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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나는 곧바로 근처의 책방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도서관이나 서고 특유의 습한 책 곰팡이 냄새가 났다. 언제나 마음이 편해지는 내음이었다. 항상 책을 좋아하던 나는 이전 생에서도 줄곧 집 안의 서재에 틀어박혀 이 냄새를 맡곤 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엄마는 어떻게 이런 냄새를 좋아할 수가 있느냐고, 참 특이한 취향을 가졌다면서 웃곤 했었다.

이렇게 이질적인 세계에서도, 책 냄새만큼은 내가 살던 서울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 위안처럼 느껴졌다. 그로에스 백작가의 저택에도 상당한 규모의 서재가 있었지만, 바로 곁의 집무실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거의 모든 백작의 업무를 대행하는 미하엘이 있기에 그의 눈에 띌까 봐서라도 감히 그곳을 가까이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조금 들뜬 기분으로 읽을거리를 찾아 서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저어. 혹시 에스델 영애?”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한참을 책에 빠져 있었을 터였다. 새 책을 꺼내려다 말고 흠칫 고개를 들자 나를 바라보는 단정한 이목구비의 여성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곁에 서서 마찬가지로 무심한 듯 나를 응시하고 있는 정복 차림의 훤칠한 남자도. 나는 낯선 이들의 모습에 조금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신지요.”

“어머. 정말로 제가 기억이 안 나시나 봐요.”

여자의 두 눈은 놀란 듯 조금 커져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움도 억누르고 잠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어느 날 내가 이곳으로 갑자기 뚝 떨어진 것과는 별개로, 나는 새로이 갖게 된 몸 주인의 원래 기억까지는 온전히 차지하지 못했다. 상대방 여자의 태도로 봐선 분명히 이전에 교류가 있었던 사이인 것 같지만…….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하는 나를 보던 여자가 먼저 입을 열어 준 것이 퍽 다행이었다.

“에스델 영애. 소식을 듣긴 했지만 정말로 기억이 온전치 못하시군요. 절벽에서 떨어진 사고의 후유증으로 기억을 잃으셨다고는 들었어요. 한동안 사교계에서도 사람들이 모였다 하면 영애에 대한 이야기가 올랐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이 정말이었나 보네요……. 이런.”

여자의 다정한 다갈색 두 눈동자에는 어느새 약간의 동정심과 걱정의 기운이 스며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받아들이는 타인의 순수한 호의에 적절한 대응을 찾지 못했다.

“그럼 저를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그냥 다시 소개드릴게요. 저는 베델리우스 공작가의 장녀 엘리시아입니다. 이것도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지만, 귀족 영식들의 비공식 사교 모임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죠.”

나는 그저 ‘아…….’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를 배려하듯, 여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에스델 영애의 소식을 듣고 저도 얼마나 놀랐던지……. 큰 부상 없이 금방 회복되셨다니 천만다행이죠. 그 높은 곳에서 떨어지셨는데도 기억을 잃으신 것 말고는 크게 다친 곳이 없으시다는 게요. 아, 참……. 이쪽은, 제가 소개드렸던가요? 제 남동생 알렌이에요. 아마 동생이 작위를 승계받기 전에 일면식 정도는 있으셨을지도 모르죠.”

여자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그동안 말없이 자리해 있던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남자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왔다. 그 바람에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 아래 뚜렷한 그의 이목구비가 한결 분명하게 드러났다.

남자의 목례는 나무랄 데 없이 정중하면서도 우아했다. 품격 있는 선이 그의 윤곽을 부드럽게 덧그리고 특유의 분위기가 주변 공기에 녹아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잠시 멍하니 있다 그의 행동에 급하게 예를 차렸다.

“알렌 르누이 베델리우스입니다.”

“네. 저는 에스델이라고 합니다. 저어……. 제가 공자님을 처음, 뵙는지요?”

입술 사이로 나온 질문이 다소 우스꽝스러워서였는지, 알렌이란 남자는 잠시 한쪽 눈썹을 미약하게 찌푸릴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에 엘리시아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에스델 영애. 제 동생은 이미 공작위(公爵位)에 올랐답니다. 그러니 이젠 돌아가신 저희 부친이 아닌 알렌이 베델리우스 공작이죠. 지난달에 작위 계승식도 무사히 마쳤는걸요.”

나는 적잖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조금 전 엘리시아가 그의 남동생을 소개할 때 ‘작위’나 ‘승계’ 따위의 단어를 언급했던 것이 떠올랐다. 가장 높은 귀족이자 가주(家主)라고 하기엔 남자의 얼굴이 지나치게 젊어 보여 미처 되짚지 못한 실수였다. 그러나 다행히 남자는 나의 무례에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는 듯했다.

순식간에 어색해질 뻔한 공기를 바꾼 것은 엘리시아였다. 그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밝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끌었다. 저런 게 공작가의 영애다운 품위일까. 이어지는 엘리시아의 상대방을 편하게 하는 화법과 배려에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겉으로만 백작 가문의 탈을 쓰고 있을 뿐 귀족으로서의 품위라곤 전혀 갖추지 못한 나와는 뚜렷이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동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시아는 자신에게 이후 일정이 있어 금방 집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오랜만의 외출인 만큼, 대신 알렌에게 이후의 에스코트를 맡기고 떠나겠다고도 했다.

