 걸어와 필리포스와 주저앉아 있는 아일라를 지나쳤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를 모두가 올려다보았다. 그의 위압감 넘치는 모습에 필리포스의 희롱이 잠시 멈추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아일라는 올라간 키톤 자락을 재빠르게 정리해 몸을 일으켰다.
여종은 자신을 지나치는 아킬레우스의 뒤를 황급히 쫒았다. 필리포스는 그런 그녀를 더는 잡을 수 없었다. 지나치며 마주했던 아킬레우스의 눈빛 때문이었다.
“……쳇, 재미없게.”
손에 감기는 여자의 속살이 몹시 맘에 들었기에 필리포스는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아킬레우스의 변덕 아닌 변덕에 다 잡은 먹이를 놓친 것만 같았다. 필리포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다른 여인을 품에 안으며 아일라를 떠올렸다. 분명 기회는 또 올 것이다. 그의 직감이 속삭였다.
한편, 아킬레우스는 조금 떨어진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작은 발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여종은 항상 그랬다. 그림자가 지지 않는 늦은 밤에도 혹여 제 그림자라도 밟을까 멀리 떨어져 걸었다.
철이 들기 한참 전부터 자신의 곁에 있던, 함께한 시간이 너무도 길었던, 그래서 철이 들 무렵부터는 어머니의 눈동자같이 느껴지는 여종.
“……성인이 되면 너로부터, 아니 내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어머니를 벨 수는 없으니 너를 베어야 할까.”
역시나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 그 말에 지친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주인의 발자국을 따라 걷던 아일라는 그제야 눈을 들어 그 와중에도 멀어지는 남자의 널따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서러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듯한 기분에 머저리처럼 허둥지둥하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런 말이, 그런 태도가 낯선 것이 아님에도 매번 그랬다. 매번…… 가슴이 아프고 눈물을 참기 힘들었어.
발에 채이는 돌멩이보다 못한 처지. 허나 주인의 앞길을 막는 돌부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토록 무정한 주인이건만,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노력하고 싶었으니까. 가슴을 열어 이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그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겠다 말한대도 아일라는 그를 뒤따라야 했다. 그건 갓난쟁이일 적 신전에 버려진 그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니까.
결심을 마치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맨발에 생채기가 나도 상관없었다. 있는 힘껏 내달려 그의 걸음을 감히 막아섰다. 뭐하는 짓이냐. 그가 역성을 내기 전에 아일라는 황급히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생전 처음 보는 여종의 행동에 답지 않게 당황한 아킬레우스는 반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런 저를 올려다보는 여종의 얼굴 위로 달빛이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가죽 샌들을 신은 그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리저리 핏줄이 솟은 단단한 발에 따뜻하고 말랑한 여인의 입술이 길게 닿았다 떨어졌다. 종들이 주인에게 바치는 최후의 예우. 아킬레우스는 어둔 밤, 달빛 하나에 의지해 아일라를 마주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여자의 희고 작은 손이, 이어서 거친 바닥에 급하게 무릎을 꿇느라 왕창 깨진 게 분명할 무릎까지 눈에 들어왔다.
“저는, 저는 아킬레우스 님의 여종입니다. 생각하시는 테티스 님의 눈동자가 되지 못합니다. 항상 그랬듯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숨죽여 아킬레우스 님의 발꿈치만 보고 걸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영원한 이름을, 원하시는 뜻을 위해 저를 데리고 가 주세요.”
그것은 진심이었다. 차마 더는 그를 올려다보지 못한 채 두 눈을 꾹 감았다. 처음으로 내보인 진심까지 믿어 주지 않으실까 두려움이 일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킬레우스는 제 발치의 여종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걸음을 돌렸다.
‘요사스러운 것.’
저 입 발린 말이 진심일지, 아니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저는 아일라를 죽일 수 없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는 저 여종이 필요하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에 아킬레우스는 다시금 조용히 뒤따르는 여종의 발소리에 발 맞춰 걸었다. 깊어지는 달빛이 이번에는 그의 가벼워진 발걸음을 비추었다.
