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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일기 1권
미래일기 1권(1화)
1. 프롤로그
“후우…….”
한숨을 내쉬며 밝은 햇빛은커녕 회색빛의 하늘이 너무나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우울한 3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타다다닥!
기쁨으로 웃는 소리는 하나 들리지 않았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둔탁한 타자 소리뿐이었다. 가끔씩 회사 상사의 외침 소리나, 그것에 사죄하는 부하 직원의 목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삭막하다면 삭막하고, 이 시대에 어울린다면 너무나도 어울리는, 그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회사의 5층 사무실을 한심한 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
눈을 반쯤 감으며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싸구려 볼펜을 집었다.
딸깍!
500원짜리 싸구려 볼펜의 심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검은색 꼭지로부터 튀어나왔다.
딸깍!
몇 번을 했을까, 계속 그렇게 볼펜의 심이 볼펜의 몸통을 들락날락하던 때 나는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이, 황 과장.”
역시나, 누군가가 나의 뒤에 서서 크지 않은 목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부사장님…….”
언제부터 있었는지 큰 키에 단정하게 다려진 양복을 입은 남성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그의 이름은 김희환. 이 대기업의 최연소 부사장이자 업계에 알아주는 유망주, 그리고 나의 죽마고우 소꿉친구였다.
“한 대 피겠나?”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표정만이 이 가라앉아 있는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붕 떠 있었다.
무겁고 찌뿌듯한 몸을 힘들게 일으켜 세웠다.
“감사합니다.”
그저 씁쓸한 미소를 한 번 지으며 김 부사장님, 아니 희환이가 건네준 담배를 잡았다.
사무실과는 그리 떨어져 있지 않는 사내(社內)의 휴게실, 점심시간 직후가 아닌 꽤나 지난 시간이어서 그런지 사람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그래?”
뿌연 연기를 자아내는 담배를 입에 물고 희환이 툭 던지듯 물어왔다.
“뭐가?”
“야, 내가 너랑 30년을 넘게 사귀었어. 정말 요만할 때부터 딱지 치고 놀았는데, 지금 네가 얼마나 웃긴 표정을 짓고 있는지 굳이 물어봐야겠어?”
손바닥으로 딱지 모양을 만들며 흥분해서 말하는 희환을 보고 나는 담배를 한 번 쑤욱 빨았다. 회색빛 연기가 폐로 들어서면서 담배 특유의 맛이 그 속을 가득 채워 갔다.
희환은 자신과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을 알고 지내 왔던 이른바 죽마고우였다.
비록 그런 사이였지만 사내에서는 보는 눈이 있다면서 과장, 부사장, 이런 식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지금처럼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언제나처럼 반말로 낮추고 호칭을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희환도 바쁜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시간을 쪼개서 온 것이리라.
“후…….”
폐 속에 가득 차 있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한 번 희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명품 브랜드의 구두와 큰 프레임의 금빛 시계, 올백으로 넘긴 머리카락과 광택 있는 검은색 양복. 재벌 부럽지 않은 차림에 단정한 모습이 매우 보기 좋았다.
그에 비해 나의 모습은 달라도 심하게 달랐다. 약간 낡은 정장에, 피곤에 지쳐 있는 표정, 그리고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과 5만 원 주고 산 중국산 시계, 그리고 그와는 다르게 어두운 기운이 맴도는 분위기.
물론, 그가 한국에서 알아주는 자화사의 부사장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런 차이는 당연하다. 그는 이 업계에서도 꽤나 알아주는 유망주였고, 사상 최연소로 엄청난 실적과 함께 대기업 자화사의 부사장이 된 사람이니까 말이다.
사실 잘 생각해 보면 희환 자신의 능력도 충분했지만, 그는 가정환경부터 최고였다. 국회의원의 아버지, 유명 디자이너인 어머니, 어렸을 당시부터 모두 최고였던 희환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쥐꼬리만 한 연봉에 실적 하나 크게 올리지 못하는 과장이었다. 그렇다고 가족관계가 딱히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나의 어머니는 암으로 인한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내가 이 회사에 부장으로 승진하자마자 낙명하셨고, 아버지는 그 후로 행방이 묘연했다.
물론, 나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생각하더라도 나는 문학계에서 꽤나 유명한 아버지와 현모양처의 좋은 견본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어머니의 밑에서 행복하게 자랐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야?”
얼마나 깊게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나의 무거운 표정을 바라보며 희환이 미간을 찌푸리며 안부를 물어왔다. 어딘가 부러운 듯한 모습의 희환이었지만, 그래도 친구라고 언제나 자신을 보살펴 주었었다.
“아무 일도 없어. 걱정 마라.”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절친한 친구의 걱정에 대답을 하며 이제 다 타 버린 담배를 짓뭉개서 불씨를 껐다.
“야, 난 네 편이야. 알고 있어.”
언제나 그렇게 친구로서 고마운 말을 건네주는 희환의 말에 너털웃음으로 답하며 휴게실을 박차고 사무실로 향했다.
휘이이이잉!
바람이 칼날처럼 피부를 찔러 왔다. 당연한 것이지만 20층 옥상의 겨울바람은 차갑고도 날카로웠다. 그 날카로운 바람은 마치 나를 질책하듯이 더욱더 그 기세를 강하게 해 갔다.
