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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체자레가 방문한 날부터 릴리스는 벽에 금을 그어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거칠거칠한 돌벽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작은 돌조각을 이용한 것이다. 고작해야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에 불과했지만 힘주어 그으면 제법 선명한 흰 줄이 생겼다.
시종도 방문객도 없는 날이 이어졌다. 간간이 순찰을 도는 기사들의 저벅이는 발소리가 선잠을 방해했으나. 그 외의 소음이라곤 아침을 성가시게 만드는 새들의 지저귐뿐이었다. 철저한 배척이었다.
“살이 조금 빠지셨습니다.”
아홉째 날. 덜덜 떨며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마친 릴리스는 담요를 두른 채 햇빛이 잘 드는 책상 옆의 빈 공간에 몸을 욱여넣었다. 그러고는 잠깐 졸았을까. 그녀는 기대하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고 일어나 둥그렇게 눈을 떴다. 의외의 방문객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바이마르는 여상하게 물었다. 흡사 아테라에서 주고받던 안부 인사 같기도 했다. 그는 대답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일어서는 릴리스를 무감정한 눈으로 살피다 이내 붙박이 책상에 기대어 섰다.
“스파티움은 아테라보다 기온이 낮지요. 본래 추위를 많이 타는 분이시니 밤이 조금 고되시겠습니다.”
“조금 그렇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물론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바이마르는 사견을 덧붙이지 않고 그저 방 안을 휙 둘러보았다.
대대로 왕족을 가두어 온 곳이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처박혀 낮밤도 알지 못한 채 죽어 가는 다른 죄수들에 비한다면야 대단히 온건한 처사였으나, 실상 이 탑에서 죽어 나간 왕족들의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열 손가락을 다 동원해도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귀애하던 누이가 이런 곳에 짐을 풀었으니 황제 폐하께서도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다. 바이마르는 손끝으로 그 색을 찍어 내려는 듯 장갑 낀 손을 위로 죽 뻗었다. 아테라에서는 이렇듯 그를 살펴볼 일이 없었으므로, 릴리스에게 그것은 다소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어두운 남청색의 두터운 가죽 망토가 얹혀 있었다. 끈을 당겨 길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실용성이 뛰어났다. 끼고 있는 장갑은 빛바랜 고동색이었고, 튼튼해 보이는 부츠는 눈밭을 굴러도 끄떡없을 것처럼 투박하고 커다랬다.
아테라에서는 겨울이라도 이처럼 두꺼운 옷을 입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비단 옷 때문만은 아닐 것이리라. 릴리스는 잠시 그렇게 선 채로 넋을 놓았다.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으셨겠지요.”
추위에 둔해진 머리는 반응이 더뎠다. 릴리스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푸른색 눈동자를 보며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바이마르가 하하, 짧게 웃었다. 이를 드러내는 웃음이었으나 그다지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형님과 많이 닮으셨습니다.”
그 모습에 무심코 말이 튀어 나갔다. 바이마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선이 굵지는 않으나 턱이 각지고 코가 높아 남성다운 면모가 있는 얼굴이었다.
“형님과 말입니까?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군요. 저는 형님과는 달리 유약하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라.”
“……웃는 모습이 닮아 그리 생각했나 봅니다.”
“형님이 웃으셨습니까?”
이곳에서? 바이마르의 눈동자가 생략된 뒷말을 대신했다. 릴리스는 설핏 어깨를 으쓱했다. 감정의 종류를 분류하긴 어려웠으나, 어쨌든 웃음이기는 했던 것이다. 바이마르는 잠시 그녀를 보다 뻗었던 팔을 거둬들이고 앞으로 흘러내린 망토를 걷어 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그 행동의 주체가 제국의 황제씩이나 되는 자라면야 더더욱.”
릴리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은 뒤에야 그가 아까 그녀가 했던 말에 대한 답을 했음을 깨달았다. 푸른 눈이 탐색하듯 번득였다. 그는 마치, 그녀의 얼굴에서 무엇이라도 읽어 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눈두덩이 다시 뜨거워졌다.
