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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오늘이…… 며칠이야?”
릴리스는 서둘러 말문을 텄다.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니 모래알을 삼킨 듯 목구멍이 까끌했다.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 릴리스의 어깨 위로 천천히 붓고 있던 개비가 그 물음에 고민도 없이 냉큼 답을 내놓았다.
“세베력 122년 2월이지요.”
“……122년.”
“예에. 2월 16일이요. 마창 시합 날이라고 그렇게들 떠들어 대었던 걸 벌써 잊으셨어요?”
“……그런가 봐.”
릴리스는 두 손을 조심스레 겹쳤다. 오목하게 팬 손바닥으로 식어 버린 물을 한가득 떠내어 얼굴의 열을 식히는 동안 다시 들어온 시녀들이 눈치를 살피며 맡은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다들 몸을 사리는 기색이었다.
평소였다면 어떻게든 개비를 설득해 대충 단장을 마쳤을 것이나, 어쩐지 오늘은 그런 재촉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치장하는 동안만큼은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으므로 릴리스는 나긋한 손길들 아래 드레스를 갖춰 입고, 볼과 입술에 연지를 찍어 바르는 일에 그녀답지 않게 무척 열을 올렸다. 풀어진 분위기에 마음이 놓였는지 시녀들도 조금씩 재잘대며 분위기를 띄웠다.
어깨 위로 제국의 문장이 수놓인 화려한 붉은색 망토가 얹혔다. 속이 훤히 비치는 레이스 장갑을 양손에 나눠 낀 뒤, 굽 낮은 구두를 골라 신고 일어서자 비로소 모든 준비가 끝났다. 릴리스는 발간 눈가를 장갑 낀 손으로 살짝 문지르며 방을 나섰다.
대회 장소는 서문 쪽에 있는 커다란 연무장이었다. 늦을까 싶어 몸이 단 개비가 걱정스러운 듯 연신 재촉을 해 댔으나 릴리스는 그 기색을 모른 체하며 길옆에 자리한 육각형의 분수를 한 바퀴 크게 돌았다.
웅장하고 화려한 아테라의 궁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미술품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수도 메트로의 반을 차지할 만큼 면적도 넓어, 사흘을 다 써도 전부 구경하기 힘들다는 소문이 온 대륙에 파다할 정도였다. 릴리스는 마치 처음 궁에 들었던 철모르는 어린 시절처럼 생경한 기분으로 정원을 거닐었다.
얼마간 걸었을까. 저 멀리 구름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릴리스는 잠시 멈춰 서 숨을 가다듬은 뒤 치맛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려 물이 고인 웅덩이를 넘었다.
봄의 초입에 열리는 마창 대회는 아테라의 여러 행사들 중에서도 제법 큰 축에 속하는 편이었다. 무예를 뽐낼 만한 일이 많지 않은 아테라의 특성상 이 기회를 틈타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영식들도 제법 되었다. 관중들 또한 분위기에 편승해 한껏 멋을 부리고 왔기에 관람석만 보고 있자면 마치 연무장이 아니라 댄스홀에 온 듯한 착각이 일기도 했다.
멀리서도 보이는 크고 흰 천막의 불투명한 가림막이 바람이 불 때마다 춤을 추듯 펄럭였다. 총 세 개의 천막 중 가운데는 황제와 릴리스의 것이었으며, 양옆으로 자리한 나머지 두 개의 천막은 참석한 귀족들을 위한 여분의 자리였다. 휑한 공터에 놓여 있는 수십 개의 의자들은 자작 이하의 귀족이나 더 낮은 신분의 참석자들을 위한 것이다. 대부분은 그곳에 앉는 대신 나무 그늘 아래 숨어 낮의 햇살을 피하곤 했지만 일단 대회가 시작되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온 자리가 금세 꽉 들어찼다.
“왔구나, 릴리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릴리스를 발견하곤 일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나서 그녀를 맞이한 것은 제국의 지고한 지배자이자, 하나뿐인 황녀의 다정한 보호자인 예거라트 황제였다. 그린 것마냥 흠 없이 다정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매달렸다. 릴리스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이번에야말로 황족으로서의 네 본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누이야.’
스파티움으로 그녀를 보낼 것임을 통보하던 그날 밤도 예거라트는 지금과 꼭 같은 웃음을 보이며 그녀에게 차를 권했다. 잘 재단된 무복을 입고 반듯하게 서 있는 황제의 얼굴 위로 그날의 잔상이 덧씌워졌다. 불쑥 현기증이 일었다.
