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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식사는 금방 준비되었다. 릴리스는 울렁이는 속을 모른 척하며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뻣뻣하게 식기를 놀렸다. 너무 노력을 했는지 평소보다 잔뜩 먹어 버린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뼈만 잔뜩 남은 접시를 보며 예거라트가 작게 웃었다.

“네가 평소 오리고기 요리를 좋아한다는 건 알았다만……. 이렇게 한 마리를 통째로 발라 먹을 정도일 줄은 몰랐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구나.”

선황을 시해하고 제위에 올랐다는 흉흉한 소문이 뒤따르는 사람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의 상냥함이었다. 한때는 이 또한 황녀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여겼으나, 지금에 와선 무엇도 확신이 어려워 머릿속이 혼란했다.

다행스럽게도 불편한 식사 자리는 평소보다 일찍 파했다. 릴리스는 본궁으로 향하는 예거라트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곧 반대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황녀궁은 본궁과 다소 거리가 있었지만 그녀는 보통 마차를 타기보단 걷는 쪽을 택하는 편이었다.

그녀는 뒤따르는 이들을 대동한 채 천천히 걸어 황녀궁의 담벼락 앞에 섰다. 성인 남성의 어깨 높이 정도 될까 말까 한 황녀궁의 낮은 담벼락은 귀하다는 백돌로 만들어져 낮에는 새하얗게, 어둠 속에서는 희부옇게 빛나며 존재감을 뿜어냈다. 선황제가 본래 있던 담을 부수어 새로이 단장해 준 것이다.

“세상에. 꽃들이 완전히 개화했네요.”

백돌 담을 지나 왼편으로 방향을 틀자 곧 드넓은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황녀궁 정원에 그득 피어난 붉은 아마릴리스 위로 군청색 어둠이 내려앉아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개화한 꽃잎들 사이사이로 빼꼼 나온 수술이 샛노란 빛을 내며 별처럼 반짝였다. 정원에 나와 있던 시녀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그 광경에 감탄하는 동안 릴리스는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무심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곁에 있던 개비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뭔가 마음에 안 차시어요? 꽃은 썩 좋아하지 않으셔도 아마릴리스만큼은 매해 찾으셨잖아요.”

그랬었던가. 릴리스는 과거를 추억하다 이내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황녀궁의 아마릴리스 꽃밭은 이미 궁 내외에서 유명한 장소였으나, 기실 그녀는 꽃구경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너른 정원을 오롯이 아마릴리스로 그득 채워 놓았던 것은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을 위함이었다. 궁에 든 첫날. 꽃 한 송이를 내밀며 웃던 상냥한 환대가 어린 마음에 어찌나 기꺼웠던지.



‘꽃 이름이 네 이름과 꼭 같더구나.’



허나 돌이켜 보면 의미라고는 정말로 고작, 그뿐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아닐 거야.”

“예?”

개비가 고개를 갸웃했다. 릴리스는 물음에 답하는 대신 그녀를 재촉해 서둘러 정원을 지나쳤다.

“그런데…… 황녀 마마께서 오늘따라 이상하신 것 같지 않아? 뭔가 멍해 보이시기도 하고.”

“응…….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시던 아마릴리스인데. 오늘은 영 심드렁하시네.”

“꽃향기가 너무 진해 싫어지셨나?”

남겨진 시녀들이 조잘대며 귓속말을 나누었다. 작지 않은 목소리에 걸음이 느려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개비가 기어이 뒤돌아서 눈을 부라린 뒤에야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수다가 멈추었다.

릴리스는 그들의 행태를 모른 척하며 곁눈으로 흘긋 꽃밭을 스쳤다. 흐드러지게 핀 커다란 꽃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가자.”

그녀는 걸음을 더욱 빨리해 그곳을 지나쳤다. 오늘따라 유독 꽃향기가 역했다.



*



뜬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 날 아침. 릴리스는 밤새 했던 고민을 실천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예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원을 엎으시겠다뇨.”

