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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희는 애원하는 척 버티어 시간을 끌면서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소란스러운 곳과 떨어져 있어 충분히 한산하고 어두웠다. 혈도를 눌러서 기절시켜 구석에 처박아 둬도 다들 주사라 여길 게 분명했다. 본인이야 부엌데기에게 당했으니 떠들 리 만무하고. 잽싸게 계산을 끝낸 그녀가 상대와의 거리를 재면서 공격 지점을 결정한 바로 그때였다.
“향월루라. 그 이름 한번 기막히니 오늘에야 그것을 알았구나.”
툭 튀어나온 중얼거림이 태평하고 능청스럽기 짝이 없었다. 희는 흠칫했고, 양반도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냐?”
“이런, 실례를 범했습니다.”
짐짓 정중한 사과를 한 상대가 머무르던 그늘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제법 큰 키에 적당히 다부진 몸집을 지닌 훤칠한 사내였다. 계집 여럿 울렸을 법한 얼굴까지 더하여 그 외양은 상급이었으나, 망건에 두루마기뿐인 한량다운 차림새가 퍽 한심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저리도 잘난 체신이니 당연하려나. 하지만 희가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기척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자네, 그것이 무슨 소린가?”
양반의 표정이 껄끄러워졌다. 아는 사이는 분명한데,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사내가 유유히 말을 받았다.
“팔도 제일이라 칭하는 꽃밭을 두고도 한갓 잡초에 눈길을 주시니, 과연 향기로운 달香月이 눈물淚을 흘리는 격이다 싶어 그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어험!”
양반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최고급 기방에 와서 한낱 부엌데기에게 손을 뻗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날엔, 그럴 요량이면 굳이 거금 들일 것 없이 사비私婢나 돌아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 십상이다. 희를 잡은 손아귀가 은근슬쩍 풀렸고, 얼른 팔을 뺀 희가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사내가 점잖게 끼어들어 틈을 만들어 주었다.
“짧은 밤은 그 눈물 손수 닦아 주심에도 벅찰 터. 이만 들어가 보심이 어떠실는지요.”
“흠, 흠! ……그저 재미 삼아 희롱한 것을, 너무 주제넘게 나서는군.”
“물론 그러셨겠지요. 이놈 성미가 원체 참섭하기 좋아하니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시종일관 온화한 저자세로 응대하고는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 점이 오히려 상대를 골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희가 조심스럽게 번갈아 보는 동안 양반은 훈계조로 몇 마디 덧붙인 다음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무렵, 사내가 희를 돌아보았다. 그는 본인을 몰래 살피다가 눈이 마주치자 찔끔 피하는 그녀의 행동을 나름대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왜, 그래도 계집이라고 잡초라는 말이 듣기 싫었더냐?”
무슨 소리야?
그를 관찰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희는 그제야 기억을 되살리고 입을 삐죽거렸다. 놀리는 듯한 그의 말이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만든 셈이었다.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용서해라, 본심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저치를 돌려보내고자 허언한 것이다.”
스스럼없는 말은 꾸밈이 없었고 묻어난 웃음기로 폄하할 수 없는 진지함까지 엿보였다. 희는 괜스레 머뭇거리다가 일단 인사부터 해야겠다 싶어 꾸벅거렸다.
“저……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리.”
“흠. 내가 구한 건 네가 아니었을 터인데.”
그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슬쩍 들린 입술 한끝에 머문 짓궂은 웃음이 또렷했다.
“주위를 둘러보는 품이 제법 매섭더구나.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눈매였더랬지. 보신술이라도 배운 게냐? 간만에 재미난 구경 할까 싶어 기다리려다 저치가 가엾어 봐준 것이다.”
들켜 버렸나. 그녀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 우물거리자 그의 웃음이 커졌다.
“한데 너는 어찌 이곳까지 들어온 거지?”
“쇤네는, 부엌에서 일하는…….”
“글쎄 처음 보는 일손이니 묻고 있질 않으냐.”
