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내 편은 아무도 없다


아빠?

순간 선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저 귀여운 아이의 조그만 입술에서 새어 나온 소리는 분명 ‘아빠’라는 말이었다.

그럼 이 남자가 진짜 아로의 아버님이란 말이야?

선아의 고개가 고장 난 로봇처럼 애처롭게 돌아갔다. 그리고 곧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한 도하를 마주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다.

뭐야,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아로와 똑같이 생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로가 제 아빠를 쏙 빼닮은 거겠지.

조목조목 따져 보니 구불거리는 머리카락도, 잡티 하나 없는 뽀얀 피부도, 무표정일 땐 다소 차가워 보이는 인상조차 판박이다. 단 한 가지의 차이가 있다면 눈 밑에 있는 점일 것이다.

소오름.

선아는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그러나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퍼뜩 정신을 차려야 했다. 도하가 눈에서 곧 레이저가 튀어나올 정도로 선아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히익!

선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선샘밈? 무슨 일이에요?”

이 순진무구한 아이는 그저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어, 어……. 아로야.”

내가 네 아빠를 매우 수상쩍은 사람으로 의심하고 있었단다…….

“박아로.”

아빠라는 남자는 제 아들을 조용히 불렀다.

“……네?”

아이의 눈에서는 반짝임이 사라졌다. 하지만 남자는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선아는 마른침만 꼴깍 삼킬 뿐이었다.

“너, 내가 누군지 말해 봐.”

도하가 씩 웃으며 아들에게 말했다. 겉으로만 웃고 있을 뿐 썩어 있는 표정이 선아의 심장을 꽉 조여 왔다.

“여기 서 계신 너네 선, 샘, 밈, 께 제대로 설명해 주렴. 내가 누군지를 말이야.”

“……아! 써나 선샘밈! 제 아빠예요. 혹시 아빠가 선샘밈을 곤란하게 한 건 아니죠? 그렇다면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저희 아빠가 좀…….”

아로는 선아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더니 한껏 목소리를 낮춘 후 말했다.

“화가 많거든요…….”

야, 다 들리거든?!

게다가 곤란하게 만든 건 내가 아니고 저 여자라고! 대놓고 이상한 사람 취급 하고 말이야! 네가 왜 사과하고 있는 거야?!

도하는 눈치 없는 아들 녀석 때문에 뒷골이 당겼다.

게다가 상황이 역전된 것 같은 이 더러운 기분은 뭐지.

선아는 아이의 어른스러운 대답에 풋! 하며 웃고 말았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만 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선아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희 원 규정이 워낙 엄격하죠? 그래도 이게 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결국 자기가 잘못한 건 없다는 거군. 뻔뻔한 여자 같으니라고.

도하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 따질 수도 없었다.

이럴 때 제 편을 들어 주는 아들도 없고……. 갑자기 자신의 신세가 처량해졌다.

그나저나 저 녀석은 왜 또 저 여자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거야?

배신감을 느낄 새도 없이 어느새 아들은 선아 옆에 서서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겁먹은 아기 사슴 같았다.

“자, 그럼 아로야. 아빠도 오셨으니까 이제 선생님이랑 인사하고 집에 가도록 할까?”

“힝…….”

힝? 히이이잉? 내가 잘못 들은 걸까?

낯선 아들의 모습에 도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저런 애교를 부릴 줄 아는 아이였나. 하긴 고작 6살짜리 아이다.

육아 상식 따위 없는 제가 보기에도 아로는 또래 아이들보다 말을 배우는 게 빠른 편 같았다. 다양한 어휘를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상황에 맞게 존댓말도 잘 쓰고 예의도 발랐다.

하지만 겉모습이야 어찌 되었든 속은 여전히 6살짜리 어린 아이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기대야 하고, 의지해야 하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그 누군가는 당연히 부모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 중 한 명은 떠나 버렸고, 한 명은 지금 이 자리에서 멍청히 서 있을 뿐이다.

마음 한구석이 또 아려 온다.

“이제 가요…….”

아들 녀석은 힘이 쭉 빠져서는 저에게 터덜터덜 다가온다. 집에 가기가 저렇게 싫을까.

“선샘밈……. 안녕히 계세요. 아로 가 볼게요.”

“그래, 아로야. 우리 주말 잘 보내고 다음 주에 다시 만나요.”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인사에 도하는 빨리 이쪽으로 오라 손짓했다. 손을 내밀어 아들의 손을 잡기엔 아직까지 뭔가 어색하다.

“아, 참! 아버님 잠시만요!”

별안간 선아가 도하를 불러 세웠다. 도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물론 최대한 싸늘한 표정으로.

“……또 뭐가 남았습니까?”

“저 혹시 다음 주에도 아버님이 데리러 오시나요?”

“!”

