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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릴리스는 딱딱한 의자 위에서 눈을 떴다. 자리가 비좁아 한껏 몸을 옹송그린 탓인지 기지개를 켜자마자 온몸의 관절들이 요란스레 비명을 질러 대었다.

굳어 있던 몸을 대충 풀어 준 뒤, 그녀는 요 며칠 내도록 그러했듯 목을 쭉 빼고 벽 위쪽에 난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살폈다. 성인 남성 손바닥 두 개 정도를 합쳐 놓은 듯한 크기의 자그마한 그 창은 사방이 꽉 막힌 마차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휙휙 지나가는 키 큰 나무들의 거슬한 몸통뿐이다. 그러나 끌려가는 처지에 그보다 더한 것을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릴리스는 대개 종일토록 멍하니 그 풍경을 감상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마차 문이 휙 열리며 찬 바람이 들이쳤다. 얇은 드레스 위로 훅 끼친 냉기에 반사적으로 양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내리시지요.”

열린 문밖에 서 있던 남자가 냉한 얼굴로 그녀를 재촉했다. 서리를 품은 것만 같은 싸늘한 목소리가 바깥의 공기보다 더 몸을 춥게 했으나, 릴리스는 내색하는 대신 당연하다는 듯이 그 말에 순종했다.

쾅. 그녀가 땅에 두 발을 딛자마자 남자가 마차 문을 거칠게 닫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만 흩어집시다.”

무감정한 목소리가 해산을 재촉했다. 험상궂은 인상의 기사 몇이 다가와 남자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된소리와 방언이 뒤섞인 낯선 언어들이 정수리 위로 날카로운 얼음처럼 쏟아져 내렸다. 릴리스는 저도 모르게 양어깨를 움츠렸다가, 시선 끝에 들어온 투박한 신발코에 깜짝 놀라 고개를 바싹 추켜올렸다.

곁에 있던 남자는 어느새 사라져 버린 뒤다. 대신 그녀의 앞에 선 것은, 스파티움인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체구를 가진 처음 보는 기사였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기사가 말하며 매몰차게 돌아섰다. 타국의 황녀를 대한다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만큼의 무례였다. 그러나 릴리스는 항의하는 대신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남편이자 이 스파티움의 왕족인 바이마르가 결코 그녀를 귀이 여겨 동행한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 그의 행동은 사실 퍽 마땅한 대우였던 것이다.

삼삼오오 모여 선 병사들 앞을 지나칠 때마다 경멸의 시선들이 올가미처럼 목덜미를 죄어 왔다. 키 작은 관목들은 가지를 뻗어 걸음걸음을 방해했고, 육중해 보이는 성벽은 어둠에 반쯤 묻혀 끝을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딱딱한 구두 뒤축에 발이 쓸려 아팠지만 릴리스는 내색하는 대신 잠시 멈춰 서 숨을 골랐다.

발자국 소리가 멎자 앞서 걷던 기사가 흘금 그녀를 돌아보았다. 릴리스는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해자에 가득한 검은 물이 바람결에 휩쓸리며 음산하게 출렁였다.

바이마르는 성벽 바로 아래에 겨울을 맞아 앙상해진 나무처럼 반듯하게 서 있었다. 아테라를 떠난 뒤 처음으로 다시 보는 얼굴이었다. 우습게도 반갑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릴리스는 그를 일별한 뒤 잠자코 다시 기사의 뒤를 따랐다. 그것만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므로.



젊은 기사는 그녀를 길쭉한 탑 위로 안내했다. 무척 높고 길이 좁아 올라가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곳이었다.

그녀가 소박하고 어둑한 꼭대기 방을 둘러보는 동안 젊은 기사는 문을 닫고 커다란 자물쇠를 두어 겹 겹쳐 문에 둘렀다. 촤르륵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연신 이어지다 이내 탕탕, 돌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하아. 숨을 내뿜자 허공에 흰 김이 어렸다. 남쪽에 위치한 아테라와 달리 북부의 스파티움은 같은 계절이라 여기기 힘들 만큼 바람이 찼다. 릴리스는 먼지가 담뿍 쌓인 딱딱한 침대를 찾아 그 위에 놓여 있던 얇은 담요를 급히 어깨 위에 넓게 둘렀다. 따뜻하다고 표현하기는 힘들었으나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조금 나았다. 그녀는 그 상태로 몸을 옹송그려 체온을 유지했다.