마주치기 십상인 기생 몸종도 아닌 허드렛일 일손까지 전부 다 외우고 있다 이건가. 희는 어이가 없어졌다. 보다보다 이런 놈은 또 첨일세. 기방을 아주 제집 드나들듯 하나 보다. 흐트러진 매무새가 그녀의 추측을 더욱 뒷받침해 주었다. 혹 기부妓夫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옷감이 지나치게 좋긴 한데.
“뭘 그리 흘끔대는 게냐?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그의 핀잔에 희는 얼른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그러니까, 급하게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 오늘만 잠시 온 것이어요.”
“오늘만?”
“예.”
그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네 어미도 참 물색없구나. 정신 나간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 어린 여식을 보내?”
희가 울컥 반발했다.
“어리지 아니합니다. 또한 소녀가 오고자 고집부린 것이니 어미를 욕하지 마십시오!”
몰래 빠져나온 것이라 사실대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들키면 주걱으로 사정없이 맞을 것이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희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자니 물끄러미 보던 그는 난데없이 그녀의 이마 한가운데를 쿡 찔렀다.
“아야!”
“효녀 났군. 여기는 어리고 몸만 다 큰 것이 문제라는 게지. 제법 영리한 줄 알았더니.”
희는 이마를 문지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솔직한 표정에 피식거린 그는 옷자락을 헤치더니 무언가를 끌러 그녀의 다른 손에 쥐여 주었다.
“이만하면 사흘 치 품삯은 될 것이다. 이런 데서 얼쩡대지 말고 얼른 가거라. 곧 인경人定이 치면 오도 가도 못할 터이니.”
희의 눈이 커졌다. 소나무와 사슴이 곱게 새겨진 을乙자형 장도였다. 옥이나 비취가 아닌 목木장도였지만, 한눈에도 상등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보통 솜씨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사흘은 고사하고 열흘 치도 될 것 같다. 그녀는 더 생각하지 않고 장도를 내밀었다.
“도로 가져가십시오. 이리 귀한 물건을 천한 소녀에게 함부로 내어 주시다니, 그리 보이진 아니한데 술이 과하셨나 봅니다.”
“제대로 봤다, 취한 건 아니니까. 내 보기엔 네가 더 취한 듯싶구나. 귀한 줄 알면 냉큼 집어넣어야지. 지게미라도 제법 주워 먹은 게냐?”
“놀리지 마시고 어서 가져가셔요!”
“남의 손으로 건너간 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가져가서 팔아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여라.”
그가 손을 내젓자 소매가 가볍게 펄럭거렸다. 이 사람, 진심이다. 그것을 깨닫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대관절 연유가 무엇인지요? 소녀, 그저 하찮은 일손일 뿐이고, 나리를 오늘 처음 뵈오며, 앞으로도 다시 뵙기는 어려울 터인데.”
“모르겠느냐? 당연히 변덕이지.”
딱 자른 대답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기가 막혀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은 아니다. 정말로 그저 그러고 싶어서니까. 몰랐다면 모르되 일단 눈에 띈 이상, 험한 꼴 당할 수 있는 곳에 더는 두고 싶지 않구나.”
“…….”
“내 마음대로 내쫓는 마당에 손해는 안 보게 해 주어야지. 무어, 일 안 하고 삯을 받으니 간밤 꿈에 돼지라도 잡은 셈 치거라.”
“하오나, 이것은…….”
“거참, 말도 많구나. 입은 됐고 다리를 움직이란 말이다, 다리를.”
옥신각신하며 등을 떠밀리다 보니, 어느새 희는 뒷문 밖에 나와 있었다.
담장 너머는 여전히 음률과 웃음소리가 시끄러운 반면 곧 통금이 될 거리는 조용했다. 희는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고 손에 든 장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크게 저은 다음 몸을 돌려 기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무리 변덕이라고는 해도, 값진 장도 하나쯤은 적선하듯 줘 버릴 만큼 부유하다고는 해도, 이유 없는 친절은 부담스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더구나 본래 목표에는 아직 근처도 못 가 봤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쫓겨날 수는 없었다.
