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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1학년 1학기를 마친 솔은 돌아오는 금요일에 이사가 잡혀 있었다. 정확히 말해서는 ‘독립’이었다. 역삼동 본가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던 솔은 1학기만 마치고 학교가 있는 상계동으로 독립하기로 했었고 바로 들어갈 수 있게 준비를 다 마쳐 놓은 상태였다.

물론 이사를 간다고 해도 시네하우스는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었지만, 집에서 코앞이었던 전과 다르게 전철로 장거리 이동을 해야 해서 자주 오기는 힘들 것 같았다. 더구나 생활비는 스스로 벌겠다고 선언한 터라 방학 내내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다. 만일 아르바이트가 평일 저녁으로 잡히면 그를 볼 수 있는 확률은 더 적어졌다.

‘저…… 저는……. 아니야.’

‘저는 이솔이라고 해요. 이것도 아닌데.’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아, 어떡하지.’

그래서 솔은 오늘을 결전의 날로 잡았다.

안 입던 원피스를 사서 입고, 제일 아끼던 구두도 신고,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큰 리본 머리핀으로 반묶음도 해 봤다. 평소에는 가볍게만 하던 화장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한 듯 안 한 듯 내추럴 메이크업’을 인터넷에서 얼마나 뒤져 봤는지 모른다.

그런데 준비를 끝내고 막 집에서 출발했을 때 진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 솔아, 너 오늘 <냉정과 열정 사이> 본다고 했지? 어디서 보는 거야?

‘시네하우스요. 왜요?’

― 아, 그래? 나 안 그래도 그 근방인데 괜찮으면 같이 봐도 될까? 오늘이 마감일인데 미루다 미루다 아직도 못 봤거든.

‘아…….’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기말고사 대체 과제인 데다가, 솔이 시네하우스에 전세를 낸 것도 아니었기에 그가 오든 말든 상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세요.’

다만 제발 ‘친한 척’은 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그는 오자마자 함박 미소를 지으며 남자 친구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네 오는 것이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석이 오기 전에 그에게 말을 건넸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오늘 꾸미는 것에 신경을 쓰느라 평소보다 늦어 버렸고, 진석이 생각보다 일찍 와서 말을 건넬 타이밍조차 없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선배, 죄송해요.”

“응?”

“저 일이 생겨서 먼저 나가 볼게요. 잘 보고 가세요.”

결국 솔은 영화 상영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벌써 30분은 진행된 후였기에 그는 이미 떠나고 없겠지만, 왠지 오늘이 아니면 만나기 힘들 것 같은 불안감에 시네하우스 근방을 뒤지고 또 뒤졌다.

여기 어디 있을 거 같은데. 제발 어디 있었으면 좋겠는데.

사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카페에도, 어떤 영화관에도, 어떤 음식점에도, 그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

‘안녕하세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오늘 영화는 뭐예요?’

어쩌면 그도, 같은 마음이지는 않았을까.

‘추우시면 이거라도 입으실래요?’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불가능한 희망이 뜬금없이 차올라서.

‘저기요.’

얼마 되지도 않는 그 문장들이 눈물처럼 차올라서.

― 그대는 나를 좋아한다.

숨이 턱― 막혀 버렸다.

마치.

이별, 한 것처럼.



○ ◎ ●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날 이후 솔은 그를 만나지 못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시네하우스를 찾았지만 그는 다른 일정이 있는지 오지 않았고, 그다음 날은 솔이 이사를 했다. 주말에는 친한 친구의 생일 기념으로 여행을 다녀와서 들를 수 없었고, 그다음 주 월요일에는…….



「임대차 계약 만료로 폐관합니다. 그동안 많은 사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시네하우스」



시네하우스가 떠나 버렸다.

더 이상 우연히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혹시나 싶어 가끔 시네하우스 건물의 카페나 음식점을 들러 보긴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런 스스로가 헛된 것에 집착하는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없던 사이였으니까.

그냥, 스치는 인연 같은 거였으니까.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키워드는 ‘운명적 사랑’이 아니다. ‘복원’과 ‘재생’이다.」



뒤늦게 감상문을 제출한 솔은 늘 그랬듯 가장 좋아하는 평론가의 블로그에서 리뷰를 읽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영화의 말미, 절대 복원이 불가능할 것만 같던 작품을 새로이 탄생시키는 준세이의 모습은 ‘사랑도 얼마든지 재생이 가능하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선사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재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섬세하고도 끈질긴 노력을 기반으로 하는가…….」



그런데 왜일까.



「준세이가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피렌체의 공연이 실은 아오이가 부탁한 공연이었다는 것, 아오이가 포기한 사랑을 준세이가 끝까지 잡아 내는 엔딩은 적극적인 행동력의 단적인 예로…….」



그를 찾지 못했을 때도, 시네하우스가 폐관했을 때도, 그를 체념했을 때도 나지 않던 눈물이 지금에야 흐르는 것은.