휘이이이잉!
“이것뿐이구나…….”
손에 들린 3개의 종이봉지 안에 들어 있는 수십 권의 공책과 가죽수첩을 보며 한숨을 한 번 쉬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챙길 수 있는 38년 인생 동안의 결과물이라고는 어릴 때부터 잦은 순간기억상실 때문에 언제나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적어 왔던 이 낡은 수십 개의 일기장들뿐이었다.
“뭐, 이제 그것도 필요 없겠지만…….”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고, 양복도 단정히 접어서 옆에다 내려놓았다. 이제 몸에 걸쳐져 있는 것은 낡은 와이셔츠와 바지뿐이었다. 언제 풀어졌는지 하늘로 너울거리며 날아가는 넥타이를 보며 영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다시 산다면 말이야.”
너털웃음을 흘리며 난간 건너편을 향해 한 발자국 걸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보니 무섭기는 무섭나 보다. 하지만 솔직히 이런 어둡고 회색빛의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지지직…….
“더 좋은 인생을…….”
말의 끝을 못 내고 악문 입에서 피 맛이 번지고 말았다.
“살고 말겠어.”
몸이 차가운 밤바람과 부닥뜨리며 땅을 향해 떨어져 내려갔다.
후욱!
풀어진 와이셔츠가 묘한 파공성을 내며 뒤로 크게 젖혀졌다.
지지지지지지직! 파지직!!!
그렇게 땅에 떨어지기 직전, 단 1초만 더 있어도 땅에 몸이 격돌해서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장기가 파열되어서 죽을 수 있을 그 약간의 타이밍에 영원의 몸이 맑은 푸른색의 섬광에 휩싸였다.
그리고 분명 그곳에 피를 퍼트리며 죽어 있을 것이라 생각되던 영원의 신형은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듯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지직!
그렇게 시간이 멈춰 버린 순간, 영원의 주변에서 엄청난 섬광을 자아내던 전류는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의 파공성을 자아내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후우우우욱!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곳에는 ‘황영원’이란 한 사람의 존재가 사라져 있었다.
2. 미래일기(1)
후우우우욱!
콰당!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몸이 바닥에 한바탕 뒹굴었다. 분명……. 아니, 확실히 높은 곳에서 보기 좋게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때의 아픔에 몸의 이곳저곳이 찌릿찌릿했다.
“억?!”
바보 같은 경악성을 내지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눈이 반쯤 감겨 있고, 목에서는 우둑우둑하는 관절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은 어딘가 멍했고, 어깻죽지 부근의 근육이 마치 잠을 잘못 잔 것처럼 뻐근했다.
어딜 보아도, 도저히 20층 위에서 떨어진 몸의 상태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깊은 잠을 자다가 안 좋은 잠버릇으로 침대에서 떨어진 그런 모습이었다.
“뭐지? 분명…….”
왜인지 기억에 약간의 누락이 있었지만, 조금씩 그 기억이 살아났다. 20층의 그 뼈가 시릴 듯한 차가운 바람과 그 높이에서 떨어진 자신. 그렇게 떨어지는 중에 갑자기 일기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난 것도 기억했다.
“그럼 여긴 어디지?”
의문에 감싸인 채로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며 영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원아! 일어나! 빨리!”
그렇게 공황 상태에 빠져 있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절묘한 타이밍으로 귀에 익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만약 자신의 귀가 이상해져 버린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 자신이 수년 전에 잃어버렸던 가장 소중한 사람의 목소리일 것이었다.
‘어…… 어머니?’
꽈당!
혹시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허겁지겁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소리가 들려온 부엌 쪽을 재빠르게 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햇빛을 받으며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이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왜인지 바쁜 듯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래,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 어째서? 왜?”
분명 어머니는 수년 전에 암으로 목숨을 잃으셨다. 이것이 환영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 상황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응? 네가 언제부터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어머니라니? 그것보다. 뭐가? 엄마 뭐 이상해? 네가 그냥 잠에서 덜 깬 것 아니니?”
쿡쿡, 웃으며 다시 일을 시작하는 어머니를 보고 마법에 걸린 것처럼 몸과 머리가 굳어져 버렸다.
분명 내가 과장직에 임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투병 생활로 밀었던 머리카락은 어디에 갔는지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잠자리에서 뒤척인 듯이 붕 떠 있었고, 많이 야위었던 팔과 다리는 예전처럼 건강하게 살이 붙어 있었다. 매일 지친 듯이 감고 계시던 두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너무나도 행복한 기분에 빠지며 두 눈을 의심해 보고 강하게 몇 번을 비벼 보았지만 결국에 보이는 것은 햇빛을 받으며 아침밥을 차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꿈이라면 깨지 마라.’
이렇게 행복한 것이 깨지 않길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살아생전에 그렇게 효도를 못했는데, 꿈이라도, 환상이라도 이렇게 볼 수 있다면 너무나도 행복한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 있었던 그 울 것 같은 회색빛 구름과 우울한 사무실이 아닌 이곳은, 너무나도 따뜻하고 행복함이 묻어 나오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