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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세상에! 에스델 아가씨, 정말 아름다우세요! 워낙에 아름다우셔서 정말 안 어울리는 드레스가 없네요. 아, 이런 디자인도 잘 소화하시네요.”

에이미의 반응에 주변을 오가던 시녀들도 눈치껏 입을 모아 나를 치켜세웠지만, 정작 그들의 찬탄 어린 목소리를 듣는 나는 무덤덤했다. 백작보다 지위상으로 위인 공작가에서 직접 보내온 초대였기에 별다른 말 없이 참석하게 된 것이었지만 미하엘이 나와 동행하는 것을 반길 리 없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스러웠다.

한층 심해진 병세에 일어나질 못하고 있는 그로에스 백작을 대신해 오늘 연회는 남동생인 미하엘과 둘이서만 파트너로 동행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오늘 하루 혹시라도 미하엘의 심기나 거스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전적으로 에이미의 선택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시간을 흘려보내니, 이윽고 그녀가 모든 치장이 끝났음을 알려 왔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검은 유리구슬처럼 이질적인 두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고 이윽고 무척이나 아름답게 치장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처럼 흰 피부에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굴곡져 흘러내렸고, 연한 분홍빛으로 발그레한 두 뺨이 은은하게 빛났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옅은 화장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쇄골과 어깨선이 드러나는 순백의 드레스에 청색 실크 장식이 곁들어진 차림새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아가씨, 정말로 너무너무 예쁘세요!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요정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아니, 이왕이면 좀 더 고상하게 천사로 할까요?”

에이미는 자신의 작품이 무척 자랑스럽다는 양 환호성을 질러 댔다. 평소 무뚝뚝하게 굴던 시종들과 사용인들조차 내가 1층으로 향하는 동안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 느껴지는 걸 보면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에이미에게 치하의 말을 건넸다.

이윽고 예복 차림을 한 미하엘이 준비를 마친 듯 걸어 나왔다. 그는 내게 잠시 시선을 두는 듯하다가 곧바로 말없이 걸어 나갔다. 나는 그저 별다른 지적이 없는 걸 보아 미하엘의 눈에 거슬리는 게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와 함께 마차에 올라 공작가의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그와 나 사이에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마차 안에 실린 밤공기가 유독 차가웠다.

연회장 안에서 나는 눈치껏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서 있었다. 공작가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미하엘은 내게 시선 한 번 두지 않은 채 마차에서 내렸고, 홀로 남겨진 내게 달려와 나를 무사히 마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에스코트한 것은 이 집안의 남자 하인들이었다. 그 이후 내가 미하엘과 가까이 있던 것은 그로에스 백작 가문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지던 아주 잠깐뿐이었다. 나는 파트너로서 소임을 다하자마자 그의 팔짱을 풀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멀어졌다.

공작가의 저택은 화려면서도 섬세히 장식되어 있어 홀로 연회를 즐기지 못하는 것을 충분히 상쇄할 만큼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흰 대리석과 황금빛으로 장식된 실내의 천정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크리스털 샹들리에며 촛대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빛의 향연은 마치 태양 아래에 반짝이는 호박색 보석을 늘어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 극상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나는 틈틈이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하고 있는 미하엘을 눈으로 좇았다. 백작가의 정식 후계자답게, 미하엘은 잠시 보이지 않는다 싶다가도 잠시 후면 어김없이 유력가나 고위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이름 모를 어느 귀족이 조금 전 끈질기게 권하고 간 음료를 홀짝거렸다. 집에서 나를 대할 때와 달리, 불쾌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저런 미하엘의 얼굴을 보는 것은 거의 처음인 것 같았다. 그때였다.

“……초대에 응해 줄 줄은 몰랐군.”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보이는 것은 지난번 만났던 바로 그 남자, 알렌 공작이었다. 그는 자리의 주연답게 한층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그의 묘한 눈동자가 황금빛 이채를 띠어 더욱 매력적으로 빛났다. 예복 차림 역시 무척이나 잘 어울려서, 나는 잠시 말없이 그 모습을 응시했다. 벌써 주변 여성들의 시선이 알게 모르게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한 채였다. 나는 잠시 동안, 이 남자는 자기가 얼마나 쉽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지 모르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영애는 이런 자리에는 언제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초대장을 보내더라도 참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런데도 굳이 달갑지 않을 나에게까지 초대장을 보낸 의도가 의문스럽긴 했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나와 그에게로 한층 더 꽂히는 여자들의 의아한 시선들을 의식했다.

“그나저나, 저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이셔도 괜찮으실는지요. 저는 공작께서도 아시다시피…….”

나는 그 순간 ‘나처럼 좋은 평을 듣지 못하는 여자와 혹시라도 엮이는 것은 공작님처럼 긍지 높은 귀족에게 명예스럽지 못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라는 말을 어떻게 돌려 말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렌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영애도 내 손님이 아니었던가?”

알렌 공작의 얼굴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그 수려한 이목구비를 말없이 응시하면서 나는 잠시 고민하다, 이윽고 지난 며칠간 끊임없이 자리하던 의문을 떠올렸다.