“릴리스! 괜찮으냐?”
성큼 다가온 예거라트가 비틀거리는 몸을 든든히 받쳤다. 다정한 행동에 주변에서 작게 탄성이 흘렀다. 사이좋은 남매의 표본이라 할 법한 모습이었으나 릴리스는 도리어 그 목소리에 토기를 느끼곤 닿은 손을 다소 급하게 밀어 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의아한 시선이 그녀의 안색을 빤히 살폈다. 해명해야 한다. 릴리스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음에도 결국 그의 눈을 오래 마주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영 미심쩍은 기색이던 예거라트가 이내 다시 물었다.
“정말이더냐? 얼굴이 아직 창백해.”
“……어제 잠을 좀 설쳐 그런가 봅니다. 어쩐지 자꾸만 긴장이 되어서요.”
“하긴 네가 이런 자리에 자주 얼굴을 비치는 편은 아니었지.”
엄밀히 말한다면 ‘자주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터다. 그러나 릴리스는 속내를 숨긴 채 애써 평소처럼 소소한 투정을 부렸다.
“아시다시피 이런 자리에는 영 면역이 없는지라…… 오라버니 곁에만 계속 붙어 있을 테니 귀찮아도 이해해 주셔야 해요.”
“하하하, 물론이지. 딱 붙어 있어야 한다.”
변명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굳어 있던 얼굴을 완전히 풀어낸 예거라트가 마침내 의심의 기색을 거두고는 한쪽 팔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청했다. 릴리스는 그와 발을 맞추어 걸으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인사들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헌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눈이 부시구나. 혹여 누구 마음에 둔 자라도 있었던 것은 아니더냐?”
“그럴 리가요. 제게 누군들 오라버니만 하겠어요.”
목소리가 짐짓 은근해졌다. 자못 유쾌한 듯 눈까지 찡긋거리던 예거라트는 돌아온 답에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젊은 왕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시선이 몰렸다. 릴리스는 그의 눈길이 떨어진 틈을 타 땀에 젖은 손바닥을 가볍게 한 번 꽉 쥐었다 폈다.
천막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나자 곧 대회가 시작되었다. 시녀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아브람 자작은 기대에 부응하듯 한껏 멋을 낸 모습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여기저기서 작은 소란이 일었으나 경기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사위가 적막해졌다.
초반의 경기들은 늘 그러했듯 별다른 긴장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키가 큰 청년 둘이 환호성과 함께 말을 몰며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뿔피리 소리가 크게 울리고 말 두 마리가 각자 거세게 앞발을 박찼다.
실력이 엇비슷한지 한동안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오늘은 누가 이길 것 같으냐?”
무료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던 예거라트가 슬쩍 몸을 기울이며 말을 붙였다. 릴리스는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글쎄요. 일단 요번 경기는 로드릭 영식이 승기를 잡은 듯한데. 오라버니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모르는 새 보는 눈이 높아졌구나. 자, 보거라. 비욘 자작은 벌써 창을 놓쳤어.”
예거라트가 손뼉을 짝 치며 연무장을 가리켰다. 고함 소리, 야유 소리와 응원 소리가 시끄럽게 뒤섞인 가운데 심판이 자작의 실격패를 선언했다.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은 스벤 남작이었다. 비쩍 마른 몸과 창백한 얼굴이 유독 눈에 띄는 사내였는데, 유약한 이미지 때문인지 시작 전부터 그의 패배를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예거라트가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저치는 창보다는 펜이 어울릴 법하구나. 이번에도 로드릭 영식이 승리의 기쁨을 누릴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릴리스?”
예고도 없이 낯익은 장면들이 불쑥 떠올라 머릿속을 스쳤다.
이전 생에서의 스벤 남작은 등장 이후 연승을 거듭하며 끝내는 준우승을 거머쥐었던 숨겨진 실력자였다. 우승자인 옐림 영식마저 그와의 경기에서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뇌리에 생생했다.
우물쭈물하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거라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하하, 좋아! 내기를 하자꾸나. 내가 로드릭 영식에게 금화 열 닢을 걸 테니 너는 스벤 남작에게 금화 한 닢을 걸도록 해라. 누가 봐도 내가 손해이니 설마 싫다고는 하지 않겠지?”
