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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몰라 1권
1화
#프롤로그
“어떻게 오셨죠?”
데스크에 있는 예쁘장한 직원이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산영을 보고 친절하게 물었다.
“저기,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간데 디피(display) 확인하러 왔거든요? 오프닝에 참석을 못해서 그러는데……. 입장료를 따로 내야하나요?”
딱히 못 낼 것도 없었지만 출품까지 해놓고 입장료를 내자니 뭔가 그랬다. 산영이 어정쩡하게 웃어 보이자 직원의 눈초리가 설핏 가늘어진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네? 아, 강산영이라고 합니다.”
흘깃 명단을 훑어본 직원이 그래도 뭔가 마음에 차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자못 고자세로 다시 물었다.
“실례지만 어떤 작품을 내셨어요?”
실례인걸 알면서 왜 묻는 것일까. 어지간히 어설프게 보였는지 어려보이는 직원의 눈빛이 수위를 넘기고 있었다. 내심 혀를 찬 산영이 빙긋 웃으며 슬쩍 말을 깔았다.
“말하면 아나요? 정식 도록은 다음 주나 되어야 나온다고 들었는데.”
순간 직원의 눈가에 당혹감이 스쳤다. 산영이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가볍게 다시 물었다.
“입장료 낼까요?”
“아, 아니요. 작가분이신데 그럴 필요는 없죠. 들어가 확인해보세요.”
“고마워요.”
꾸벅 인사를 하며 금세 태도를 바꾸는 직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산영이 터덜터덜 갤러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거슬릴 것도 없었다. 서른이나 되는 나이로 보기엔 나름 동안인 까닭에 간혹 오해를 사고는 했다. 사실 자다 일어난 것 같은 부스스한 외모도 한 몫 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 산영이었다.
프랑스에서 어렵게 공수해 왔다는 작품들을 무심하게 지나치며 작품을 찾던 그녀가 낯선 목소리에 멈춰 섰다.
“작품은 찾았습니까.”
깔끔하게 정리된 반백의 머리에 꽤 큰 키, 멋스런 스트라이프 정장이 잘 어울리는 노신사였다. 데스크에서의 상황을 보았는지 연륜이 묻어나는 서늘한 눈가에 호기심 어린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 아직요. 돌다보면 나오겠죠.”
“어떤 작품이죠?”
이어지는 질문에 설핏 미소를 지은 산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동판인데 폭이 좁고 아래위로 긴 세 개의 연작이에요. 블랙 잉킹.”
“찾으면 나한테도 알려줄래요?”
“네? 아, 뭐, 그러죠.”
언뜻 과한 관심이라 여겨졌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따스한 눈빛너머 순수한 호의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산영은 계속해서 작품 앞을 휙휙 빠르게 지나쳤다. 간혹 걸음을 멈추고 뚫어져라 보는 것도 잠시, 일견 참 무성의한 관람 태도였다.
미로처럼 이어진 벽을 따라 느릿하게 걷던 그녀가 국내 작가들의 부스에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중앙 벽에 좁고 기다란 작품 세 개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오프닝은 물론 디피에도 당연히(?) 빠진 관계로 내심 걱정했던 산영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아무도 챙기지 않는 작품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연작임에도 띄엄띄엄 걸리는 불상사를 겪을 수도 있었다. 이번처럼 참여 작가가 많은 대규모 전시에서는 더더구나 좋은 위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
“그쪽 작품입니까?”
갑작스런 음성에 놀란 산영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아, 네.”
예의 노신사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낯선 관심이 새삼 부담스러워지려고 했다. 산영의 기색을 읽었는지 그가 스스럼없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작가라고 하기에 어떤 작품을 출품했는지 궁금했을 뿐이니까. 그나저나 동양화에 관심이 많아요?”
“네? 아니, 전 서양화 전공인데요.”
“하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작품을 보니까 동양적이랄까. 고요하고 섬세한 흐름이 수묵화 같은 느낌이 나서요.”
“아, 네.”
