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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들을 납치하러 왔습니다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피트니스 센터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운동만큼은 여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간단히 스트레칭을 마친 도하는 러닝 머신 위에 섰다.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끼고 곧장 운동을 시작했다.
30분 정도를 아무 생각 없이 뛰었을까. 호흡이 가빠지고, 땀이 이마와 등줄기를 타고 미친 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스피드를 낮추고 걷기 시작했다. 도하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아로가 지금 이 집에 처음 온 날을 떠올렸다.
제 엄마한테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집에 도착한 녀석은 눈가가 벌게져 있었고 눈두덩이 한껏 부어올라 있었다. 앙다문 입술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했으면 애가 저 지경이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맘 같아서는 정연서를 찾아가 다 뒤엎어 버리고 싶었다. 무슨 이유로 떠나든지 간에 그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지도 못하게 다 망쳐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작디작은 아이를 보고 있자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정연서는 도하에게는 원수보다 못할지언정 아로에게는 하나뿐인 엄마였다.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도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참 못 할 짓이었다. 하지만 6년 만에 처음으로 둘만 남게 된 이 상황에서 도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결국, 아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방은 어디예요?’
아로가 저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도하는 멍하니 있다 뒤통수라도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굴었다. 아직 제 방도 정하지 않은 그였다.
‘어……. 네가 원하는 방으로 해.’
둘만 사는 집인데 방은 쓸데없이 4개나 있었다. 물론 전에는 이보다 더 넒은 공간에서 살았으니, 토마스가 배려해 준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조만간 토마스도 불러다가 같이 살아야 할 판이었다.
아들은 영특한 건지 집 안에서 가장 작은 방이지만,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을 제 방으로 골랐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이 부자의 첫날 밤이 지나갔다.
그 후로 며칠간은 비서인 토마스가 아로의 에스코트를 자처하며 유치원을 들락날락했다.
그러다 이번에 장염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지금은 도하가 애데렐라가 되어 2시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 분노를 풀 대상은 토마스밖에 없었다.
‘토마스 자식, 퇴원하기만 해 봐라! 아주, 그냥, 제대로, 부려, 먹을, 테니, 각오, 하라, 고!’
어느새 그는 러닝 머신에서 내려와 분노의 푸시업을 시작했다.
평일 오전, 피트니스 센터의 이용객은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이 대부분이었다. 어느새 도하 주위로 몇몇 어르신들이 몰려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젊은이, 살살 혀…….”
“역시 젊은 게 좋네그려∼ 김 영감, 이리 좀 와 봐.”
“…….”
어딜 가든 마음 편한 곳이 없었다. 간만에 주어진 자유 시간이 오히려 감옥처럼 느껴졌다.
* * *
한편, 도하가 내적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 아로의 유치원에서는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써나 선샘밈!”
유치원에 도착한 아로가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누군가의 품에 포옥 안겼다.
“어머, 우리 아로 왔구나! 우리 아로는 하루 사이에 더 큰 것 같네?”
“아로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클게요!”
해맑게 웃는 아로의 표정은 아까 아빠와 있을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 그래. 자, 그럼 우리 짐부터 정리해 볼까?”
“넹!”
아로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제 담임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자신만을 바라봐 주길 바라는 6살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이 귀엽기만 했다.
파마기가 살짝 있는 밝은 갈색 단발머리에,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 동그란 눈을 가진 한선아는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만한 첫인상의 소유자였다. 그 선한 인상은 아이들에게도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이 귀여운 아이와는 이번에 해님반의 담임을 맡으면서 처음 만났다.
아직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학부모 상담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선아는 아로의 전 담임 선생님을 통해 그의 가정사에 대해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아로의 엄마인 정연서가 유치원에 찾아와 몇 번 깽판을 치고 간 걸 목격했던 그녀는 아로에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과는 달리 자신을 퍽 따르고 별 탈 없이 지내 주는 아로가 고맙게 느껴졌다.
* * *
한껏 피트니스 센터에서 땀을 빼고 나왔지만 도하는 오히려 식욕이 돌지 않았다.
제 분노의 푸시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몇몇 어르신들이 저들에게도 푸시업을 알려 달라며 성화를 부리는 통에 결과적으로 더 많은 스트레스를 떠안고 말았다.
겨우 그곳에서 빠져나온 도하는 집 근처 커피숍에 들렀다.
“에스프레소 쓰리 샷이요.”
“……네?”
아르바이트생은 잘못 들은 줄 알았는지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에스프레소, 쓰리 샷, 이요.”