조금 전 그 자리로 가 봤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찾아서 돌려줘야 하나. 막막해서 한숨을 쉬던 그녀는 일단 일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종묘령 일행이 지금쯤 얼마나 퍼마셨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운이 좋다면 가는 길에 그가 있는 방도 찾아 장도를 살짝 놓아두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희는 장도를 품속에 집어넣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다른 술 취한 양반과 마주칠까 주변을 둘러보는 눈과 주의를 끌지 않는 움직임은 더욱 기민해졌다. 문득 부는 찬 바람에 그녀는 팔을 비비며 몸을 움츠렸다. 더 쓸데없는 일에 방해받지 말고 들을 거 후딱 듣고 돌아가면 참 좋으련만. 따뜻한 아랫목이 그립다. 희는 새삼 오지랖 넓은 자신이 한스러워졌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라, 하늘에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향월루는 한성, 아니 조선 최고 기방이란 명성에 걸맞게 매우 넓었다. 처음 왔을 때 일손인 척 ‘종묘령 나리’가 계신 곳을 확실히 알아 두었음에도 다시 찾아가려니 이 방이 그 방 같고 저 방도 그 방 같다. 낙담의 한숨을 삼킨 희는 몇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문제의 방을 찾았다. 작은 뜰에 있는 괴석 하나를 표식 삼아 맞모금으로 보이는 곳으로, 안에서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웃는 소리가 크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기다려 보기로 한 희가 뜰로 향한 창 아래에 쪼그리려던 참이었다.
“너,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게냐?”
엉거주춤한 자세로 흠칫 고개를 돌린 희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 벌써 낯익고 만, 장도의 주인이었다.
뭘 하려고 이리 돌아다니는 거야……라고 생각하다 말고, 희는 황급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태평한 그의 옷자락을 붙들면서 얼떨결에 손으로 입을 막아 버렸다. 얼른 둘러보자 주변의 다른 인기척은 없었고 등 뒤의 방에서는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이야기꽃이 한창 피고 있었다.
안도한 것도 잠시, 그녀는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사내는 순순히 잡혀 준 채로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 잡히는 비단만큼이나 다른 손바닥에 닿은 입술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뗐다.
“죄, 죄송합니다, 나리! 실은…… 아까 그 나리가 지나가시는 것 같아 잠시 숨었던 터라, 무심결에 그만…….”
그녀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면서 열심히 변명을 만들어 붙었다. 가만히 보기만 하던 그가 갑자기 몸을 굽혀 그녀를 향해 귀를 갖다 댔다.
“그래서야 들리는 것도 없구나. 다시 말해 보아라.”
은은한 등불 아래, 지척에서 보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얼굴이었다. 공연히 가슴이 뛰는 바람에 희는 재촉을 받고서야 조금 전의 변명을 다시 중얼거렸다. 그가 몸을 바로 했다.
“그리 두려우면 어찌 다시 들어온 게냐? 알아듣게 타일렀건만!”
엄한 꾸짖음이었지만 그녀의 사정에 맞춰 준 목소리는 매우 나직했다.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라, 희는 찔끔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니까…… 나리께 장도를 돌려드리려고요. 한데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허 참.”
희는 품에서 장도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천것을 헤아려 주신 그 마음은……”
“쉿!”
상황이 뒤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말과 입을 한 번에 막고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난데없이 팔 안에 가두어진 그녀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입을 꽉 막고 있어 숨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갑자기 왜 이래? 희가 눈을 들자 진지해진 그의 시선은 머리 위 창을 향해 있었다. 그제야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가 그녀의 귀에도 와 닿았다.
“……었는데 참말인가, 청전菁全?”
“연담의 <설경산수도>? 그것이 무어 볼만하다고 위작까지 구했나?”
“그러게. 사람 참, 더 보태어 차라리 허주虛舟의 위작을 구할 일이지.”
각자 한마디씩 던진 말을 듣고만 있던 쪽이 입을 열었다.
