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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빨리 가요! 아빠, 빨리! 버스 온단 말예요!”

저 급할 때만 아빠라고 부르지.

저 코딱지만 한 녀석이 만만치가 않다. 도하는 아들의 성화에도 비서가 적어 준 유치원 준비물 리스트를 보며 빠뜨린 건 없는지 체크하느라 여념이 없다.

낮잠 이불, 수건, 식탁 매트, 여벌 양말……. 젠장, 뭐가 이렇게 많아!

하필 아들의 등하원을 담당해 오던 전속 비서가 배탈이 나는 바람에 오늘 난생처음으로 등원 준비를 혼자 하게 된 것이다.

“아 진짜! #$@%^$^!”

도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바람에 애써 정리한 머리카락이 다시 구불거리기 시작했다.

“나쁜 말은 써나 선샘밈이 하는 거 아니랬어요.”

선생님 발음이나 제대로 해라. 써나는 또 뭐고.

도하가 말없이 아들을 노려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내미는 그런 아빠의 시선을 무시한다. 그 모습이 잔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다.



한 달 전, 전처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받지 않으려 했지만 급한 일이었는지 받을 때까지 계속 걸어 댈 기세였다.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아닌데,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전화를 받았다.

‘왜.’

― 아, XX!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나도 바쁜 사람인데 자꾸 시간 낭비하게 만들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 판다. 저 목소리를 한때는 듣기 좋다고 말했었지.

‘무슨 일인데. 바쁘니까 용건만 말해.’

이미 잔뜩 구겨진 미간을 꾹 누르며 도하가 말했다.

― 하여튼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좋아, 그럼 바로 본론부터 말할게.

다짜고짜 전화해서 할 말이 뭐가 있을까. 이제 다 끝난 사이에 말이지.

― 아로 말이야. 앞으로 당신이 키워.

‘……뭐?’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 나 다음 달에 출국해. 이 나라 영원히 뜰 거라고. 남은 생은 당신 없는 곳에서 살고 싶으니까.

‘하! 쓸데없는 말을 주절대는 걸 보니 남자 생겼냐?’

― 내가 남자가 생기든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야? 언제는 내 일에 관심이나 있었어?

그래, 남자가 생기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애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맘대로 데려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뭔 개소리야? 애가 무슨 물건이야?’

걸리는 건 아이였다.

― 아 몰라! 친권하고 양육권 다 변경해야 한다니까 보내는 서류에 동의나 해.

‘나쁜 X…….’

저도 잘한 것은 없지만, 이 생각 없는 여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 야, 네가 감히 얻다 대고 욕질이야?

‘……그래, 욕도 아깝다 너한텐. 후회하지 마라 정연서.’

― 후회는 당신 만나고 충분히 했어. 그리고 당신한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이 정도는 받아들여야지, 안 그래?

전화는 그렇게 끊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있었다. 도하를 꼭 빼닮은 아들이었다. 아들은 너무 어렸다. 도하는 전처인 정연서는 싫었지만 제 자식만큼은 싫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슴속 깊이 사랑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사랑해 줄 시간이 없었다. 변명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박도하는 일에 치여 살았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본궤도에 올려놓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아들인 아로는 훌쩍 커서 어느새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아로는 도하를 아빠라고 부르는 데 익숙지 않은 듯했다. 도하도 아들을 대하는 게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기저귀 한번 제대로 갈아 준 적이 없는 그였다.

6년이라는 시간을 제대로 함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였을까. 전처의 제멋대로인 결정을 도하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정연서는 이제 남이었지만, 적어도 아로는 제 핏줄이었으니까.



1화. 2시까지 애데렐라입니다


도하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애써 바로잡으며 아들을 불렀다.

“야, 너 양말은 신었……. 아.”

우려와는 다르게 똑 부러지는 6살 아로는 이미 스스로 옷을 입은 건 물론이고, 신발까지 신고선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저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거야?

“왜 발을 동동 굴러? 쉬 마려워?”

“아이참! 버스요, 버스. 이제 곧 온다니까요!”

아무래도 집보다 유치원 가는 걸 더 좋아하는 듯한 녀석이다.

유치원에 여자 친구라도 있나 보지. 요새 애들은 뭐든 빠를 테니 저 녀석도 좋아하는 여자애쯤은 있겠지. 다 부질없다 아들아, 부질없어.

