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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대공과 고양이 (3)
“흐흠, 역시나.”
“방금 봤지? 자신의 의지로 손을 움직였어. 보통 동물이라면 갑자기 인간이 된다고 해도 손을 쓸 생각을 하지 못하지.”
“일반적인 동물의 지적 능력이라면 갑작스러운 변화를 가져와도 충분히 학습하고 동조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저 강아지는 방금 손이 생겨나자마자 손가락으로 리본을 풀어내려고 했어.”
“게다가 말도 했어.”
둘이서 무어라 신나게 떠드는 와중에 나는 얼른 거울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부쩍 높아졌다. 그리고 두 손과 두 다리가 보였다. 털로 뒤덮여 있지 않은 온전한 피부, 직립 보행이 가능한 신체.
모든 변화가 나에게 또렷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으나,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로 내 두 다리는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렸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굳게 닫혀 있는 발코니의 유리를 향해 달려갔다.
유리에 반사되어 보이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인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육체 나이는 언뜻 애들레이드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나는 지금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인간이 된 소감이 어때?”
“굉장해. 하지만…… 내 얼굴은 이게 아니야.”
“뭐?”
“이 몸, 내 원래 나이보다 어려. 그리고 나는 검은 머리란 말이야.”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완전한 동양인이다. 하지만 지금 내 얼굴은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도 눈송이가 쌓인 것처럼 새하얗다.
환생했기 때문인가?
하긴 나는 차 사고를 당했으니, 죽었다면 내 진짜 육신은 지금쯤 땅에 묻혀서 부패되고 있겠지.
다시 태어난 뒤 10개월 동안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닫고 끝내 체념했다. 그런데 이 모습으로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 다시 서글퍼졌다.
끙, 우울해지지 말자. 지금 와서 어쩔 수조차 없는 일이잖아.
“우선 이거라도 걸치고 있어 주겠니? 아무리 어리다고는 해도 숙녀가 함부로 나체를 드러내고 있으면 곤란하지.”
아치볼트는 제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악, 나 지금 벌거벗고 돌아다닌 거야?
나는 뒤늦게 코트의 앞섶을 여몄다. 아이고,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남정네 앞에서 벗은 꼴을 보이다니. 이 무슨 낯부끄러운 행태냐.
“그런데 너 어떻게 인간이 되자마자 손을 쓰고 말을 할 생각을 했지? 나는 그게 가장 궁금해.”
“그야…….”
“산 생물이 영기를 걸치고 있는 게 퍽 신기해서 아치볼트의 거처로 오라고 넌지시 말만 건넸는데, 너는 제대로 알아들었지. 네가 보통 지능을 가진 동물이라면 인간의 말을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어.”
이 고양이, 제법 영리한데?
“나, 나는 원래 사람이었어.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사고로 한번 죽었다가 애들레이드의 애완견으로 다시 환생했어.”
“전생의 기억을 가진 강아지라, 이거 굉장하군.”
“그렇다면 영기와 생기의 파동이 응축된 이 기묘한 현상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어.”
“대체 그 영기와 생기가 뭡니까? 나도 좀 압시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듯 다리 하나를 바닥에 탕탕 두들기며 말했다. 아르튀르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가느다랗게 웃음소리를 냈다.
“말 그대로 생기는 산 자가 가진 순수한 힘의 근원, 그리고 영기는 죽음의 경계에 있는 영족들이 가진 힘의 근원이야.”
“인간이라면 생기를 가지고 태어나고, 영족은 영기를 가지고 떠돌지. 나와 아르튀르처럼.”
“뭐야, 그럼 당신들은 죽은 사람이라는 소리입니까?”
“반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반문했다.
“그런데 왜 죽은 사람이랑 죽은 고양이가 구천을 떠돌고 있어요?”
아치볼트와 아르튀르는 거의 동시에 배를 잡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어허, 이 사람이랑 고양이가 지금 누구를 놀리나. 나 겁 많아서 유령이나 괴담 같은 건 딱 질색이란 말이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놀랄 시간을 줘요.
“엄밀히 따지자면 죽음에 걸쳐 있을 뿐이지, 죽은 것은 아니야.”
“원념이 많아서 이승을 떠돌고 있는 가엾은 영혼이라고 생각해 줘, 아가씨.”
“원념이라고 해도 거의 다 이루어졌지만.”
그리고 둘은 다시 한번 까르르 웃었다.
아, 제발 나도 좀 알고 웃든지 놀라든지 합시다, 좀.
내가 인간 모습을 유지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체감하건대 10분 정도 되었을까?
그동안 나는 나에게 있었던 일을 낱낱이 아치볼트와 아르튀르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고,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것까지 전부 말이다.
