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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형을 집행하라.”
삽시간에 고요해진 군중들의 귀에 짤막한 한마디가 박혀 들었다. 형식적인 애도조차 없었다. 릴리스는 고개를 조금 틀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체자레를 보았다. 여전히 강건하며 사납고 오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드레스를 입은 채 허리춤에 검을 매단 키가 큰 여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친 듯도 했다. 여자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오른손으로 체자레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 그의 시선을 끌었다. 고개를 튼 체자레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 손을 끌어당겨 장갑 위에 입을 맞추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과 그보다 조금 진한 고동색 눈동자.
그 광경을 살피던 릴리스는 문득, 여자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자그마한 은빛 관을 발견했다. 어쩐지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로 이제는 어렴풋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귀걸이, 반지, 목걸이와 허리 장식, 그리고―
‘……비의 관인가.’
바이마르가 가져온 스파티움의 예물 중 분명 비슷한 것이 있었다. 세공이 워낙 정교해 한동안은 제법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더랬다. 릴리스는 여자의 관 정가운데에 박혀 있는 샛노란 호박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햇빛을 그대로 담아낸 듯 깨끗하고 화사한 빛깔이었다.
‘어쩌면 나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묘한 기분에 가슴께가 울렁거렸다.
“형을 집행하라 하신다!”
이내 걸걸한 목소리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에 응답하듯 함성 소리가 성난 파도처럼 와르르 밀려들었다. 등줄기로 섬뜩한 감각이 내달렸다. 릴리스는 긴장하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치떠 앞을 노려보았다.
야트막한 단 위에는 흑색의 커다란 옥좌가 놓여 있었다. 중앙에 자리한 체자레의 오른편엔 바이마르가 앉아 그녀를 응시했다. 종종 예쁘다고 생각했던 푸른빛 눈동자가 쨍한 정오의 햇살을 그대로 받아 마치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높이 솟아오른 날붙이가 빛 아래에서 번뜩이는 찰나, 사지가 찌르르 저려 오는가 싶더니 천천히 시야가 기울어졌다. 불이 꺼지듯 가물거리는 풍경 너머에 새파란 눈이 있었다.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감한 색이었다. 릴리스는 그 안에서 동정이나 미련, 측은함과 이해 같은 어떤 다정하고 따스한 것들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점멸하는 의식으론 어떤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얼음 호수 같던 냉한 눈동자 속에 황금빛 햇살이 한 줄기 비쳐 들었다. 희미한 무언가가 설핏 떠올라 수면 위를 아스라이 배회하고 있었다. 릴리스는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이후로는 그저 암전이었다.
세베력 123년 봄.
아테라의 황녀 릴리스 반 모라 아테라가
스파티움의 테베 광장에서 처형당하다.
#-1부-
#1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시선이 닿은 곳에 익숙한 그물 무늬의 천장이 보였다. 그 옆의 섬세한 몰딩과 은실로 수를 놓은 부드러운 실크 벽지, 반투명한 휘장을 둘러놓은 침대와 휘장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화려하지 않은 가구들이 스멀스멀 윤곽을 드러내며 천천히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푹신푹신해 보이는 회색빛 러그와 연하늘색 바닥까지 전부 눈에 담았을 때, 릴리스는 퍼뜩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아테라에 있는 그녀의 방과 꼭 같은 모습이었다. 덮고 있는 이불 위로 일렁일렁 빛 그림자가 졌다. 무심코 그 빛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던 릴리스는 하얀 장미목으로 마감한 커다란 발코니 창 너머로 들이치는 여명을 보며 잠시간 넋을 잃었다.
그녀는 한동안 눈을 껌뻑이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문득 손끝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머리꼭지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늘어진 머리칼을 걷어 내고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목덜미를 확인했다. 희미하지만 기다란 흉터가 살갗 위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체자레의 검이 닿았던 곳이다.
죽은 게 아니었던가.
릴리스는 황망한 기분으로 양팔을 늘어뜨렸다. 정오의 태양빛 아래 날이 번뜩였고, 인식할 새도 없이 몸이 허물어졌다. 끔찍한 감각이었으나 그만큼 생생했다.
“마마, 오늘은 이만 일어나시…… 어머나, 벌써 기다리고 계셨네요.”
두 번쯤 숨을 몰아쉬었을 무렵,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희끗한 갈색 머리를 말끔하게 묶어 넘긴 중년의 여인이 방 안으로 살포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개비였다.