도하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양손에 이불 가방과 유치원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주세요. 가방은 저 혼자 들 수 있어요.”

들어 준다는데도 굳이 제 손에서 가방을 가져간다.

“……그러시든지.”

심드렁하게 대답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보통의 아빠라면 우리 아들 다 컸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겠지만, 두 부자는 결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빨리 오세요. 진짜 늦겠어요.”

누가 누굴 재촉하는 건지 원.

집 밖을 나서자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정연서가 그렇게 아로를 멋대로 보내고 난 후, 녀석이 다니는 유치원 근처에 위치한 한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아들 녀석이 죽어도 이 유치원을 다녀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급히 집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이 집을 구하느라 제 비서가 고생을 좀 했다.

도대체 왜 이곳이어야만 했던 걸까? 유치원에 꿀단지라도 숨겨 둔 건지……. 애들 속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휴∼ 안 늦었다! 이제 여기서 기다리면 돼요. 앞으로 이렇게 늦으면 안 돼요. 미리미리 준비해야죠.”

녀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도하는 콧방귀를 뀌었다.

앞으로는 무슨.

아이를 키우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유치원 등하원까지 시킬 용의는 없었다. 지금 배탈이 난 비서가 얼른 낫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같은 음식을 먹어 놓고 왜 저만 배탈이 난 건지.

그리 재촉해서 급하게 나왔건만, 버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어색한 분위기도 깰 겸 도하가 입을 열었다.

“버스는 왜 이렇게 안 와?”

“어른이 기다릴 줄 알아야죠. 이제 2분 정도 남았어요.”

“뭐? 그럼 왜 그렇게 재촉했어?”

황당하네.

“그야, 미리미리 와서 기다려야죠. 버스 아저씨가 왔는데 우리가 없으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너무 황당해서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아니, 근데 얜 왜 아까부터 한마디를 안 져? 6살이면 이 정도는 다 말하는 건가?

도하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어머, 아로야! 안녕!”

그때, 도하의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아들과 똑같은 원복을 입은 아이와 아이의 엄마처럼 보이는 사람이 제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주아 어머님. 안녕, 주아야.”

그 모습을 본 녀석이 90도로 몸을 숙였다. 자그마한 몸을 숙이려다 보니 웅크리는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래도 예의는 바르군. ‘어머님’은 좀 오버인 것 같지만.

분명 제 자식인데 행동 하나하나가 낯설게 느껴진다.

주아라는 아이와 그 엄마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졌다. 둘은 각자 다른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 우리 아로는 예의도 참 바르다니까, 호호! 근데 옆에는 누구……. 아로 삼촌이신가 봐요?”

그리 말하는 여자의 시선이 도하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고 있었다. 도하는 그런 시선이 익숙한 듯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눈에 띄었다. 남들보다 껑충 큰 키에, 구불거리지만 결 좋은 새까만 머리카락, 눈 밑에 난 점 하나를 제외하면 깨끗한 피부를 지닌 그는 현직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빼어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대가 삼촌이냐고 묻는 건 아마 지금 입고 있는 추리닝 때문이겠지. 주름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은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까.

“삼촌 아니고, 아버집니다.”

뭐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틀린 말은 정정해 줘야 하니까.

“네?”

여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아빠라고요.”

아빠에게만 예의를 차리지 않는 아들이 아무 대답도 않고 있자, 결국 도하가 입을 열었다.

“어머, 어머나 세상에! 그러셨구나! 어쩐지 꼭 닮았다 했더니! 처음 뵙네요. 아로랑 같은 반 주아 엄마예요. 잘 부탁드려요.”

“예예.”

오늘만 보고 더 이상은 볼 일이 없을 것 같지만 일단 짤막히 대답을 해 두었다. 상대는 얘기를 이어 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도하는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마침 아파트 단지 입구에 유치원 버스로 추정되는 샛노란 버스 한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왔다! 왔다!”

뭐가 그리 좋은지 망아지처럼 폴짝폴짝 뛰고 있는 아들을 보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부모보다는 또래와 있는 걸 더 좋아할 나이인가?

그러고 보니 어제 잠들기 전 콧노래를 흥얼거리기에 뭐가 그리 좋으냐고 물었더니 녀석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응! 내일은 내 짝을 만나는 날이니까요!’

‘뭐?’

‘내 평생의 짝 말이에요.’

