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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리지서連理之書
연리連理
① 여러 가지 이치를 논함 ②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 ③ 화목한 부부 또는 남녀 사이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 일러두기
본 글은 조선왕조실록의 일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실제 인물, 장소 및 사건과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점이 있다면 우연임을 밝힙니다.
1화
1부 명불허전名不虛傳
: 이름은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다
一. 명모호치明眸皓齒1)
1) 밝은 눈동자에 흰 이. 빼어난 미인을 뜻함
一
“잘들 논다.”
낮과 마찬가지로 환한 밤이었다.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무색하리만치 이곳저곳에 달린 등이 앞다투어 빛나고 오가는 사람들 또한 장터처럼 북적거렸다. 어디랄 것 없이 흘러나오는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호탕함을 꾸며 낸 목소리, 화려한 음률이 한데 어우러져 한성 기방 향월루香月樓 담장 안을 명성만큼이나 높이 채우고 있었다.
그 한 귀퉁이,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있는 희熙는 다시금 투덜거렸다.
“체, 누가 보면 그 난리가 정묘년이 아니라 임진년인 줄 알겠네. 어쩜 이리도 난장판이람.”
하긴 괜한 시비일지도 모른다. 고래로 웃전과 기방은 나라가 뒤집힌다 한들 함께 뒤집히지는 않는다 했다. 더욱이 지난 정묘년에 쳐들어온 여진(女眞, 후금)은 북에서 내려와 황주까지 밟았을 뿐, 한성까지는 오지 못하였기에 한 해가 지난 지금은 더욱 옛일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 그러나 지역과 관계없이 힘없는 이들에게는 같은 상처였고, 나아가고는 있으나 여전히 쓰라린 까닭에 희는 눈앞의 태평한 광경이 몹시 불편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그럴 만한 이유가 또 있었다. 초경初更이 다 되어 가면 누구라도 술이 불콰해져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라고 여겨 부러 이때를 점찍었는데, 이제 시작이라는 듯 술판은 더욱 요란해지고 악기의 목청은 높아만 가는 탓이었다. 명백한 시행착오였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희는 해시, 안 되면 삼경까지라도 버티기로 작심했다. 이 마당에 그깟 통금이 중요하리.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늘 아침 있었던 종사관 강수인姜修靭과의 대화가 스쳐 갔다.
“더는 관심 두지 말거라.”
“하오나, 나리!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면 하나도 놓치지 말라 하신 분이 나리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리고 또한 증거가 중요하다고도 일렀었지. 너의 그 의심이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증거는 있느냐?”
“그, 그건…….”
“희야, 그만 되었다. 입단속 주의하고 다른 곳으로나 그 총기를 돌려 보려무나. 애석하지만, 한성부 제일의 다모茶母가 필요한 사건은 어디건 널려 있으니.”
아버지뻘 되는 나이의 그가 드물게 칭찬까지 해 가며 타이른 그 뜻은 명백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대로 물러났던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말했어야 했나?
희는 몇 번째인지 모를 되물음을 곱씹었다. 증거는 있었다. 그것도 더없이 믿을 만한 놈으로. 하지만 그걸 어찌 알았느냐는 반문이 꼬리를 잇게 되면 종국엔 단端 오라버니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르니, 역시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목이 마르면 직접 우물을 파야 한다는 것.
이 고뇌와 고생의 시작은 바로 엿새 전 벌어진 잔혹한 살인 사건이었다.
이월 초나흘 인시 경, 공조정랑工曹正郞 김익현金翊賢이 방 안에서 수십 차례나 찔려 죽은 채 발견되었다. 범인은 금세 밝혀졌다. 그 옆에 사노 한석瀚石이 흉기인 낫으로 제 목을 찔러 자진한 상태로 함께 발견된 것이다.