희는 애원하는 척 버티어 시간을 끌면서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소란스러운 곳과 떨어져 있어 충분히 한산하고 어두웠다. 혈도를 눌러서 기절시켜 구석에 처박아 둬도 다들 주사라 여길 게 분명했다. 본인이야 부엌데기에게 당했으니 떠들 리 만무하고. 잽싸게 계산을 끝낸 그녀가 상대와의 거리를 재면서 공격 지점을 결정한 바로 그때였다.
“향월루라. 그 이름 한번 기막히니 오늘에야 그것을 알았구나.”
툭 튀어나온 중얼거림이 태평하고 능청스럽기 짝이 없었다. 희는 흠칫했고, 양반도 깜짝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냐?”
“이런, 실례를 범했습니다.”
짐짓 정중한 사과를 한 상대가 머무르던 그늘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제법 큰 키에 적당히 다부진 몸집을 지닌 훤칠한 사내였다. 계집 여럿 울렸을 법한 얼굴까지 더하여 그 외양은 상급이었으나, 망건에 두루마기뿐인 한량다운 차림새가 퍽 한심스러웠다. 아니 어쩌면 저리도 잘난 체신이니 당연하려나. 하지만 희가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기척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자네, 그것이 무슨 소린가?”
양반의 표정이 껄끄러워졌다. 아는 사이는 분명한데, 탐탁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사내가 유유히 말을 받았다.
“팔도 제일이라 칭하는 꽃밭을 두고도 한갓 잡초에 눈길을 주시니, 과연 향기로운 달香月이 눈물淚을 흘리는 격이다 싶어 그만.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어험!”
양반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최고급 기방에 와서 한낱 부엌데기에게 손을 뻗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날엔, 그럴 요량이면 굳이 거금 들일 것 없이 사비私婢나 돌아보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 십상이다. 희를 잡은 손아귀가 은근슬쩍 풀렸고, 얼른 팔을 뺀 희가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사내가 점잖게 끼어들어 틈을 만들어 주었다.
“짧은 밤은 그 눈물 손수 닦아 주심에도 벅찰 터. 이만 들어가 보심이 어떠실는지요.”
“흠, 흠! ……그저 재미 삼아 희롱한 것을, 너무 주제넘게 나서는군.”
“물론 그러셨겠지요. 이놈 성미가 원체 참섭하기 좋아하니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시종일관 온화한 저자세로 응대하고는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 점이 오히려 상대를 골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희가 조심스럽게 번갈아 보는 동안 양반은 훈계조로 몇 마디 덧붙인 다음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무렵, 사내가 희를 돌아보았다. 그는 본인을 몰래 살피다가 눈이 마주치자 찔끔 피하는 그녀의 행동을 나름대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왜, 그래도 계집이라고 잡초라는 말이 듣기 싫었더냐?”
무슨 소리야?
그를 관찰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희는 그제야 기억을 되살리고 입을 삐죽거렸다. 놀리는 듯한 그의 말이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만든 셈이었다.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용서해라, 본심은 아니었으니까. 그저 저치를 돌려보내고자 허언한 것이다.”
스스럼없는 말은 꾸밈이 없었고 묻어난 웃음기로 폄하할 수 없는 진지함까지 엿보였다. 희는 괜스레 머뭇거리다가 일단 인사부터 해야겠다 싶어 꾸벅거렸다.
“저……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리.”
“흠. 내가 구한 건 네가 아니었을 터인데.”
그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슬쩍 들린 입술 한끝에 머문 짓궂은 웃음이 또렷했다.
“주위를 둘러보는 품이 제법 매섭더구나.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는 눈매였더랬지. 보신술이라도 배운 게냐? 간만에 재미난 구경 할까 싶어 기다리려다 저치가 가엾어 봐준 것이다.”
들켜 버렸나. 그녀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해 우물거리자 그의 웃음이 커졌다.
“한데 너는 어찌 이곳까지 들어온 거지?”
“쇤네는, 부엌에서 일하는…….”
“글쎄 처음 보는 일손이니 묻고 있질 않으냐.”