“전 마마께서 분명 주무시고 계실 거라 생각했지 뭐예요. 안 그런 척하시더니……. 역시 오늘 열리는 대회가 궁금하셨던 것이 맞지요?”
황녀궁의 시녀장이자 연륜 있는 유모인 그녀는 오랜 세월 릴리스를 돌봐 온 몇 안 되는 측근이었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의 등장에 릴리스의 얼굴이 당혹으로 굳어졌다.
“저도 실은 어제부터 가슴이 좀 떨렸답니다. 아드람 자작이라면 그 얼굴로 이미 지방에서부터 유명세를 떨친 사람이잖아요? 유부남이라는 게 좀 아쉽기는 하지만 뭐, 마창 솜씨가 그렇게 빼어나다고들 하니 폐하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도 하죠. 워낙에 인재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시잖아요.”
개비는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다의 물꼬를 틀어 놓은 채로 연신 분주히 방을 오갔다. 촤르륵. 조잘대는 목소리에 박자를 맞추듯 두터운 커튼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열을 맞추어 들어온 시녀들이 향유와 손수건, 미지근한 물이 담긴 대야와 잘 다진 꽃잎들을 탁자 위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릴리스는 따끈한 수건이 팔다리를 문지르고, 향유를 묻힌 부드러운 손길이 손발을 누르는 감각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두 눈을 깜빡였다.
“어제 시녀 애들도 그 얘기로 한참을 떠들어 대었답니다. 늦게까지 도통 자질 않아서 결국 제가 자정 전에 한 바퀴를 더 돌아야 했지 뭐예요. 나, 참. 그래 봐야 결국 손도 못 댈 접시일 뿐인데. 그렇지 않니, 알레나?”
걷어 낸 커튼을 고정시켜 놓은 개비가 이내 조금 들뜬 낯으로 오늘 입을 옷가지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한 아침이었다.
수석 시녀 알레나가 푹신한 실내화 한 쌍을 침대 아래 사뿐히 놓아두었다. 릴리스는 뻗어 나온 손들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일어나 커다란 거울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온 알레나가 입술을 비죽이며 커다란 빗을 집어 들었다.
“아이, 참.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떻게 해요. 내로라하는 영애들께서도 그분만 나타나시면 얼굴을 붉히신다고 들었는데, 저희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어요?”
“아니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고?”
“어쩜, 구경보다 더한 걸 바랄 수 있을 리가 있나요. 먼발치서 어떻게 얼굴만이라도 한번 볼 수 있을까 기대하는 것뿐이지요. 시녀장님도 참. 꼭 다 아시면서 그러신다니까요.”
그렇지? 하는 충동질에 꺄르르― 청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늘어뜨린 머리를 꼼꼼하게 위로 틀어 올리고 나자 누군가 그녀를 일으켜 욕실로 안내했다. 욕조 안에 가득 찬 뜨거운 물이 모락모락 흰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릴리스는 평평한 턱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시녀들의 익숙한 면면을 훑었다.
“헌데 마마, 오늘따라 유독 말이 없으시네요?”
커다란 거품 망에 비누를 문지르던 개비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미워한 만큼 그리워했던 눈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릴리스는 다급히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울컥울컥 새어 나온 눈물이 닦을 새도 없이 두 볼을 흠뻑 적셨다.
난데없는 울음에 퍽 당황한 듯 허둥거리던 개비가 조심스럽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치 빠른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욕실을 빠져나가며 문을 닫았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욕실 안에 선명했다.
“혹 제가 모르는 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마마? 아니라면 어젯밤 나쁜 꿈을 꾸셨나.”
꿈.
릴리스는 그 천진한 말에 그만 홀로 조금 웃어 버렸다. 차라리 그랬다면 기꺼웠으련만.
그러나 웃음도 잠시, 곧 다시 퐁퐁 솟아난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바구니를 뒤져 부드러운 손수건을 하나 꺼내 온 개비가 연신 손을 놀려 젖은 눈가를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잠투정도 잘 안 하시던 분이 오늘은 왜 이리 서럽게 우실까…….”
“……개비.”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그녀를 달래 주던 친숙한 목소리였다. 릴리스는 습관처럼 곁에 선 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대답과 함께, 거칠고 따끈한 손이 젖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릴리스는 잠시 그 온기에 취해 옛일을 되짚었다.