사건은 별다른 의문 없이 한석의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지배층에 경각심을 일깨워, 암암리에 함구령이 내려진 와중에 귀를 가진 양반들은 너도나도 집안을 엄히 단속하고 식솔들이 본을 받을까 경계했다. 또한 살인과 거의 겹쳐 일어난 절도 행각을 두고 진실을 덮기 좋은 마침맞은 가리개로 기껍게 받아들였다.
당시 그 방 안에서 없어진 유일한 물건은 돈도 귀중품도 아닌, 도화서 화원인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였다.
그날 저녁까지는 그림을 담은 궤가 있었다는 증언에 따라 죽음 전후가 직시 되었다. 그리고 온통 피 칠을 한 방바닥에 밟힌 자국이 나 있지 않아 한석이 김익현을 죽이러 들어가기 전 도적의 손을 탄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오래전 상처喪妻하고 외동딸도 두어 달 전 죽어 혈혈단신인 그는 달리 가깝게 지낸 이가 없었고, 그림보다 값진 것들이 제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재물을 빼돌렸으리란 의심은 자연히 사그라졌다.
포도청은 그림을 찾기 위해 온 한성 바닥을 훑었고 모든 장사치를 조사했으나 그 도적과 그림의 행방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그림은 암시장으로 넘어간 것으로 결론이 났고, 김익현 살인 사건에 비해 소소한 일로 치부되어 수사는 종결되었다. 희는 그 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경험을 쌓으라는 수인의 배려로 현장과 주변 증언을 기록한 서책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의문을 가졌다.
살인과 절도가 하필 거의 같은 시각에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 과연 우연인가.
평소에는 덜렁대지만, 사건 앞에서는 하나하나 다 따져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였다. 물론 세상에는 형언하기 힘든 우연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안다. 또 살인 사건은 해결되었고 절도 사건 역시 피해자도 죽은 마당에 잊고 털어도 될 일이었다. 그래서 단지 확실히 하기 위해 그림이 암시장에 흘러간 것인지만 확인하려 했는데, 결코 그런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결국 타고난 성질대로 두 사건 모두 다시 따져 보기 시작했다. 그림이 암시장에 나오지 않았다면 훔쳐 간 자가 혼자 보관하고 있다는 뜻이라. 돈이 아니라 그 그림 자체를 노렸다면, 정녕 도적일까? 과연 한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
궁금증에 못 이겨 은밀하게 알아보던 희의 앞에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났다. 사건이 벌어진 그 시각, 김익현의 저邸와 대로가 이어지는 그 골목 어귀에서 수상한 자를 보았다는 증인이 있었다. 증인은 근방 과부댁과 눈이 맞아 다니러 가던 유생으로, 그런 사정 때문에 포졸들에게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가 사사로운 자리에서 추궁당하자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본 것을 털어놓았다. 그 인상착의와 사건 관계자를 맞춰 보자 누구의 수하인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종오품 종묘령宗廟令 채형蔡亨은 뇌물을 반기고 육욕을 즐기는 방탕한 자로 평판이 자자했다. 종묘령에 제수되기 전 간관諫官이었음에도 뇌물과 관련하여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을 때 결백을 주장하여 자리를 지켰지만 실상 믿는 이는 드물었다. 고인과는 알 사람은 다 아는 앙숙 관계였고, 서로 더 가진 것을 투기하였다 한다. 특히 김익현이 구한 연담의 그림으로 심기가 불편했다는 점은 귀 밝은 여종이 희의 구슬림에 넘어가 선선히 말해 주었다.
그러나 범인이 한석임은 분명했고 종묘령은 김익현이 죽을 당시에 기방에 있었음을 밝히기란 어렵지 않았다. 늘 데리고 다니는 수하 역시 함께였다.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한들 무관하지도 않으리라. 희는 종묘령을 조사하면 몰랐던 진실이 나타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마무리된 사건을 일개 다모의 확신만으로 재수사할 만큼 포도청은 한가한 곳이 아니었다.