농이라 한들 황제의 명이다. 손해 여부를 떠나 거부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예거라트를 놀리기라도 하듯, 스벤 남작은 뿔피리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창을 던져 영식이 탄 말의 숨통을 끊었다. 뜻밖의 결과에 흥분한 관중들이 연신 남작의 이름을 외쳤다. 예거라트는 진 것이 불쾌한 양 작게 혀를 차면서도 기분 좋은 얼굴로 릴리스에게 금화 한 주머니를 건넸다.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던 대회는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릴리스는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내리는 것으로 제 소임을 마치고는 조용히 물러나 자리를 지켰다. 분명 이날, 예거라트와 정원에서 식사를 같이했던 기억이 있었다.
수고한 참가자와 관중들을 위해 즉석에서 소소한 연회가 열렸다. 제철 과일과 푹 묵힌 꿀술 등 온갖 음식으로 가득한 쟁반들이 자리마다 넉넉하게 돌아갔다. 슬슬 저물기 시작하는 해를 배경으로 모두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예거라트는 퍽 흡족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포도주 한 병을 말끔히 비운 뒤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릴리스. 간만에 정원에서 저녁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날이 좋아 이대로 들어가기는 아쉬운 듯하구나.”
천막을 반쯤 걷고 나서던 예거라트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릴리스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었다. 우뚝 선 훤칠한 얼굴 뒤편으로 주홍빛 노을이 이글대는 것이 보였다.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요, 현실이라 한들 믿기 힘든 행운이었다.
“왜 그리 보는 것이야. 오늘은 내키지 않는 것이냐?”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예거라트의 양미간이 서서히, 그러나 확연하게 좁아 드는 것이 보였다. 릴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오라버니와의 식사라면 언제나 환영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 자, 함께 식당으로 가자꾸나.”
취기 덕일까. 예거라트는 그녀의 머뭇거림을 딱히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듯했다. 릴리스는 앞서가는 그를 따르며 쿵쾅대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눌렀다. 기억이 재연되는 것을 지켜보는 느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묘했다.
“오늘이…… 며칠이야?”
릴리스는 서둘러 말문을 텄다.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내려니 모래알을 삼킨 듯 목구멍이 까끌했다.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 릴리스의 어깨 위로 천천히 붓고 있던 개비가 그 물음에 고민도 없이 냉큼 답을 내놓았다.
“세베력 122년 2월이지요.”
“……122년.”
“예에. 2월 16일이요. 마창 시합 날이라고 그렇게들 떠들어 대었던 걸 벌써 잊으셨어요?”
“……그런가 봐.”
릴리스는 두 손을 조심스레 겹쳤다. 오목하게 팬 손바닥으로 식어 버린 물을 한가득 떠내어 얼굴의 열을 식히는 동안 다시 들어온 시녀들이 눈치를 살피며 맡은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가라앉은 분위기에 다들 몸을 사리는 기색이었다.
평소였다면 어떻게든 개비를 설득해 대충 단장을 마쳤을 것이나, 어쩐지 오늘은 그런 재촉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았다. 치장하는 동안만큼은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으므로 릴리스는 나긋한 손길들 아래 드레스를 갖춰 입고, 볼과 입술에 연지를 찍어 바르는 일에 그녀답지 않게 무척 열을 올렸다. 풀어진 분위기에 마음이 놓였는지 시녀들도 조금씩 재잘대며 분위기를 띄웠다.
어깨 위로 제국의 문장이 수놓인 화려한 붉은색 망토가 얹혔다. 속이 훤히 비치는 레이스 장갑을 양손에 나눠 낀 뒤, 굽 낮은 구두를 골라 신고 일어서자 비로소 모든 준비가 끝났다. 릴리스는 발간 눈가를 장갑 낀 손으로 살짝 문지르며 방을 나섰다.
대회 장소는 서문 쪽에 있는 커다란 연무장이었다. 늦을까 싶어 몸이 단 개비가 걱정스러운 듯 연신 재촉을 해 댔으나 릴리스는 그 기색을 모른 체하며 길옆에 자리한 육각형의 분수를 한 바퀴 크게 돌았다.
웅장하고 화려한 아테라의 궁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미술품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다. 수도 메트로의 반을 차지할 만큼 면적도 넓어, 사흘을 다 써도 전부 구경하기 힘들다는 소문이 온 대륙에 파다할 정도였다. 릴리스는 마치 처음 궁에 들었던 철모르는 어린 시절처럼 생경한 기분으로 정원을 거닐었다.