그러고 보니 토마스 녀석이 주말 내내 입원하게 된다면―그런 최악의 경우는 생각하기도 싫지만― 꼼짝없이 도하가 또 이곳에 와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아……. 일단 그럴 예정입니다.”

“아, 네. 다음 주에도 혼선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살펴 가세요.”

선아는 방금 전까지의 일은 모든 잊은 듯 평소처럼 밝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도하에게 좋게 보일 리는 없었다.

사람 좋게 읏쯔 므르……. 이 굴욕은 잊지 않을 테니.

도하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선아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제 아들을 질질 끌었다. 아로가 가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섰다.

“아빠!”

얘가 다른 사람 앞에서 저를 아빠라고 이렇게 자주 부른 적이 있었던가.

“왜.”

“왜 써나 선샘밈한테 인사 안 해요?”

“……뭐?”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제 귀를 파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하루 잘못 들은 말이 너무도 많아서.

“방금 선샘밈이 아빠한테 인사했잖아요. 그럼 아빠도 인사해야지요. 아로는 그렇게 배웠는걸요. 인사는 서로 주고받는 거라고.”

도하는 이마를 탁 쳤다.

미치겠다. 이 녀석 도대체 누구 편인 거야?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병아리같이 작은 여자가 웃음을 꾹 참으며 서 있었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은 최악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들 녀석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으니. 좋은 아빠가 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좋은 어른은 되어야겠지.

“슨승님…….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저 남자 어금니를 악물고 인사하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일까?

선아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 혼자 남은 선아는 그제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저 남자가 진짜 아로 아버님이었다니. 기분 많이 나빴겠지?

살기 어린 눈빛을 떠올리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규칙은 규칙이니까. 조금이라도 아이들이 위험에 노출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아로를 데리러 오는 사람이 얼마 전부터 자주 바뀌는 게 더 신경 쓰였다. 그리고 아까 한껏 어두워진 아로의 표정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빠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걸까?’

아빠라는 사람도 제 아들을 대하는 게 어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물며 아들이 무슨 반인지도 모르다니. 물론 학부형 중에 제 자식의 반을 헷갈리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남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

아로네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선아였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고 예뻐해 마지않는 그녀였지만 아로에게 유독 더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힘든 상황일 수 있음에도 전혀 티를 내지 않는 아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이들도 제가 동정 혹은 연민을 받는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적어도 선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행동을 더욱 조심해야지. 선아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



* * *



유치원을 빠져나와 차로 향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두 부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차 뒷문을 열자, 얼마 전 급하게 설치해 둔 새 카 시트가 눈에 띄었다.

아로는 말없이 그 카 시트를 바라보더니, 도하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카 시트에 올라타 앉았다. 아들을 손수 올려 주려던 도하의 손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후우…….”

애먼 곳에서 힘을 다 빼 버린 도하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 집으로 가는 거예요?”

운전석에 올라타자마자 아들이 물었다.

“그래야지. 왜?”

“토마스 아저씨는 어떻대요?”

몰라 그런 자식.

토마스는 오늘 유치원에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데려가는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어서 이렇게나 깐깐하게 굴 거라는 걸 말이다. 덕분에 도하는 납치범 취급을 당했고, 아들은 제 편을 들어 주지도 않았다.

업무 태만이야, 토마스. 감봉해 주도록 하지.

“입원했단다.”

“……입원이요? 아파서 병원에 가는 거 말인가요?”

“그래. 병원에 가서 하룻밤 아니면 그 이상 자고 오는 거야. 게다가 지금쯤 침대에 누워서 꿀 빨고 있을 거야. 왜 자꾸 묻는 건데?”

“걱정되잖아요.”

아들은 도하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을 걱정할 판이었다.

“다 큰 어른인데 뭐가 걱정이야.”

도하가 툴툴거렸다.

“그럼 지금 토마스 아저씨 보러 가면 안 돼요?”

“싫은데. 뭐가 예쁘다고 그런 녀석을 보러 가.”

그 대답에 아로의 표정에 또다시 그늘이 졌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뭔가를 뒤적거리더니 한눈에 봐도 낡아 빠진 천 같은 걸 꺼내어 둘둘 말아 제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불에 새겨진 공룡 프린트는 빛이 바랜 지 오래였다.

애착…… 이불 같은 건가? 저딴 낡은 이불이 아니고 저한테 좀 매달려 줬으면 하는데, 아들은 그러지 않았다. 하긴,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도하는 고개를 젓더니 결국 아들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다,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가자, 가 보자고.”

“정말요?”

“그래.”

녀석의 얼굴이 대번 밝아졌다.

“그럼 우리 토마스 아저씨가 좋아하는 팥빵도 사 가요, 네?”

“!”

도하는 이제 진짜로 서운해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