즉 이제 남은 길은 포기하거나, 출처와 경로를 정당하게 밝힐 수 있는 다른 증거를 찾거나 두 가지인데 그런 경우라면 희에게는 갈림길이 아니라 외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종묘령이 금일 밤 일행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인다는 정보를 들어 기방에 잠입했다. 술로 인해 몸도 마음도 흐트러졌을 때 뭔가 하나라도 건지려는 목적으로.
한데 흐트러지기를 기다리려니 먼동이 틀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지도 모를 판이었다. 누굴 탓하리오. 희는 속으로 투덜대며 종묘령 일행의 방을 다시 돌아볼 요량으로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양반 한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주춤했지만 이미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희는 얌전히 비켜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희망과는 달리 양반은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고개 좀 들어 보거라.”
“예?”
“낯을 보이래도.”
희는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고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맞닥뜨리자마자 얼른 다시 숙였다. 양반이 물었다.
“뉘 몸종이더냐?”
“쇤네는 그저 부엌데기입니다요.”
“흐음. 그래?”
갑자기 커다란 손이 덥석, 희의 손목을 잡아챘다. 깜짝 놀란 그녀가 붙들린 팔에 힘을 주었다.
“어, 어찌 이러십니까?”
“잔말 말고 따라오너라. 잠시 볼일이 있느니라.”
희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볼일은 얼어 죽을, 이대로 끌려가면 으슥한 곳에서 험한 꼴을 당할 게 빤했다. 그녀는 팔을 더 세게 잡아당겼지만 꿈쩍하기는커녕 양반은 껄껄 웃었다.
“제법이로고. 겁먹지 말거라. 말을 잘 들으면 오히려 네겐 좋은 일이다.”
퍽이나!
“나리, 제발…… 놓아주셔요.”
연리連理
① 여러 가지 이치를 논함 ②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서 결이 서로 통한 것 ③ 화목한 부부 또는 남녀 사이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 일러두기
본 글은 조선왕조실록의 일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입니다. 실제 인물, 장소 및 사건과 유사하거나 일치하는 점이 있다면 우연임을 밝힙니다.
1화
1부 명불허전名不虛傳
: 이름은 헛되이 전해지지 않는다
一. 명모호치明眸皓齒1)
1) 밝은 눈동자에 흰 이. 빼어난 미인을 뜻함
一
“잘들 논다.”
낮과 마찬가지로 환한 밤이었다.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무색하리만치 이곳저곳에 달린 등이 앞다투어 빛나고 오가는 사람들 또한 장터처럼 북적거렸다. 어디랄 것 없이 흘러나오는 간드러진 웃음소리와 호탕함을 꾸며 낸 목소리, 화려한 음률이 한데 어우러져 한성 기방 향월루香月樓 담장 안을 명성만큼이나 높이 채우고 있었다.
그 한 귀퉁이,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아 있는 희熙는 다시금 투덜거렸다.
“체, 누가 보면 그 난리가 정묘년이 아니라 임진년인 줄 알겠네. 어쩜 이리도 난장판이람.”
하긴 괜한 시비일지도 모른다. 고래로 웃전과 기방은 나라가 뒤집힌다 한들 함께 뒤집히지는 않는다 했다. 더욱이 지난 정묘년에 쳐들어온 여진(女眞, 후금)은 북에서 내려와 황주까지 밟았을 뿐, 한성까지는 오지 못하였기에 한 해가 지난 지금은 더욱 옛일처럼 여겨질 법도 하다. 그러나 지역과 관계없이 힘없는 이들에게는 같은 상처였고, 나아가고는 있으나 여전히 쓰라린 까닭에 희는 눈앞의 태평한 광경이 몹시 불편했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그럴 만한 이유가 또 있었다. 초경初更이 다 되어 가면 누구라도 술이 불콰해져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라고 여겨 부러 이때를 점찍었는데, 이제 시작이라는 듯 술판은 더욱 요란해지고 악기의 목청은 높아만 가는 탓이었다. 명백한 시행착오였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 희는 해시, 안 되면 삼경까지라도 버티기로 작심했다. 이 마당에 그깟 통금이 중요하리.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늘 아침 있었던 종사관 강수인姜修靭과의 대화가 스쳐 갔다.
