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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나는 그대를
“하아.”
쏟아지는 신음을 참으며 도하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바로 앞에 그녀가 있었다.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등을 보이고 선 채. 교탁에 선 도하의 품 안으로 예고도 없이 들어와 노트북을 만지던 솔의 뒷모습을, 가녀린 목덜미를 그는 결국 참지 못했다.
덥석,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솔의 작은 손을 잡아 쥐고,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얇은 허리를 당겨 안았다. 놀랐는지 짧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 솔의 입술을 틀어막고 와락, 끝까지 끌어안았다.
세게. 더 세게.
몸을 더 밀어붙이고 뽀얀 목덜미를 집어삼켰다. 깨물면 터질 것처럼 여린 살결을 입술 새에 가두고 부드럽게 쓸어 보았다. 형언할 수 없이 보드라운 촉감에 혀가 절로 거칠어졌다. 동그랗게 굴려 핥다가 후욱, 단숨에 빨아들이니 솔의 몸이 농밀하게 비틀렸다.
그 작은 움직임이 도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곳이 대학, 강의실만 아니었다면.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벗어 버리고 싶었다. 도하는 타오르는 갈증을 억누르듯 그녀의 목덜미를 짓씹고 또 짓씹으며 정신없이 손을 추켜올렸다. 골반에서부터 빠르게 밀어 올린 손이 주저 없이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자지러지는 신음이 귓가에 쑤시듯 박혔다. 그가 기어이 무방비 상태가 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 순간, 도하의 단단한 손이 바르르 떨리다 차게 굳고 말았다. 높게 터지는 신음과 함께 솔이 무너지듯 교탁을 움켜잡은 바로 그 순간, 보고 만 것이다.
상흔. 여린 손목에 선명히 그어져 있는 두 줄의 상흔을.
……온몸에서 힘이 빠진 그때 챙, 날카로운 마찰 소리와 함께 품 안에 있던 그녀가 깨어져 버렸다. 산산조각 나 버렸다.
유리처럼. 환상처럼.
“하아!”
숨이 막힐 듯한 느낌에 거친 신음을 터뜨린 도하는 번뜩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낯선 매트리스, 낯선 벽지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제야 도하는 자신이 단기 계약 한 오피스텔에 입주했었다는 걸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지금 무슨 꿈을 꾸었는지 깨닫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데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실 4년 전 그때부터 셀 수 없이 많은 밤, 그를 짓이겨 왔던 꿈이었으므로.
‘하지 마세요, 그런 장난.’
아니었다. 그런 게.
그때는 답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분명해져 버렸다.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너를 안고 싶어 한다.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더럽고 한심한 인간이 되어서라도.
나는 너를,
나는 너를 온통,
“미친 거네, 강도하.”
갖고 싶어 한다.
#1. 그대는 나를 보고 있을까?
그 남자다.
복숭아 아이스티를 움켜잡는 솔의 손이 떨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늘 그랬듯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머지않아 쿵쿵 심장 소리 같은 발소리가 옆쪽으로 다가왔다. 털썩. 그가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린다. 스윽. 재킷을 벗는 소리도.
“하아.”
어느새 5월이 끝나 가고 있었다. 산뜻한 벚꽃이 지고 짙은 녹음이 시작되는 계절. 재킷이 조금 더울 만도 하지만, 그래도 더워서 뱉은 한숨이라기엔 너무 깊다.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있는 것을 보니 약간 지쳐 보이기도 한다.
혹시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늘어진 옷처럼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그가 직원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뚜벅, 뚜벅. 다시 정갈한 발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감사합니다.”
여지없이 담백한 목소리도.
“<프라하에서> 입장 15분 전입니다!”
그때, 카페 밖에서 영화관 스태프의 안내 음성이 들렸다. 솔은 이제 막 커피를 받은 그가 조급한 마음에 제대로 마시지도 못할까 신경이 쓰여서 한 번 더 훔쳐보았다. 하지만 그는 조급해하기는커녕 15분이나 남았냐는 듯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빨대를 입에 물었다.