얼마간 걸었을까. 저 멀리 구름처럼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릴리스는 잠시 멈춰 서 숨을 가다듬은 뒤 치맛자락을 가볍게 들어 올려 물이 고인 웅덩이를 넘었다.
봄의 초입에 열리는 마창 대회는 아테라의 여러 행사들 중에서도 제법 큰 축에 속하는 편이었다. 무예를 뽐낼 만한 일이 많지 않은 아테라의 특성상 이 기회를 틈타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영식들도 제법 되었다. 관중들 또한 분위기에 편승해 한껏 멋을 부리고 왔기에 관람석만 보고 있자면 마치 연무장이 아니라 댄스홀에 온 듯한 착각이 일기도 했다.
멀리서도 보이는 크고 흰 천막의 불투명한 가림막이 바람이 불 때마다 춤을 추듯 펄럭였다. 총 세 개의 천막 중 가운데는 황제와 릴리스의 것이었으며, 양옆으로 자리한 나머지 두 개의 천막은 참석한 귀족들을 위한 여분의 자리였다. 휑한 공터에 놓여 있는 수십 개의 의자들은 자작 이하의 귀족이나 더 낮은 신분의 참석자들을 위한 것이다. 대부분은 그곳에 앉는 대신 나무 그늘 아래 숨어 낮의 햇살을 피하곤 했지만 일단 대회가 시작되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온 자리가 금세 꽉 들어찼다.
“왔구나, 릴리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이 릴리스를 발견하곤 일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나 누구보다 먼저 나서 그녀를 맞이한 것은 제국의 지고한 지배자이자, 하나뿐인 황녀의 다정한 보호자인 예거라트 황제였다. 그린 것마냥 흠 없이 다정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매달렸다. 릴리스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이번에야말로 황족으로서의 네 본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누이야.’
스파티움으로 그녀를 보낼 것임을 통보하던 그날 밤도 예거라트는 지금과 꼭 같은 웃음을 보이며 그녀에게 차를 권했다. 잘 재단된 무복을 입고 반듯하게 서 있는 황제의 얼굴 위로 그날의 잔상이 덧씌워졌다. 불쑥 현기증이 일었다.
“릴리스! 괜찮으냐?”
성큼 다가온 예거라트가 비틀거리는 몸을 든든히 받쳤다. 다정한 행동에 주변에서 작게 탄성이 흘렀다. 사이좋은 남매의 표본이라 할 법한 모습이었으나 릴리스는 도리어 그 목소리에 토기를 느끼곤 닿은 손을 다소 급하게 밀어 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의아한 시선이 그녀의 안색을 빤히 살폈다. 해명해야 한다. 릴리스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음에도 결국 그의 눈을 오래 마주 볼 수가 없어 시선을 돌려 버리고 말았다. 영 미심쩍은 기색이던 예거라트가 이내 다시 물었다.
“정말이더냐? 얼굴이 아직 창백해.”
“……어제 잠을 좀 설쳐 그런가 봅니다. 어쩐지 자꾸만 긴장이 되어서요.”
“하긴 네가 이런 자리에 자주 얼굴을 비치는 편은 아니었지.”
엄밀히 말한다면 ‘자주 나오지 못하게 막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터다. 그러나 릴리스는 속내를 숨긴 채 애써 평소처럼 소소한 투정을 부렸다.
“아시다시피 이런 자리에는 영 면역이 없는지라…… 오라버니 곁에만 계속 붙어 있을 테니 귀찮아도 이해해 주셔야 해요.”
“하하하, 물론이지. 딱 붙어 있어야 한다.”
변명이 퍽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굳어 있던 얼굴을 완전히 풀어낸 예거라트가 마침내 의심의 기색을 거두고는 한쪽 팔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청했다. 릴리스는 그와 발을 맞추어 걸으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인사들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헌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욱 눈이 부시구나. 혹여 누구 마음에 둔 자라도 있었던 것은 아니더냐?”
“그럴 리가요. 제게 누군들 오라버니만 하겠어요.”
목소리가 짐짓 은근해졌다. 자못 유쾌한 듯 눈까지 찡긋거리던 예거라트는 돌아온 답에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젊은 왕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시선이 몰렸다. 릴리스는 그의 눈길이 떨어진 틈을 타 땀에 젖은 손바닥을 가볍게 한 번 꽉 쥐었다 폈다.