귓구멍 막혔냐, 라고 물으려다가 썩소를 날리며 간신히 대답해 주었다.
지금껏 수많은 진상 손님을 경험했던 아르바이트생은 그 모습만으로도 도하가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무 말 없이 곧바로 에스프레소 쓰리 샷을 대령했다.
도하는 창가 자리에 대충 걸터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마치 한 편의 커피 CF를 찍는 것처럼 보였다.
적당히 맛을 음미한 후, 그가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쓰다. 더럽게 써.’
저 아르바이트생이 아무래도 쓰리 샷이 아니고 포 샷을 넣은 것 같다. 아니면, 사약을 넣었거나.
그가 이 커피숍을 찾아오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도하는 조심스럽게 잔을 내려놓고 손목에 걸친 시계를 슬쩍 쳐다보았다. 슬슬 아로의 하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유로움 따위는 사치인가.’
그는 곧 아들이 있을 유치원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 내비를 찍으려는데 정연서가 알려 준 유치원 이름이 좀 이상하다.
리베로 숲 유치원. 뭐야, 이 쓸데없이 고풍스러운 이름의 유치원은.
도하는 코웃음을 쳤다. 평소 욕심 많고 허영에 가득 찬 정연서의 선택답다. 아니면, 아들의 선택이던지.
숲 유치원은 또 뭐야? 진짜 숲속에 있는 유치원은 아니겠지…….
내비를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유치원 앞에서 도하는 할 말을 잃었다. 기다란 유치원 건물 뒤로 정말 숲이 있었던 것이다.
봄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목련꽃이 피어 있었고, 벚꽃도 피기 직전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면 울창해질 숲이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졌다.
흠, 뭐. 시설이 나쁜 것 같진 않군.
머쓱해진 도하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정각 2시였다. 평소 시간 관리에 철저한 그는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거지? 애들이 직접 나오는 게 아닌가?
5분쯤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자니, 학부모로 보이는 한 여자가 도하를 지나쳐 유치원 현관으로 보이는 곳에서 벨을 눌렀다.
― 누구세요?
“네, 저 달님반 건우 엄마예요.”
― 네 잠시만요∼
달칵― 그러고 나서야 문이 열린다. 여자는 도하 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이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저렇게 해야 들여보내 주나 보군. 쓸데없이 깐깐하지만 뭐, 나쁘지 않아.
도하도 그녀를 따라 현관 쪽으로 다가가 벨을 누르려 했다. 그러다 그 밑에 붙어 있는 종이에 각 반마다 눌러야 할 번호가 적혀져 있는 걸 발견했다.
가만있자, 아들 녀석이 무슨 반이었지? 달님반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데…….
에라이, 진짜.
도하는 일단 별님반일 거라 찍어 보기로 했다. 별님반 번호는 111이다.
― 누구세요?
“별님반…… 박아로 아빠 되는 사람인데요.”
목소리에 자신감은 없었다.
― 네? 누구시라고요?
“박아로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뚝 하며 인터폰은 끊겼고, 열려야 할 문은 열리지 않았다.
뭔데, 이거.
순간 또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다.
잠시 후, 헐레벌떡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아로는 아니다. 밝은 갈색 머리를 한 여자다. 한눈에 들어온 건 그 모습뿐이었다.
도하를 발견한 여자는 살짝 문을 열고 나와 그의 앞에 섰다. 상대는 그가 한참을 밑으로 내려 봐야 할 정도로 작은 키였다.
뭐지?
“저, 아로 아버님이시라고요.”
작은 체구에 비해서는 꽤나 또랑또랑한 목소리다.
“네, 그렇습니다만.”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시군요. 전 아로 담임 한선아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네. 그런데 아로는 어디 있습니까? 하원 시간이 2시까지라고 해서 데리러 왔는데요.”
“저기, 아로가 별님반이라고 하셨죠?”
“……예?”
뭔 딴소릴 하는 거야, 이 여자가.
“아로는 해님반이에요, 아버님.”
“아, 네네. 헷갈렸습니다.”
도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지만, 선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치원 규정상, 하원 시 정해진 사람만이 아이를 데려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유치원 입소 시에 제출하는 서류에 적혀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선아는 그를 무조건 신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난주까지만 해도 아로의 하원은 정장을 쫙 빼입은 외국인이 책임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추리닝 바람의 웬 수상쩍은 남자가 나타나 아들을 데리러 왔다니.
심지어 아들이라면서 아이가 다니고 있는 반까지 틀렸다. 아무리 관심이 없다지만, 반도 모르면서 아이를 데리러 오는 건 선아의 기준에선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 바람에 선아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이 여자, 왜 저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지…….’
