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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너한테 더 주지 않게 해 줘서.’

여자의 잔잔한 목소리가 맑은 호숫가의 물비늘처럼 일렁였다.

‘이제 아무에게도 더 주지 않게 해 줘서.’

‘…….’

‘더는 바보가 되지 않게 해 줘서.’

도하의 손이 멈칫했다.

‘잘 가.’

여자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한참을 망설이던 남자가 떠났다. 여자는 푸욱 고개를 숙였다.

앞에서는 괜찮은 척하더니 뒤에서 울려는 건가.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애들 연애에는 이제 관심 끄자는 생각으로 휴대폰에 시선을 꽂았다. 저녁 8시 45분. 영화가 상영되기까지는 아직 5분이 남아 있었고. 그리고…….

저들이 이별한 시간은 15분이었다.

툭.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가 안쓰러웠는지 직원이 티슈 몇 장을 테이블 위에 놓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하, 저건 또 무슨 오지랖인가 싶어 실소가 났다. 같은 또래라고 공감해 주는 건가?

그런데.

“……!”

마주쳤다.

제 앞에 놓인 티슈를 보고 고개를 든 여자가 딱딱하게 굳은 눈으로 도하를 보고 있었다.

‘나…… 아닌데.’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애매한 순간이었다. 그녀가 티슈를 구길 듯 움켜쥐고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타악.

테이블에 티슈를 소리 나게 내려놓은 그녀는 무덤덤한 듯 건조한 눈동자로, 그러나 다분히 화가 난 어조로 말했다.

‘성의는 감사하지만. 저는 울지 않으니까.’

눈물이라곤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눈동자.

‘그쪽도 웃지 마세요.’

그 눈동자가 뇌리에 박혔다.

‘저기.’

뒤늦게 해명을 해 보려 했지만 그녀는 눈 깜짝할 새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타이밍을 놓친 도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였다. 그날 이후 매주 한 번씩은 영화관에서 꼭 마주치고 같은 시간, 같은 줄에서 영화를 보았음에도 그녀에게 다가가지도, 마음껏 미소 짓지도 못한 것은.

의도치 않게 내 미소가 네 아픔의 일부가 돼 버렸으니까. 혹여나 내 경솔함이 네가 원치 않는 기억을 불러올지도 모르니까.

― 그럴 때마다, 저는 이렇게 주문을 외워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도하의 귓가에 스크린 속 여배우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 나는 그대를 좋아한다. 그리고…….

달콤한 듯 차가운 목소리. 그녀를 닮은 목소리였다.

― 그대도 나를 좋아한다.

도하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동시에 미동도 없던 그녀의 손가락이 약간 움직이는 게 보였다. 공기 중에 떠도는 것은 차가운 적막이 전부인데 그 손짓 하나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은 이제 산뜻한 벚꽃이 지고 짙은 녹음이 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대는 나를 좋아한다.

짙은, 너무도 짙은.

― 그대는 나를 좋아한다.

너라는 계절의 녹음이.



○ ◎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6월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영화관에 도착한 도하가 텅 빈 카페를 보며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끼고 있을 때. 차분한 발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그녀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도하는 오히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때마침 드르르르,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타이밍 좋게 걸려 온 팀장의 전화였다.

“네, 팀장님.”

일을 하는 척 노트북을 두드리며 시선을 들던 도하가 흠칫 굳었다.

베이지색 민소매 플라워 원피스에 살구색 구두. 그리고 리본 모양의 핀으로 살짝 잡은 반묶음 머리.

아. 예쁘다.

그녀는 평소에도 잘 차려입긴 했지만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잘 잡힌 원피스의 라인은 적당한 굴곡이 있는 그녀의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내 주었고, 무릎을 살짝 웃도는 길이는 단정한 듯 관능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왠지 죄의식이 들어 얼른 시선을 돌려 보지만.

“금방…… 마무리해서…… 보내겠습니다.”

말마디 사이사이에 공백이 생긴다. 긴장으로 일렁이는 목울대를 들킨 것 같다.

도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일에 집중하는 척했다. 하지만 화면은 백지상태에서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너에겐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을까? 혹시 소개팅이라도 하고 온 건가? 그렇다면 어떡하지? 더 늦기 전에, 오늘은 다가가 볼까?

별의별 생각들에 잠겨 있던 그때, 그녀가 복숭아 아이스티를 받아 들고 그의 옆쪽으로 다가왔다. 상영관에서와 마찬가지로 한 자리를 띄워 놓은 옆 옆 자리.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상영관에 들어가면 정숙해야 하니 말 붙이기가 더 어려워진다.

도하는 옅은 숨을 길게 빼었다. 마음을 먹었더니 그렇잖아도 두근거리던 심장이 배로 뛰는 기분이었다. 사실 상영관에서 자리를 옮기는 용기를 냈던 후로, 도하는 그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안녕하세요.’

뜬금없이 그간 안 하던 인사를 건네 보기도 했고.

‘오늘 영화는 뭐예요?’

시간표가 극장 입구에 빤히 붙어 있음에도 못 본 척 물어보기도 했고.

‘추우시면 이거라도 입으실래요?’

영화를 보면서 오들오들 떠는 그녀에게 미친 척 재킷을 건네 보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안녕하세요.’

‘<중경삼림>이요.’

‘아, 감사합니다.’

단답 그 자체. 조금의 수식어도 덧붙이지 않았고, 다른 무언가를 물어 오지도 않았다. 아무 의미 없는 스몰토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고백의 성공 여부에도 확률이 있다면 거절당할 확률이 99.9프로는 되어 보였다. 그러나 절망도 잠시, 도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우스워서 실소가 났다.

