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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일기 1권(2화)
2. 미래일기(2)


샤아아아아아!
잠을 깨기 위해 샤워실에 들어선 나는 따뜻한 샤워기의 물에 흠뻑 잠겼다. 몸을 타고 조금씩 흘러내리는 차가운 기운이 있는 물은, 잠으로 멍해진 머리와 아직 정리가 안 된 정신 상태를 조금씩 편안하게 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간단히 몸을 씻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자마자 영원은 몸이 마치 석상이 된 것처럼 딱딱하게 경직되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엇?!”
거기엔 꽤 멋있는 얼굴의, 아니…… 분명히 거울 안에 있는 모습은 나의 고등학생 때의 모습이 있었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아닌 단정한 머리카락, 흐리멍덩한 눈빛이 아닌 맑은 눈빛을 가진, 어딜 보아도 건강하고 행복했던 자신의 청소년 때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이제 마지막이라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대에서 살라는 건가?”
자살을 한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자신이 어수룩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죽기 전에 본다는 파노라마거나, 아니면 49일간 중천을 떠돈다는 49제이리라.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분명 이것은 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행복한 기억을 주기 위한 하늘 높으신 분의 배려이리라.
“내가…… 이렇게 작은 걸 입었었구나…….”
슬픔과 씁쓸한 웃음을 짓던 나는 방에 걸려 있는, 유행이라고 줄여 놓았던 교복을 몸에 걸쳤다. 이 시대에 꽤나 유행했던 스타일인지 교복 셔츠와 마이, 바지까지 모두 꽉 낄 정도로 줄여져 있었다. 이 시대에는 꽤나 인기가 있었고 멋있다고 생각했던 스타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단 하나의 실용성도 없는 짓이었다.
“훗.”
가볍게 너털웃음을 흘리며 바지의 벨트를 맸다. 붉은색 바탕의 이름표에 하얀색으로 ‘황영원’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후 부엌으로 향하는 문고리를 잡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행복한 것이 과연 거짓은 아닐까, 자살을 한 나에게 심한 절망감을 주기 위한 신의 장난은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영원의 뇌리를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딸깍!
하지만 그런 공포심은 문을 열고 부엌을 바라보자 일순간에 사라졌다.
“빨리 와. 엄마 오늘 가면 한 달 정도 안 들어올 거란 말이야.”
여전히 하나 다른 점 없이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어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는 아까 전과 똑같이 따뜻한 분위기와 좋은 냄새가 나는 따끈따끈한 반찬들이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기뻐서, 너무나도 기뻐서 목소리를 높여서 대답을 하고 식탁으로 달려가듯 앉았다.
“어머, 네가 웬일이야? 존대를 다 쓰고.”
또다시 웃는 어머니를 앞에 두고 밥을 푹푹 퍼먹었다. 정말 몇 년 만에 먹어 보는 밥 같은 밥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매일 라면이나 도시락으로 대충 먹으며 살았던 당시와는 다르게 맛있는 국과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갖가지 따끈한 반찬들. 그리 진수성찬도 아니지만 집 밥을 먹는다는 것은 그 어떤 진수성찬과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맛있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야야, 벌써 7시 30분이다. 빨리 준비하고 학교 가. 엄마는 먼저 갈 테니까.”
대충 설거지가 끝났는지 고무장갑을 내던지고 허겁지겁 준비하러 안방에 들어가는 어머니를 미소가 담긴 얼굴로 바라본 나는, 다 먹은 식기들을 싱크대에 넣은 후 정리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흐읍!”
달콤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래, 이 향기. 언제나 그리웠던 나의 방의 향기가 느껴졌다.
책상 위를 바라보자 내가 1년 가까이 돈을 모아서 구입한 모던틱한 디자인의 아이팟과 휴대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의 거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구식 컴퓨터도 또한 눈에 들어왔다. 아껴서 입으려고 옷장에 걸어 둔 정장에, 읽지도 않는데 사 두었던 책들이 꽂힌 책꽂이, 길가에서 버려져 있던 것을 주워서 수선한 침대까지.
그 모든 게 나의 기억 속에 있는 행복했던 청소년 시절의 것들이었다.
“짐을 싸라…… 학교를 가란 말이구나. 그래, 지옥을 가든 천국을 가든 즐기고 가야지.”
자살을 한 사실을 잊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죽은 몸. 이것이 만약 중천이나 파노라마와도 같은 것이라면 이곳에 있는 행복을 모두 누리고 말 것이다.
영원은 자신이 한 짓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희망을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이 행복했던 시절을 즐겨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오랜만에 가방 싸서…… 익숙지 않네…….”
책상을 싼다고 쌌지만 필요한 책들이나 공책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책이 어느 곳에 있는지 기억이 도통 나지를 않았다. 때문에 책상에 붙여 있는 시간표를 보고 가방을 싸는 것 따위의 쉬운 일에도 꽤나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어……?”
그렇게 책장을 뒤지고 있었던 영원은 이 방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낡은 공책의 무더기를 발견했다. 몇 개는 벌써 낡아서 찢어질듯 너덜거리고 있었고, 그것들은 침대의 옆에, 정확히 오늘 아침에 자신이 떨어진 땅바닥에 놓여 있었다.
툭.
실수로 몸을 그 책의 무더기 쪽으로 돌리다 그 공책의 산을 건드리고 말았다. 떨어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그 공책들을 잡았지만, 건드리기 무섭게 이 공책의 산은 방바닥에 와르르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어림잡아도 200개는 넘어 보이는 공책들, 그것들이 단번에 쓰러지자 방바닥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확인한 나의 눈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것들을 모를 리가 있는가. 이것은…….