열 살 생일을 며칠 앞두었던 어느 겨울날.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수도에 발을 디뎠다. 선황제가 일찍 타계한 양친 대신 그녀의 신변을 거두겠다 공표한 이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어미가 선황제의 먼 친척 누이들 중 하나였으므로, 릴리스는 이를테면 그의 먼 조카뻘인 셈이 되었다. 친하다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사이임이 분명했음에도, 선황제는 동기며 혈육을 죄 죽이고 제위에 오른 이답지 않게 그녀를 제법 살뜰하게 챙겨 모두의 놀람을 자아냈다.
황녀라는 직위와 더불어 하사받은 드넓은 별궁 또한 공공연한 총애의 일환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연회 때마다 빼놓지 않고 마련되는 황제 옆의 빈자리는 위태롭던 릴리스의 위치를 금세 공고히 만들었다. 보란 듯 아낌을 과시하는 태도에 귀족들의 반발도 적지만은 않았으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해 두더지가 제 구멍에 몸을 숨기듯 자취를 감추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황태자인 예거라트조차 아비를 거스르지 않는데, 감히 누가 더 나서 그것을 부정한단 말인가.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마.’
개비는 그로부터 2년 뒤, 선황제가 서거하며 제위를 이어받은 예거라트의 명을 받아 시녀장으로서 황녀궁에 첫발을 들였다.
하루아침에 죄 바뀐 사용인들의 면면에 한껏 움츠러들어 있던 어린 황녀는 새 유모의 살뜰한 보살핌에 빠르게 길들여졌다. 선황의 급사로 혼란했던 정국이 차츰 안정되어 감에 따라, 세간은 황제의 너그러운 면모에 박수와 환호를 함께 보내며 두 사람의 우애를 칭송했다. 언뜻 보기엔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다.
‘마마. 내 예쁜 마마. 저를 용서하시어요.’
그러나 종국에 그녀의 등을 떠민 것 또한 그 다정한 손이 아니었던가.
릴리스는 연달아 떠오르는 기억에 속절없이 휩쓸렸다. 어둑했던 숲길과 시큼한 풀 내음, 울음을 참듯 떨리던 목소리와 서늘했던 밤공기.
마치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에 가슴이 못내 먹먹해졌다.
어쩌면 개비는 평생 그녀의 편이 아니었으리라. 아니, 실은 그 누구도 그녀의 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뒷배 없는 황녀가 가진 권력은 황제의 총애가 유일했으므로, 결국은 그 또한 허울 좋은 양날의 검에 불과했다. 손바닥 뒤집듯 쉬이 바뀔 수 있는 감정에 명예를 걸 만큼 멍청한 이들이 궁에 넘쳐 날 리 없었다.
선황제를 쏙 빼닮은 황제의 냉혹한 성정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한몫을 거들었다. 피바람을 일으키며 황위를 찬탈한 아비와, 그 아비를 죽이고 옥좌를 차지한 아들. 전자는 역사요, 후자는 의심에 불과했으나 어찌 되었건 부자가 휘두른 공포라는 권력은 모두를 손쉽게 그들의 발아래로 굴복시켰다.
그러나 곧 내쳐질 것이라는 세간의 기대와는 전혀 반대로, 예거라트는 황태자였던 시절과 다름없이 릴리스를 귀히 여겼다. 심지어는 그것을 드러내는 걸 즐기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새로 바뀐 사용인들은 황제의 눈과 귀가 되었고, 가뜩이나 드물던 방문객도 어느 순간 뚝 끊기며 그녀를 자연스레 고립시켰다. 그럼에도 행복하다 여겼던 것은 그 관심마저 애정이라 착각했던 탓이었다. 기쁜 마음에 허겁지겁 주워 먹었던 것이 도리어 독이 되어 돌아올 줄 그때 어찌 알았을까.
역시 모두가 행복한 결말은 없었다.
눈물이 멎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새 식어 버린 목욕물이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가슴 근처에서 찰랑거렸다.
릴리스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곤 양손으로 서툴게 얼굴을 훔쳤다. 그래도 탑에서의 나날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던지, 전보다는 감정을 숨기는 일에 퍽 능숙해졌다.
“형을 집행하라.”