***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어깨 부근에 클라미스를 두르는 여종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여종은 기분이 좋은지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킬레우스 님. 얼마 만에 왕비 님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인지 아시나요? 분명 식탁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황홀한 음식들이 가득 채워져 있을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천한 여종에게나 눈이 돌아갈 법한 음식들이겠지.”
그가 무심한 어투로 대꾸하자 아일라는 괜스레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입을 꾹 다물었다. 여종의 시무룩한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그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를 기대하란 말인가. 마치 자신이 음식을 준비하기라도 한 양 자신 있게 말하는 여종의 모습이 우스웠다.
“다 된 건가?”
“예? 아, 네! 모두 마쳤습니다. 무척…… 아름다우세요 아킬레우스 님.”
“헛소리.”
일순, 날 선 눈빛에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아일라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머리를 한 대만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릴 적부터 수려했던 외모 때문에 여장까지 했던 전적 때문일까, 주인은 제 껍데기를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경멸했으니까.
‘그런데 어떡해, 진심인걸…….’
아킬레우스 님이 아름답지 않으시면 대체 누가 아름다운 걸까. 테티스 님일까,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빼어난 미모를 가졌다는 아폴론 신일까. 그도 아니면 혹,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님 정도일지도 몰라. 아일라는 한참을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 이내 머리를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일라는 연이은 당황스러움에 멍청하게 웃음 짓고 말았다. 다행히도 아킬레우스는 그녀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에서 무심히 고개를 돌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장서라.”
“예.”
자신의 어깨에도 못 미치는 여종을 따라 아킬레우스가 마련된 식사 자리로 들어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펠레우스와 테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아들을 기쁘게 맞이했다.
“오랜만이구나 아들아.”
“언제나 올까 하며 기다렸단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간단하고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저녁 식사는 바로 시작되었다. 음식이 줄어든 그릇을 치우고 새 음식을 가져오거나, 비어 있는 물 잔과 술잔을 채우며 종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세 사람의 식사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대강 식사가 마무리된 무렵, 붉은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켠 테티스는 먼저 운을 뗐다.
“함께 식사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조금 더 일찍 이리 함께 식사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식사는 고사하고 얼굴도 제대로 비추지 않으니 늘 속상했단다.”
“나 역시 그렇소. 아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라니, 아킬레우스가 장성한 이후 거의 처음 아닐까 싶은데.”
펠레우스 왕이 제 부인의 말을 거들었다. 그 와중에 식사를 마친 아킬레우스가 당연하게 손을 내밀자 아일라는 천을 가져와 그의 단단한 손가락 하나하나를 꼼꼼히 닦아 내었다. 그 모습을 테티스와 펠레우스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킬레우스는 아일라에게 물을 가져오라 시킨 후에야 제 부모를 응시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크흠.”
의자에 기댔던 등을 떼 내며 펠레우스는 불편한 듯 신음했다. 테티스는 아무 말 없이 다시금 금잔을 입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아일라를 데리고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겠습니다.”
“그리하거라. 어찌 다 큰 자식의 앞길을 막겠느냐.”
왕이 냉큼 대답했다. 아버지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미 모친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리라. 아킬레우스의 무심한 시선이 테티스로 넘어가자 테티스는 팔을 뻗어 단단한 아킬레우스의 손을 감아쥐었다.
어느새 자신의 손보다 훨씬 크고 굵어진 아들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테티스는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듯 달싹이던 입술을 열었다.
“몸 조심히 다녀오거라. 어미와 아비는 여기서 신들께 기도드리며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제야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끔찍할 만큼 자신의 눈과 닮아 있는 모친의 눈은 파랗고 깊었다.
어째서일까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물병을 든 채 한참 종종거리고 있을 여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져 간다. 아킬레우스는 잠시 시선을 옮겨 뒤편을 살폈다. 그러나 아일라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저 무뚝뚝하게 그리 대답했다. 시선 한번 마주치지 않는 아들의 대답에 왕은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뿐인 아들이지만 참 귀염성 없는 자식이었다.