그녀는 내가 당황해서 채 정중한 사양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자신을 마중 온 마차에 올라탔다.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황급히 알렌 공작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딱히 누이의 부탁을 거절할 의향이 없어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게 관심 어린 시선을 두는 것도 아니었다.

어색하게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내게, 그가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정말 기억을 못하나 보군. 그게 아니면…… 좋은 핑계가 생긴 셈치고 부끄러웠던 일련의 행동들을 모르는 척 넘기고 싶은 건가?”

남자의 말끝은 어느새 짧아져 있었다. 무심결에 올려다본 그는 내게서 뭔가를 읽어 내기라도 하려는 듯 조용히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짙은 황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당혹스러움에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느라 고심했다.

“저어…… 무슨 말씀이신지. 죄송스럽지만 공작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여전히 표정의 변화 없이 대꾸했다.

“날 유혹했었지.”

순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알렌의 말은 그가 귀족 영애라면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내 과거의 행적을 마주했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나의 얼굴로 뜨거운 당혹감이 잉크처럼 번져 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그때는 내게서 얻어 내고 싶은 게 있었겠지. 혹은 날 이용해야만 하는 일이나.”

나는 떠듬거리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공자님을. 아니. 공, 공작 각하께…… 말씀이신가요?”

혼란스러움에 동요하는 나를 관찰하며 그는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다만 더 이상 내가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알렌은 잠시 할 말을 찾는 나를 내려다보다, 이어지는 나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이만 가지.’라는 말과 함께 앞서 걸어갔다.

어느새 무표정으로 돌아온 알렌은 말없이 한동안 앞만 바라보며 걸었다. 다만 그의 보폭이 꽤 느린 내 걸음걸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해서, 나는 그가 자신의 누이가 남긴 부탁을 받아들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이끄는 방향의 길은 하나같이 쾌적하면서도 볼거리가 많았다. 나는 혼란에 휩싸여 동요하고 있으면서도 엘리시아의 부탁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의 배려를 거스르지 않고자 애썼다. 그래서 기계적으로 상점가 앞에 진열된 물건들에 시선을 두곤 했다.

알렌은 내가 구경하는 척을 하느라 그와의 거리가 어느 정도 벌어질 때마다 그저 말없이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의 의무적인 매너는 매번 이어졌다. 순간순간 상념에서 벗어나 서둘러 그에게로 향할 때마다 그는 조금씩 더 느린 속도로 걸음을 맞춰 주었다.

그와의 시간은 조용히,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는 거리가 이미 반투명한 노을빛으로 젖어 들기 시작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시간이 꽤 지났군. 이만 돌아가지. 마차까지 배웅할 테니.”

“……아, 네.”

나는 긴장했던 탓인지 오늘의 교제에 대한 감사의 말도 그에게 미처 전하지 못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지만, 알렌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는 내가 마차에 오를 수 있도록 손을 내밀어 주었다.

잠깐이었지만 맞잡은 그의 손이, 생각과 달리 꽤 뜨거웠다.



* * *



알렌과 만났던 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나는 몇 번이나 그의 곧은 옆얼굴을 떠올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 이후로도 나는 꽤 자주 그를 생각했다. 혼자 몸을 씻을 때면 장갑 위로 마주했던 남자의 감촉이 젖은 손바닥 위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무척이나 묘한 일이었다.

그런 만남이 있은 후였기에 며칠 뒤 베델리우스 공작가로부터, 특히 알렌의 서명이 담긴 연회 초대장이 도착했을 때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가 지난번 나와의 만남을 쾌적하게 여겼을 리 없으니만큼 나와 더 접촉할 일을 굳이 힘들여 피하지는 않더라도 부러 만들지도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하엘은 자신에게 온 것 외에 또 하나의 초대장이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며 설핏 인상을 구겼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군. 어째서 너 따위를…….”

나는 가장 비천한 어미의 몸에서 난, 심지어는 귀족의 피가 섞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불분명한 출생의 여자였다. 그런 이유로 나는 스스로가 이곳의 귀족 사회에서 이름만 백작가의 일원일 뿐 암암리에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음을 그간의 눈치로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지난번 엘리시아가 나와는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사교 모임에서나 몇 번 마주할 수 있을 뿐이었다고 한 말도 아마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때문에 지난 수년간 그로에스가의 음지에서만 살던 나를 알면서도 굳이, 그것도 최고 유력 가문인 베델리우스 공작가의 공식적인 연회에 갑자기 초대한 알렌의 행동에 미하엘은 의문을 품는 눈치였다.

공작가의 연회가 있는 날은 아침부터 온 집 안이 분주했다. 사용인들은 시종장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집에서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나를 상전으로 모시느라 늘 쥐 죽은 듯 지내던 하녀 에이미도 이날만큼은 내 것으로 되어 있는 온갖 화려한 드레스며 장신구들을 늘어놓으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의 주근깨가 박힌 얼굴은 쉴 새 없이 구겨졌다 펴지며 에이미의 벅찬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딱히 내 물건에 탐을 낸다기보다는 평소 구경하기 힘든 반짝이는 귀금속들을 실컷 만지고, 각종 화장 도구며 값비싼 드레스로 쉴 새 없이 나를 치장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