도하의 눈매도 덩달아 더욱 매서워졌다.
“아니, 안 들여보내 줄 겁니까? 나 여기서 밤새라고요?”
“아버님. 저희 원 규정상 미리 정해진 분만 아이를 데려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버님은 아로의 반도 제대로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희가 일단 어머님과 통화 후 다시 말씀드려도 될까요?”
“지금 뭔 소립니까. 내 아들 내가 찾아가겠다는데.”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튀어나오자, 선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흥분하는 모습이 더 수상쩍어 보였다. 도하의 행동은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죄송하지만 규정상 어쩔 수 없습니다. 통화하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선아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도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급하게 잡는 바람에 생각보다 힘이 들어갔는지 선아가 악 소리를 냈다.
“악!”
“앗, 어 아니! 전화하지 말고 아로를 불러 줘요. 아로가 절 보면 알 거 아닙니까.”
도하가 그녀의 어깨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이 상황에서 전처한테 전화라니. 그것도 규정이니 어쩌니 하면서 제가 아버지인 걸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 이런 일로 엮이는 건 죽어도 싫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선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봐요! 내가 무슨 납치범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당신 같으면 납치범이 대낮에 당당하게 얼굴 들이밀고 찾아오겠습니까?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 겁니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죠. 유치원 밖을 벗어나면 몰라도 적어도 안에서만큼은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선아가 동그란 눈을 더 부릅뜨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한 사명감이군그래.
“뭐 그럼 가족 관계 증명서라도 떼어 줘야 합니까?”
“그래 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아놔, 진짜…….”
속이 또 부글부글 끓는다.
“……아빠? 써나 선샘밈?”
순간, 두 사람의 고개가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절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아로가 서 있었다.
이 남자가 진짜 아로 아버님?
이 여자가 써나 선샘밈?
아로가 갸우뚱한 얼굴을 하고 도하와 선아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피트니스 센터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운동만큼은 여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간단히 스트레칭을 마친 도하는 러닝 머신 위에 섰다. 귀에는 무선 이어폰을 끼고 곧장 운동을 시작했다.
30분 정도를 아무 생각 없이 뛰었을까. 호흡이 가빠지고, 땀이 이마와 등줄기를 타고 미친 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스피드를 낮추고 걷기 시작했다. 도하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아로가 지금 이 집에 처음 온 날을 떠올렸다.
제 엄마한테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집에 도착한 녀석은 눈가가 벌게져 있었고 눈두덩이 한껏 부어올라 있었다. 앙다문 입술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했으면 애가 저 지경이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맘 같아서는 정연서를 찾아가 다 뒤엎어 버리고 싶었다. 무슨 이유로 떠나든지 간에 그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지도 못하게 다 망쳐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작디작은 아이를 보고 있자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정연서는 도하에게는 원수보다 못할지언정 아로에게는 하나뿐인 엄마였다.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도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참 못 할 짓이었다. 하지만 6년 만에 처음으로 둘만 남게 된 이 상황에서 도하는 아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결국, 아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방은 어디예요?’
아로가 저에게 던진 첫 질문이었다.
도하는 멍하니 있다 뒤통수라도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굴었다. 아직 제 방도 정하지 않은 그였다.
‘어……. 네가 원하는 방으로 해.’
둘만 사는 집인데 방은 쓸데없이 4개나 있었다. 물론 전에는 이보다 더 넒은 공간에서 살았으니, 토마스가 배려해 준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조만간 토마스도 불러다가 같이 살아야 할 판이었다.
아들은 영특한 건지 집 안에서 가장 작은 방이지만, 가장 볕이 잘 드는 곳을 제 방으로 골랐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이 부자의 첫날 밤이 지나갔다.
그 후로 며칠간은 비서인 토마스가 아로의 에스코트를 자처하며 유치원을 들락날락했다.
그러다 이번에 장염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지금은 도하가 애데렐라가 되어 2시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 분노를 풀 대상은 토마스밖에 없었다.
‘토마스 자식, 퇴원하기만 해 봐라! 아주, 그냥, 제대로, 부려, 먹을, 테니, 각오, 하라, 고!’
어느새 그는 러닝 머신에서 내려와 분노의 푸시업을 시작했다.
평일 오전, 피트니스 센터의 이용객은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이 대부분이었다. 어느새 도하 주위로 몇몇 어르신들이 몰려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젊은이, 살살 혀…….”
“역시 젊은 게 좋네그려∼ 김 영감, 이리 좀 와 봐.”