거칠고 위험한 전쟁에 명예를 위해 참전하는 것이 제 아들의 운명이라면 그것은 아무리 왕이라도, 아비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펠레우스의 시선이 저 멀리서 물병을 쏟을까 아슬아슬하게 걸어오는 한 여종에게 닿았다.
아일라를 살피는 펠레우스의 눈빛은 간절했다.
“돌아가겠다.”
아일라가 막 구슬땀을 흘리며 떠 온 물을 아킬레우스의 빈 잔에 채우려 할 때, 기다렸다는 듯 아킬레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휙, 뒤돌아 떠나는 제 주인 때문에 들고 있던 물병을 제대로 내려놓을 새도 없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가 보거라.”
왕의 명령에 아일라는 그들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황급히 아킬레우스의 뒤를 따랐다.
혹 테티스 님과 또 말다툼을 하신 것인가.
아일라는 그가 거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것을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앞서 걸어가는 주인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어느새 아킬레우스의 방 앞에 다다른 아일라가 조르르 달려가 문을 열자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일라가 막 무거운 문을 닫으려 할 때였다. 우뚝 걸음을 멈춘 아킬레우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명령했다.
“……너도 함께 트로이로 간다. 그러니 출정 준비에 차질이 없게 해.”
알고는 있었으나 이리 직접 말해 주실 줄은 몰랐기에 아일라는 시선을 올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놀라 커다래진 눈동자. 쿵쾅거리는 심장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쩐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믿어 준 것만 같아서.
“네!”
흥분을 감추며 아일라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대답했다.
1. 참전(4)
“어머니가 찾으신다니.”
“…….”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군.”
무리의 중심에서 몸을 일으킨 아킬레우스가 저벅저벅 걸어와 필리포스와 주저앉아 있는 아일라를 지나쳤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를 모두가 올려다보았다. 그의 위압감 넘치는 모습에 필리포스의 희롱이 잠시 멈추었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아일라는 올라간 키톤 자락을 재빠르게 정리해 몸을 일으켰다.
여종은 자신을 지나치는 아킬레우스의 뒤를 황급히 쫒았다. 필리포스는 그런 그녀를 더는 잡을 수 없었다. 지나치며 마주했던 아킬레우스의 눈빛 때문이었다.
“……쳇, 재미없게.”
손에 감기는 여자의 속살이 몹시 맘에 들었기에 필리포스는 짜증을 감추지 못했다.
아킬레우스의 변덕 아닌 변덕에 다 잡은 먹이를 놓친 것만 같았다. 필리포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다른 여인을 품에 안으며 아일라를 떠올렸다. 분명 기회는 또 올 것이다. 그의 직감이 속삭였다.
한편, 아킬레우스는 조금 떨어진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는 작은 발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여종은 항상 그랬다. 그림자가 지지 않는 늦은 밤에도 혹여 제 그림자라도 밟을까 멀리 떨어져 걸었다.
철이 들기 한참 전부터 자신의 곁에 있던, 함께한 시간이 너무도 길었던, 그래서 철이 들 무렵부터는 어머니의 눈동자같이 느껴지는 여종.
“……성인이 되면 너로부터, 아니 내 어머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
“어머니를 벨 수는 없으니 너를 베어야 할까.”
역시나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 그 말에 지친 발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주인의 발자국을 따라 걷던 아일라는 그제야 눈을 들어 그 와중에도 멀어지는 남자의 널따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서러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듯한 기분에 머저리처럼 허둥지둥하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런 말이, 그런 태도가 낯선 것이 아님에도 매번 그랬다. 매번…… 가슴이 아프고 눈물을 참기 힘들었어.
발에 채이는 돌멩이보다 못한 처지. 허나 주인의 앞길을 막는 돌부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토록 무정한 주인이건만,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노력하고 싶었으니까. 가슴을 열어 이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차피, 그가 자신을 데려가지 않겠다 말한대도 아일라는 그를 뒤따라야 했다. 그건 갓난쟁이일 적 신전에 버려진 그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니까.
