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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1. 참전(5)





***



뜨겁기만 했던 태양이 식은 것처럼 선선한 바람이 불 즈음, 검은 돛이 걸린 배는 준비를 모두 마쳤다. 영웅의 탄생에 대한 기대와 사랑하는 왕자의 죽음에 대한 걱정을 가득 안고 아킬레우스와 그의 병사들인 미르미돈족, 그리고 아일라를 포함한 다수의 종들은 배에 올랐다.

“우욱!”

분명 그랬다. 배에 막 오를 때까지만 해도 이 커다란 배가 파란 바다 위에 둥둥 뜬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었는데.

‘이렇게 괴로울 줄은 미처 몰랐어…….’

음식을 제대로 넘기지도 못하고 다 토해 낸 것이 벌써 며칠째인지 모르겠다. 아일라는 마지막으로 입가를 헹구고 난 후 갑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이은 구토 때문에 도저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선선해졌다고 생각한 날씨는 거짓말 같았다. 바다 한가운데로 나오자 피할 곳 없는 햇볕이 그녀의 머리 위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다들 대체 어떻게 멀쩡한 걸까.”

흐릿한 시선을 돌려 저 멀리 파트로클로스와 무언가 상의를 하고 있는 아킬레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옷차림이 약간 간소해진 것 말고는 성에 있을 때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새파란 바다 위에서 그는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것만 같았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노잡이들의 기합소리, 바쁘게 갑판을 돌아다니는 이들의 발소리. 아일라는 잠시 눈을 감았다.

“팔자 좋네. 아일라.”

“아, 아드리아.”

주저앉은 제 앞에 바싹 다가온 이는 식량을 관리하는 여종 아드리아였다. 인상을 와락 찌푸린 아드리아는 신경질적으로 아일라에게 손짓했다. 아직 저녁 식사시간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아의 얼굴은 더위에 빨갛게 익어 있었다.

“지금 일손이 부족해서 다들 발등에 불 떨어진 듯 일하고 있어. 그리 할 짓 없으면 이리 와서 좀 거들기나 하라구.”

“물론 도울게. 미안해.”

따지고 보면 소속된 곳 없이 모든 잡일을 떠맡은 아일라도 하루 종일 바빴지만 겨우 여종 따위의 사정을 봐줄 만큼 배 위의 상황은 여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육지 생활이 아닌 광활한 바다 생활에 모두가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저 같은 종들은 죽으면 죽은 그대로 바다에 던져질 것이다. 겨우 일어선 아일라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리를 옮겼다.

한편, 감출 수 없이 축 늘어진 아일라의 뒷모습을 필리포스가 진득한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미르미돈족 전사인 그가 아킬레우스를 따라 배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

까칠한 턱을 문지르며 웃음 짓던 그는 아킬레우스의 옆에 선 아일라를 한번에 알아보았더랬다. 아직까지 손아귀에 가득 들어차던 말캉한 가슴과 바들바들 떨던 부드러운 몸을 잊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갑갑한 선상 생활에 떨어진 재미있는 먹잇감. 그는 실실 웃으며 아일라를 살폈다.

‘기운 빠진 여자만큼 다루기 쉬운 게 없지.’

쓰러질 것만 같은 여자를 보아하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가 온 것만 같았다. 아일라는 알 리 없는 남자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날 밤. 파트로클로스와 이런저런 상의를 마친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선실에 돌아와 포도주를 입에 대었다. 그는 최근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항해는 순조로웠고, 날씨가 무덥기는 했으나 항해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었으며, 병든 이나 사망자도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거슬리는 것은 있었다. 아일라였다. 뱃멀미를 하는 것인지 요 며칠 새 지나치게 수척해진 여종은 병든 닭마냥 비실거리며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구토를 하는 것도 꽤 많이 봤는데. 혹 병이 든 것은 아니겠지?’

병이 든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폐쇄된 바다 위에서 병든 자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아킬레우스의 반듯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킬레우스는 아무래도 아일라를 제 눈으로 확인해야 할 듯싶었다. 정말이지 귀찮은 일이다. 신경질적으로 여종을 부르는 종을 집어 들려고 할 때였다.

