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해요.”
“정유현 씨. 파혼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짐작이 사실로 다가왔을 때, 유현은 결코 서두르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자리에서 유일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여자가, 파혼의 순간에도 자신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화가 났을 뿐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이유…….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이런 대형 사고를 치면서 이유도 미리 준비하지 않았어요?”
“다른 남자가 있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어요?”
“남자가 있었어요?”
“아뇨.”
대답해 놓고 보니 이 무슨 농담 주고받기인가 싶다. 다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의 말투는 느긋하게 느껴졌지만 어딘가 다그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이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하고 결혼해 봤자 골치만 아프실 거예요. 좋은 부모님 밑에서 사랑 듬뿍 받고 자란 여자와 결혼하세요. 그런 여자가 꼬인 것도 없고 넉넉하고 긍정적이어서 정유현 씨를 열심히 내조할 수 있을 테니까요.”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썹을 비틀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긴 다리를 꼬더니 그녀를 정면으로 쳐다보기에, 다이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류다이 씨는 꼬인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어느 정도는요.”
“흐음. 핑계가 부족하지만 납득은 했어요. 하지만 그걸로 부모님을 ‘설득’시킬 수는 없겠는데.”
“그게…….”
“이 결혼에는 우리보다는 부모님들의 이해관계가 더 얽혀 있는 듯하니, 나를 납득시키는 것보다 부모님을 설득시키는 게 관건입니다.”
다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갈등하느라 흔들리는 눈을 그에게 고정시켰다. 그는 여러모로 괜찮은 남자였다. 자신처럼 꼬인 것도, 억울한 것도 없는 삶을 아주 우수하게 잘 살아왔을 터였다. 그러니 어쩌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른다.
“제가, 하고 싶지 않아요.”
가련하고 창백한 얼굴이 긴장감이 역력한 음성을 건네 왔다. 유현은 생각하는 척 고개를 돌려 유리창을 응시했다. 그녀의 옆모습이 빗줄기를 두드려 맞고 있었다. 순탄하게 흘러갈 거라 여겼던 일들이 물기에 일그러진 실루엣처럼 어그러지고 있었다.
물론 동요하지 않았다.
그 자신에게도 이 결혼은, 그저 해치워야 할 하나의 업무일 뿐이었으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름 섞인 염려를 오랫동안 들어야 한다는 게 걱정되긴 하지만 말이다.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예 피하려구요.”
그녀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짓고 있는 미소에 얼마나 짙은 슬픔이 담겨 있는지조차 그땐 알 수 없었다.
“정말 죄송해요, 정유현 씨. 지금은 제가 더 급해서 그쪽의 후폭풍까지 걱정해 줄 틈이 없어요.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에 들어가기 전에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금전 문제까지 엮이면 여러모로 불편해질 테니까요.”
다만,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황급히 일어나 커피숍을 나가려는 그녀를 불러 세우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류다이 씨.”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녀가 돌아봤다. 유현은 우산꽂이에서 그녀의 우산을 빼 건넸다. 그녀의 빤한 시선이 헤아리기 힘든 의미로 다가왔다. 입가를 살짝 늘이는 걸로 고맙다는 말을 대신한 그녀는 아까보다 더 서둘러 커피숍을 나갔다.
#1
“으으으으으!”
다이는 초조한 얼굴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매고, 바지와 양말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이제 부모님이 완벽하게 잠들 밤 11시만 기다리면 된다.
그 시간이 되면 미련도 갖지 않고 이 집을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꽉 잡고 있는데 긴장과 초조는 자꾸만 각오를 흐트러지게 만들고 있었다. 파혼 선언을 하고 급기야 가출까지 강행하려 들다니. 류다이 인생이 이토록 급류에 휘말린 건 처음이었다.
“그러게 왜 이런 대형 사고를 치려는 거야, 언니야.”
제이는 아까부터 그런 다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침대 옆에 다이가 미리 싸 둔 커다란 짐 가방 두 개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넌 네 방으로 가, 어서. 왜 틈만 나면 내 방에서 자는 거야?”
“갈 거야. 갈 건데, 이게 지금 잘하는 짓이냐구요, 자매님.”
“잘하는 짓까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후회할 짓은 아니야. 내가, 하나뿐인 네 언니가, 원하지도 않는 결혼이란 걸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다고 집을 나가기까지 해야 돼? 사춘기가 와도 사고 한번 안 치고 착실하게 살아왔던 언니가 스물아홉씩이나 먹고 뒤늦게 이래야 하냐고!”