“……이유가 있으셨을 겁니다.”
릴리스는 떨지 않고 말하려 애썼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이유가…….”
그럼에도, 그녀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다시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주 작고, 아까보다 한층 더 초라하게 들렸다.
“아테라에서의 삶이 당신에게 끔찍했단 건 압니다. 제 탓이에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결코 이렇게 되길 바라지 않으셨을 겁니다. 분명…….”
허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스파티움으로 향하는 짧지 않은 여정 내내, 릴리스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 웅크리고 앉아 다정했던 황제의 기만을 곱씹었다. 부정과 분노, 수용과 절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더딘 감정은 종국에 그 애틋함의 부질없음을 비로소 깨닫고 그대로 무너졌다. 마치 벼락같은 충격이었다.
어쩌면, 마음 한편 어디에선가는 이미 의심의 싹이 들썩이며 움을 틔우고 있었으리라. 단지 깨닫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그의 다정함이 오로지 가치 있는 물건을 향해 베푸는 한 자락 온정이었음을.
릴리스는 채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점점이 검은 얼룩을 만들었다. 바이마르는 한참 그것을 내려다보다 긴 한숨을 뱉어 냈다. 시선을 들자 흰 목덜미가 눈앞에 바로 보였다. 어깨와 턱선 사이, 아직 덜 아문 상처 위로 거뭇한 딱지가 얹혀 있었다.
그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가는 목을 쓸어 보았다.
“왕자……?”
물기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가 의아한 듯 끝을 올리며 귓가를 스쳤으나 바이마르는 모른 척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뜨끈하고 보드라운 살결이 손바닥을 뭉근하게 간지럽혔다. 생경하고 뭉클하여 조금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한때는 이렇게 닿는 것을 꿈꾸었던 적도 있었다. 볼모처럼 끌려가 찾아오는 이도 없이 방에 갇혀 매일을 살아 내던 그때. 정원을 거니는 릴리스와 시녀들의 모습이 얼마나 부럽고 또 원망스러웠던지.
그는 실소하며 손을 거둬들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 얼굴이 그토록 미웠더랬다. 눈을 뜨면 스파티움이길 바라 마지않았던 수많은 밤들 사이에, 그녀에 대한 원망과 서러움이 켜켜이 쌓여 견고한 층을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마―
“……당신은, 당신의 무지 때문에 죽는 겁니다.”
바이마르는 그쯤에서 생각을 멈추었다. 어차피 더 이상 볼 일 없는 사람이 아닌가. 구태여 이런 결말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 이상 선처를 구하기에는 황제의 의사가 너무도 확고했다.
적국의 젊은 왕은 황녀를 언급하는 그의 제안에 다소 유감을 표하면서도, 반절의 독립 보장에 만족하여 결국 협정서 아래 제 서명을 적어 넣었다. 어차피 피를 흩뿌려 얻어 낼 종전이라면 셋보단 둘이, 둘보단 하나가 낫지 않겠느냐는 무언의 합의였다. 그리고 물론, 이 비인도적인 결탁의 유일한 제물은 릴리스였다.
“그럼. 며칠 뒤에 뵙지요.”
그러나 모두 지난 일일 따름이었다. 바이마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수런거리는 듯도 했으나 그는 애써 그 감각을 무시한 채 철문을 밀었다.
처형일이 앞으로 열흘 뒤였다.
*
정오.
수도 폴리스의 중앙 광장은 모여든 사람들로 대단히 북적거렸다. 과장을 조금 보태, 스파티움 백성의 반 이상이 이곳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릴리스는 삐걱거리는 나무 수레에 실려 군중의 조롱 섞인 경멸을 받으며 공터 한가운데에 자리한 단상으로 옮겨졌다. 벌건 낯빛의 군중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향해 사나운 말들을 쏟아 냈다. 단상을 둥그렇게 둘러싼 병사들이 흥분한 얼굴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연달아 밀쳐 내며 힘겹게 제자리를 지켰다. 릴리스는 띄엄띄엄 귓가를 스치는 단어들을 곱씹으며 시선을 멀리 두었다.
