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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게 뭔데?”

“언니 생각대로 해. 대신 난 중립이야.”

제이는 내뱉듯이 툭 던지곤 다시 벌러덩 드러눕는다. 제이가 훌륭한 묘수라도 꺼낼 줄 알았던 다이는 제이의 이마에 꿀밤이라도 한 대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내심 제이가 그렇게 말해 줘 고마웠다. 제이는 중립이라고 했지만 제 아군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이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부모님 앞에선 언제나 작고 초라해진다.

부모님의 의지와 노력을 따라가지 못한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었고, 그런 부모님을 볼 때마다 절감하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뜻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미안했기에, 지금까지 어떤 반항이나 거부도 일삼지 않았다. 그건 주눅으로 이어졌고 자존감마저 떨어뜨렸다. 습관처럼 부모님 앞에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모님한테 내세울 게 없는 자식이 된 기분이 어떤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알까. 미운 오리 새끼가 평생 동안 품었을 외로움이나 패배감을,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이 먼지 같게만 느껴지는 기분, 그저 밥이나 축내는 짐승이 된 기분을,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다이가 한숨만 푹푹 내쉬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 * *



“제이야. 얼굴이 왜 그래? 피곤하니?”

아침 식탁에서, 지숙이 걱정을 담은 얼굴로 제이를 쳐다봤다.

식탁은 오늘도 변함없이 5대 영양소를 가득 함유한 음식들로 풍성했다. 아버지 민철은 병원장이자 신경외과 전문의였고 어머니는 심장내과 전문의로서, 두 분 모두 의사기 때문에 가능한 식탁이었다. 덕분에 주방 아주머니가 매번 힘들어하긴 하나, 어마어마한 보수 앞에선 언제나 생글생글 웃었다.

“잠을 설쳤어요.”

“의사가 건강해야 환자들도 믿음이 생기는 법이야. 오늘 당장 김 교수한테 부탁해서 약 맞춰 놔야겠다.”

“김 교수님? 그 한의사분이요?”

“응.”

“의사가 한약 먹어도 돼요?”

제이의 물음에 지숙이 잠시 할 말을 잃고 멋쩍어하니, 민철이 끼어들었다.

“한약도 약이야. 먹어. 김 교수는 믿을 만해.”

“아, 싫은데. 한약 특유의 그 쓴맛이 너무 싫더라, 난. 언니랑 나눠 먹을…….”

제이가 말을 내뱉다가 멈칫했다. 어젯밤 다이는 결국 집을 나갔고 제이는 그저 어둠 속에서 다이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습관처럼 다이와 나눠 먹겠다는 말이 튀어나왔는데 다이가 없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해졌다. 지숙이 냉정하게 말했다.

“좋은 거라 양은 얼마 안 될 거야. 네 언니 약은 나중에 결혼하면 따로 지어 줄 테니까 너나 잘 챙겨 먹어.”

“다이는 왜 안 내려오는 거냐. 늦잠 자는 거야?”

“곧 결혼할 애가 하여간 정신머리하고는.”

민철과 지숙이 차례대로 다이를 입에 올렸다. 제이는 그저 눈치만 살피며 밥을 떠먹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기승전자그룹 회장 아들이잖아요. 다이한텐 차고 넘치는 자리인 데다가 뭣보다 행실이 중요할 텐데 저렇게 철없이 굴기만 하니.”

“다이가 지금 스펙이 있어, 내세울 직업이 있길 해? 그나마도 우리 병원이 아니었으면 언감생심 그런 자린 꿈도 못 꾸지. 나나 네 엄마나 사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야? 아니, 우리뿐만 아니지. 이제 곧 제이 너도 그렇게 될 텐데, 거기에 기승전자그룹까지 더해지면 지 위치는 자동으로 올라가는 건데. 그렇게 중요한 거다, 이 결혼이. 별 볼 일 없는 네 언니 신데렐라로 만들어 주는 거야, 이 결혼이.”

“그런 집에서 다이 같은 애를 원한다는 건 딱 한 가지 이유뿐이죠. 내조. 그러니까 회계사 시험 준비 중이라고 둘러댄 건 어찌 보면 잘하신 거예요. 다이는 결국 회계사가 되지 못할 거고 그 몸 그대로 결혼할 거고, 내조만 열심히 하면서 살면 되니까.”

다이가 없는 자리에서, 민철과 지숙은 다이의 향후 인생의 방향까지 잡아 주고 있었다. 갑자기 어젯밤 다이가 지어 보였던 그 좌절과 절망의 표정이 떠올라 제이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저기요. 엄마, 아버지.”

그래서였다. 다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먹은 것은.