“혹시 네가 말하는 그 또 다른 세계라는 곳에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도구가 있지 않니?”
“그리고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많은 사람을 태워서 하루 이틀 만에 날라 주는 영특한 날것과 탈것도 존재한다고 했어.”
“또 어느 현장이든 그 모습을 기록해서 생생하게 보여 주는 상자도 있고 말이야.”
그들이 말하는 것은 차례로 전화기, 비행기, 자동차, 그리고 텔레비전을 일컫고 있었다.
이 세계는 내가 아는 한 유럽의 절대 왕정 시대를 닮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보다 훌쩍 진화한 인류의 문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놀랄 것 없어. 그곳에서 이 세계로 온 인간은 너 말고도 또 있단다.”
“정말입니까?”
“한 20년쯤 전에 영계로 어떤 남자가 나타났어. 그도 너처럼 영기와 생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지.”
“그는 우리에게 이런저런 지식을 제공해 주었단다. 그 남자 말고도 과거에 전례는 여러 번 있었어.”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죽었어.”
아르튀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사람이면 늙어서 죽는 게 이치지. 그럼, 그럼. 나는 그렇게 휘몰아치는 부정적인 사고를 애써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저 까맣고 사랑스러운 주둥이가 멋대로 나에게 현실을 뇌까려 주었다.
“시공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체의 주인만이 누릴 수 있는 권능이야. 우리는 그래서 이 세계로 건너온 사람들은 모두 성체의 인도를 받았다고 하지. 하지만 성체의 인도를 받은 이들은 이 세계의 시간과 심하게 엇갈려 있기 때문에 빠르게 노화되어서 죽고 말아.”
“아, 망할 성체 자식…….”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체의 주인은 또 누구니? 누군데 멋대로 자기 권능을 휘둘려서 애먼 사람들만 이 알 수 없는 곳에 던져 넣는 거냐?
그런데 그때, 불현듯 내 머리로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 사람들이 빨리 늙어서 죽었다면 나도 그렇게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돌아가는 일은 둘째 치고 일단 사는 일부터 걱정해야 할 상황인데, 이거?
❄ ❄ ❄
“우리 베티, 왜 이렇게 힘이 없니?”
애들레이드는 밥그릇 앞에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글쎄, 내 말 좀 들어 보련?
애들레이드. 이제 무슨 수를 써도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가 없대. 내 육체가 이미 죽어서 이 세계로 영혼만 건너와 환생한 탓에 다시 되돌아가는 건 아예 불가능하대.
들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일전에 이 세계로 넘어온 사람들과는 다르게 새 육체를 얻어 태어났기 때문에 시공이 충돌해서 빨리 늙어 죽는 일만큼은 모면했다는 것이다.
허허, 개로 태어났다고 하소연하던 내가 이제는 이 네발짐승의 탈에 위안받게 되었구나.
하긴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내 팔자가 상전이라며 으쓱거리고 있었다.
“베티가 밥을 거부하다니, 어디 아픈 걸까요?”
“얌전하던 애가 어젯밤에는 갑자기 밖에 나가려고 떼를 쓰잖아. 베티가 정말 아픈 거면 어쩌지?”
스테파니가 죽었던 그날의 트라우마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애들레이드의 눈가는 벌써 촉촉해졌다.
겨우 밥 한 끼 안 먹는다고 죽지 않아. 그냥 생각이 많아서 밥맛이 없다니깐?
그러나 나는 그녀를 설득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나는 늘 하던 대로 그릇에 머리를 박고 와그작와그작 사료를 씹어 삼켰다.
“이제야 밥을 먹네요.”
“다행이야. 아픈 건 아닌가 봐.”
그제야 애들레이드와 사라의 목소리에서 화색이 돈다.
나는 의무적으로 사료를 꼭꼭 씹으면서 다시 어제저녁을 회상했다.
몇 마디 제대로 나눠 보지도 못하고 내 모습은 다시 작은 강아지로 되돌아갔다. 아르튀르가 말하기를, 내가 아직 영기와 생기를 공평하게 다스려서 에테르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고 했다.
아직 물어보고 싶은 일이 산더미였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애들레이드가 눈치챌지도 모른다면서 다시 황녀궁으로 데려다주었다.
끙, 답답하다. 아무것도 못 하니까 속이 너무 답답해.
하지만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천진난만한 애들레이드는 나를 데리고 정원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신나게 동그란 공을 던지면, 나는 기쁜 척 뛰면서 수차례 다시 물어 왔다.
아, 진짜 먹고 살기 힘드네.
대공과 고양이 (3)
“흐흠, 역시나.”