“저, 그러시다면……. 괜찮으시다면, 연회 중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예법에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공작 각하께서 이전에 겪으셨다고 한 제 불미스런 행동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를 여쭐 수 있을까요.”

그의 두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이제는 기억도 못하게 되었다는 껄끄러운 일을 굳이 본인이 나서서 캐묻는 것이 이상하게 비칠 만도 했다. 특히나 오늘의 주인공인 그에게 불쾌할 수 있는 과거의 일이라면 더더욱. 그러나 그는 따라오라는 듯 조용히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알렌은 저택의 후원으로 나를 이끌었다. 어느덧 밤하늘에 자리한 은백색 보름달과, 그 빛이 매끄러운 풀잎 위로 부서져 흩어지는 광경은 몹시 아름다웠다. 저택 안과 달리 사방이 고요해서 내가 긴장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도 알렌에게 들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나는 뜸을 들이다 드디어 알렌 공작과 만났던 날 이후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던 말을 내뱉었다.

“저……, 이런 질문 정말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 혹시 그간 제가 다소 문란한, 여성이었나요?”

지난번 알렌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언급대로라면 나는 무언가를 얻어 내기 위해 노골적으로 몸을 이용해 남자를 유혹하는, 창부와 다름없는 행동을 했을 터였다. 문란한, 이라는 단어가 혀끝에 올랐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잠시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 미세한 떨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렌은 나의 직설적인 질문에 조금 의외라는 듯이 쳐다보았다.

“문란하다, 라. 그래. 굳이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군.”

“……아. 그렇다면.”

“보기에 따라서는 그 표현을 확실히 부정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

이곳으로 오게 된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몸의 주인이 만들었던 과거의 행적. 몇 번이고 혼자 최악의 상황까지 상정하였지만 타인의 입으로 확인 사살 당하는 것은 태연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일을 저지른 것은 지금의 나 자신이 아닌데도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과 수치스러움에 목과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작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내게 제안을 해 왔던 그때는 사치품이 필요했었나? 그게 아니면 돈? ……아, 기억을 못한다고 했었지.”

“각하. 저는…….”

“자포자기한 채로 본인 스스로를 그로에스 백작가의 창녀라고 일컫더군. 어차피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일컫고 있고 또 그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니까, 날더러 영애를 쉽게 취하고 그 대신 줄 수 있는 걸 달라고 했어.”

순간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그간 저택의 사용인들이 주고받는 말 사이에 나에 대한 저질스런 소문이나 폄하가 왜 그리 자주 섞이곤 했는지 알 만했다. 단순히 외국인 노예, 창녀 출신의 어미로부터 기인한 것치고는 그 정도가 유독 심하다 싶었다. 알렌 공작의 고저 없는 목소리에는 조금도 비판이나 힐난의 의도가 실리지 않았기에 나는 오히려 더 수치스러웠다.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애의 그 행동을 특별히 더 질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여자들이라면 흔히 보석이나 장신구에 목숨을 걸지.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도 보아 온 게 있고, 그래서 그게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는 건 알거든. 물론, 매춘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면서도 마치 실제 직업여성처럼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그 태도만큼은 놀라웠지만.”

그의 얼굴은 허영에 빠진 귀족 영애의 천박함에 대한 모멸도 거부감도 싣지 않은 채 건조했다. 공작이 차라리 미하엘이나 여타 귀족들처럼 나에 대한 경멸이나 불쾌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 주는 게 덜 수치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이제 온몸을 벌거벗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곱상한 몸뚱이의 본래 주인이었던 여자가 지금껏 생을 이 정도까지 함부로 살아왔을 줄이야.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 몸이 휘청거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수치심으로 떨리던 몸이 중심을 놓친 것 같았다. 후원에 온 뒤부터 몸에 올라왔던 열기가 갑자기 한꺼번에 왈칵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

맥없이 주저앉으려는 내 몸을 알렌이 황급히 지탱해 주었다. 그는 놀란 듯 잠시 내 모습을 살피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공작은 내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가,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 독특한 냄새. 미약이로군.”

그를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감정이 구체적으로 표면화되어 드러난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놀라움을 느낄 틈도 없이 그는 내게 여기서 뭘 마셨냐고 추궁했고, 나는 자꾸 가물가물해지는 기억을 필사적으로 헤집고 나서야 연회의 구석 자리에서 시간을 죽일 때 이름 모를 귀족이 성가실 정도로 잔을 권했던 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점점 달뜨는 호흡이 느껴졌다. 이제 나는 수치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천치처럼 열이 올라 공작의 품에서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공작과 나 사이를 가로지르는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렌.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갑자기 등장한 남자의 존재에 공작은 나를 안은 채 몸을 틀었다. 그 남자 또한 잘은 몰라도 알렌과 마찬가지로 귀족이 틀림없을 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예를 갖추고자 제자리에 필사적으로 발을 딛고 서려고 했지만 이미 온몸에 힘이 들어서질 않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나와 그런 나를 몇 번이고 다시 안아 올리는 알렌 공작. 그리고 그런 우리 둘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에드먼드 드뉴엘 바우렐리우스. 이곳의 황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