아테라는 스파티움의 오랜 적이다. 남녀 모두 무예를 연마하고, 무력을 큰 가치로 두는 스파티움인들에게 속국으로서의 역사는 입에 담기조차 꺼려지는 치욕이었다. 서자라 한들 어쨌거나 왕족인 바이마르의 수치스러운 혼인 또한 그랬다.
그러한 시기에 새로운 왕이 된 체자레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패기 넘치는 젊은이였다. 그는 무엇보다 스파티움의 번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결정적으로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주창했다.
젊은 왕에 대한 스파티움인들의 충성이 과열되면서 아테라의 불안이 커졌음은 물론이었다. 스파티움의 영토였으며 아테라의 정복지였던 카리알이 최근 독립을 선언한 것 또한 이런 불안에 한 축을 담당했을 것이다.
릴리스는 시선을 조금 내려 성난 군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마음의 준비는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날 선 얼굴들을 마주하니 어쩔 수 없이 양손이 벌벌 떨렸다.
예거라트는 그녀의 죽음으로 저들의 불만과 성토를 누그러뜨릴 심산이었다. 대외적으로 쌓아 놓은 그녀에 대한 애정이 제법 견고했으니만큼, 실제 그 정도의 효과는 기대할 법도 했다.
릴리스는 멍하니 기사의 손에 이끌려 무릎을 꿇고 단두대 위로 하얀 목을 내밀었다. 밧줄이 단단히 매이고 머리칼이 거칠게 앞으로 쏟아졌다.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거친 손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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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자레가 방문한 날부터 릴리스는 벽에 금을 그어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거칠거칠한 돌벽에서 떨어져 나온 듯한 작은 돌조각을 이용한 것이다. 고작해야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에 불과했지만 힘주어 그으면 제법 선명한 흰 줄이 생겼다.
시종도 방문객도 없는 날이 이어졌다. 간간이 순찰을 도는 기사들의 저벅이는 발소리가 선잠을 방해했으나. 그 외의 소음이라곤 아침을 성가시게 만드는 새들의 지저귐뿐이었다. 철저한 배척이었다.
“살이 조금 빠지셨습니다.”
아홉째 날. 덜덜 떨며 일어나 고양이 세수를 마친 릴리스는 담요를 두른 채 햇빛이 잘 드는 책상 옆의 빈 공간에 몸을 욱여넣었다. 그러고는 잠깐 졸았을까. 그녀는 기대하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고 일어나 둥그렇게 눈을 떴다. 의외의 방문객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바이마르는 여상하게 물었다. 흡사 아테라에서 주고받던 안부 인사 같기도 했다. 그는 대답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일어서는 릴리스를 무감정한 눈으로 살피다 이내 붙박이 책상에 기대어 섰다.
“스파티움은 아테라보다 기온이 낮지요. 본래 추위를 많이 타는 분이시니 밤이 조금 고되시겠습니다.”
“조금 그렇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렇군요.”
물론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바이마르는 사견을 덧붙이지 않고 그저 방 안을 휙 둘러보았다.
대대로 왕족을 가두어 온 곳이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 감옥에 처박혀 낮밤도 알지 못한 채 죽어 가는 다른 죄수들에 비한다면야 대단히 온건한 처사였으나, 실상 이 탑에서 죽어 나간 왕족들의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열 손가락을 다 동원해도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귀애하던 누이가 이런 곳에 짐을 풀었으니 황제 폐하께서도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다. 바이마르는 손끝으로 그 색을 찍어 내려는 듯 장갑 낀 손을 위로 죽 뻗었다. 아테라에서는 이렇듯 그를 살펴볼 일이 없었으므로, 릴리스에게 그것은 다소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어두운 남청색의 두터운 가죽 망토가 얹혀 있었다. 끈을 당겨 길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실용성이 뛰어났다. 끼고 있는 장갑은 빛바랜 고동색이었고, 튼튼해 보이는 부츠는 눈밭을 굴러도 끄떡없을 것처럼 투박하고 커다랬다.