옅은 적색의 건조한 입술. 솔은 그새 남자의 입술을 훔쳐본 자신이 음흉하게 느껴져 얼른 시선을 거두고 책에 고개를 박았다.
벌써 한 달째. 같은 패턴이었다. 솔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그를 만났다. 이곳, 시네하우스에서.
시네하우스는 예술 영화 전용 극장으로, 한 개의 상영관과 오픈형 카페, 갤러리로 이루어져 있는 복합 극장이었다. 본래 서울만 해도 종로, 명동, 광화문 등 곳곳에 있었는데 재정난을 이유로 하나씩 폐관해서 지금은 이곳 역삼점이 유일했다.
여기 또한 언제 폐관될지 모르지만.
“<프라하에서> 입장 시작하겠습니다!”
대기 중인 관객이래야 솔과 남자, 그리고 복도의 여자 둘뿐이었는데 직원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솔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 정도 남은 아이스티를 카페 직원에게 넘겨주고 나왔다. 예술 영화관은 상영관에 스낵이나 음료를 들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 마셨을까? 너무 급하게 마시느라 가슴이 차가워지지는 않았을까?
“감사합니다.”
고개만 까딱하고 나온 솔이 무안할 정도로 남자는 가벼우면서도 정중한 인사를 하고 나왔다.
참, 인사성도 밝지.
솔은 슬쩍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며 표를 들고 직원에게 향했다. 등 뒤로 남자의 존재가 느껴졌다. 은은한 투베로즈 향. 달달한 듯하면서도 코끝이 아릿해지는 남자의 향이었다.
쿵쾅쿵쾅. 이놈의 심장은 또 변태처럼 두근거린다. 고작 향기 하나만으로 그는 솔의 사위를 완전히 지배해 버렸다.
“즐거운 관람 되세요.”
매일 저녁 8시 30분. 솔은 시네하우스를 찾아 8시 50분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영화 제작자인 엄마 윤정의 영향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솔은 음식은 가려 먹어도 영화는 가려 보지 않았다. 모든 장르의 영화를 사랑했다. 영화의 좋고 나쁨은 별개의 문제였다.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꼭 영화였다. 시네하우스에서 영화를 보고 집에 들어간 후에는 꼭 제일 좋아하는 평론가의 블로그에 들어가 리뷰를 읽으며 잠이 들었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영화를 좋아하는 듯했다. 매일 오는 솔과 다르게 일주일에 한두 번만 온다는 것이 차이였지만. 그마저도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걸 두고 복불복이라고 하는 건가?
그가 오면 행운처럼 반가웠고, 아닌 날은 아쉬웠다. 그래도 그 역시 항상 8시 50분 영화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다른 시간대의 영화를 보면 같은 날 영화관을 찾아도 만나지 못할 수 있었으니까.
언제부턴가 그랬다. 그를 마주치는 것이 하나의 낙이 되었다. 얼굴밖에 모르는 그를.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그새 정이라도 든 건지 자꾸 신경이 쓰였고 그의 정갈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점점 더 좋아졌다. 날카로운 듯 잘생긴 외모도, 책을 볼 때의 깊이 있는 눈동자도, 그리고 무엇보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녀를 묘하게 의식하는 듯한 느낌도.
“……!”
그때, 솔의 심장이 덜컹,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왜…… 여기에?’
늘 맨 왼쪽 자리에 앉던 그가, 오늘은 가운데 자리에 앉은 것이다. 솔이 항상 앉는 자리에서 한 칸 떨어진 자리였다. 분명히 하나의 자리가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지만, 솔은 그가 바로 옆에 앉은 것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미칠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한 번도 가장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던 그였다. 관객은 그들 포함 오직 넷뿐이고 다른 두 명의 여자는 앞쪽에 있었기에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순수하게 왼쪽 자리가 불편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오늘은 가운데서 보고 싶은 마음에 옮긴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확률이 제일 컸다. 그런데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이유는 방금 마신 복숭아 아이스티가 너무 차갑기 때문이리라.
