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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대공과 고양이 (1)





지금 내가 어디를 가느냐고? 잠적한 조원들 잡으러 간다.

이 자식들이 만장일치로 나에게 조장 자리를 일임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왜냐하면 내가 공부 좀 하거든. 차석으로 대학에 입학했고, 지금까지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놈팡이 같은 조원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모든 귀찮은 과정을 떠맡기고서 튀어 버렸다. 하하하, 이 강아지 같은 놈들. 너희들은 지금 겁도 없이 폭주하는 기관차에 무임승차한 거란다. 기관차 차장인 내가 얼마나 악덕한 인간인지 보여 주마.

당장 내일이 발표인데 한 놈은 친지가 상을 당했다고, 한 놈은 아파서 병원이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다른 한 놈은 아예 내 전화를 받지도 않는다.

너부터 잡아 주마. 내가 보기에 변명할 궁리조차 안 하고 무작정 연락을 무시하는 네가 제일 못됐어.

그리고 나는 내가 아는 대학 동기생,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총동원해서 이놈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이제 목덜미만 쥐어틀면 된다.

쥐어틀기만 하면 됐는데.

그날은 유난히도 거센 빗줄기가 쏟아졌다. 늦봄의 단비가 내려서 만개한 벚꽃은 전부 빗물에 씻겨 내려갔다.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나는 분홍빛으로 형형하게 물든 거리를 놀러 다닐 틈도 없이 과제에 치여서 살았다. 이번 학기도 장학금을 타지 않으면 생활비가 위험했거든. 기숙사 신청서를 냈는데 떨어지는 바람에 자취방을 구하느라 생활비가 무척 빠듯했다.

나는 PC방에 잠복해 있다는 조원 한 명을 잡으러 가기 위해, 후드 티를 뒤집어쓰고서 비 오는 밤거리를 홀로 걷고 있었다. 남은 놈들도 모조리 붙잡아 밤을 새워서라도, 어떻게든 만들던 PPT를 완성할 생각에 나는 한참 독이 올라 있었다.

마치 곧 다가올 전운을 돋우는 것처럼 가장 시끄러운 록 음악을 틀어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 전쟁터가 눈앞에 보였다.

그리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도 보였다.

타이어가 아스팔트 바닥을 거칠게 긁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 소란스러운 록 음악을 헤치고서 말이다. 아마 궂은 빗길에 미끄러졌겠지.

그리고 운도 나쁘게 미끄러진 자동차는 인정사정없이 보닛으로 나를 들이받았다. 헤드라이트가 너무 눈부셔서 미처 피하지 못했다.



❄ ❄ ❄



“우리 베티는 참 영리해. 내 말을 전부 알아듣는 것 같다니까?”

당신 말 알아듣는 거 맞거든요. 황녀님?

그래도 칭찬해 주니까 으쓱해져서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랬더니 애들레이드는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행히 이 세계의 언어는 내 모국어와 똑같이 들렸다. 가끔 애들레이드가 읽는 책을 훔쳐보면 전혀 알 수 없는 생소한 글씨가 가득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언어 체계 자체는 우리말과 다르다는 소리겠지만, 그래도 귀가 들린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기왕 태어난 거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훨씬 더 좋았겠지. 아이고, 야속해.

원래 애들레이드가 가장 애지중지하던 개는 따로 있었다. 그 개는 몇 개월 전 나를 낳다가 죽었다. 그래도 다행히 나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녀는 그 개를 꽤 오랫동안 예뻐하며 키운 것 같았다. 그 개가 죽었을 때,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순간 애들레이드는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면서 통곡했다. 덕분에 난 태어나자마자 고막이 터질 뻔한 위기를 겪었지.

“스테파니도 영리했잖아요. 스테파니가 낳은 강아지니까, 엄마를 따라 영리할 거예요.”

그래, 스테파니. 날 낳다가 돌아가신 우리 엄마.

살다 살다 개를 부모로 둔 경우는 또 처음이네.

“스테파니가 고생하면서 낳아 주었잖아. 그리니까 엘리자베스도 내가 예쁘게 키워 줄 거야.”

덧붙여서 내 이름은 엘리자베스다. 애들레이드는 나를 애칭으로 베티라고 부른다.

하얗고 고운 털 결이 몹시도 우아한 나. 참고로 나는 태어난 지 이제 10개월 됐다. 배도 발바닥의 육구도 모두 분홍색이다. 내가 봐도 말랑말랑한 배와 발바닥이 참 귀여웠다.

“대공님도 우리 베티를 좋아해 주실까? 대공님을 뵐 때 함께 데려가는 건 처음이잖아.”

“대공님도 고양이를 키우시잖아요. 여행 중에라도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시는 것 같은데, 그게 얼마나 수고스러운 일이겠어요? 그분도 동물을 무척 좋아하시는 게 분명해요.”

“맞아. 다정한 분이시니까, 우리 베티에게도 잘해 주실 거야.”

그렇다. 나는 지금 애들레이드가 말하는 대공님을 만나러 간다. 지금 머리에 하고 있는 다이아몬드 머리핀도 그 사람이 선물한 것이다.

애들레이드는 어떻게든 바쁜 대공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선물을 준 답례라며 그를 자신이 연 다과회에 초대했다.

원래 애들레이드의 황녀궁은 허락된 남성이 아니면 출입이 엄하게 금지되어 있는 성역이었다. 그런데도 대공이 황녀궁의 정원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의 천진난만한 황녀님이 요새 이 대공이라는 사람에게 푹 빠져 있다는 증거지.

애들레이드는 그 대공님과 만난 날에는 내가 알아듣든 말든 한껏 상기된 얼굴로 구구절절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공님께서 얼마나 자상한 사람인지 열변을 토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심경이 오묘해졌다.