아테라에서는 겨울이라도 이처럼 두꺼운 옷을 입는 일이 드물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비단 옷 때문만은 아닐 것이리라. 릴리스는 잠시 그렇게 선 채로 넋을 놓았다.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으셨겠지요.”
추위에 둔해진 머리는 반응이 더뎠다. 릴리스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푸른색 눈동자를 보며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바이마르가 하하, 짧게 웃었다. 이를 드러내는 웃음이었으나 그다지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형님과 많이 닮으셨습니다.”
그 모습에 무심코 말이 튀어 나갔다. 바이마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선이 굵지는 않으나 턱이 각지고 코가 높아 남성다운 면모가 있는 얼굴이었다.
“형님과 말입니까?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군요. 저는 형님과는 달리 유약하게 생겼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라.”
“……웃는 모습이 닮아 그리 생각했나 봅니다.”
“형님이 웃으셨습니까?”
이곳에서? 바이마르의 눈동자가 생략된 뒷말을 대신했다. 릴리스는 설핏 어깨를 으쓱했다. 감정의 종류를 분류하긴 어려웠으나, 어쨌든 웃음이기는 했던 것이다. 바이마르는 잠시 그녀를 보다 뻗었던 팔을 거둬들이고 앞으로 흘러내린 망토를 걷어 냈다.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그 행동의 주체가 제국의 황제씩이나 되는 자라면야 더더욱.”
릴리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은 뒤에야 그가 아까 그녀가 했던 말에 대한 답을 했음을 깨달았다. 푸른 눈이 탐색하듯 번득였다. 그는 마치, 그녀의 얼굴에서 무엇이라도 읽어 내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눈두덩이 다시 뜨거워졌다.
“……이유가 있으셨을 겁니다.”
릴리스는 떨지 않고 말하려 애썼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분명 이유가…….”
그럼에도, 그녀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다시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아주 작고, 아까보다 한층 더 초라하게 들렸다.
“아테라에서의 삶이 당신에게 끔찍했단 건 압니다. 제 탓이에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폐하께서는 결코 이렇게 되길 바라지 않으셨을 겁니다. 분명…….”
허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스파티움으로 향하는 짧지 않은 여정 내내, 릴리스는 흔들리는 마차 안에 웅크리고 앉아 다정했던 황제의 기만을 곱씹었다. 부정과 분노, 수용과 절망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더딘 감정은 종국에 그 애틋함의 부질없음을 비로소 깨닫고 그대로 무너졌다. 마치 벼락같은 충격이었다.
어쩌면, 마음 한편 어디에선가는 이미 의심의 싹이 들썩이며 움을 틔우고 있었으리라. 단지 깨닫지 못했을 뿐인 것이다. 그의 다정함이 오로지 가치 있는 물건을 향해 베푸는 한 자락 온정이었음을.
릴리스는 채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점점이 검은 얼룩을 만들었다. 바이마르는 한참 그것을 내려다보다 긴 한숨을 뱉어 냈다. 시선을 들자 흰 목덜미가 눈앞에 바로 보였다. 어깨와 턱선 사이, 아직 덜 아문 상처 위로 거뭇한 딱지가 얹혀 있었다.
그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가는 목을 쓸어 보았다.
“왕자……?”
물기에 젖어 떨리는 목소리가 의아한 듯 끝을 올리며 귓가를 스쳤으나 바이마르는 모른 척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뜨끈하고 보드라운 살결이 손바닥을 뭉근하게 간지럽혔다. 생경하고 뭉클하여 조금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한때는 이렇게 닿는 것을 꿈꾸었던 적도 있었다. 볼모처럼 끌려가 찾아오는 이도 없이 방에 갇혀 매일을 살아 내던 그때. 정원을 거니는 릴리스와 시녀들의 모습이 얼마나 부럽고 또 원망스러웠던지.