솔은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안정시키려 노력하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
숨을 쉬면 들릴 것 같다. 고요한 정적과 함께 살을 에는 떨림이 솔을 감쌌다.
그는 아까처럼 등받이에 등을 푸욱 기대고 편안하게 앉아 있었는데, 솔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미동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영화는 이미 한참이나 진행된 후였다.
솔은 어둠을 방패 삼아 그를 훔쳐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스크린만 응시했다. 옆자리인 만큼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티가 날 것 같아서였다.
심장에 자그마한 개미가 기어 다니는 기분. 불쾌하면서도 간질거리는 기분. 솔은 한동안 그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 ◎ ●
혹시 불편하려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저질러 버렸으니.
그녀는 체육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덕분에 시야가 조금 더 뒤에 있던 도하는 그녀를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어깨선에서 조금 더 내려오는 천연 갈색 머리. 하얀 블라우스에 네이비색 치마바지. 곧게 모은 두 발. 그리고…… 수수한 바디 워시 향기.
피식. 다문 입술 새로 한 줄기 바람이 새어 나온다. 이제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빡빡했던 오늘 하루가 증발되어 버리는 것만 같은 시원함에서 나온 웃음. 그래도 그녀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제법 잘한 편이다. 도하는 일부러라도 그녀 앞에서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첫 만남 때의 영향이었다.
‘왜?’
한 달 전, 시네하우스 카페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린 티가 나는 둘이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갓 새내기가 된 것 같은 대학생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이 재미있어서 도하는 대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이유가 뭔데?’
헤어지자고 하는 남자에게 그녀는 이유를 물었다. 진부한 드라마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네가 너무 부담스러워.’
남자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내가 왜?’
‘너무 주기만 하잖아.’
웃음이 났다. 어린아이들이 그런 대화를 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주기만 하는 게 이유라니, 보나 마나 다른 여자가 생겨 핑계를 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너도 주면 되잖아.’
한참 만에 그녀가 뱉은 말이었다. 남자와 너, 너 하는 것을 봐서 둘은 동갑인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그때 이질감이 들었다. 그녀가 노안이라는 게 아니라, 분위기가 그랬다. 어린 외모에 비해 그녀는 왠지 깊어 보였다.
‘내가 주는 게 버거우면 너도…….’
‘주고 싶지 않아.’
확실히 일반적인 대화는 아니었다. 니가 싫어져서, 다른 여자가 생겨서, 혹은 니가 곤약 같아서 등. TV 드라마의 뜨거운 한 장면을 기대했던 도하는 김이 새는 한편 묘하게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벌써 다 마신 것도 잊고 계속해서 빨대를 빨며 본격적으로 그들의 이별을 시청했다.
‘왜?’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또 짧은 웃음이 샜다.
그래, 사랑이란 말은 모를수록 더 쉬운 법이니까.
‘그러니까, 너를 위해서도…….’
‘알겠어.’
뒤늦게 이어지려는 남자의 구구절절한 포장을 여자는 용납지 않았다.
‘그렇게 싫은데, 3년이나 어떻게 참았어?’
그저 짧은 웃음을 흘리고.
‘조금 더 일찍 말해 줬으면 좋았겠지만.’
앞에 놓인 복숭아 아이스티를 쪽쪽 빨아들이며, 좀 전보다 가볍고 따뜻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말해 줘서 고마워.’
그러자 남자는 마음이 조금 약해졌는지 그윽한 눈길로 여자를 보았다. 금세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3년이라면 그래, 그럴 만도 하겠다.
도하도 다시 엷은 웃음을 지으며 얼음만 남은 컵을 툭 내려놓았을 때였다.
#프롤로그. 나는 그대를
“하아.”
쏟아지는 신음을 참으며 도하는 주먹을 그러쥐었다.
바로 앞에 그녀가 있었다. 체온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등을 보이고 선 채. 교탁에 선 도하의 품 안으로 예고도 없이 들어와 노트북을 만지던 솔의 뒷모습을, 가녀린 목덜미를 그는 결국 참지 못했다.
