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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눈병이 나서…….”
여자의 아이섀도 컬러가 지난번에 비해 짙어졌다. 그의 눈치를 본 여자가 손가락으로 눈썹을 휙 스치며 멋쩍게 웃었다. 맞선 이후 오늘로 세 번째 만남이다. 여자의 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얼마나 혼신의 노력으로 빚어진 것인지 이제는 알고 있었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잘 지냈어요?”
“네.”
물음에 대한 짧고 건조한 여자의 대답. 심지어 ‘그쪽은요?’라고 되묻지도 않는 무심함에 유현의 심사가 불현듯 뒤틀렸다. 천천히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삼세번. 되도록 오늘을 넘기지 않을 작정이지만, 맞선 상대가 아니라 이웃집 아저씨를 쳐다보는 듯한 여자의 무감한 눈빛이 여전히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아버지께 전해 들었어요. 저하고의 결혼을 원하신다고.”
여자의 목소리가 다소 도전적으로 변했다. 마치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한 투였다. 그녀의 그런 반응이 얼마쯤 흥미로웠다.
“그래요.”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그쪽이 나와의 만남을 지속한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현은 대답을 고쳤다.
“그러니까…… 나쁘지 않아서?”
여자가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심호흡을 했다. 헤아리기 힘든 표정을 한 여자가 묵묵히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여자는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어떤 알지 못할 이유로 심란한 게 분명했다. 여자가 곤란해하니, 오히려 재미있다.
돌이켜 보면 여자는 첫 만남에서부터 이 맞선에 어떤 흥미도 관심도 없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었다. 내리깐 시선은 절대 들지 않았고 마치 의무인 양 커피만 내리 마셨다. 그가 묻는 질문에 겨우 대답만 하는가 하면, 자주 화장실을 드나드는 걸로 흐름을 깨곤 했다.
지금까지 유현은 어떤 맞선에서든 상대 여자로부터 절대적 우위를 점해 왔다. 집안 배경이든 학벌이든 외모든, 상대가 어떤 기준을 세우든 그 분위기는 무척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유현은 흡사 클릭 한 번으로 수억 원의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처럼, 고갯짓 한 번으로 여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여자들에게 그래 왔다.
단 한 명, 눈앞의 여자만 빼고.
그녀가 내내 보여 주고 있는 무관심은, 유현으로선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난제였다. 유현은 그 사실이 적잖이 불쾌했고 어떻게 해서든 여자의 흥미를 끌어내고 싶었다. 이 여자를 결혼 상대로 낙점한 이유에 이런 빌어먹을 오기도 어느 정도 포함된 건지도 몰랐다.
유현은 담백하게 말했다.
“문제가 있으면 말해요.”
여자의 흐린 한숨 소리가 테이블 위를 건너왔다. 묵묵부답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녀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도 이 강제 결혼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물론 이것마저도 그녀는 별 관심이 없을 것 같지만.
갑자기 이 기계적인 만남이 우습고 회의가 들었다.
결혼 생활은 내 사람들을 한 명씩 얻어 가는 과정이라는데.
“별문제가 없다면…….”
이 여자는 언제쯤 얻게 될까.
“결혼하죠.”
아니, 내 사람이 되기나 할까.
유현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고개 숙인 여자의 잔뜩 찌푸린 얼굴을 응시했다.
어쩌면 저 퉁퉁 부은 눈은 눈병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 * *
결혼 준비가 바야흐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모친은 신혼부부가 살게 될 집, 예단과 예물 등등을 두고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다음 주에는 정식으로 양가 상견례가 잡혀 있었다. 상견례가 이루어지면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스운 건, 결혼 준비에서 당사자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YBC 방송국 합격자 관리팀 사무실을 나온 유현은 손에 들린 사원증을 내려다봤다. 오래전부터 해 왔던 계획이 실현되고 있었다. 노력과 땀의 결정체인 그것을 유현은 소중히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Rrrrr.
복도를 지나 1층 로비에 도착한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유현의 눈빛이 미세하게 일렁거렸다. 건너온 목소리는 매우 오랜만이었다.
― 정유현 씨. 저 류다이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만.”
― 정말 죄송하지만 저녁에 시간이 되시나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유현은 건물 밖을 쳐다봤다. 오후 내내 흐리던 날씨가 급기야 장대비를 뿌리고 있었다. 저녁이라 해 봤자 지금부터 플러스마이너스 한 시간 남짓일 텐데. 유현은 시간을 확인한 후 대답했다.