“넌 몰라. 아무것도.”
다이는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무거운 한숨을 천장으로 쏘아 올렸다. 등 뒤로 제이의 한숨 소리도 들려왔다.
아버지의 병원에서 레지던트 1년 차로 근무 중인 제이가 자신의 방을 두고 굳이 다이의 방에 와서 자기 시작한 건, 몇 달 전부터였다. 자세한 이유를 말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병원 일로 스트레스가 쌓인 게 그 원인일 것이다.
한 살 차이라 어려서부터 24시간 동안 붙어 다녔다. 각자의 방이 있었지만 일상뿐만 아니라 침대도 공유했고 그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성인이 되고 의대에 진학한 제이가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방과 일상을 누리기 시작했지만, 제이는 간간이 다이와 함께 자기 위해 방을 건너오곤 했다.
그랬는데 얼마 전부터는 아예 다이의 침대에서 자기 시작한 것이다.
다이가 집을 떠나고 나면, 이제 제이는 다시 자신의 침대와 다이의 침대를 번갈아 가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 쳐. 그래도 결혼 상대가 기승전자그룹 장남이면 우리 집은 땡잡은 거라는 것쯤은 알지. 그래서 엄마도 저 난리시잖아.”
“그러니까 더 답답해. 난 그쪽에서 결혼하자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내가 너처럼 스펙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저 어머니 아버지가 밀어붙이시니 어쩔 수 없이 나간 자리였는데. 그게 결혼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구.”
“바보 언니야. 애프터가 들어왔을 때 눈치 깠어야지. 그 대단한 집안의 자제분께서 시간이 남아돌아 애프터를 신청했겠냐? 응? 여자가 없어서 애프터를 신청했겠냐구. 하여간 이 언니는 남자 문제에 있어선 싹수 컬러가 애초에 옐로였어.”
“그게 문제가 아냐. 둘러댄 거짓말은 어떻게 해? 회계사 시험 준비하고 있다고 뻥친 건 어떡해.”
“그건 아버지가 뻥친 거지, 언니가 한 게 아니잖아.”
입심에 탄력받은 제이가 아예 다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언니의 마음을 돌려놓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말투 속에서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러지 말고 지금 내려가서 엄마 아버지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려. 오늘 그쪽에 파혼을 선언했다는 거랑, 지금 언니가 방송국 라디오 작가 일을 하고 있다고.”
“그 순간에 아버지는 아마 딴따라 일이라고 코웃음 치실 거야. 너도 알잖아. 아버지랑 어머니는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거. 두 분이 인정하는 사람다운 직업은 딱 넷뿐이야. 의사, 법조인, 경영인, 교육자.”
다이의 회의적인 태도에 제이는 짐짓 할 말을 잃었다. 언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자매가 어렸을 때부터 성적과 일상, 사람 관계에 있어 철두철미하다 싶을 정도로 관리를 해 왔다.
그 결과 제이는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의사 ‘따님’이 됐고, 다이는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장래를 찾지 못하다 뒤늦게 하고 싶은 일을 찾은 ‘딸년’이 됐다. 물론 다이는 1년 전에 방송국 라디오 작가로 입사한 사실을 아직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그 남자,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막 혐오스러워?”
제이는 이쯤에서 타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이와 부모님 간의 타협. 그리고 다이와 그 남자와의 타협.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야 어떤 쪽으로든 다이가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제이에겐 그 점이 가장 중요했다.
“잘생겼어. 재벌 아들이라 그런지 후광이 남다르긴 해.”
“그럼 뭐가 문제야?”
“내가 문제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내가. 부모님한테 억지로 등 떠밀려 하는 결혼이 싫은 내가.”
“언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내 의견이랄 게 있나. 그쪽에서 결혼하자고 말이 나온 이상 아버진 밀어붙이실 텐데.”
다이는 자조적으로 뇌까렸다. 이게 말이 되냐고 제이에게 하소연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이 상황을 말이 되도록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네.”
제이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한 그 당당한 태도에 다이의 귀가 절로 솔깃해졌다.
“해요.”