삽시간에 고요해진 군중들의 귀에 짤막한 한마디가 박혀 들었다. 형식적인 애도조차 없었다. 릴리스는 고개를 조금 틀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체자레를 보았다. 여전히 강건하며 사납고 오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드레스를 입은 채 허리춤에 검을 매단 키가 큰 여자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서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친 듯도 했다. 여자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더니 오른손으로 체자레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 그의 시선을 끌었다. 고개를 튼 체자레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 손을 끌어당겨 장갑 위에 입을 맞추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과 그보다 조금 진한 고동색 눈동자.
그 광경을 살피던 릴리스는 문득, 여자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자그마한 은빛 관을 발견했다. 어쩐지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로 이제는 어렴풋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귀걸이, 반지, 목걸이와 허리 장식, 그리고―
‘……비의 관인가.’
바이마르가 가져온 스파티움의 예물 중 분명 비슷한 것이 있었다. 세공이 워낙 정교해 한동안은 제법 관심을 가지기도 했었더랬다. 릴리스는 여자의 관 정가운데에 박혀 있는 샛노란 호박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햇빛을 그대로 담아낸 듯 깨끗하고 화사한 빛깔이었다.
‘어쩌면 나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묘한 기분에 가슴께가 울렁거렸다.
“형을 집행하라 하신다!”
이내 걸걸한 목소리가 고함을 내질렀다. 그에 응답하듯 함성 소리가 성난 파도처럼 와르르 밀려들었다. 등줄기로 섬뜩한 감각이 내달렸다. 릴리스는 긴장하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치떠 앞을 노려보았다.
야트막한 단 위에는 흑색의 커다란 옥좌가 놓여 있었다. 중앙에 자리한 체자레의 오른편엔 바이마르가 앉아 그녀를 응시했다. 종종 예쁘다고 생각했던 푸른빛 눈동자가 쨍한 정오의 햇살을 그대로 받아 마치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높이 솟아오른 날붙이가 빛 아래에서 번뜩이는 찰나, 사지가 찌르르 저려 오는가 싶더니 천천히 시야가 기울어졌다. 불이 꺼지듯 가물거리는 풍경 너머에 새파란 눈이 있었다.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감한 색이었다. 릴리스는 그 안에서 동정이나 미련, 측은함과 이해 같은 어떤 다정하고 따스한 것들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점멸하는 의식으론 어떤 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주 잠시, 얼음 호수 같던 냉한 눈동자 속에 황금빛 햇살이 한 줄기 비쳐 들었다. 희미한 무언가가 설핏 떠올라 수면 위를 아스라이 배회하고 있었다. 릴리스는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이후로는 그저 암전이었다.
세베력 123년 봄.
아테라의 황녀 릴리스 반 모라 아테라가
스파티움의 테베 광장에서 처형당하다.
#-1부-
#1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시선이 닿은 곳에 익숙한 그물 무늬의 천장이 보였다. 그 옆의 섬세한 몰딩과 은실로 수를 놓은 부드러운 실크 벽지, 반투명한 휘장을 둘러놓은 침대와 휘장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화려하지 않은 가구들이 스멀스멀 윤곽을 드러내며 천천히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푹신푹신해 보이는 회색빛 러그와 연하늘색 바닥까지 전부 눈에 담았을 때, 릴리스는 퍼뜩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아테라에 있는 그녀의 방과 꼭 같은 모습이었다. 덮고 있는 이불 위로 일렁일렁 빛 그림자가 졌다. 무심코 그 빛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던 릴리스는 하얀 장미목으로 마감한 커다란 발코니 창 너머로 들이치는 여명을 보며 잠시간 넋을 잃었다.
그녀는 한동안 눈을 껌뻑이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문득 손끝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에 머리꼭지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늘어진 머리칼을 걷어 내고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목덜미를 확인했다. 희미하지만 기다란 흉터가 살갗 위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체자레의 검이 닿았던 곳이다.
죽은 게 아니었던가.
릴리스는 황망한 기분으로 양팔을 늘어뜨렸다. 정오의 태양빛 아래 날이 번뜩였고, 인식할 새도 없이 몸이 허물어졌다. 끔찍한 감각이었으나 그만큼 생생했다.
“마마, 오늘은 이만 일어나시…… 어머나, 벌써 기다리고 계셨네요.”
두 번쯤 숨을 몰아쉬었을 무렵,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희끗한 갈색 머리를 말끔하게 묶어 넘긴 중년의 여인이 방 안으로 살포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개비였다.