“방금 봤지? 자신의 의지로 손을 움직였어. 보통 동물이라면 갑자기 인간이 된다고 해도 손을 쓸 생각을 하지 못하지.”
“일반적인 동물의 지적 능력이라면 갑작스러운 변화를 가져와도 충분히 학습하고 동조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저 강아지는 방금 손이 생겨나자마자 손가락으로 리본을 풀어내려고 했어.”
“게다가 말도 했어.”
둘이서 무어라 신나게 떠드는 와중에 나는 얼른 거울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시선이 부쩍 높아졌다. 그리고 두 손과 두 다리가 보였다. 털로 뒤덮여 있지 않은 온전한 피부, 직립 보행이 가능한 신체.
모든 변화가 나에게 또렷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었으나,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변화로 내 두 다리는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렸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굳게 닫혀 있는 발코니의 유리를 향해 달려갔다.
유리에 반사되어 보이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인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육체 나이는 언뜻 애들레이드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나는 지금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인간이 된 소감이 어때?”
“굉장해. 하지만…… 내 얼굴은 이게 아니야.”
“뭐?”
“이 몸, 내 원래 나이보다 어려. 그리고 나는 검은 머리란 말이야.”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완전한 동양인이다. 하지만 지금 내 얼굴은 서구적인 이목구비의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도 눈송이가 쌓인 것처럼 새하얗다.
환생했기 때문인가?
하긴 나는 차 사고를 당했으니, 죽었다면 내 진짜 육신은 지금쯤 땅에 묻혀서 부패되고 있겠지.
다시 태어난 뒤 10개월 동안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닫고 끝내 체념했다. 그런데 이 모습으로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 다시 서글퍼졌다.
끙, 우울해지지 말자. 지금 와서 어쩔 수조차 없는 일이잖아.
“우선 이거라도 걸치고 있어 주겠니? 아무리 어리다고는 해도 숙녀가 함부로 나체를 드러내고 있으면 곤란하지.”
아치볼트는 제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악, 나 지금 벌거벗고 돌아다닌 거야?
나는 뒤늦게 코트의 앞섶을 여몄다. 아이고,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남정네 앞에서 벗은 꼴을 보이다니. 이 무슨 낯부끄러운 행태냐.
“그런데 너 어떻게 인간이 되자마자 손을 쓰고 말을 할 생각을 했지? 나는 그게 가장 궁금해.”
“그야…….”
“산 생물이 영기를 걸치고 있는 게 퍽 신기해서 아치볼트의 거처로 오라고 넌지시 말만 건넸는데, 너는 제대로 알아들었지. 네가 보통 지능을 가진 동물이라면 인간의 말을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어.”
이 고양이, 제법 영리한데?
“나, 나는 원래 사람이었어.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사고로 한번 죽었다가 애들레이드의 애완견으로 다시 환생했어.”
“전생의 기억을 가진 강아지라, 이거 굉장하군.”
“그렇다면 영기와 생기의 파동이 응축된 이 기묘한 현상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어.”
“대체 그 영기와 생기가 뭡니까? 나도 좀 압시다.”
나는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듯 다리 하나를 바닥에 탕탕 두들기며 말했다. 아르튀르는 나를 올려다보면서 가느다랗게 웃음소리를 냈다.
“말 그대로 생기는 산 자가 가진 순수한 힘의 근원, 그리고 영기는 죽음의 경계에 있는 영족들이 가진 힘의 근원이야.”
“인간이라면 생기를 가지고 태어나고, 영족은 영기를 가지고 떠돌지. 나와 아르튀르처럼.”
“뭐야, 그럼 당신들은 죽은 사람이라는 소리입니까?”
“반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반문했다.
“그런데 왜 죽은 사람이랑 죽은 고양이가 구천을 떠돌고 있어요?”
아치볼트와 아르튀르는 거의 동시에 배를 잡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어허, 이 사람이랑 고양이가 지금 누구를 놀리나. 나 겁 많아서 유령이나 괴담 같은 건 딱 질색이란 말이야. 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놀랄 시간을 줘요.
“엄밀히 따지자면 죽음에 걸쳐 있을 뿐이지, 죽은 것은 아니야.”
“원념이 많아서 이승을 떠돌고 있는 가엾은 영혼이라고 생각해 줘, 아가씨.”
“원념이라고 해도 거의 다 이루어졌지만.”
그리고 둘은 다시 한번 까르르 웃었다.
아, 제발 나도 좀 알고 웃든지 놀라든지 합시다, 좀.
내가 인간 모습을 유지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체감하건대 10분 정도 되었을까?
그동안 나는 나에게 있었던 일을 낱낱이 아치볼트와 아르튀르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었고,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는 것까지 전부 말이다.