방은 사람의 손을 제법 탄 듯 보였다. 군데군데 쌓여 있는 먼지를 제외한다면 쓰레기나 잡동사니가 많은 편도 아니었고, 커튼이나 침구는 낡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모양새였다. 다소 퀴퀴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아주 못 견딜 정도는 아니라 릴리스는 조금 안심한 채로 앉을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황녀치곤 퍽 소박한 감상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양다리를 쭉 펼 수 있음이 기껍게만 여겨졌다. 모름지기 덜컹이는 마차 안에서 보름을 넘게 지내다 보면 이런 소소한 것에도 충분히 감사할 줄 알게 되는 법이었다.

릴리스는 서늘한 돌벽에 등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추위에 잔뜩 곱아들었던 손가락에 온기가 돌아오며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아테라.

그녀는 치맛자락을 헤쳐 두 손을 엉덩이 아래 깔고는 가만히 앉아 고국의 이름을 떠올렸다. 황족으로 1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았으나 지금은 모든 것이 그저 허울 좋은 과거일 뿐이었다.

황제는 그녀를 버렸고, 내쳤으며 방관했다. 관대한 척 굴던 보호자의 역할을 이어받은 사람은 남편이자 스파티움의 왕자인 바이마르였으나, 그는 그녀를 인내할 뿐 살피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이전 날 그러했듯이.

릴리스는 간지러운 두 눈을 깜빡였다. 차갑게 식어 버린 마음과 달리 눈가는 델 것처럼 뜨겁기만 했다. 이윽고 퐁퐁 솟아난 눈물이 더러운 담요 위로 지저분한 얼룩을 만들었다. 찬 바람에 트고 갈라진 볼이며 손등에 물이 닿아 우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엉성하게 엮인 창문이 덜컹이며 자그마한 방 안으로 찬 바람을 들였다. 릴리스는 그 불규칙적인 소음에 끅끅거리는 울음소리를 한 꺼풀 얹었다. 그토록 귀애한다 일렀던 것이 전부 거짓이었던가. 홀로된 그녀를 거두어 먹이고, 입히고, 아낀다 속삭였던 것이 모두 그럴듯한 기만이었던가.

어느덧 축축해진 담요가 마음만큼이나 서러웠다. 오는 길 내내 억눌렀던 감정이 분수처럼 샘솟아 얼굴을 적셨으나 릴리스는 멈추지 못하고 밤새 울음을 뱉었다.



까무룩 잠들었던 모양이다. 커튼이 없는 창문으로 햇빛이 여과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릴리스는 천천히 일어나 어제처럼 침대 머리맡에 몸을 잔뜩 웅크려 앉았다. 울다 지쳐 저도 모르게 잠들었는지 구태여 만지지 않아도 눈이 잔뜩 부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릴리스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꾸벅이며 졸음을 쫓아내다, 침대 맞은편의 자그마한 문 하나를 발견했다. 물집과 딱지로 범벅이 된 발로 구두를 신을 자신이 없어 그녀는 곧 맨발로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밟았다.

발치로 부연 햇빛이 쏟아졌다. 직선으로 뻗어 내린 그 희미한 빛은, 거무튀튀한 돌벽 위에 난 둥그런 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워낙 높은 곳에 있어 혼자서는 손도 잘 닿지 않는 높이였다.

릴리스는 아쉬운 기분으로 묵직한 철문을 힘주어 밀었다. 작은 화장실 벽면에는 바깥의 창보다 조금 더 큰 거울이 달려 있었다. 더러운 부분을 소매로 조금 닦아 내곤 얼굴을 확인하자 역시나, 눈가가 발갛게 부어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대야에 찬물을 받아 얼굴에 대충 끼얹고 있으려니 문밖에서 소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거친 목소리와, 그보다 조금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한데 뒤섞이다 차츰 잦아들었다. 릴리스는 흘러내린 머리를 대충 넘겨 정리한 뒤 아픈 발을 질질 끌며 화장실을 나섰다.

“……직접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로군.”