“전 마마께서 분명 주무시고 계실 거라 생각했지 뭐예요. 안 그런 척하시더니……. 역시 오늘 열리는 대회가 궁금하셨던 것이 맞지요?”
황녀궁의 시녀장이자 연륜 있는 유모인 그녀는 오랜 세월 릴리스를 돌봐 온 몇 안 되는 측근이었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의 등장에 릴리스의 얼굴이 당혹으로 굳어졌다.
“저도 실은 어제부터 가슴이 좀 떨렸답니다. 아드람 자작이라면 그 얼굴로 이미 지방에서부터 유명세를 떨친 사람이잖아요? 유부남이라는 게 좀 아쉽기는 하지만 뭐, 마창 솜씨가 그렇게 빼어나다고들 하니 폐하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도 하죠. 워낙에 인재 모으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시잖아요.”
개비는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다의 물꼬를 틀어 놓은 채로 연신 분주히 방을 오갔다. 촤르륵. 조잘대는 목소리에 박자를 맞추듯 두터운 커튼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열을 맞추어 들어온 시녀들이 향유와 손수건, 미지근한 물이 담긴 대야와 잘 다진 꽃잎들을 탁자 위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릴리스는 따끈한 수건이 팔다리를 문지르고, 향유를 묻힌 부드러운 손길이 손발을 누르는 감각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두 눈을 깜빡였다.
“어제 시녀 애들도 그 얘기로 한참을 떠들어 대었답니다. 늦게까지 도통 자질 않아서 결국 제가 자정 전에 한 바퀴를 더 돌아야 했지 뭐예요. 나, 참. 그래 봐야 결국 손도 못 댈 접시일 뿐인데. 그렇지 않니, 알레나?”
걷어 낸 커튼을 고정시켜 놓은 개비가 이내 조금 들뜬 낯으로 오늘 입을 옷가지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한 아침이었다.
수석 시녀 알레나가 푹신한 실내화 한 쌍을 침대 아래 사뿐히 놓아두었다. 릴리스는 뻗어 나온 손들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일어나 커다란 거울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등 뒤로 다가온 알레나가 입술을 비죽이며 커다란 빗을 집어 들었다.
“아이, 참.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떻게 해요. 내로라하는 영애들께서도 그분만 나타나시면 얼굴을 붉히신다고 들었는데, 저희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겠어요?”
“아니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고?”
“어쩜, 구경보다 더한 걸 바랄 수 있을 리가 있나요. 먼발치서 어떻게 얼굴만이라도 한번 볼 수 있을까 기대하는 것뿐이지요. 시녀장님도 참. 꼭 다 아시면서 그러신다니까요.”
그렇지? 하는 충동질에 꺄르르― 청량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늘어뜨린 머리를 꼼꼼하게 위로 틀어 올리고 나자 누군가 그녀를 일으켜 욕실로 안내했다. 욕조 안에 가득 찬 뜨거운 물이 모락모락 흰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릴리스는 평평한 턱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여전히 얼떨떨한 기분으로 시녀들의 익숙한 면면을 훑었다.
“헌데 마마, 오늘따라 유독 말이 없으시네요?”
커다란 거품 망에 비누를 문지르던 개비가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미워한 만큼 그리워했던 눈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릴리스는 다급히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울컥울컥 새어 나온 눈물이 닦을 새도 없이 두 볼을 흠뻑 적셨다.
난데없는 울음에 퍽 당황한 듯 허둥거리던 개비가 조심스럽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치 빠른 시녀들이 일사불란하게 욕실을 빠져나가며 문을 닫았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욕실 안에 선명했다.
“혹 제가 모르는 새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마마? 아니라면 어젯밤 나쁜 꿈을 꾸셨나.”
꿈.
릴리스는 그 천진한 말에 그만 홀로 조금 웃어 버렸다. 차라리 그랬다면 기꺼웠으련만.
그러나 웃음도 잠시, 곧 다시 퐁퐁 솟아난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다. 바구니를 뒤져 부드러운 손수건을 하나 꺼내 온 개비가 연신 손을 놀려 젖은 눈가를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잠투정도 잘 안 하시던 분이 오늘은 왜 이리 서럽게 우실까…….”
“……개비.”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그녀를 달래 주던 친숙한 목소리였다. 릴리스는 습관처럼 곁에 선 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대답과 함께, 거칠고 따끈한 손이 젖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릴리스는 잠시 그 온기에 취해 옛일을 되짚었다.