있잖니, 애들레이드. 남자는 더 두고 봐야 해. 너에게만 다정한 게 아니라 아무 여자에게나 다 잘해 주는 사람이면 어찌할 거니? 나중에 사귀면 너만 속 썩을까 봐 나는 걱정이야, 얘.

내가 만약 사람 입이라도 달렸다면 당장에라도 이야기해 줬을 텐데, 아쉽다. 참 아쉬워.



어느새 우리는 황녀궁의 훌륭한 정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하녀들이 부지런하게 커다란 테이블 위를 꾸미며 음식을 나르고 있었다.

아니, 다과회라면서? 기껏 차 마시고 과자 먹는 거잖아.

그런데 정원의 테이블은 이미 다과회를 넘어서 오찬 수준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우리가 정원 한가운데에 도착하자, 하녀들은 쥐고 있던 일손도 놓은 채 무릎을 구부려서 애들레이드에게 예를 갖췄다. 그리고 어느 고아한 귀부인이 다가와서 애들레이드와 사라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녀는 이곳의 시녀장, 올리비에 백작 부인이었다.

“애들레이드 황녀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애들레이드를 따르는 시녀는 사라 말고도 여러 명 있었다. 그중에는 명성 있는 가문의 귀한 숙녀뿐만 아니라, 연령이 높은 귀족 부인들도 섞여 있었다.

애들레이드의 어머니이자, 이 제국의 황비는 애들레이드가 다섯 살이 되는 해에 병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등지고 떠났다. 그 탓에 그녀를 모시던 귀부인들은 모두 황비 대신 황녀 애들레이드를 모시게 되었다.

하지만 애들레이드는 그것이 숨 막힌다면서 꼭 필요한 자리가 아니면 사라 외에는 아무도 곁에 두지를 않았다.

“어서 오세요, 아리따운 황녀 전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아치볼드 대공님.”

애들레이드는 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드레스의 치마폭을 그러모아 대공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대공은 레이스 장갑을 끼고 있는 애들레이드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우와, 잘생겼어. 애들레이드가 살살 녹을 만도 하다.

안 돼! 상냥한 대공님이 잘생기기까지 하면 금상첨화잖아!

암회색 긴 머리카락과 탁한 황금 빛깔 눈동자가 무척이나 매력적인 남자였다. 이런 사람이라면 우리 애들레이드를 순순히 양보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은 번듯한 대공국의 젊은 대공님이었다.

애들레이드가 가끔 나에게 말해 주는데, 그는 황제와 함께 무슨 중요한 사업을 추진한다고 했다.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그가 전부 융통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감히 제국의 황제랑 큰 사업을 함께하는 포부도 고루 갖춘 남자다.

“여기 앉으세요.”

“감사해요, 다정하신 분.”

아치볼드는 손수 의자를 빼서 애들레이드를 자리로 인도했다. 음, 키가 크니까 뭘 해도 멋있네.

나는 애들레이드의 곁으로 쫄래쫄래 걸어갔다. 아니, 걸어가려고 했다.

“베티는 애들레이드 님을 방해하지 말고 여기 얌전히 있자?”

오, 사라야. 잠깐만. 내 자리는 항상 애들레이드의 발치라고.

하지만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 없는 그녀는 나를 데리고 테이블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푹신한 흰 쿠션이 가득 담긴 커다란 바구니가 있었다. 사라는 그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지. 애들레이드를 위해서 나는 이 자리에서 참기로 했다.

그래도 여기가 명당이라서 테이블이 한눈에 올려다보인다. 애들레이드의 곁에는 어느새 아치볼트가 앉아서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남녀가 저리 한 쌍의 나비처럼 노니니, 보기 좋네.

그리고 하녀가 다가와서 내가 앉은 바구니 곁에 강아지용 간식과 우유를 내려놓고 갔다.

어찌 보면 내 팔자가 아주 상전이다. 하녀들과 시녀들은 저렇게 바삐 움직이는데 나는 푹신한 자리에서 맛난 음식을 먹으며 호화롭게 살고 있잖아. 개 팔자가 상팔자라더니, 이게 바로 그 꼴이구나.

개로 환생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마냥 처량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개가 되었나 싶어서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록 개라고 할지라도 황녀가 아끼는 애완견으로 태어났다. 매일같이 최상급의 먹이와 음료, 깨끗한 잠자리와 쿠션, 그리고 예쁜 리본까지 무료로 제공된다.

전생에서 나는 그저 오로지 공부만 했다. 집안 사정도 넉넉하지 않아서 차비가 모자라는 날에는 다리가 부르트도록 학교와 집을 걸어 다녔지.

꽃다운 나이에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 보고 도서관에만 틀어박혀 있던 지난 내 생을 돌이켜보면, 이건 엎드려 절하기도 모자란 판국이었다.

내 인생이 개만도 못했다니, 이제는 눈물도 안 나오니까 그냥 웃자. 하하하.

그러던 내 옆으로 웬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왔다. 까만 털하며, 노란 눈동자하며, 아치볼트랑 아주 똑같이 생겼다. 눈매가 치켜 올라간 것도 닮았어, 저거 봐.

까만 고양이는 매우 유려한 자세로 나에게 나긋나긋하게 다가왔다. 반드러운 등을 바구니 테두리에 바짝 붙여 비비면서 교태롭게 ‘야옹’ 하고 울었다.

그래, 네가 바로 아치볼트가 데리고 다닌다는 고양이구나. 안녕, 개와 고양이로 태어나서 아마 말은 안 통하겠지만.

“왕왕.”

“이거, 참 신기한 강아지일세.”

뭐?

잠시만. 너 방금 뭐라고 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