차를 따르던 개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릴리스는 찻잔을 만지작대며 양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변명은 역시 변덕이었다.

“말 그대로야. 새 정원을 꾸미고 싶어졌거든.”

“허면 지금 피어 있는 꽃들은 어찌하시려구요? 한창 개화했는데. 며칠 전만 해도 제일 예쁠 때라고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머리를 매만지던 시녀 아이가 손에 향유를 듬뿍 덜어 곱게 빗질한 머리에 조심스레 펴 발랐다. 릴리스는 솜씨 좋게 땋아 올린 뒷머리 위에 손바닥만 한 나비 장식을 힘주어 꽂아 넣었다. 머리꼭지에서 팔랑이는 샛노란 날개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글쎄. 이젠 싫어졌나 보지.”

“그렇지만 폐하께서 아쉬워하실 텐데요. 아무 말씀 올리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어요?”

릴리스는 들고 있던 손거울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개비는 어느새 보석함에 코를 박을 듯 고개를 아래로 푹 수그린 채였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였으나 방 안의 어느 누구도 그 점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릴리스는 새삼 그 사실에 놀라 눈을 깜빡이다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물었다.

그녀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내 궁에 딸린 정원을 꾸미는 일에 폐하의 허락까지 필요한 거야?”

“그럴 리가요. 단지 폐하께서 아마릴리스를 심을 때 구근 선물을 잔뜩 보내 주셨으니 혹 서운하다 하실까 봐 그러는 것이지요.”

뱉고 보니 꼭 투정 같은 말이 되었다. 그사이 장신구를 몇 개 골라낸 개비가 그녀의 귓불 앞에 달랑이는 보석을 이것저것 대어 보며 의견을 물어 왔다. 릴리스는 개중 가장 단정해 보이는 오팔 귀걸이를 골라 귓불에 뭉툭한 침을 꽂았다.

“……결정을 바꾸지는 않을 거야. 게다가 어차피, 아마릴리스는 더 이상 심지 않을 생각이니까.”

“그렇게 하시어요.”

개비가 말했다. 틈도 없이 나온 답이다. 릴리스는 고개를 모로 틀었다. 그러나 눈앞의 거울이 시야를 가려 개비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자, 다 되었네요.”

잠시 뒤 거울이 스르륵 내려갔다. 의심이 무색하게도,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 그 너머에 있었다.



*



예거라트는 대략 보름에 한 번꼴로 릴리스와 오찬을 함께하곤 했다. 제위에 오른 뒤 거른 적 없는 오래된 습관이었다. 수요일 점심나절 황제의 위치를 모르는 이가 있다면 궁의 시종이라 부를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으니 그 꾸준함이야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래. 정원을 바꾸려 한다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더냐?”

예거라트가 고기를 썰며 물었다. 핏기가 비치는 것을 꺼려 하는 황제의 스테이크는 안까지 완전히 익어 두툼한 살이 온통 갈색이었다.

“별 뜻은 없답니다. 그저 분위기를 조금 바꿔 보고 싶어서요.”

릴리스는 마지막 남은 고기 조각을 육즙에 적시며 예거라트의 눈치를 살폈다. 개비에게 정원 이야기를 꺼낸 후로 이제 고작 이틀이 지났다. 아무리 ‘귀애하는 누이의 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한대도, 역시 지나치게 짧은 간격이었다.

“……오라버니께서 신경 쓰실 만큼 큰일은 아니니 걱정 마시어요. 바쁘실 텐데 괜한 심려를 끼친 것은 아닌지 걱정이네요.”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느냐. 네 궁이니 모쪼록 네가 원하는 대로 해야겠지.”

“감사해요. 아, 주셨던 꽃들은 다른 곳에 옮겨 심을까 하는데.”