덥석,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솔의 작은 손을 잡아 쥐고,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얇은 허리를 당겨 안았다. 놀랐는지 짧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리는 솔의 입술을 틀어막고 와락, 끝까지 끌어안았다.
세게. 더 세게.
몸을 더 밀어붙이고 뽀얀 목덜미를 집어삼켰다. 깨물면 터질 것처럼 여린 살결을 입술 새에 가두고 부드럽게 쓸어 보았다. 형언할 수 없이 보드라운 촉감에 혀가 절로 거칠어졌다. 동그랗게 굴려 핥다가 후욱, 단숨에 빨아들이니 솔의 몸이 농밀하게 비틀렸다.
그 작은 움직임이 도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곳이 대학, 강의실만 아니었다면.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거추장스러운 옷들을 벗어 버리고 싶었다. 도하는 타오르는 갈증을 억누르듯 그녀의 목덜미를 짓씹고 또 짓씹으며 정신없이 손을 추켜올렸다. 골반에서부터 빠르게 밀어 올린 손이 주저 없이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자지러지는 신음이 귓가에 쑤시듯 박혔다. 그가 기어이 무방비 상태가 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 순간, 도하의 단단한 손이 바르르 떨리다 차게 굳고 말았다. 높게 터지는 신음과 함께 솔이 무너지듯 교탁을 움켜잡은 바로 그 순간, 보고 만 것이다.
상흔. 여린 손목에 선명히 그어져 있는 두 줄의 상흔을.
……온몸에서 힘이 빠진 그때 챙, 날카로운 마찰 소리와 함께 품 안에 있던 그녀가 깨어져 버렸다. 산산조각 나 버렸다.
유리처럼. 환상처럼.
“하아!”
숨이 막힐 듯한 느낌에 거친 신음을 터뜨린 도하는 번뜩 눈을 떴다.
낯선 천장, 낯선 매트리스, 낯선 벽지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그제야 도하는 자신이 단기 계약 한 오피스텔에 입주했었다는 걸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지금 무슨 꿈을 꾸었는지 깨닫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데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실 4년 전 그때부터 셀 수 없이 많은 밤, 그를 짓이겨 왔던 꿈이었으므로.
‘하지 마세요, 그런 장난.’
아니었다. 그런 게.
그때는 답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분명해져 버렸다. 더는 부인할 수 없었다.
나는 너를 안고 싶어 한다.
나조차도 믿을 수 없는 더럽고 한심한 인간이 되어서라도.
나는 너를,
나는 너를 온통,
“미친 거네, 강도하.”
갖고 싶어 한다.
#1. 그대는 나를 보고 있을까?
그 남자다.
복숭아 아이스티를 움켜잡는 솔의 손이 떨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늘 그랬듯 낮고 울림 있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머지않아 쿵쿵 심장 소리 같은 발소리가 옆쪽으로 다가왔다. 털썩. 그가 자리에 앉는 소리가 들린다. 스윽. 재킷을 벗는 소리도.
“하아.”
어느새 5월이 끝나 가고 있었다. 산뜻한 벚꽃이 지고 짙은 녹음이 시작되는 계절. 재킷이 조금 더울 만도 하지만, 그래도 더워서 뱉은 한숨이라기엔 너무 깊다.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있는 것을 보니 약간 지쳐 보이기도 한다.
혹시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늘어진 옷처럼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그가 직원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뚜벅, 뚜벅. 다시 정갈한 발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감사합니다.”
여지없이 담백한 목소리도.
“<프라하에서> 입장 15분 전입니다!”
그때, 카페 밖에서 영화관 스태프의 안내 음성이 들렸다. 솔은 이제 막 커피를 받은 그가 조급한 마음에 제대로 마시지도 못할까 신경이 쓰여서 한 번 더 훔쳐보았다. 하지만 그는 조급해하기는커녕 15분이나 남았냐는 듯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빨대를 입에 물었다.