“혹시 네가 말하는 그 또 다른 세계라는 곳에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달하는 도구가 있지 않니?”
“그리고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많은 사람을 태워서 하루 이틀 만에 날라 주는 영특한 날것과 탈것도 존재한다고 했어.”
“또 어느 현장이든 그 모습을 기록해서 생생하게 보여 주는 상자도 있고 말이야.”
그들이 말하는 것은 차례로 전화기, 비행기, 자동차, 그리고 텔레비전을 일컫고 있었다.
이 세계는 내가 아는 한 유럽의 절대 왕정 시대를 닮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보다 훌쩍 진화한 인류의 문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놀랄 것 없어. 그곳에서 이 세계로 온 인간은 너 말고도 또 있단다.”
“정말입니까?”
“한 20년쯤 전에 영계로 어떤 남자가 나타났어. 그도 너처럼 영기와 생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지.”
“그는 우리에게 이런저런 지식을 제공해 주었단다. 그 남자 말고도 과거에 전례는 여러 번 있었어.”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습니까?”
“죽었어.”
아르튀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사람이면 늙어서 죽는 게 이치지. 그럼, 그럼. 나는 그렇게 휘몰아치는 부정적인 사고를 애써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저 까맣고 사랑스러운 주둥이가 멋대로 나에게 현실을 뇌까려 주었다.
“시공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체의 주인만이 누릴 수 있는 권능이야. 우리는 그래서 이 세계로 건너온 사람들은 모두 성체의 인도를 받았다고 하지. 하지만 성체의 인도를 받은 이들은 이 세계의 시간과 심하게 엇갈려 있기 때문에 빠르게 노화되어서 죽고 말아.”
“아, 망할 성체 자식…….”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체의 주인은 또 누구니? 누군데 멋대로 자기 권능을 휘둘려서 애먼 사람들만 이 알 수 없는 곳에 던져 넣는 거냐?
그런데 그때, 불현듯 내 머리로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그 사람들이 빨리 늙어서 죽었다면 나도 그렇게 된다는 소리가 아닌가? 돌아가는 일은 둘째 치고 일단 사는 일부터 걱정해야 할 상황인데, 이거?
❄ ❄ ❄
“우리 베티, 왜 이렇게 힘이 없니?”
애들레이드는 밥그릇 앞에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글쎄, 내 말 좀 들어 보련?
애들레이드. 이제 무슨 수를 써도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가 없대. 내 육체가 이미 죽어서 이 세계로 영혼만 건너와 환생한 탓에 다시 되돌아가는 건 아예 불가능하대.
들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내가 일전에 이 세계로 넘어온 사람들과는 다르게 새 육체를 얻어 태어났기 때문에 시공이 충돌해서 빨리 늙어 죽는 일만큼은 모면했다는 것이다.
허허, 개로 태어났다고 하소연하던 내가 이제는 이 네발짐승의 탈에 위안받게 되었구나.
하긴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내 팔자가 상전이라며 으쓱거리고 있었다.
“베티가 밥을 거부하다니, 어디 아픈 걸까요?”
“얌전하던 애가 어젯밤에는 갑자기 밖에 나가려고 떼를 쓰잖아. 베티가 정말 아픈 거면 어쩌지?”
스테파니가 죽었던 그날의 트라우마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애들레이드의 눈가는 벌써 촉촉해졌다.
겨우 밥 한 끼 안 먹는다고 죽지 않아. 그냥 생각이 많아서 밥맛이 없다니깐?
그러나 나는 그녀를 설득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나는 늘 하던 대로 그릇에 머리를 박고 와그작와그작 사료를 씹어 삼켰다.
“이제야 밥을 먹네요.”
“다행이야. 아픈 건 아닌가 봐.”
그제야 애들레이드와 사라의 목소리에서 화색이 돈다.
나는 의무적으로 사료를 꼭꼭 씹으면서 다시 어제저녁을 회상했다.
몇 마디 제대로 나눠 보지도 못하고 내 모습은 다시 작은 강아지로 되돌아갔다. 아르튀르가 말하기를, 내가 아직 영기와 생기를 공평하게 다스려서 에테르를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오래 유지하기 어렵다고 했다.
아직 물어보고 싶은 일이 산더미였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애들레이드가 눈치챌지도 모른다면서 다시 황녀궁으로 데려다주었다.
끙, 답답하다. 아무것도 못 하니까 속이 너무 답답해.
하지만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천진난만한 애들레이드는 나를 데리고 정원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면서 신나게 동그란 공을 던지면, 나는 기쁜 척 뛰면서 수차례 다시 물어 왔다.
아, 진짜 먹고 살기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