결심을 마치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작은 맨발에 생채기가 나도 상관없었다. 있는 힘껏 내달려 그의 걸음을 감히 막아섰다. 뭐하는 짓이냐. 그가 역성을 내기 전에 아일라는 황급히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생전 처음 보는 여종의 행동에 답지 않게 당황한 아킬레우스는 반걸음 뒷걸음질 쳤다. 그런 저를 올려다보는 여종의 얼굴 위로 달빛이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가죽 샌들을 신은 그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이리저리 핏줄이 솟은 단단한 발에 따뜻하고 말랑한 여인의 입술이 길게 닿았다 떨어졌다. 종들이 주인에게 바치는 최후의 예우. 아킬레우스는 어둔 밤, 달빛 하나에 의지해 아일라를 마주했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여자의 희고 작은 손이, 이어서 거친 바닥에 급하게 무릎을 꿇느라 왕창 깨진 게 분명할 무릎까지 눈에 들어왔다.
“저는, 저는 아킬레우스 님의 여종입니다. 생각하시는 테티스 님의 눈동자가 되지 못합니다. 항상 그랬듯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숨죽여 아킬레우스 님의 발꿈치만 보고 걸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영원한 이름을, 원하시는 뜻을 위해 저를 데리고 가 주세요.”
그것은 진심이었다. 차마 더는 그를 올려다보지 못한 채 두 눈을 꾹 감았다. 처음으로 내보인 진심까지 믿어 주지 않으실까 두려움이 일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킬레우스는 제 발치의 여종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다 걸음을 돌렸다.
‘요사스러운 것.’
저 입 발린 말이 진심일지, 아니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저는 아일라를 죽일 수 없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는 저 여종이 필요하니까. 그것을 알면서도 굳이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에 아킬레우스는 다시금 조용히 뒤따르는 여종의 발소리에 발 맞춰 걸었다. 깊어지는 달빛이 이번에는 그의 가벼워진 발걸음을 비추었다.
***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어깨 부근에 클라미스를 두르는 여종을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여종은 기분이 좋은지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킬레우스 님. 얼마 만에 왕비 님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인지 아시나요? 분명 식탁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황홀한 음식들이 가득 채워져 있을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천한 여종에게나 눈이 돌아갈 법한 음식들이겠지.”
그가 무심한 어투로 대꾸하자 아일라는 괜스레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입을 꾹 다물었다. 여종의 시무룩한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그는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뭐를 기대하란 말인가. 마치 자신이 음식을 준비하기라도 한 양 자신 있게 말하는 여종의 모습이 우스웠다.
“다 된 건가?”
“예? 아, 네! 모두 마쳤습니다. 무척…… 아름다우세요 아킬레우스 님.”
“헛소리.”
일순, 날 선 눈빛에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아일라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멍청한 머리를 한 대만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릴 적부터 수려했던 외모 때문에 여장까지 했던 전적 때문일까, 주인은 제 껍데기를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는 눈동자들을 경멸했으니까.
‘그런데 어떡해, 진심인걸…….’
아킬레우스 님이 아름답지 않으시면 대체 누가 아름다운 걸까. 테티스 님일까,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빼어난 미모를 가졌다는 아폴론 신일까. 그도 아니면 혹,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님 정도일지도 몰라. 아일라는 한참을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다가 이내 머리를 휘휘 저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일라는 연이은 당황스러움에 멍청하게 웃음 짓고 말았다. 다행히도 아킬레우스는 그녀의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에서 무심히 고개를 돌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앞장서라.”
“예.”
자신의 어깨에도 못 미치는 여종을 따라 아킬레우스가 마련된 식사 자리로 들어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펠레우스와 테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아들을 기쁘게 맞이했다.
“오랜만이구나 아들아.”