옅은 적색의 건조한 입술. 솔은 그새 남자의 입술을 훔쳐본 자신이 음흉하게 느껴져 얼른 시선을 거두고 책에 고개를 박았다.
벌써 한 달째. 같은 패턴이었다. 솔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그를 만났다. 이곳, 시네하우스에서.
시네하우스는 예술 영화 전용 극장으로, 한 개의 상영관과 오픈형 카페, 갤러리로 이루어져 있는 복합 극장이었다. 본래 서울만 해도 종로, 명동, 광화문 등 곳곳에 있었는데 재정난을 이유로 하나씩 폐관해서 지금은 이곳 역삼점이 유일했다.
여기 또한 언제 폐관될지 모르지만.
“<프라하에서> 입장 시작하겠습니다!”
대기 중인 관객이래야 솔과 남자, 그리고 복도의 여자 둘뿐이었는데 직원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솔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 정도 남은 아이스티를 카페 직원에게 넘겨주고 나왔다. 예술 영화관은 상영관에 스낵이나 음료를 들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 마셨을까? 너무 급하게 마시느라 가슴이 차가워지지는 않았을까?
“감사합니다.”
고개만 까딱하고 나온 솔이 무안할 정도로 남자는 가벼우면서도 정중한 인사를 하고 나왔다.
참, 인사성도 밝지.
솔은 슬쩍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며 표를 들고 직원에게 향했다. 등 뒤로 남자의 존재가 느껴졌다. 은은한 투베로즈 향. 달달한 듯하면서도 코끝이 아릿해지는 남자의 향이었다.
쿵쾅쿵쾅. 이놈의 심장은 또 변태처럼 두근거린다. 고작 향기 하나만으로 그는 솔의 사위를 완전히 지배해 버렸다.
“즐거운 관람 되세요.”
매일 저녁 8시 30분. 솔은 시네하우스를 찾아 8시 50분 영화를 보았다.
그 영화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영화 제작자인 엄마 윤정의 영향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솔은 음식은 가려 먹어도 영화는 가려 보지 않았다. 모든 장르의 영화를 사랑했다. 영화의 좋고 나쁨은 별개의 문제였다. 하루 일과의 마무리는 꼭 영화였다. 시네하우스에서 영화를 보고 집에 들어간 후에는 꼭 제일 좋아하는 평론가의 블로그에 들어가 리뷰를 읽으며 잠이 들었다.
남자도 마찬가지로 영화를 좋아하는 듯했다. 매일 오는 솔과 다르게 일주일에 한두 번만 온다는 것이 차이였지만. 그마저도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걸 두고 복불복이라고 하는 건가?
그가 오면 행운처럼 반가웠고, 아닌 날은 아쉬웠다. 그래도 그 역시 항상 8시 50분 영화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다른 시간대의 영화를 보면 같은 날 영화관을 찾아도 만나지 못할 수 있었으니까.
언제부턴가 그랬다. 그를 마주치는 것이 하나의 낙이 되었다. 얼굴밖에 모르는 그를.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그새 정이라도 든 건지 자꾸 신경이 쓰였고 그의 정갈하고 묵직한 분위기가 점점 더 좋아졌다. 날카로운 듯 잘생긴 외모도, 책을 볼 때의 깊이 있는 눈동자도, 그리고 무엇보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녀를 묘하게 의식하는 듯한 느낌도.
“……!”
그때, 솔의 심장이 덜컹,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왜…… 여기에?’
늘 맨 왼쪽 자리에 앉던 그가, 오늘은 가운데 자리에 앉은 것이다. 솔이 항상 앉는 자리에서 한 칸 떨어진 자리였다. 분명히 하나의 자리가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지만, 솔은 그가 바로 옆에 앉은 것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미칠 것 같았다.
한 달 동안 한 번도 가장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던 그였다. 관객은 그들 포함 오직 넷뿐이고 다른 두 명의 여자는 앞쪽에 있었기에 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왜?