“7시면 되겠어요?”
― 아, 네. 괜찮습니다. 어디서 뵐까요? 정유현 씨가 편한 곳으로 잡으셔도 돼요.
문득 건물 밖 도로 건너편에 작은 커피숍이 눈에 띄었다. 유현은 시선을 커피숍에 두고 천천히 대답했다.
“YBC 방송국 건물 앞, 카페 <오렌지>.”
유현은 예정에도 없던 그녀와의 만남에 긴장하며, 사원증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날씨만큼 마음도 무거웠다.
퇴근 후 남자가 정한 약속 장소로 이동하면서 다이의 마음은 내내 돌처럼 무겁고 거칠고 딱딱했다. 편의점에서 급하게 구입한 비닐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남자가 선택한 곳은 방송국 근처에 있는 작은 커피숍이었다.
약속 장소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멀었다면, 가는 내내 긴 시간 동안 무거운 마음이 더더욱 끝없이 내려앉았을 것이다.
커피숍 앞에 다다른 다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유리창을 쳐다봤다. 커피숍 안,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기 때문이다. 창문에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빗줄기에 그의 모습이 얼룩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했다.
다이의 눈에, 그제야 남자의 존재가 닿아 왔다. 맞선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자신의 감정에만 매몰돼 있었던 탓에 비슷한 처지일 남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세 번의 만남이 전부인 자신과 선뜻 결혼하고자 하는 걸까.
저 남자는 결혼을 원하고 있긴 한 걸까.
자신은 이 결혼에 어떤 흥미도 관심도 열의도 없는데, 저 남자는 어떤 마음일까.
그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무심결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시선이 마주쳤다. 얼른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다이는 한숨을 내쉬고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경쾌한 방울 소리가 가장 먼저 그녀를 맞아 주었다.
다이는 우산꽂이에 우산을 넣고는 다시금 결전을 다짐하고 남자가 있는 테이블로 갔다. 세 번의 만남에서 한결같이 단정한 슈트 차림이었던 남자는 오늘은 하프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세련된 외모가 아니었다면 감히 기승전자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근처에 볼일이 있으셨나 봐요.”
“네.”
“주문하죠. 전 커피요.”
“커피 두 잔.”
유현은 다이를 뒤따라온 직원에게 메뉴를 주문한 뒤 그녀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비가 내리는 날씨 탓일까. 여자는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싸늘하고, 차갑고, 냉정했다.
매사에 건조한 여자라는 생각은 쭉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감정적으로 꽤 거칠고 사나워 보였다. 유현은 짐짓 태연하게 물었다.
“눈병은 다 나았어요?”
“네?”
“눈병.”
“아, 네.”
기억력이 좋은 편인가. 다이는 하마터면 ‘눈병이라니요?’라고 되물을 뻔했다. 며칠간 눈물 바람이었던 탓에 퉁퉁 부은 눈을 아이섀도로 감추고, 그에겐 눈병이라 둘러댄 일을 기어이 기억해 내고 끄집어내다니. 때마침 커피가 나오지 않았다면, 다이는 자신의 눈을 스윽 만질 뻔했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눈을 껌뻑거리는 사이, 유현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저녁 식사는 했어요? 안 했다면 파스타라도 먹어요. 여기 메뉴에 있던데.”
“아뇨. 커피면 됩니다.”
“결혼 준비가 시작될 것 같은데, 정작 다이 씨와 난 그 결혼 준비에서 제외되고 있는 거, 우습지 않아요?”
“그러게요.”
“류다이 씨가 스물아홉, 나 서른하나. 어린 나이에 하는 결혼도 아닌데 부모님이 도맡고 계시니. 이게 결혼인지 사업인지 알 수가 있나.”
“사실은…… 그 이야기 때문에 만나자고 했어요.”
때마침 커피가 나왔고, 유현은 잔을 들어 올린 채 그녀를 응시했다. 언제나 육감이라는 건 틀리는 법이 없었다. 유현은 아까 창밖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그리고 지금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오늘 이루어질 대화가 어떤 종류의 것일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프롤로그
“눈병이 나서…….”