“아킬레우스 님. 아일라입니다. 혹 필요한 건 없으신지요?”

귀신같은 여종의 행동에 아킬레우스는 움찔했다. 이내 무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곧 놀란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아일라를 불렀다.

“들어와.”

아일라는 허리를 숙인 채 그의 선실로 들어섰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들어찬 선실 안에는 포도주 향기가 짙게 풍겼고 그는 침상 위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나체와 다름없는 그의 옷차림에 아일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리 가까이 와라.”

평소에는 자신이 바라보는 것도 싫어하시는 분이 가까이 오라니, 당황한 아일라는 당황한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지만 주인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일라는 몇 발자국 다가갔다.

“……아니 좀 더 가까이.”

아킬레우스는 여전히 멀찍이 서 있는 여종에게 짜증을 숨기지 않으며 손짓했다.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지레 겁먹은 듯한 행동에 답답함이 치밀어 올랐다.

평소보다 더 마른 듯한 아일라가 그의 침상 바로 앞에 와 서자, 씻지 못할 게 분명한 여종에게서는 이상하게도 달콤하고 짭짤한, 바다 내음이 섞인 향기가 났다. 포도주 때문일까 잠시 고개를 갸웃한 아킬레우스가 아일라에게 명령했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여종의 눈은 참 오랜만이었다. 자신의 머리카락과 같은 새카만 눈동자는 맑고 투명한 느낌을 주곤 했다. 이렇게 자신의 얼굴까지 비춰 보일 정도로.

아일라 역시 이리 가까이 주인의 눈을 마주한 것이 오랜만이기에 무심한 눈빛이 제 이마와 눈가, 입술을 지나 턱 끝까지 닿자 심장이 세게 뛰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겨우 물었다.

“주인님.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단순한 뱃멀미가 맞는 건가?”

휙 시선을 돌리며 아킬레우스가 물었다. 조금 창백한 것 말고는 별다를 게 없는 아일라의 얼굴에 다행이라 생각하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생각에 울컥 성질이 났다. 다행이라니, 전염병이면 그저 죽여 버리면 그만일 것을.

이 여종을 죽여 버릴 수 있다면, 자신에게는 더 좋은 일 아니었던가.

“아, 아무래도 배를 타는 것이 생전 처음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네가 괜찮다고 다가 아니지.”

“…….”

“혹 네가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이라면? 그래서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다면? 그땐 어찌할 셈이지?”

가슴이 철렁했다. 이리도 멍청할 데가 없다. 만약 그의 말대로 전염병이 맞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저는 전염병을 퍼뜨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놀란 아일라는 망연한 얼굴로 황급히 제 이마에 손을 얹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하루 종일 땀을 흘리며 일하다 보니 멀미도 조금씩 익숙해지는 중이긴 했다.

‘그래도 주인님의 말씀대로 전염병에 걸린 것이라면…….’

죽어야겠지. 아마 죽임당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자 아일라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아랫입술을 깨문 아일라는 털썩 아킬레우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으레 그러하듯 시선조차 마주하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아일라는 입술을 물고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아주 낮은 자세로 그녀는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제, 제가, 제가 감히 주, 주인님께, 다, 당장이라도......”

“……그만.”

그럴지도 모른다 하여 던져 본 말에 겁을 된통 집어먹은 여종은 혼자 충격을 받았다가 두려워했다가 결국 울먹이고 있었다. 그 멍청함에 가슴속에서 어쩐지 헛웃음이 일었다. 그는 눕힌 몸을 일으켜 제 발치에 무릎 꿇은 아일라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주, 주인님.”

결국 울었군. 젖은 눈가와 달아오른 코끝을 살피던 아킬레우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손등을 올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열은 없는데.”

날카로운 주인의 눈이 정면에서 아일라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피다가 손을 거두었다. 아일라는 이상하게 그제야 제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싶었다. 정말 전염병이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일라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한편, 그녀의 긴장과는 다르게 손을 거둔 아킬레우스는 여전히 아일라를 내려다보며 그 나름대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여자를 안은 지 꽤 오래되긴 했지만…….’

한낱 비루한 여종 따위에 발정할 만큼 그리 오래 되었나 싶었다. 왠지 자존심이 상한 아킬레우스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