낯선 이의 그림자가 방 한가운데를 길게 가로질렀다. 처음 보는 방문객은 키가 무척 크고, 그만큼 체격 또한 우람한 남자였다. 머리칼은 칠흑처럼 검었고, 눈동자는 그보다도 좀 더 새까만 색이었으며 사나운 인상은 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져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릴리스를 두렵게 하는 것은 그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커다란 검이었다. 검집도 없이 번들거리는 날이 생경해 주춤하고 있으려니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릴리스 반 모라 아테라.”

“……누구신지요.”

그녀는 가까스로 잠긴 목소리를 짜냈다. 긴장한 태가 역력한 모습에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잠시 뒤 그가 답했다.

“체자레.”

릴리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다물렸다. 드레스에 닿아 있던 손이 옷감을 잡아 뜯듯 꽉 쥐었다 놓았다. 체자레는 기민한 시선으로 그 모양새를 훑으며 입맛을 다셨다.

“보아하니 이미 나를 아는 모양인데. 반에게 들었나?”

낯설기 짝이 없는 호칭에 둥그런 두 눈에 의아함이 차올랐다. 곰곰 생각하던 릴리스는 한참 뒤에야 그것이 그녀의 남편을 이르는 말임을 깨닫고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컨대 처음 듣는 별칭이었다.

“……예, 몇 번.”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그대와 길게 말을 섞고 싶지는 않거든. 그저 그 낯짝이 좀 궁금했을 뿐이야.”

체자레는 성큼성큼 걸어 릴리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작고 마른 몸이다. 주홍빛이 도는 금발은 여행길 내내 쌓인 먼지로 색이 바랬고, 입고 있는 드레스와 드러난 살갗도 처지가 비슷했다.

“아테라의 황녀가 남편을 박대한다는 소문이 스파티움에 파다했다는 건 알고 있나?”

릴리스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왜 모르겠는가. 체자레가 다시 웃었다. 그리고 잠시 뒤, 릴리스는 서늘한 감각에 두 눈을 꾹 감았다. 소리도 없이 뽑힌 검이 섬뜩하게 목덜미를 위협하고 있었다.

체자레는 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얼어 있는 그녀의 볼을 두 번 툭툭, 아랫것들 대하듯 가볍게 건드렸다.

“너무하다 생각하지 말게나. 내 동생이 겪은 무례는 분명 이보다 더했을 것이니. 아니 그런가?”

릴리스는 그 말에 흠칫 놀라 입술을 말아 물었다. 새로 즉위한 스파티움의 왕이 자신의 배다른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이미 귀가 따갑도록 충분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제 와 할 말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때로는 무심함이 그 어떤 폭력보다 무서운 법이지. 그렇지 않은가, 황녀?”

체자레는 무언으로 긍정하는 릴리스를 잠시 내려다보다 검을 거두었다. 날이 스쳤던 살갗에서 피가 슬몃 배어 나왔다. 그는 감흥 없는 눈으로 그것을 일별한 뒤 릴리스에게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모쪼록 대접이 만족스러웠으면 좋겠군. 그럼.”

키이익. 듣기 싫은 쇳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기다랗고 좁은 계단을 통해 소용돌이치며 올라온 찬 바람이 방 안을 한 바퀴 거세게 휘돌았다.

릴리스는 철컥이는 발소리가 잦아든 뒤에야 손을 들어 뜨끈한 상처를 훑었다. 손끝이 닿자마자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며 소매에 지저분한 얼룩을 만들었다.

그녀는 휘청휘청 걸어 다시 화장실 문을 열었다. 받아 두었던 물로 거울을 좀 더 깨끗이 닦아 내고 나자 목덜미에 길게 난 상흔이 또렷이 보였다. 살짝 눌러 보니 뜨끔한 통증이 느껴지며 다시 울컥 피가 솟아 나왔다.

릴리스는 더러워진 물을 비우고 깨끗한 새 물을 대야에 다시 채웠다. 그새 드레스 위로 지저분하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두 손으로 얼룩을 벅벅 문질러 빨아 보았지만 도리어 흔적이 번져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되고 말았다.

급기야는 꽁꽁 언 손이 엇나가 대야를 엎기까지 했다. 피가 섞여 옅은 선홍빛이 된 물이 발을 흠뻑 적셨다. 여전히, 마음만큼이나 물이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