「언뜻 ‘운명적 사랑’을 말하는 것 같은 이 작품은, 사실 두 남녀의 처절하고도 치열한 ‘노력형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한 번이라도 노력했다면.



「― S무비, 강도하」



나는 그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저…… 제 이름은, 이솔이에요.’

그리고 알게 될 수 있었을까?

‘그쪽 이름은…… 뭐예요?’

당신의 이름. 그리고 당신이라는 사람을.



#2. 그대는 나를 기억할까?


4년 후.

“쏠!”

자그마한 발로 새하얀 눈을 걷어 내고 있던 솔이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 여진이 해사하게 웃으며 뛰어오고 있었다.

“성공했어?”

“너는?”

2월 15일 오늘은 대망의 수강 신청이 있는 날. 각기 다른 컴퓨터실에서 수강 신청을 한 솔과 여진은 경영관 앞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한 개 빼곤 다. 그래도 그건 그냥 끼워 넣은 거라 바꾸면 돼.”

여진이 먼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어쩐지 함박 미소를 띠고 오더라니, 솔도 기분 좋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두 개 실패했는데 괜찮아. 제일 중요한 걸 성공했으니까.”

“뭐? <영화와 문화>?”

“응. 대기 1번 떠서 걱정했는데 5분 만에 빠져서. 천만다행이야.”

솔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4학년 1학기를 마지막으로 조기 졸업을 생각하고 있는 솔은 수강 신청이 어느 때보다 중요했지만 <영화와 문화> 한 과목을 무사히 신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렇게 좋아하더니. 드디어 강도하 실물 보겠네?”

이유는 오직 하나, 강도하.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솔의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였던 평론가 강도하가 맡은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도하는 솔이 다니는 S대 교수가 아니었다. S대는 물론 어떤 학교에서도 강의를 한 적이 없었다. 그게 어디 강의뿐이랴. 서른 살 때 이미 ‘대한민국에서 가장 신뢰도 높은 평론가 1위’로 꼽힌 그는 이후 라디오, TV 프로그램, 인터넷 방송 등 온갖 매체에서 섭외를 받았지만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이름을 날리는 다른 평론가들과 다르게 집필 외에는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 본업인 기자와 블로거, 교양서적 작가로만 활동할 뿐이었다.

그는 오직 글로써만 자신을 드러냈고, 기사나 책에 사진을 싣지도 않았다. 그래서 영화계 관계자가 아니고서야 그의 얼굴을 알 수는 없었다. 그랬던 그가 무슨 일인지 갑자기 S대 초빙 교수로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마침 솔의 마지막 학기에.

이게 운명이 아니면 무얼까?

“강도하, 대머리 아저씨라는 말도 있던데. 그래도 좋을 것 같아?”

여진이 쿡쿡 웃으며 솔을 놀리듯 물었다.

“대머리 아저씨건 백발의 할아버지건 뭐 어때? 난 그 사람의 글이 좋은 건데.”

아니, 실은 그 사람 자체가 좋았다. 남자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무려 7년 동안 토씨 하나까지 덕질한 결과, 그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삶에 대한 태도까지 알게 되었고 그것들이 솔에게 많은 교훈과 위안을 주었기 때문이다.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야.”

이제 그 멋진 사람의 마음을 글이 아닌 말로 들을 수 있다니. 마음이 벅차고도 남았다.

“호는 성공했을까? 왜 이렇게 안 나오지? 우리가 가 보자.”

그런데. 행복에 겨운 미소를 좀처럼 감추지 못했던 그때.

“솔?”

멀거니 한곳을 보고 있던 솔이 흠칫 놀라며 여진을 보았다.

“가자니까 뭐 해?”

“……어, 어.”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또 쓸데없는 주책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절로 돌아가는 시선은 막지 못했다.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듯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무심코 고개를 돌렸던 곳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해학관으로 올라가는 높은 계단 위. 약간 느슨한 셔츠에 그레이 슈트를 입고 있던 남자. 벽에 기대어 서리 같은 담배 연기를 흘리던 남자. 무감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던 남자. 그 남자는 분명히 ‘그’였다.

‘그쪽도 웃지 마세요.’

웃지 말랬다고 정말 떠날 때까지 짧은 미소 한번 보여 준 적 없던 그.

‘저 사람이 왜 여기에…….’

하지만 역시나. 다시 돌아본 곳에 그는 없었다. 텅 빈 자리에는 연약한 햇볕만 쏟아지고 있었다. 햇볕에 반사된 새하얀 눈이 투명한 막 같은 걸 만들어 냈다. 신기루처럼. 환상처럼.

‘역시…… 그럴 리가 없잖아.’

드문 일은 아니었다. 솔은 지난 4년간 종종 이런 환영에 휩싸이곤 했다.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인가 보다.

고작 두 달의 인연을 4년 동안이나 잊지 못하는 자신이 이제는 비정상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후우.”

망연히 바라본 곳에 희끗한 눈발이 흩날렸다. 눈은 그쳤지만 덧없이 부는 한 줄기 바람 때문이었다.

그래. 그저, 한 줄기 바람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