“그래. 혹 필요한 게 더 있다면 사양 말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럼요. 릴리스는 부러 우물대며 대답했다. 실상 아마릴리스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 말하고 싶었으나 그 불만은 결국 고기 조각과 뒤섞여 목구멍 너머로 덩어리째 넘어갔다.

“응? 표정이 왜 그러한지 모르겠구나. 음식이 별로인가?”

그러나 그렇다 한들, 한 번의 죽음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뇨, 그것이…….”

릴리스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황제가 당황한 낯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한때는 저 걱정이 온전한 진심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이 고팠던 어린 시절의 철없음이 어쩐지 우습고 또 처량하게 느껴져 입맛이 썼다.

‘왜 몰랐을까.’

실은 어떻게 생각한들 다소 과한 보호였다. 예거라트는 황녀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늘 제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고, 과시하듯 먼저 나서 권력을 행사하길 꺼리지도 않았다. 포악하고 냉정하다 소문난 황제의 또 다른 면모였다.

황제의 포용력 있고 너그러운 의외의 모습에 사람들은 차츰차츰 감화되었다. 젊은 황제에 대한 칭송의 목소리가 역병을 밀어내는 축복처럼 빠르게 사방으로 퍼지는 동안, 그의 즉위를 둘러싼 험험한 소문들은 말라비틀어진 식물처럼 힘을 잃고 뒷골목의 그림자 안으로 숨어들었다.

어린 황녀는 세간의 소문에 손쉽게 휩쓸렸다. 아주 약간의 의구심이 남아 있긴 했으나, 어쨌건 릴리스는 점차 주어진 생활에 익숙해졌다. 그저 갑갑하게만 느껴졌던 예거라트의 ‘보호’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익숙해져 마치 아주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이런…….”

부모 없는 그녀를 친누이처럼 대해 주었던 예거라트다. 그토록 믿고 따랐던 상대가 웃으며 자신을 사지로 몰았다는 것이 다시 생각해도 서럽고 끔찍해 속이 뒤집어졌다.

울적한 기운을 풍기는 누이의 모습에 예거라트가 품속을 뒤져 지니고 있던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부드러운 천에서는 익숙한 향이 풍겼다. 어린 그녀를 끌어안아 줄 때,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 가까이 다가와 손을 잡아 줄 때, 그 순간마다 희미하게 맡아지던 묵직한 향이었다.

“혹, 달튼 백작 때문이더냐?”

잠시 뒤, 팔을 거둬들이던 예거라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백작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내 그 일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정원을 바꾼다니,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걱정했는데.”

릴리스는 구태여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달튼 백작이라. 까맣게 잊고 있던 사람이라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편 예거라트의 오해가 다행스러웠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찬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축였다.

“미안하다, 이 오라비가 무심했구나.”

달튼 백작은 선황제가 고르고 골라 붙여 준 그녀의 전 약혼자였다. 똑똑하고 상냥한 신진 학자로, 내색하진 않았으나 릴리스는 사실 그를 퍽 친근하게 여겼더랬다. 단명이 그의 유일한 흠이었으니 따져 보면 누구보다 황녀의 부군 자리에 가까웠던 이이기도 했다.

“아까운 인재였지. 불의의 사고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마는, 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퍽 속상해하셨을 게야.”

예거라트가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애도라 하기에는 다소 거친 언사였다.

“헌데 오늘따라 유독 말수가 적구나. 평소라면 분명 이쯤에서 나를 잔뜩 질책했을 텐데 말이지. 그렇지 않으냐?”

릴리스는 그 말에 호응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구역질이 왈칵 솟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농을 거는 모습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뻔뻔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곳은 황제궁이었다. 가뜩이나 오늘 여러 번 의심을 샀으니, 이 이상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면 분명 뒷일이 곤란해질 터다.

“…….”

그러나 입술은 딱 붙은 채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웃어 주기라도 해야 하는데. 억지 미소는 이미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속에서는 연신 신물이 솟구치고 있었다. 릴리스는 두어 번 더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포기하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 순간이야말로 악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