“정유현 씨. 파혼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짐작이 사실로 다가왔을 때, 유현은 결코 서두르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자리에서 유일하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 여자가, 파혼의 순간에도 자신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화가 났을 뿐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됩니까?”
“이유…….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요.”
“이런 대형 사고를 치면서 이유도 미리 준비하지 않았어요?”
“다른 남자가 있다고 말한다면 믿으시겠어요?”
“남자가 있었어요?”
“아뇨.”
대답해 놓고 보니 이 무슨 농담 주고받기인가 싶다. 다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남자의 말투는 느긋하게 느껴졌지만 어딘가 다그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이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저하고 결혼해 봤자 골치만 아프실 거예요. 좋은 부모님 밑에서 사랑 듬뿍 받고 자란 여자와 결혼하세요. 그런 여자가 꼬인 것도 없고 넉넉하고 긍정적이어서 정유현 씨를 열심히 내조할 수 있을 테니까요.”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썹을 비틀며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긴 다리를 꼬더니 그녀를 정면으로 쳐다보기에, 다이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류다이 씨는 꼬인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어느 정도는요.”
“흐음. 핑계가 부족하지만 납득은 했어요. 하지만 그걸로 부모님을 ‘설득’시킬 수는 없겠는데.”
“그게…….”
“이 결혼에는 우리보다는 부모님들의 이해관계가 더 얽혀 있는 듯하니, 나를 납득시키는 것보다 부모님을 설득시키는 게 관건입니다.”
다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갈등하느라 흔들리는 눈을 그에게 고정시켰다. 그는 여러모로 괜찮은 남자였다. 자신처럼 꼬인 것도, 억울한 것도 없는 삶을 아주 우수하게 잘 살아왔을 터였다. 그러니 어쩌면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른다.
“제가, 하고 싶지 않아요.”
가련하고 창백한 얼굴이 긴장감이 역력한 음성을 건네 왔다. 유현은 생각하는 척 고개를 돌려 유리창을 응시했다. 그녀의 옆모습이 빗줄기를 두드려 맞고 있었다. 순탄하게 흘러갈 거라 여겼던 일들이 물기에 일그러진 실루엣처럼 어그러지고 있었다.
물론 동요하지 않았다.
그 자신에게도 이 결혼은, 그저 해치워야 할 하나의 업무일 뿐이었으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름 섞인 염려를 오랫동안 들어야 한다는 게 걱정되긴 하지만 말이다.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예 피하려구요.”
그녀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 희미하게 짓고 있는 미소에 얼마나 짙은 슬픔이 담겨 있는지조차 그땐 알 수 없었다.
“정말 죄송해요, 정유현 씨. 지금은 제가 더 급해서 그쪽의 후폭풍까지 걱정해 줄 틈이 없어요.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에 들어가기 전에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금전 문제까지 엮이면 여러모로 불편해질 테니까요.”
다만,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황급히 일어나 커피숍을 나가려는 그녀를 불러 세우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류다이 씨.”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녀가 돌아봤다. 유현은 우산꽂이에서 그녀의 우산을 빼 건넸다. 그녀의 빤한 시선이 헤아리기 힘든 의미로 다가왔다. 입가를 살짝 늘이는 걸로 고맙다는 말을 대신한 그녀는 아까보다 더 서둘러 커피숍을 나갔다.
#1
“으으으으으!”
다이는 초조한 얼굴로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매고, 바지와 양말까지 완벽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이제 부모님이 완벽하게 잠들 밤 11시만 기다리면 된다.
그 시간이 되면 미련도 갖지 않고 이 집을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을 꽉 잡고 있는데 긴장과 초조는 자꾸만 각오를 흐트러지게 만들고 있었다. 파혼 선언을 하고 급기야 가출까지 강행하려 들다니. 류다이 인생이 이토록 급류에 휘말린 건 처음이었다.
“그러게 왜 이런 대형 사고를 치려는 거야, 언니야.”
제이는 아까부터 그런 다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침대 옆에 다이가 미리 싸 둔 커다란 짐 가방 두 개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넌 네 방으로 가, 어서. 왜 틈만 나면 내 방에서 자는 거야?”
“갈 거야. 갈 건데, 이게 지금 잘하는 짓이냐구요, 자매님.”
“잘하는 짓까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후회할 짓은 아니야. 내가, 하나뿐인 네 언니가, 원하지도 않는 결혼이란 걸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다고 집을 나가기까지 해야 돼? 사춘기가 와도 사고 한번 안 치고 착실하게 살아왔던 언니가 스물아홉씩이나 먹고 뒤늦게 이래야 하냐고!”