열 살 생일을 며칠 앞두었던 어느 겨울날.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수도에 발을 디뎠다. 선황제가 일찍 타계한 양친 대신 그녀의 신변을 거두겠다 공표한 이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어미가 선황제의 먼 친척 누이들 중 하나였으므로, 릴리스는 이를테면 그의 먼 조카뻘인 셈이 되었다. 친하다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 사이임이 분명했음에도, 선황제는 동기며 혈육을 죄 죽이고 제위에 오른 이답지 않게 그녀를 제법 살뜰하게 챙겨 모두의 놀람을 자아냈다.
황녀라는 직위와 더불어 하사받은 드넓은 별궁 또한 공공연한 총애의 일환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연회 때마다 빼놓지 않고 마련되는 황제 옆의 빈자리는 위태롭던 릴리스의 위치를 금세 공고히 만들었다. 보란 듯 아낌을 과시하는 태도에 귀족들의 반발도 적지만은 않았으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해 두더지가 제 구멍에 몸을 숨기듯 자취를 감추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황태자인 예거라트조차 아비를 거스르지 않는데, 감히 누가 더 나서 그것을 부정한단 말인가.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마.’
개비는 그로부터 2년 뒤, 선황제가 서거하며 제위를 이어받은 예거라트의 명을 받아 시녀장으로서 황녀궁에 첫발을 들였다.
하루아침에 죄 바뀐 사용인들의 면면에 한껏 움츠러들어 있던 어린 황녀는 새 유모의 살뜰한 보살핌에 빠르게 길들여졌다. 선황의 급사로 혼란했던 정국이 차츰 안정되어 감에 따라, 세간은 황제의 너그러운 면모에 박수와 환호를 함께 보내며 두 사람의 우애를 칭송했다. 언뜻 보기엔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다.
‘마마. 내 예쁜 마마. 저를 용서하시어요.’
그러나 종국에 그녀의 등을 떠민 것 또한 그 다정한 손이 아니었던가.
릴리스는 연달아 떠오르는 기억에 속절없이 휩쓸렸다. 어둑했던 숲길과 시큼한 풀 내음, 울음을 참듯 떨리던 목소리와 서늘했던 밤공기.
마치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에 가슴이 못내 먹먹해졌다.
어쩌면 개비는 평생 그녀의 편이 아니었으리라. 아니, 실은 그 누구도 그녀의 편은 아니었을 것이다. 뒷배 없는 황녀가 가진 권력은 황제의 총애가 유일했으므로, 결국은 그 또한 허울 좋은 양날의 검에 불과했다. 손바닥 뒤집듯 쉬이 바뀔 수 있는 감정에 명예를 걸 만큼 멍청한 이들이 궁에 넘쳐 날 리 없었다.
선황제를 쏙 빼닮은 황제의 냉혹한 성정 역시 그러한 분위기에 한몫을 거들었다. 피바람을 일으키며 황위를 찬탈한 아비와, 그 아비를 죽이고 옥좌를 차지한 아들. 전자는 역사요, 후자는 의심에 불과했으나 어찌 되었건 부자가 휘두른 공포라는 권력은 모두를 손쉽게 그들의 발아래로 굴복시켰다.
그러나 곧 내쳐질 것이라는 세간의 기대와는 전혀 반대로, 예거라트는 황태자였던 시절과 다름없이 릴리스를 귀히 여겼다. 심지어는 그것을 드러내는 걸 즐기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새로 바뀐 사용인들은 황제의 눈과 귀가 되었고, 가뜩이나 드물던 방문객도 어느 순간 뚝 끊기며 그녀를 자연스레 고립시켰다. 그럼에도 행복하다 여겼던 것은 그 관심마저 애정이라 착각했던 탓이었다. 기쁜 마음에 허겁지겁 주워 먹었던 것이 도리어 독이 되어 돌아올 줄 그때 어찌 알았을까.
역시 모두가 행복한 결말은 없었다.
눈물이 멎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새 식어 버린 목욕물이 미지근한 온기를 품고 가슴 근처에서 찰랑거렸다.
릴리스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곤 양손으로 서툴게 얼굴을 훔쳤다. 그래도 탑에서의 나날이 아주 헛된 것은 아니었던지, 전보다는 감정을 숨기는 일에 퍽 능숙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