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말 내가?

믿기 어려웠지만 처음이었다. 이런 사소한 감정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고 흔들리는 자신을 보는 것이. 이전까지 도하에게 ‘사소한 감정’이란 호르몬 이상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저…….”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저기요.”

천하의 강도하도 정체불명의 거대한 호르몬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미안, 너무 늦었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들기 전까지는.

“차가 막혀서. 그래도 다행히 안 늦었네.”

그녀는 땀에 젖은 셔츠를 펄럭이며 제 앞에 앉는 남자를 보곤 애써 웃음 지었다.

“아, 잠시만요.”

그러곤 상당히 난감한 표정으로 도하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로…….”

“아.”

너무 갑자기 닥친 상황. 그것도 예기치 못한 상황. 말문이 막힌 도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웬만한 스몰토크는 다 써 버린 상황이라 곧장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와중에 그녀의 앞에 앉은 남자는 무슨 일이냐는 듯,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보고 있었다.

“여기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뭐였죠?”

한참 만에 생각해 낸 게 고작 와이파이라니. 내가 이렇게 찌질한 남자였던가?

목부터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감추며 도하는 빙긋, 사무적인 미소를 띠어 보였다.

“거기 영수증 밑에 쓰여 있을 거예요.”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하곤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더는 말 걸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 같았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는 직원에게 물어야지 왜 나한테 묻느냐고 따지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정말이지 최악의 순간이다. 30년 인생에 이런 수치는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었다. 강도하에게 연애라는 건 계절 같은 것이었으니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때가 되면 찾아오는.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바뀌는.

그는 일평생 단 한 번도 누군가를 간절하게 원해 본 적 없었다. 처음 사귄 사람은 있어도 ‘첫사랑’은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먼저 신경 쓰이고, 먼저 설레고, 먼저 애가 닳아 미칠 것 같았던 근 두 달이 첫사랑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남자가 있었다니.

그렇잖아도 처음 겪어 보는 감정에 그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고 있었던 도하의 눈앞에 새카만 암전이 닥쳐 버린 것 같았다.

“<냉정과 열정 사이> 입장 시작하겠습니다!”

그녀와 남자가 먼저 일어났다. 손을 잡지 않는 것으로 봐서 아직 연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아무 사이가 아닌 것 같지도 않았다. 종종 도하에게 닿는 남자의 눈빛이 서늘했으니까.

‘뭘 봐?’

도하도 짙은 눈썹을 모으며 그를 쏘아보았다. 전 남자 친구보다 외모나 분위기가 더 성숙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도하보다는 한참 어려 보였는데 경계하는 듯 힐긋거리는 게 같잖았다. 자신보다 잘생긴 것 같지도 않았다.

왜, 그런데 왜.

태어나 처음 자존심이란 것에 상처를 입어 본 도하는 허탈한 실소를 흘렸다. 이런 마음으로는 도저히 영화를 볼 수 없을 것 같아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노트북을 챙겨 일어섰다. 어디로든 도망쳐야 했던 그때, 타이밍을 아는 팀장님이 절묘하게 또 전화를 걸어 주었다.

“네, 팀장님. 지금 가겠습니다.”

― 뭔 소리야? 원고를 보내라니까 왜 니가…….

뚝.

전화를 끊은 도하는 그녀가 줄을 선 상영관 앞에서 몸을 꺾었다. 찰나지만 그녀가 돌아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왜…….’

도하의 걸음이 멈칫했다.

낯설었다. 그런 눈빛. 그런 표정. 항상 벽을 치듯 차갑고 딱딱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그 순간에는 심해의 적막처럼 무거운 눈동자로 그를 보고 있었다.

너무 깊고, 고요하다.

그녀는 제 어깨에 팔을 올리는 남자 때문에 금방 등을 돌려 상영관으로 들어갔지만 혼자 남은 도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붙박인 듯 움직이지 못했다. 심장이 그녀의 무거운 눈동자를 이고 있는 것처럼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는다.

마치.

이별, 한 것처럼.



○ ◎ ●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영화를 보는 도중 진석이 속삭이듯 물어 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솔은 몸을 약간 떨어뜨리며 엷게 웃었다.

하필이면 오늘. 하필이면.

급한 일이라도 생긴 듯 영화도 보지 않고 떠나 버린 그의 뒷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이미 스크린은 온통 그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어서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기요.’

처음이었다. 그런 말은. 항상 가볍게 인사만 하거나 용건부터 툭 꺼내 놓고 마는 그였는데. 오늘은 그녀를 불렀다.

이솔이라는 사람을.

‘여기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뭐였죠?’

정말 궁금한 게 그것이었을까. 이상하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석이 왔을 때 당황하던 표정과 짧은 적막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 사람, 정말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후우.”

나지막한 숨이 새어 나왔다. 진석은 눈치채지 못하고 다시 영화에 빠져 있었다.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원망스러웠다.

진석을 여기서 만난 것은 예정되어 있던 일이 아니었다. 경영학부생인 솔은 영화영상학과 선배인 진석과 같은 영화 동아리였고, 진석의 추천으로 영화과 전공인 <서양 영화 분석>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수업에서 기말고사 대체로 <냉정과 열정 사이> 영화의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 주었고, 혹시나 싶어 시네하우스의 시간표를 살펴보았는데, 운 좋게도 상영이 잡혀 있었다. 솔은 곧바로 영화를 예매했다.

만약 와 준다면. 와 주기만 한다면.

‘이번엔 꼭…… 말해야지.’

이번이 마음 편히 시네하우스를 올 수 있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