“그래.”

“응.”

“언니 지금 집에 없어요.”

“없다니?”

“아침 일찍 어딜 간 거냐.”

“가출했어요. 어젯밤에.”

그저 잠시 외출한 거라고만 여겼던지, 제이의 말에 부모님이 동시에 수저질을 멈추었다. 두 개의 숟가락이 허공에 둥둥 떠다녔다.



* * *



“파혼이라니?”

포크를 들던 승미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모친인 승미는 분명 당황해 할 것이고 부친인 동훈은 그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의 예상이 정확했다.

저녁 식탁 앞에서 꺼낼 수 있는 종류의 말이 아니었기에 식사를 끝내고 거실로 이동했을 때 꽤 담담하게 털어놓은 것인데, 승미는 아무래도 오늘 밤 소화 불능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듯했다. 동훈은 잠자코 멜론 조각을 찍어 입에 넣었지만 그 역시 얼굴이 굳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 동훈 대신, 승미가 다시 질문 공세를 이어 갔다.

“대체 왜? 이유가 뭔데?”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답니다.”

“하고 싶지 않았다면 맞선에도 나오질 말았어야지. 기껏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소리야. 더구나 상견례까지 앞두고서.”

“마음이 바뀌었겠죠.”

“어이가 없어서 원. 여러모로 그쪽이 조금 처져도 소개해 준 김 여사 얼굴도 있고, 여자애 자체는 모나지 않은 것 같아서 다 묻고 내 식구로 안고 가려고 했더니. 내일 내가 그쪽 엄마, 그러니까 안 교수한테 연락해 보마.”

“연락하셔도 여기서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어머니.”

“그럼 손 놓고 있으라고? 무려 파혼인데?”

재벌가 사모님답지 않게 소탈하고 인간적이라는 평이 자자한 승미였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라,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올라와 혼자 아르바이트해 모은 돈으로 대학까지 졸업했다. 졸업한 그해에 기승전자 홍보팀에 입사했으며, 당시 회사 후계자라는 걸 비밀에 부친 채 기획부서에서 일하던 아버지와 연이 닿아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류다이라는 여자와 그 여자의 집안이 자신들과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도, 승미는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아들의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른하나로 장성한 아들의, 그것도 향후 기승전자그룹을 이끌어 가야 할 아들의 결혼식을 말이다.

“그래. 넌 뭐라고 그랬냐.”

한동안 침묵만 유지하던 동훈이 낮게 입을 열었다. 옆에서 아직 표정이 풀리지 않은 승미가 퉁명스럽게 뇌까렸다.

“물어보나 마나죠. 저 녀석도 결혼하기 싫어한 건 마찬가지니까 얼씨구나 했겠죠, 뭐.”

“정확하게 보셨어요, 어머니.”

“이 녀석이.”

아들이 결혼을 해서 안정적인 상황에서 회사를 끌어가기를 바랐던 분들이다. 그래서 작년부터 결혼을 서둘렀고 어마어마하게 자주 맞선 자리를 물어 왔다. 동훈이 그렇게 해서 회사를 더욱 번창시킬 수 있었고 다른 많은 경영인들의 비슷한 선례도 있었다. 하나같이 결혼이 심적으로 얼마나 많은 안정을 주는지 입을 모았던 것이다.

아직 두 사람이 결혼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별로 없었고 언론에 보도가 나가지도 않은 상태라, 주변의 시선은 크게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승미는 그런 외부적인 여건에 안도하기보다는 이 결혼이 깨졌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이 더욱 큰 듯해 보였다.

유현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더 큰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무슨 일이야? 이번에도 폭탄선언이야?”

“말씀드렸다시피 YBC 방송국 PD 시험에 합격했어요. 어제 방송국에 들러 합격증과 사원증을 받아 왔습니다.”

“유현아.”

두 분에겐 설상가상이었겠지만, 유현에겐 금상첨화였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1년 동안은 창원에 있는 지사에서 근무하게 될 듯해요. 내년 봄에 서울 본사로 다시 올라올 겁니다.”

“그걸 꼭 해야겠어? 네가 누구라는 사실을 숨기기까지 하고서?”

“5년입니다. 5년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겁니다. 이건 아버지도 허락하신 겁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앞으로 얼마가 될지 모를 세월을 온통 회사에 헌신하며 살아야 할 텐데, 그에겐 또 다른 꿈이 있었고 잠시만이라도 그 꿈에 도취돼 살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동훈에게 미리 언질을 준 후 시험을 치렀다. 그런 아들의 심경을 동훈이 암묵적으로 인정한 셈이다.

동훈이 묵묵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