저 나이에 평생이란 말을 쓰기도 하나? 뜻은 알고 쓰는 거야?

어린 게 못 하는 말이 없다. 황당해서 대꾸조차 하지 않고 있었더니, 아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는지 방으로 쪼르르 들어가 버렸었다.



“아로 안녕! 주아 안녕! 여러분 모두 좋은 아치임∼!”

순간 귀가 째질 것 같은 하이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유치원 선생님인 듯했다.

“자자, 어서 올라타세요! 발밑을, 항상, 살피기!”

선생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싣고 있었다. 알아듣기 쉽게 하려는 건가. 하루 종일 저 목소리에, 저 톤을 유지하려면 힘들겠어.

버스에 올라타려던 아로가 뒤로 돌아 도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도하는 할 말이 있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 끝나고…… 데리러 와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뭐? 버스로 다시 데려다주는 거 아니었어?”

“아니요, 오후에는 버스 없어요. 유치원으로 직접 와야 해요. 데리러 올 수 있어요?”

헐. 황당하다는 얼굴로 선생의 얼굴을 쳐다보니 멋쩍게 미소만 지어 보인다. 꼼짝없이 하원도 맡게 생겼다.

“어어……. 알겠다.”

아들은 도하의 대답에 안심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버스에 올라탔다. 그렇게 버스는 속절없이 떠나 버렸다.

“저기……. 아로 아버님? 안 가세요?”

“아, 예. 그럼 이만.”

도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아 엄마는 서둘러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유치원 학부모 단톡방에 오늘의 핫뉴스를 알렸다.

[저 방금 해님반 박아로 아빠라는 사람 봤음요. 모델 뺨치고 완전 대박이네욬ㅋㅋㅋ]

그 단톡방의 후끈 달아오른 열기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는 후문이다.



* * *



뚜르르― 뚜르르―

“왜 이리 안 받아, 이 자식.”

도하는 집으로 들어가다 말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Hi…….

드디어 전화를 받은 상대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였다.

“하이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배탈은 좀 어때?”

― 대표님, 저 입원했어요…….

“뭐라는 거야, 장난치지 말고. 얼른 업무 복귀해야지.”

― 못 가요. 지금 스웩 맞고 있어요…….

“수액이겠지. 진짜야? 장난 아니고?”

― Yes. I’m 장염.

“아니 같은 걸 먹고 왜 너만 장염에 걸리는 건데?”

― 저라고 좋아서 걸렸겠습니까…….

“#$#@^!#%@!@#$!!”

― Calm down, bro…….

다소 어눌한 한국말을 구사하는 그는 도하의 전속 비서인 토마스였다. 그리고 도하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만난 절친이기도 했다.

절친을 비서로 고용할 수밖에 없었던 건, 도하의 까칠한 성격을 감당할 수 있는 비서를 도통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두 길어야 3개월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국에 오고 싶어 했던 베프 토마스가 생각이 났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생활 전반을 서포트하는 조건으로 그를 미국에서 데려왔다.

토마스는 도하의 성질을 받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도하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남자였다. 말 그대로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있으면 기어이 성질을 내고야 마는, 성격 한번 까칠한 남자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성질을 죽일 때가 아들인 아로를 대할 때였다. 그 모습을 본 것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 자식이라고 까칠한 성격을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도하의 아들은 보고 배우는 게 다인 겨우 6살짜리 남자애였다. 토마스는 그런 아로가 도하에게 다시 온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아이만을 생각하면 가여웠지만, 그의 존재가 도하에게 끼칠 영향이 엄청나게 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로와 도하가 다시 만나 두 부자의 앞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데 그 도하라는 작자는 친구의 깊은 속뜻도 모르고, 수화기 너머로 욕지거리만 해 대고 있었다.

‘아직 멀었구나, bro…….’

토마스의 뺨 위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토마스에게 욕지거리를 한바탕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졌다. 어차피 회사 대표인 도하는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하원 시간은 2시라고 했었나. 뭐가 이렇게 빨라. 등원하자마자 다시 하원하는 격이군.

어차피 회사로 출근하긴 글렀다. 도하는 새로 이사 온 동네를 구경할 겸 산책을 시작했다. 시원하게 뻗은 긴 다리를 휘적거리며 걷다 보니, 수군거리며 저를 쳐다보는 동네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온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산책을 할 바엔 진탕 뛰며 땀이나 빼자는 생각으로 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한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