여자의 아이섀도 컬러가 지난번에 비해 짙어졌다. 그의 눈치를 본 여자가 손가락으로 눈썹을 휙 스치며 멋쩍게 웃었다. 맞선 이후 오늘로 세 번째 만남이다. 여자의 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얼마나 혼신의 노력으로 빚어진 것인지 이제는 알고 있었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잘 지냈어요?”
“네.”
물음에 대한 짧고 건조한 여자의 대답. 심지어 ‘그쪽은요?’라고 되묻지도 않는 무심함에 유현의 심사가 불현듯 뒤틀렸다. 천천히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삼세번. 되도록 오늘을 넘기지 않을 작정이지만, 맞선 상대가 아니라 이웃집 아저씨를 쳐다보는 듯한 여자의 무감한 눈빛이 여전히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아버지께 전해 들었어요. 저하고의 결혼을 원하신다고.”
여자의 목소리가 다소 도전적으로 변했다. 마치 그러지 말라고 당부하는 듯한 투였다. 그녀의 그런 반응이 얼마쯤 흥미로웠다.
“그래요.”
“이유를 물어도 되나요?”
“그쪽이 나와의 만남을 지속한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현은 대답을 고쳤다.
“그러니까…… 나쁘지 않아서?”
여자가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심호흡을 했다. 헤아리기 힘든 표정을 한 여자가 묵묵히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여자는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어떤 알지 못할 이유로 심란한 게 분명했다. 여자가 곤란해하니, 오히려 재미있다.
돌이켜 보면 여자는 첫 만남에서부터 이 맞선에 어떤 흥미도 관심도 없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었다. 내리깐 시선은 절대 들지 않았고 마치 의무인 양 커피만 내리 마셨다. 그가 묻는 질문에 겨우 대답만 하는가 하면, 자주 화장실을 드나드는 걸로 흐름을 깨곤 했다.
지금까지 유현은 어떤 맞선에서든 상대 여자로부터 절대적 우위를 점해 왔다. 집안 배경이든 학벌이든 외모든, 상대가 어떤 기준을 세우든 그 분위기는 무척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유현은 흡사 클릭 한 번으로 수억 원의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처럼, 고갯짓 한 번으로 여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여자들에게 그래 왔다.
단 한 명, 눈앞의 여자만 빼고.
그녀가 내내 보여 주고 있는 무관심은, 유현으로선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난제였다. 유현은 그 사실이 적잖이 불쾌했고 어떻게 해서든 여자의 흥미를 끌어내고 싶었다. 이 여자를 결혼 상대로 낙점한 이유에 이런 빌어먹을 오기도 어느 정도 포함된 건지도 몰랐다.
유현은 담백하게 말했다.
“문제가 있으면 말해요.”
여자의 흐린 한숨 소리가 테이블 위를 건너왔다. 묵묵부답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녀뿐만 아니라 자신 역시도 이 강제 결혼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주었으면 싶었다. 물론 이것마저도 그녀는 별 관심이 없을 것 같지만.
갑자기 이 기계적인 만남이 우습고 회의가 들었다.
결혼 생활은 내 사람들을 한 명씩 얻어 가는 과정이라는데.
“별문제가 없다면…….”
이 여자는 언제쯤 얻게 될까.
“결혼하죠.”
아니, 내 사람이 되기나 할까.
유현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 고개 숙인 여자의 잔뜩 찌푸린 얼굴을 응시했다.
어쩌면 저 퉁퉁 부은 눈은 눈병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 * *
결혼 준비가 바야흐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모친은 신혼부부가 살게 될 집, 예단과 예물 등등을 두고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었고, 다음 주에는 정식으로 양가 상견례가 잡혀 있었다. 상견례가 이루어지면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스운 건, 결혼 준비에서 당사자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YBC 방송국 합격자 관리팀 사무실을 나온 유현은 손에 들린 사원증을 내려다봤다. 오래전부터 해 왔던 계획이 실현되고 있었다. 노력과 땀의 결정체인 그것을 유현은 소중히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Rrrrr.
복도를 지나 1층 로비에 도착한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유현의 눈빛이 미세하게 일렁거렸다. 건너온 목소리는 매우 오랜만이었다.
― 정유현 씨. 저 류다이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만.”