“…….”
어딜 가든 마음 편한 곳이 없었다. 간만에 주어진 자유 시간이 오히려 감옥처럼 느껴졌다.
* * *
한편, 도하가 내적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 아로의 유치원에서는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써나 선샘밈!”
유치원에 도착한 아로가 세상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누군가의 품에 포옥 안겼다.
“어머, 우리 아로 왔구나! 우리 아로는 하루 사이에 더 큰 것 같네?”
“아로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클게요!”
해맑게 웃는 아로의 표정은 아까 아빠와 있을 때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 그래. 자, 그럼 우리 짐부터 정리해 볼까?”
“넹!”
아로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제 담임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자신만을 바라봐 주길 바라는 6살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이 귀엽기만 했다.
파마기가 살짝 있는 밝은 갈색 단발머리에,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 동그란 눈을 가진 한선아는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만한 첫인상의 소유자였다. 그 선한 인상은 아이들에게도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이 귀여운 아이와는 이번에 해님반의 담임을 맡으면서 처음 만났다.
아직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학부모 상담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선아는 아로의 전 담임 선생님을 통해 그의 가정사에 대해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아로의 엄마인 정연서가 유치원에 찾아와 몇 번 깽판을 치고 간 걸 목격했던 그녀는 아로에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걱정과는 달리 자신을 퍽 따르고 별 탈 없이 지내 주는 아로가 고맙게 느껴졌다.
* * *
한껏 피트니스 센터에서 땀을 빼고 나왔지만 도하는 오히려 식욕이 돌지 않았다.
제 분노의 푸시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몇몇 어르신들이 저들에게도 푸시업을 알려 달라며 성화를 부리는 통에 결과적으로 더 많은 스트레스를 떠안고 말았다.
겨우 그곳에서 빠져나온 도하는 집 근처 커피숍에 들렀다.
“에스프레소 쓰리 샷이요.”
“……네?”
아르바이트생은 잘못 들은 줄 알았는지 인상을 구기며 물었다.
“에스프레소, 쓰리 샷, 이요.”
귓구멍 막혔냐, 라고 물으려다가 썩소를 날리며 간신히 대답해 주었다.
지금껏 수많은 진상 손님을 경험했던 아르바이트생은 그 모습만으로도 도하가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무 말 없이 곧바로 에스프레소 쓰리 샷을 대령했다.
도하는 창가 자리에 대충 걸터앉아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마치 한 편의 커피 CF를 찍는 것처럼 보였다.
적당히 맛을 음미한 후, 그가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쓰다. 더럽게 써.’
저 아르바이트생이 아무래도 쓰리 샷이 아니고 포 샷을 넣은 것 같다. 아니면, 사약을 넣었거나.
그가 이 커피숍을 찾아오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도하는 조심스럽게 잔을 내려놓고 손목에 걸친 시계를 슬쩍 쳐다보았다. 슬슬 아로의 하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유로움 따위는 사치인가.’
그는 곧 아들이 있을 유치원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타 내비를 찍으려는데 정연서가 알려 준 유치원 이름이 좀 이상하다.
리베로 숲 유치원. 뭐야, 이 쓸데없이 고풍스러운 이름의 유치원은.
도하는 코웃음을 쳤다. 평소 욕심 많고 허영에 가득 찬 정연서의 선택답다. 아니면, 아들의 선택이던지.
숲 유치원은 또 뭐야? 진짜 숲속에 있는 유치원은 아니겠지…….
내비를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유치원 앞에서 도하는 할 말을 잃었다. 기다란 유치원 건물 뒤로 정말 숲이 있었던 것이다.
봄이라 그런지 군데군데 목련꽃이 피어 있었고, 벚꽃도 피기 직전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면 울창해질 숲이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졌다.
흠, 뭐. 시설이 나쁜 것 같진 않군.
머쓱해진 도하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정각 2시였다. 평소 시간 관리에 철저한 그는 약속 시간에 늦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왜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거지? 애들이 직접 나오는 게 아닌가?
5분쯤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자니, 학부모로 보이는 한 여자가 도하를 지나쳐 유치원 현관으로 보이는 곳에서 벨을 눌렀다.
― 누구세요?
“네, 저 달님반 건우 엄마예요.”
― 네 잠시만요∼
달칵― 그러고 나서야 문이 열린다. 여자는 도하 쪽을 흘끗 쳐다보더니 이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저렇게 해야 들여보내 주나 보군. 쓸데없이 깐깐하지만 뭐, 나쁘지 않아.