“더는 관심 두지 말거라.”
“하오나, 나리! 부자연스러운 것이라면 하나도 놓치지 말라 하신 분이 나리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리고 또한 증거가 중요하다고도 일렀었지. 너의 그 의심이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증거는 있느냐?”
“그, 그건…….”
“희야, 그만 되었다. 입단속 주의하고 다른 곳으로나 그 총기를 돌려 보려무나. 애석하지만, 한성부 제일의 다모茶母가 필요한 사건은 어디건 널려 있으니.”
아버지뻘 되는 나이의 그가 드물게 칭찬까지 해 가며 타이른 그 뜻은 명백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대로 물러났던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말했어야 했나?
희는 몇 번째인지 모를 되물음을 곱씹었다. 증거는 있었다. 그것도 더없이 믿을 만한 놈으로. 하지만 그걸 어찌 알았느냐는 반문이 꼬리를 잇게 되면 종국엔 단端 오라버니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르니, 역시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목이 마르면 직접 우물을 파야 한다는 것.
이 고뇌와 고생의 시작은 바로 엿새 전 벌어진 잔혹한 살인 사건이었다.
이월 초나흘 인시 경, 공조정랑工曹正郞 김익현金翊賢이 방 안에서 수십 차례나 찔려 죽은 채 발견되었다. 범인은 금세 밝혀졌다. 그 옆에 사노 한석瀚石이 흉기인 낫으로 제 목을 찔러 자진한 상태로 함께 발견된 것이다.
사건은 별다른 의문 없이 한석의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확정되었다. 이는 지배층에 경각심을 일깨워, 암암리에 함구령이 내려진 와중에 귀를 가진 양반들은 너도나도 집안을 엄히 단속하고 식솔들이 본을 받을까 경계했다. 또한 살인과 거의 겹쳐 일어난 절도 행각을 두고 진실을 덮기 좋은 마침맞은 가리개로 기껍게 받아들였다.
당시 그 방 안에서 없어진 유일한 물건은 돈도 귀중품도 아닌, 도화서 화원인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였다.
그날 저녁까지는 그림을 담은 궤가 있었다는 증언에 따라 죽음 전후가 직시 되었다. 그리고 온통 피 칠을 한 방바닥에 밟힌 자국이 나 있지 않아 한석이 김익현을 죽이러 들어가기 전 도적의 손을 탄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오래전 상처喪妻하고 외동딸도 두어 달 전 죽어 혈혈단신인 그는 달리 가깝게 지낸 이가 없었고, 그림보다 값진 것들이 제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재물을 빼돌렸으리란 의심은 자연히 사그라졌다.
포도청은 그림을 찾기 위해 온 한성 바닥을 훑었고 모든 장사치를 조사했으나 그 도적과 그림의 행방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그림은 암시장으로 넘어간 것으로 결론이 났고, 김익현 살인 사건에 비해 소소한 일로 치부되어 수사는 종결되었다. 희는 그 사건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경험을 쌓으라는 수인의 배려로 현장과 주변 증언을 기록한 서책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의문을 가졌다.
살인과 절도가 하필 거의 같은 시각에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 과연 우연인가.
평소에는 덜렁대지만, 사건 앞에서는 하나하나 다 따져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였다. 물론 세상에는 형언하기 힘든 우연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건 안다. 또 살인 사건은 해결되었고 절도 사건 역시 피해자도 죽은 마당에 잊고 털어도 될 일이었다. 그래서 단지 확실히 하기 위해 그림이 암시장에 흘러간 것인지만 확인하려 했는데, 결코 그런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결국 타고난 성질대로 두 사건 모두 다시 따져 보기 시작했다. 그림이 암시장에 나오지 않았다면 훔쳐 간 자가 혼자 보관하고 있다는 뜻이라. 돈이 아니라 그 그림 자체를 노렸다면, 정녕 도적일까? 과연 한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까?