순수하게 왼쪽 자리가 불편하거나 아무 생각 없이 오늘은 가운데서 보고 싶은 마음에 옮긴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확률이 제일 컸다. 그런데도 가슴이 벌렁거리는 이유는 방금 마신 복숭아 아이스티가 너무 차갑기 때문이리라.
솔은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안정시키려 노력하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
숨을 쉬면 들릴 것 같다. 고요한 정적과 함께 살을 에는 떨림이 솔을 감쌌다.
그는 아까처럼 등받이에 등을 푸욱 기대고 편안하게 앉아 있었는데, 솔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미동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영화는 이미 한참이나 진행된 후였다.
솔은 어둠을 방패 삼아 그를 훔쳐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스크린만 응시했다. 옆자리인 만큼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티가 날 것 같아서였다.
심장에 자그마한 개미가 기어 다니는 기분. 불쾌하면서도 간질거리는 기분. 솔은 한동안 그 기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 ◎ ●
혹시 불편하려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저질러 버렸으니.
그녀는 체육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덕분에 시야가 조금 더 뒤에 있던 도하는 그녀를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있었다.
어깨선에서 조금 더 내려오는 천연 갈색 머리. 하얀 블라우스에 네이비색 치마바지. 곧게 모은 두 발. 그리고…… 수수한 바디 워시 향기.
피식. 다문 입술 새로 한 줄기 바람이 새어 나온다. 이제 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났다.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빡빡했던 오늘 하루가 증발되어 버리는 것만 같은 시원함에서 나온 웃음. 그래도 그녀 앞에서는 표정 관리를 제법 잘한 편이다. 도하는 일부러라도 그녀 앞에서 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첫 만남 때의 영향이었다.
‘왜?’
한 달 전, 시네하우스 카페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린 티가 나는 둘이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갓 새내기가 된 것 같은 대학생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이 재미있어서 도하는 대놓고 지켜보고 있었다.
‘이유가 뭔데?’
헤어지자고 하는 남자에게 그녀는 이유를 물었다. 진부한 드라마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네가 너무 부담스러워.’
남자는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내가 왜?’
‘너무 주기만 하잖아.’
웃음이 났다. 어린아이들이 그런 대화를 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주기만 하는 게 이유라니, 보나 마나 다른 여자가 생겨 핑계를 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너도 주면 되잖아.’
한참 만에 그녀가 뱉은 말이었다. 남자와 너, 너 하는 것을 봐서 둘은 동갑인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그때 이질감이 들었다. 그녀가 노안이라는 게 아니라, 분위기가 그랬다. 어린 외모에 비해 그녀는 왠지 깊어 보였다.
‘내가 주는 게 버거우면 너도…….’
‘주고 싶지 않아.’
확실히 일반적인 대화는 아니었다. 니가 싫어져서, 다른 여자가 생겨서, 혹은 니가 곤약 같아서 등. TV 드라마의 뜨거운 한 장면을 기대했던 도하는 김이 새는 한편 묘하게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벌써 다 마신 것도 잊고 계속해서 빨대를 빨며 본격적으로 그들의 이별을 시청했다.
‘왜?’
‘너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또 짧은 웃음이 샜다.
그래, 사랑이란 말은 모를수록 더 쉬운 법이니까.
‘그러니까, 너를 위해서도…….’
‘알겠어.’
뒤늦게 이어지려는 남자의 구구절절한 포장을 여자는 용납지 않았다.
‘그렇게 싫은데, 3년이나 어떻게 참았어?’
그저 짧은 웃음을 흘리고.
‘조금 더 일찍 말해 줬으면 좋았겠지만.’
앞에 놓인 복숭아 아이스티를 쪽쪽 빨아들이며, 좀 전보다 가볍고 따뜻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말해 줘서 고마워.’
그러자 남자는 마음이 조금 약해졌는지 그윽한 눈길로 여자를 보았다. 금세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3년이라면 그래, 그럴 만도 하겠다.
도하도 다시 엷은 웃음을 지으며 얼음만 남은 컵을 툭 내려놓았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