도하도 그녀를 따라 현관 쪽으로 다가가 벨을 누르려 했다. 그러다 그 밑에 붙어 있는 종이에 각 반마다 눌러야 할 번호가 적혀져 있는 걸 발견했다.
가만있자, 아들 녀석이 무슨 반이었지? 달님반이 아닌 것만은 확실한데…….
에라이, 진짜.
도하는 일단 별님반일 거라 찍어 보기로 했다. 별님반 번호는 111이다.
― 누구세요?
“별님반…… 박아로 아빠 되는 사람인데요.”
목소리에 자신감은 없었다.
― 네? 누구시라고요?
“박아로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뚝 하며 인터폰은 끊겼고, 열려야 할 문은 열리지 않았다.
뭔데, 이거.
순간 또 짜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다.
잠시 후, 헐레벌떡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아로는 아니다. 밝은 갈색 머리를 한 여자다. 한눈에 들어온 건 그 모습뿐이었다.
도하를 발견한 여자는 살짝 문을 열고 나와 그의 앞에 섰다. 상대는 그가 한참을 밑으로 내려 봐야 할 정도로 작은 키였다.
뭐지?
“저, 아로 아버님이시라고요.”
작은 체구에 비해서는 꽤나 또랑또랑한 목소리다.
“네, 그렇습니다만.”
자연스럽게 시선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시군요. 전 아로 담임 한선아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네. 그런데 아로는 어디 있습니까? 하원 시간이 2시까지라고 해서 데리러 왔는데요.”
“저기, 아로가 별님반이라고 하셨죠?”
“……예?”
뭔 딴소릴 하는 거야, 이 여자가.
“아로는 해님반이에요, 아버님.”
“아, 네네. 헷갈렸습니다.”
도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지만, 선아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치원 규정상, 하원 시 정해진 사람만이 아이를 데려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유치원 입소 시에 제출하는 서류에 적혀 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선아는 그를 무조건 신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난주까지만 해도 아로의 하원은 정장을 쫙 빼입은 외국인이 책임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추리닝 바람의 웬 수상쩍은 남자가 나타나 아들을 데리러 왔다니.
심지어 아들이라면서 아이가 다니고 있는 반까지 틀렸다. 아무리 관심이 없다지만, 반도 모르면서 아이를 데리러 오는 건 선아의 기준에선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 바람에 선아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이 여자, 왜 저런 눈으로 날 쳐다보는 거지…….’
도하의 눈매도 덩달아 더욱 매서워졌다.
“아니, 안 들여보내 줄 겁니까? 나 여기서 밤새라고요?”
“아버님. 저희 원 규정상 미리 정해진 분만 아이를 데려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아버님은 아로의 반도 제대로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희가 일단 어머님과 통화 후 다시 말씀드려도 될까요?”
“지금 뭔 소립니까. 내 아들 내가 찾아가겠다는데.”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튀어나오자, 선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흥분하는 모습이 더 수상쩍어 보였다. 도하의 행동은 상황을 최악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죄송하지만 규정상 어쩔 수 없습니다. 통화하고 오겠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선아가 자리를 뜨려는 순간, 도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급하게 잡는 바람에 생각보다 힘이 들어갔는지 선아가 악 소리를 냈다.
“악!”
“앗, 어 아니! 전화하지 말고 아로를 불러 줘요. 아로가 절 보면 알 거 아닙니까.”
도하가 그녀의 어깨에서 황급히 손을 뗐다.
이 상황에서 전처한테 전화라니. 그것도 규정이니 어쩌니 하면서 제가 아버지인 걸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 이런 일로 엮이는 건 죽어도 싫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선아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봐요! 내가 무슨 납치범이라도 된다는 겁니까? 당신 같으면 납치범이 대낮에 당당하게 얼굴 들이밀고 찾아오겠습니까?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구는 겁니까?”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죠. 유치원 밖을 벗어나면 몰라도 적어도 안에서만큼은 아이들에 대한 책임은 저희에게 있습니다.”
선아가 동그란 눈을 더 부릅뜨며 말했다.
참으로 대단한 사명감이군그래.
“뭐 그럼 가족 관계 증명서라도 떼어 줘야 합니까?”
“그래 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네요.”
“아놔, 진짜…….”
속이 또 부글부글 끓는다.
“……아빠? 써나 선샘밈?”
순간, 두 사람의 고개가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절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아로가 서 있었다.
이 남자가 진짜 아로 아버님?
이 여자가 써나 선샘밈?
아로가 갸우뚱한 얼굴을 하고 도하와 선아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