“일기…… 내가 죽기 전에 같이 떨어졌던 것들…….”
그것은 일기였다.
어렸을 때부터 순간기억상실증이 일어날 때가 자주 있었던 내게 의사 선생님들이 처방한 치료 방법.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나, 흥미 있는 일, 재밌는 일을 일기에 적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흥미로운 처방을 받은 나는 처음에는 약간 익숙지 않았지만 곧 일기를 쓰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고, 그렇게 38살의 죽음까지 매일 습관적으로 일기를 썼었다.
아니,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이 일기의 양은 어디를 어떻게 보아도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 써 왔던 양이 아니었다. 어림잡아 200권은 넘는 양. 순간 머릿속에 한 줄기의 섬광이 스쳤다.
“설마.”
방바닥을 꽉 채운 일기들을 보며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회전했다.
지금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거기다 말이 고등학교 3학년이지 개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날이었다. 그리고 이 일기들의 양이나 혹은 이 일기들의 손상 상태로 보았을 때, 어떻게 생각해도 이것은 내가 고등학생 때까지 써 왔던 일기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것들은 자신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때부터 죽기 직전의 일기들의 상태와 똑같았다.
“이거…… 회사에서 있었던 일. 이건 대학교 졸업 때…… 이건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방바닥의 일기를 뒤지며 하나하나 다 훑어보았지만 그 내용은 나의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듯이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가 쓰여 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읽었을까.
나는 일기들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며 시선을 어딘가에 고정시키지 못하고 계속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본래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일기들이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 즉 일기에는 모두 내가 적은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놀라기 전에 몸이 먼저 흥분과 두려움에 덜덜 떨렸다.
“여긴…… 과거인 거야? 설마 난 돌아온 건가? 영화들처럼? 소설들처럼 시간 여행이라도 했다는 거야?”
이 일기가 그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였다. 파노라마도, 49일 동안 천계와 지옥에 갈지 심판을 받는 중천도 아니었다.
이곳은 과거. 자신은 20년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거기다 달력을 살펴보니 지금은 2009년 3월 말이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달리 이것을 설명할 도리가 없잖아.”
다른 것은 모두 과거의 모습과 동일했다. 그런데 오직 이 일기들만, 내가 죽었을 때 양손 한가득 들고 있었던 이 일기들만이 이 시대와 달랐다. 미래가 적혀 있는 이 일기들은 마치 예언서와도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우…… 우선 학교야.”
두근대는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가방을 멨다. 하지만 그런 공항 상태에서도 나는 이 방바닥을 어지럽힌 책들 중에서 오늘의 일들이 적혀 있는 책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못했다.
이곳이 현실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물병에 물을 채우듯이 채워 나가자 무언가가 의지와는 다르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것을 실험해 볼 필요가 있어.”
문을 잠그고, 굳게 다짐하며 등교를 하기 위해 발을 옮겼다.

“끄응…….”
기대라고 해야 하나?
어찌 되었든 기대와는 달리 학교는 평범했다. 놀랍기까지 한 평범한 수업이었다.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끼리 익살스러운 장난도 치고, 도망가고, 야한 이야기나 여자 이야기, 연예인과 최신가요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수업 시간에는 내신 관리를 위해 거의 모든 아이들이 눈을 초롱초롱 뜨고 수업을 경청했고, 선생님들도 그에 응답하듯 열정을 다해 수업을 하였다.
모 영화처럼 어떤 기관이나 집단에서 시간 여행을 한 것을 알아채고 찾으러 오거나 킬러를 보내지도 않았고, 알고 보니 반의 친구가 유명한 첩보원이거나 초능력자이지도 않았다. 자신과 같은 일을 겪은 사람과 조우하는, 그런 일도 없었다.
그저 질릴 정도로 평온하고 평범한 수업 시간이었다. 약간 식상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런 바뀐 것이 없는 평범함과 행복함에 안도를 하며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정말 적혀 있는 그대로 실행되…….”
여기저기 곰팡이가 있거나 누렇게 빛바랜 공책을 책 밑에 숨겨서 수업을 들었다.
그 이전 시간이었던 국사에서도, 그리고 그 전전 시간이었던 국어에서도 같은 짓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마치 짜 맞추어진 퍼즐처럼 일기에 적힌 그대로 일어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바보 같은 과학 선생님, 방귀 뀌고 모른 척한다.
뿌웅!
“크흠!”
이처럼 교과서 밑에 슬쩍 숨겨 놓고 읽으면서 수업을 듣고 있자니, 정말로 적혀 있는 대로 실행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미래의 일들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적혀 있는 대로 실행된다기보다는 미리 예언하는 예언서에 가까웠다.
예를 들었던 것처럼 선생님이 욕을 했다던가.
친구들이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했는데 왜인지 모두가 웃어 버린다던지.
그런 자잘한 내용들도 모두 적혀 있는 이 일기는, 이 일기만은 이 현실이라는 세계에서 오직 미래의 일을 간직한 물건인 것이었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