“언제나 올까 하며 기다렸단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간단하고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저녁 식사는 바로 시작되었다. 음식이 줄어든 그릇을 치우고 새 음식을 가져오거나, 비어 있는 물 잔과 술잔을 채우며 종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그럼에도 세 사람의 식사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대강 식사가 마무리된 무렵, 붉은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켠 테티스는 먼저 운을 뗐다.
“함께 식사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조금 더 일찍 이리 함께 식사를 했으면 좋았을 것을. 식사는 고사하고 얼굴도 제대로 비추지 않으니 늘 속상했단다.”
“나 역시 그렇소. 아들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라니, 아킬레우스가 장성한 이후 거의 처음 아닐까 싶은데.”
펠레우스 왕이 제 부인의 말을 거들었다. 그 와중에 식사를 마친 아킬레우스가 당연하게 손을 내밀자 아일라는 천을 가져와 그의 단단한 손가락 하나하나를 꼼꼼히 닦아 내었다. 그 모습을 테티스와 펠레우스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킬레우스는 아일라에게 물을 가져오라 시킨 후에야 제 부모를 응시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크흠.”
의자에 기댔던 등을 떼 내며 펠레우스는 불편한 듯 신음했다. 테티스는 아무 말 없이 다시금 금잔을 입에 가져다 댈 뿐이었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아일라를 데리고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겠습니다.”
“그리하거라. 어찌 다 큰 자식의 앞길을 막겠느냐.”
왕이 냉큼 대답했다. 아버지의 태도를 보아하니 이미 모친의 허락이 떨어진 것이리라. 아킬레우스의 무심한 시선이 테티스로 넘어가자 테티스는 팔을 뻗어 단단한 아킬레우스의 손을 감아쥐었다.
어느새 자신의 손보다 훨씬 크고 굵어진 아들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테티스는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듯 달싹이던 입술을 열었다.
“몸 조심히 다녀오거라. 어미와 아비는 여기서 신들께 기도드리며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제야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끔찍할 만큼 자신의 눈과 닮아 있는 모친의 눈은 파랗고 깊었다.
어째서일까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물병을 든 채 한참 종종거리고 있을 여종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져 간다. 아킬레우스는 잠시 시선을 옮겨 뒤편을 살폈다. 그러나 아일라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저 무뚝뚝하게 그리 대답했다. 시선 한번 마주치지 않는 아들의 대답에 왕은 쓸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뿐인 아들이지만 참 귀염성 없는 자식이었다.
거칠고 위험한 전쟁에 명예를 위해 참전하는 것이 제 아들의 운명이라면 그것은 아무리 왕이라도, 아비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펠레우스의 시선이 저 멀리서 물병을 쏟을까 아슬아슬하게 걸어오는 한 여종에게 닿았다.
아일라를 살피는 펠레우스의 눈빛은 간절했다.
“돌아가겠다.”
아일라가 막 구슬땀을 흘리며 떠 온 물을 아킬레우스의 빈 잔에 채우려 할 때, 기다렸다는 듯 아킬레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휙, 뒤돌아 떠나는 제 주인 때문에 들고 있던 물병을 제대로 내려놓을 새도 없이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가 보거라.”
왕의 명령에 아일라는 그들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보인 후 황급히 아킬레우스의 뒤를 따랐다.
혹 테티스 님과 또 말다툼을 하신 것인가.
아일라는 그가 거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것을 떠올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앞서 걸어가는 주인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어느새 아킬레우스의 방 앞에 다다른 아일라가 조르르 달려가 문을 열자 그가 안으로 들어섰다.
아일라가 막 무거운 문을 닫으려 할 때였다. 우뚝 걸음을 멈춘 아킬레우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명령했다.
“……너도 함께 트로이로 간다. 그러니 출정 준비에 차질이 없게 해.”
알고는 있었으나 이리 직접 말해 주실 줄은 몰랐기에 아일라는 시선을 올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놀라 커다래진 눈동자. 쿵쾅거리는 심장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쩐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믿어 준 것만 같아서.
“네!”
흥분을 감추며 아일라는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