마주치기 십상인 기생 몸종도 아닌 허드렛일 일손까지 전부 다 외우고 있다 이건가. 희는 어이가 없어졌다. 보다보다 이런 놈은 또 첨일세. 기방을 아주 제집 드나들듯 하나 보다. 흐트러진 매무새가 그녀의 추측을 더욱 뒷받침해 주었다. 혹 기부妓夫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옷감이 지나치게 좋긴 한데.
“뭘 그리 흘끔대는 게냐? 묻는 말에 대답도 않고.”
그의 핀잔에 희는 얼른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그러니까, 급하게 일손이 부족하다고 해서 오늘만 잠시 온 것이어요.”
“오늘만?”
“예.”
그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네 어미도 참 물색없구나. 정신 나간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 어린 여식을 보내?”
희가 울컥 반발했다.
“어리지 아니합니다. 또한 소녀가 오고자 고집부린 것이니 어미를 욕하지 마십시오!”
몰래 빠져나온 것이라 사실대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들키면 주걱으로 사정없이 맞을 것이니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희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있자니 물끄러미 보던 그는 난데없이 그녀의 이마 한가운데를 쿡 찔렀다.
“아야!”
“효녀 났군. 여기는 어리고 몸만 다 큰 것이 문제라는 게지. 제법 영리한 줄 알았더니.”
희는 이마를 문지르며 얼굴을 찌푸렸다. 솔직한 표정에 피식거린 그는 옷자락을 헤치더니 무언가를 끌러 그녀의 다른 손에 쥐여 주었다.
“이만하면 사흘 치 품삯은 될 것이다. 이런 데서 얼쩡대지 말고 얼른 가거라. 곧 인경人定이 치면 오도 가도 못할 터이니.”
희의 눈이 커졌다. 소나무와 사슴이 곱게 새겨진 을乙자형 장도였다. 옥이나 비취가 아닌 목木장도였지만, 한눈에도 상등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보통 솜씨로 꾸며진 것이 아니라 사흘은 고사하고 열흘 치도 될 것 같다. 그녀는 더 생각하지 않고 장도를 내밀었다.
“도로 가져가십시오. 이리 귀한 물건을 천한 소녀에게 함부로 내어 주시다니, 그리 보이진 아니한데 술이 과하셨나 봅니다.”
“제대로 봤다, 취한 건 아니니까. 내 보기엔 네가 더 취한 듯싶구나. 귀한 줄 알면 냉큼 집어넣어야지. 지게미라도 제법 주워 먹은 게냐?”
“놀리지 마시고 어서 가져가셔요!”
“남의 손으로 건너간 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가져가서 팔아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여라.”
그가 손을 내젓자 소매가 가볍게 펄럭거렸다. 이 사람, 진심이다. 그것을 깨닫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대관절 연유가 무엇인지요? 소녀, 그저 하찮은 일손일 뿐이고, 나리를 오늘 처음 뵈오며, 앞으로도 다시 뵙기는 어려울 터인데.”
“모르겠느냐? 당연히 변덕이지.”
딱 자른 대답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기가 막혀 입을 벌린 채 바라보고 있자니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은 아니다. 정말로 그저 그러고 싶어서니까. 몰랐다면 모르되 일단 눈에 띈 이상, 험한 꼴 당할 수 있는 곳에 더는 두고 싶지 않구나.”
“…….”
“내 마음대로 내쫓는 마당에 손해는 안 보게 해 주어야지. 무어, 일 안 하고 삯을 받으니 간밤 꿈에 돼지라도 잡은 셈 치거라.”
“하오나, 이것은…….”
“거참, 말도 많구나. 입은 됐고 다리를 움직이란 말이다, 다리를.”
옥신각신하며 등을 떠밀리다 보니, 어느새 희는 뒷문 밖에 나와 있었다.
담장 너머는 여전히 음률과 웃음소리가 시끄러운 반면 곧 통금이 될 거리는 조용했다. 희는 멍하니 주변을 돌아보고 손에 든 장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크게 저은 다음 몸을 돌려 기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무리 변덕이라고는 해도, 값진 장도 하나쯤은 적선하듯 줘 버릴 만큼 부유하다고는 해도, 이유 없는 친절은 부담스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더구나 본래 목표에는 아직 근처도 못 가 봤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쫓겨날 수는 없었다.