궁금증에 못 이겨 은밀하게 알아보던 희의 앞에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났다. 사건이 벌어진 그 시각, 김익현의 저邸와 대로가 이어지는 그 골목 어귀에서 수상한 자를 보았다는 증인이 있었다. 증인은 근방 과부댁과 눈이 맞아 다니러 가던 유생으로, 그런 사정 때문에 포졸들에게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가 사사로운 자리에서 추궁당하자 비밀을 지킨다는 조건으로 본 것을 털어놓았다. 그 인상착의와 사건 관계자를 맞춰 보자 누구의 수하인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종오품 종묘령宗廟令 채형蔡亨은 뇌물을 반기고 육욕을 즐기는 방탕한 자로 평판이 자자했다. 종묘령에 제수되기 전 간관諫官이었음에도 뇌물과 관련하여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을 때 결백을 주장하여 자리를 지켰지만 실상 믿는 이는 드물었다. 고인과는 알 사람은 다 아는 앙숙 관계였고, 서로 더 가진 것을 투기하였다 한다. 특히 김익현이 구한 연담의 그림으로 심기가 불편했다는 점은 귀 밝은 여종이 희의 구슬림에 넘어가 선선히 말해 주었다.
그러나 범인이 한석임은 분명했고 종묘령은 김익현이 죽을 당시에 기방에 있었음을 밝히기란 어렵지 않았다. 늘 데리고 다니는 수하 역시 함께였다.
직접 나서지는 않았다 한들 무관하지도 않으리라. 희는 종묘령을 조사하면 몰랐던 진실이 나타날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마무리된 사건을 일개 다모의 확신만으로 재수사할 만큼 포도청은 한가한 곳이 아니었다.
즉 이제 남은 길은 포기하거나, 출처와 경로를 정당하게 밝힐 수 있는 다른 증거를 찾거나 두 가지인데 그런 경우라면 희에게는 갈림길이 아니라 외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종묘령이 금일 밤 일행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인다는 정보를 들어 기방에 잠입했다. 술로 인해 몸도 마음도 흐트러졌을 때 뭔가 하나라도 건지려는 목적으로.
한데 흐트러지기를 기다리려니 먼동이 틀 때까지 이러고 있어야 할지도 모를 판이었다. 누굴 탓하리오. 희는 속으로 투덜대며 종묘령 일행의 방을 다시 돌아볼 요량으로 몸을 일으켰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양반 한 명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주춤했지만 이미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희는 얌전히 비켜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그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희망과는 달리 양반은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고개 좀 들어 보거라.”
“예?”
“낯을 보이래도.”
희는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고 술기운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맞닥뜨리자마자 얼른 다시 숙였다. 양반이 물었다.
“뉘 몸종이더냐?”
“쇤네는 그저 부엌데기입니다요.”
“흐음. 그래?”
갑자기 커다란 손이 덥석, 희의 손목을 잡아챘다. 깜짝 놀란 그녀가 붙들린 팔에 힘을 주었다.
“어, 어찌 이러십니까?”
“잔말 말고 따라오너라. 잠시 볼일이 있느니라.”
희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볼일은 얼어 죽을, 이대로 끌려가면 으슥한 곳에서 험한 꼴을 당할 게 빤했다. 그녀는 팔을 더 세게 잡아당겼지만 꿈쩍하기는커녕 양반은 껄껄 웃었다.
“제법이로고. 겁먹지 말거라. 말을 잘 들으면 오히려 네겐 좋은 일이다.”
퍽이나!
“나리, 제발…… 놓아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