천막 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나자 곧 대회가 시작되었다. 시녀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아브람 자작은 기대에 부응하듯 한껏 멋을 낸 모습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여기저기서 작은 소란이 일었으나 경기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사위가 적막해졌다.
초반의 경기들은 늘 그러했듯 별다른 긴장감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키가 큰 청년 둘이 환호성과 함께 말을 몰며 경기장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뿔피리 소리가 크게 울리고 말 두 마리가 각자 거세게 앞발을 박찼다.
실력이 엇비슷한지 한동안 지루한 공방이 이어졌다.
“오늘은 누가 이길 것 같으냐?”
무료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던 예거라트가 슬쩍 몸을 기울이며 말을 붙였다. 릴리스는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글쎄요. 일단 요번 경기는 로드릭 영식이 승기를 잡은 듯한데. 오라버니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모르는 새 보는 눈이 높아졌구나. 자, 보거라. 비욘 자작은 벌써 창을 놓쳤어.”
예거라트가 손뼉을 짝 치며 연무장을 가리켰다. 고함 소리, 야유 소리와 응원 소리가 시끄럽게 뒤섞인 가운데 심판이 자작의 실격패를 선언했다.
다음으로 등장한 사람은 스벤 남작이었다. 비쩍 마른 몸과 창백한 얼굴이 유독 눈에 띄는 사내였는데, 유약한 이미지 때문인지 시작 전부터 그의 패배를 당연시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예거라트가 목소리를 낮추어 다시 말을 걸어왔다.
“저치는 창보다는 펜이 어울릴 법하구나. 이번에도 로드릭 영식이 승리의 기쁨을 누릴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릴리스?”
예고도 없이 낯익은 장면들이 불쑥 떠올라 머릿속을 스쳤다.
이전 생에서의 스벤 남작은 등장 이후 연승을 거듭하며 끝내는 준우승을 거머쥐었던 숨겨진 실력자였다. 우승자인 옐림 영식마저 그와의 경기에서 초반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뇌리에 생생했다.
우물쭈물하는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예거라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짓궂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하하, 좋아! 내기를 하자꾸나. 내가 로드릭 영식에게 금화 열 닢을 걸 테니 너는 스벤 남작에게 금화 한 닢을 걸도록 해라. 누가 봐도 내가 손해이니 설마 싫다고는 하지 않겠지?”
농이라 한들 황제의 명이다. 손해 여부를 떠나 거부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 예거라트를 놀리기라도 하듯, 스벤 남작은 뿔피리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창을 던져 영식이 탄 말의 숨통을 끊었다. 뜻밖의 결과에 흥분한 관중들이 연신 남작의 이름을 외쳤다. 예거라트는 진 것이 불쾌한 양 작게 혀를 차면서도 기분 좋은 얼굴로 릴리스에게 금화 한 주머니를 건넸다.
흥미진진하게 이어지던 대회는 두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릴리스는 우승자에게 월계관을 내리는 것으로 제 소임을 마치고는 조용히 물러나 자리를 지켰다. 분명 이날, 예거라트와 정원에서 식사를 같이했던 기억이 있었다.
수고한 참가자와 관중들을 위해 즉석에서 소소한 연회가 열렸다. 제철 과일과 푹 묵힌 꿀술 등 온갖 음식으로 가득한 쟁반들이 자리마다 넉넉하게 돌아갔다. 슬슬 저물기 시작하는 해를 배경으로 모두가 먹고 마시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예거라트는 퍽 흡족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포도주 한 병을 말끔히 비운 뒤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릴리스. 간만에 정원에서 저녁을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날이 좋아 이대로 들어가기는 아쉬운 듯하구나.”
천막을 반쯤 걷고 나서던 예거라트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릴리스는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었다. 우뚝 선 훤칠한 얼굴 뒤편으로 주홍빛 노을이 이글대는 것이 보였다.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요, 현실이라 한들 믿기 힘든 행운이었다.
“왜 그리 보는 것이야. 오늘은 내키지 않는 것이냐?”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예거라트의 양미간이 서서히, 그러나 확연하게 좁아 드는 것이 보였다. 릴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오라버니와의 식사라면 언제나 환영이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 자, 함께 식당으로 가자꾸나.”
취기 덕일까. 예거라트는 그녀의 머뭇거림을 딱히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듯했다. 릴리스는 앞서가는 그를 따르며 쿵쾅대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눌렀다. 기억이 재연되는 것을 지켜보는 느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