조금 전 그 자리로 가 봤지만, 그는 안으로 들어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찾아서 돌려줘야 하나. 막막해서 한숨을 쉬던 그녀는 일단 일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종묘령 일행이 지금쯤 얼마나 퍼마셨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운이 좋다면 가는 길에 그가 있는 방도 찾아 장도를 살짝 놓아두고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희는 장도를 품속에 집어넣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다른 술 취한 양반과 마주칠까 주변을 둘러보는 눈과 주의를 끌지 않는 움직임은 더욱 기민해졌다. 문득 부는 찬 바람에 그녀는 팔을 비비며 몸을 움츠렸다. 더 쓸데없는 일에 방해받지 말고 들을 거 후딱 듣고 돌아가면 참 좋으련만. 따뜻한 아랫목이 그립다. 희는 새삼 오지랖 넓은 자신이 한스러워졌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라, 하늘에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향월루는 한성, 아니 조선 최고 기방이란 명성에 걸맞게 매우 넓었다. 처음 왔을 때 일손인 척 ‘종묘령 나리’가 계신 곳을 확실히 알아 두었음에도 다시 찾아가려니 이 방이 그 방 같고 저 방도 그 방 같다. 낙담의 한숨을 삼킨 희는 몇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문제의 방을 찾았다. 작은 뜰에 있는 괴석 하나를 표식 삼아 맞모금으로 보이는 곳으로, 안에서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웃는 소리가 크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기다려 보기로 한 희가 뜰로 향한 창 아래에 쪼그리려던 참이었다.
“너,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게냐?”
엉거주춤한 자세로 흠칫 고개를 돌린 희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 벌써 낯익고 만, 장도의 주인이었다.
뭘 하려고 이리 돌아다니는 거야……라고 생각하다 말고, 희는 황급히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태평한 그의 옷자락을 붙들면서 얼떨결에 손으로 입을 막아 버렸다. 얼른 둘러보자 주변의 다른 인기척은 없었고 등 뒤의 방에서는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이야기꽃이 한창 피고 있었다.
안도한 것도 잠시, 그녀는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사내는 순순히 잡혀 준 채로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 잡히는 비단만큼이나 다른 손바닥에 닿은 입술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뗐다.
“죄, 죄송합니다, 나리! 실은…… 아까 그 나리가 지나가시는 것 같아 잠시 숨었던 터라, 무심결에 그만…….”
그녀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면서 열심히 변명을 만들어 붙었다. 가만히 보기만 하던 그가 갑자기 몸을 굽혀 그녀를 향해 귀를 갖다 댔다.
“그래서야 들리는 것도 없구나. 다시 말해 보아라.”
은은한 등불 아래, 지척에서 보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얼굴이었다. 공연히 가슴이 뛰는 바람에 희는 재촉을 받고서야 조금 전의 변명을 다시 중얼거렸다. 그가 몸을 바로 했다.
“그리 두려우면 어찌 다시 들어온 게냐? 알아듣게 타일렀건만!”
엄한 꾸짖음이었지만 그녀의 사정에 맞춰 준 목소리는 매우 나직했다. 그렇다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라, 희는 찔끔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니까…… 나리께 장도를 돌려드리려고요. 한데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허 참.”
희는 품에서 장도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천것을 헤아려 주신 그 마음은……”
“쉿!”
상황이 뒤바뀐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말과 입을 한 번에 막고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난데없이 팔 안에 가두어진 그녀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커다란 손바닥이 입을 꽉 막고 있어 숨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갑자기 왜 이래? 희가 눈을 들자 진지해진 그의 시선은 머리 위 창을 향해 있었다. 그제야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말소리가 그녀의 귀에도 와 닿았다.
“……었는데 참말인가, 청전菁全?”
“연담의 <설경산수도>? 그것이 무어 볼만하다고 위작까지 구했나?”
“그러게. 사람 참, 더 보태어 차라리 허주虛舟의 위작을 구할 일이지.”
각자 한마디씩 던진 말을 듣고만 있던 쪽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