그는 실소하며 손을 거둬들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 두셔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이 얼굴이 그토록 미웠더랬다. 눈을 뜨면 스파티움이길 바라 마지않았던 수많은 밤들 사이에, 그녀에 대한 원망과 서러움이 켜켜이 쌓여 견고한 층을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도, 아마―
“……당신은, 당신의 무지 때문에 죽는 겁니다.”
바이마르는 그쯤에서 생각을 멈추었다. 어차피 더 이상 볼 일 없는 사람이 아닌가. 구태여 이런 결말을 바랐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 이상 선처를 구하기에는 황제의 의사가 너무도 확고했다.
적국의 젊은 왕은 황녀를 언급하는 그의 제안에 다소 유감을 표하면서도, 반절의 독립 보장에 만족하여 결국 협정서 아래 제 서명을 적어 넣었다. 어차피 피를 흩뿌려 얻어 낼 종전이라면 셋보단 둘이, 둘보단 하나가 낫지 않겠느냐는 무언의 합의였다. 그리고 물론, 이 비인도적인 결탁의 유일한 제물은 릴리스였다.
“그럼. 며칠 뒤에 뵙지요.”
그러나 모두 지난 일일 따름이었다. 바이마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수런거리는 듯도 했으나 그는 애써 그 감각을 무시한 채 철문을 밀었다.
처형일이 앞으로 열흘 뒤였다.
*
정오.
수도 폴리스의 중앙 광장은 모여든 사람들로 대단히 북적거렸다. 과장을 조금 보태, 스파티움 백성의 반 이상이 이곳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릴리스는 삐걱거리는 나무 수레에 실려 군중의 조롱 섞인 경멸을 받으며 공터 한가운데에 자리한 단상으로 옮겨졌다. 벌건 낯빛의 군중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향해 사나운 말들을 쏟아 냈다. 단상을 둥그렇게 둘러싼 병사들이 흥분한 얼굴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연달아 밀쳐 내며 힘겹게 제자리를 지켰다. 릴리스는 띄엄띄엄 귓가를 스치는 단어들을 곱씹으며 시선을 멀리 두었다.
아테라는 스파티움의 오랜 적이다. 남녀 모두 무예를 연마하고, 무력을 큰 가치로 두는 스파티움인들에게 속국으로서의 역사는 입에 담기조차 꺼려지는 치욕이었다. 서자라 한들 어쨌거나 왕족인 바이마르의 수치스러운 혼인 또한 그랬다.
그러한 시기에 새로운 왕이 된 체자레는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패기 넘치는 젊은이였다. 그는 무엇보다 스파티움의 번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결정적으로 나라의 완전한 독립을 주창했다.
젊은 왕에 대한 스파티움인들의 충성이 과열되면서 아테라의 불안이 커졌음은 물론이었다. 스파티움의 영토였으며 아테라의 정복지였던 카리알이 최근 독립을 선언한 것 또한 이런 불안에 한 축을 담당했을 것이다.
릴리스는 시선을 조금 내려 성난 군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마음의 준비는 전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날 선 얼굴들을 마주하니 어쩔 수 없이 양손이 벌벌 떨렸다.
예거라트는 그녀의 죽음으로 저들의 불만과 성토를 누그러뜨릴 심산이었다. 대외적으로 쌓아 놓은 그녀에 대한 애정이 제법 견고했으니만큼, 실제 그 정도의 효과는 기대할 법도 했다.
릴리스는 멍하니 기사의 손에 이끌려 무릎을 꿇고 단두대 위로 하얀 목을 내밀었다. 밧줄이 단단히 매이고 머리칼이 거칠게 앞으로 쏟아졌다.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거친 손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