“넌 몰라. 아무것도.”
다이는 흘러내리는 긴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무거운 한숨을 천장으로 쏘아 올렸다. 등 뒤로 제이의 한숨 소리도 들려왔다.
아버지의 병원에서 레지던트 1년 차로 근무 중인 제이가 자신의 방을 두고 굳이 다이의 방에 와서 자기 시작한 건, 몇 달 전부터였다. 자세한 이유를 말하진 않았지만 아마도 병원 일로 스트레스가 쌓인 게 그 원인일 것이다.
한 살 차이라 어려서부터 24시간 동안 붙어 다녔다. 각자의 방이 있었지만 일상뿐만 아니라 침대도 공유했고 그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성인이 되고 의대에 진학한 제이가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방과 일상을 누리기 시작했지만, 제이는 간간이 다이와 함께 자기 위해 방을 건너오곤 했다.
그랬는데 얼마 전부터는 아예 다이의 침대에서 자기 시작한 것이다.
다이가 집을 떠나고 나면, 이제 제이는 다시 자신의 침대와 다이의 침대를 번갈아 가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 쳐. 그래도 결혼 상대가 기승전자그룹 장남이면 우리 집은 땡잡은 거라는 것쯤은 알지. 그래서 엄마도 저 난리시잖아.”
“그러니까 더 답답해. 난 그쪽에서 결혼하자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내가 너처럼 스펙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저 어머니 아버지가 밀어붙이시니 어쩔 수 없이 나간 자리였는데. 그게 결혼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구.”
“바보 언니야. 애프터가 들어왔을 때 눈치 깠어야지. 그 대단한 집안의 자제분께서 시간이 남아돌아 애프터를 신청했겠냐? 응? 여자가 없어서 애프터를 신청했겠냐구. 하여간 이 언니는 남자 문제에 있어선 싹수 컬러가 애초에 옐로였어.”
“그게 문제가 아냐. 둘러댄 거짓말은 어떻게 해? 회계사 시험 준비하고 있다고 뻥친 건 어떡해.”
“그건 아버지가 뻥친 거지, 언니가 한 게 아니잖아.”
입심에 탄력받은 제이가 아예 다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언니의 마음을 돌려놓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말투 속에서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러지 말고 지금 내려가서 엄마 아버지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려. 오늘 그쪽에 파혼을 선언했다는 거랑, 지금 언니가 방송국 라디오 작가 일을 하고 있다고.”
“그 순간에 아버지는 아마 딴따라 일이라고 코웃음 치실 거야. 너도 알잖아. 아버지랑 어머니는 내가 무슨 일을 하든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거. 두 분이 인정하는 사람다운 직업은 딱 넷뿐이야. 의사, 법조인, 경영인, 교육자.”
다이의 회의적인 태도에 제이는 짐짓 할 말을 잃었다. 언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자매가 어렸을 때부터 성적과 일상, 사람 관계에 있어 철두철미하다 싶을 정도로 관리를 해 왔다.
그 결과 제이는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의사 ‘따님’이 됐고, 다이는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장래를 찾지 못하다 뒤늦게 하고 싶은 일을 찾은 ‘딸년’이 됐다. 물론 다이는 1년 전에 방송국 라디오 작가로 입사한 사실을 아직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그 남자,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막 혐오스러워?”
제이는 이쯤에서 타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이와 부모님 간의 타협. 그리고 다이와 그 남자와의 타협.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아야 어떤 쪽으로든 다이가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 제이에겐 그 점이 가장 중요했다.
“잘생겼어. 재벌 아들이라 그런지 후광이 남다르긴 해.”
“그럼 뭐가 문제야?”
“내가 문제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 내가. 부모님한테 억지로 등 떠밀려 하는 결혼이 싫은 내가.”
“언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내 의견이랄 게 있나. 그쪽에서 결혼하자고 말이 나온 이상 아버진 밀어붙이실 텐데.”
다이는 자조적으로 뇌까렸다. 이게 말이 되냐고 제이에게 하소연했지만 아버지는 결국 이 상황을 말이 되도록 만들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네.”
제이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한 그 당당한 태도에 다이의 귀가 절로 솔깃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