― 정말 죄송하지만 저녁에 시간이 되시나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유현은 건물 밖을 쳐다봤다. 오후 내내 흐리던 날씨가 급기야 장대비를 뿌리고 있었다. 저녁이라 해 봤자 지금부터 플러스마이너스 한 시간 남짓일 텐데. 유현은 시간을 확인한 후 대답했다.
“7시면 되겠어요?”
― 아, 네. 괜찮습니다. 어디서 뵐까요? 정유현 씨가 편한 곳으로 잡으셔도 돼요.
문득 건물 밖 도로 건너편에 작은 커피숍이 눈에 띄었다. 유현은 시선을 커피숍에 두고 천천히 대답했다.
“YBC 방송국 건물 앞, 카페 <오렌지>.”
유현은 예정에도 없던 그녀와의 만남에 긴장하며, 사원증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날씨만큼 마음도 무거웠다.
퇴근 후 남자가 정한 약속 장소로 이동하면서 다이의 마음은 내내 돌처럼 무겁고 거칠고 딱딱했다. 편의점에서 급하게 구입한 비닐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남자가 선택한 곳은 방송국 근처에 있는 작은 커피숍이었다.
약속 장소가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멀었다면, 가는 내내 긴 시간 동안 무거운 마음이 더더욱 끝없이 내려앉았을 것이다.
커피숍 앞에 다다른 다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유리창을 쳐다봤다. 커피숍 안,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기 때문이다. 창문에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빗줄기에 그의 모습이 얼룩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했다.
다이의 눈에, 그제야 남자의 존재가 닿아 왔다. 맞선부터 지금까지 오롯이 자신의 감정에만 매몰돼 있었던 탓에 비슷한 처지일 남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 남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세 번의 만남이 전부인 자신과 선뜻 결혼하고자 하는 걸까.
저 남자는 결혼을 원하고 있긴 한 걸까.
자신은 이 결혼에 어떤 흥미도 관심도 열의도 없는데, 저 남자는 어떤 마음일까.
그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가 무심결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시선이 마주쳤다. 얼른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다이는 한숨을 내쉬고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경쾌한 방울 소리가 가장 먼저 그녀를 맞아 주었다.
다이는 우산꽂이에 우산을 넣고는 다시금 결전을 다짐하고 남자가 있는 테이블로 갔다. 세 번의 만남에서 한결같이 단정한 슈트 차림이었던 남자는 오늘은 하프 점퍼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세련된 외모가 아니었다면 감히 기승전자그룹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근처에 볼일이 있으셨나 봐요.”
“네.”
“주문하죠. 전 커피요.”
“커피 두 잔.”
유현은 다이를 뒤따라온 직원에게 메뉴를 주문한 뒤 그녀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기분 탓일까. 아니면 비가 내리는 날씨 탓일까. 여자는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싸늘하고, 차갑고, 냉정했다.
매사에 건조한 여자라는 생각은 쭉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감정적으로 꽤 거칠고 사나워 보였다. 유현은 짐짓 태연하게 물었다.
“눈병은 다 나았어요?”
“네?”
“눈병.”
“아, 네.”
기억력이 좋은 편인가. 다이는 하마터면 ‘눈병이라니요?’라고 되물을 뻔했다. 며칠간 눈물 바람이었던 탓에 퉁퉁 부은 눈을 아이섀도로 감추고, 그에겐 눈병이라 둘러댄 일을 기어이 기억해 내고 끄집어내다니. 때마침 커피가 나오지 않았다면, 다이는 자신의 눈을 스윽 만질 뻔했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눈을 껌뻑거리는 사이, 유현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저녁 식사는 했어요? 안 했다면 파스타라도 먹어요. 여기 메뉴에 있던데.”
“아뇨. 커피면 됩니다.”
“결혼 준비가 시작될 것 같은데, 정작 다이 씨와 난 그 결혼 준비에서 제외되고 있는 거, 우습지 않아요?”
“그러게요.”
“류다이 씨가 스물아홉, 나 서른하나. 어린 나이에 하는 결혼도 아닌데 부모님이 도맡고 계시니. 이게 결혼인지 사업인지 알 수가 있나.”
“사실은…… 그 이야기 때문에 만나자고 했어요.”
때마침 커피가 나왔고, 유현은 잔을 들어 올린 채 그녀를 응시했다. 언제나 육감이라는 건 틀리는 법이 없었다. 유현은 아까 창밖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그리고 지금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오늘 이루어질 대화가 어떤 종류의 것일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