제법 진솔한 감상평에 산영은 그제야 자신의 작품을 다시 돌아보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부분 부식으로 흐르듯 자연스레 표현된 농담(濃淡)이 그리 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작품을 인상 깊게 봐준 것 같아서 왠지 기분이 좋았다.
“출품도 하셨는데 이제야 전시를 보러 왔나 봅니다.”
“네? 아……, 어쩌다 보니 그리 됐네요.”
노신사의 사심 없는 태도에 산영이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늦잠자다 오프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그녀가 가볍게 목례하며 돌아서는데 그가 다시 말을 건넸다.
“작가 선생은 이번 전시를 어떻게 봅니까. 난 미술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 판화는 생소하기도 하고…….”
난데없는 질문에 노신사를 잠시 바라본 산영이 가볍게 대답했다.
“저라고 뭐 아나요. 판화도 그림이니까 그냥 보이는 대로 보시면 되죠. 말씀대로 생소할 수도 있는 장르니까 작가나 기법에 대한 설명이 좀 더 보충되면 좋지 않을까요? 쉽게 접할 수 없는 외국 작가들의 작품들도 많아서 판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으면 감상하는데 더 도움이 되겠죠.”
별다를 것도 없는 감상이건만 노신사가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아가씨는 작간데도 감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는군. 휙휙 지나치며 보기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지. 하하. 그런 의미에서 전시에 대한 의견을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네? 아, 저기, 그…….”
당황한 산영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말을 이었다.
“저도 많이 아는 건 아닌데요. 사실 어떤 작가들이 출품했는지도 잘 모르면서 참여했거든요. 뭐,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작가들 작품도 많고, 동료 작가도 있지만 제대로 설명을 할 만큼 작품에 대해 아는 바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이런, 나야말로 실례를 했나 보네. 미안합니다. 작품보다, 작가 입장에서 보는 전시는 어떤지, 궁금했거든. 부담주려한건 아니에요. 하하.”
소위 생각하는 작품 설명이 아닌, 전시에 대한 의견을 묻다니 산영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전시 자체가 어떤지 말해 달라는 건가?
일반적으로 화가라 하면 작품에 대해 잘 알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산영은 화가라는 말에 대뜸 그림 설명부터 요구하면 난색을 표하고는 했다. 그저 느껴지는 대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감상법인 것을. 이론으로 무장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감상자가 아닌 평론가들의 몫이다.
골치 아픈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은 산영이 편하게 입을 열었다.
“전시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이라면,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대로 판화 자체가 생소할 수 있는 장르인데다, 더더욱 외국 작가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잖아요. 어떻게 이런 전시를 기획했는지 모르지만 발상도 좋고, 준비도 많이 한 것 같네요.”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처럼 보여서 난 또 이번 전시가 마음에 안 드는 줄 알았지.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장난기 가득한 그의 눈빛에 산영이 마주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도 볼 건 다 봤는데요? 음……, 제가 이래봬도 판화가 맞거든요. 하하.”
처음 보는 낯선 어른인데도 격의 없이 선한 눈빛에 산영은 왠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이른 봄날, 별 다를 것도 없는 평범한 오후였다.
두 달 후.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늦은 밤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깊어 가는 봄 날, 대지를 넉넉하게 적셔주는 빗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따스하게 가로지른다.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밤. 인적 없이 어두운 아파트 거실 구석에 희미한 불빛이 어른 거렸다.
“아, 심심해. 이제 뭐 하지.”
저녁 내내 온라인 고스톱 게임에 올인 하다 남은 잔액을 홀랑 까먹은 산영이 멍하니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문득 빗소리에 고개를 드니 어느새 자정도 훨씬 지난 깊은 밤이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산영은 남은 시간을 어찌 보낼까 궁리하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었다. 놀만큼 놀았는지 한동안 미뤄둔 작업이 떠오른 것이다.
“간만에 작업이나 하러 갈까.”
전형적인 올빼미 형 인간인 산영은 해 뜨는 새벽에 잠이 들고, 아이들이 들이닥치는 오후 레슨 시간 직전에 눈을 떴다. 주 활동 시간이 까만 밤이다 보니 작업도 사람이 없는 새벽에 주로 했다.
남들은 이상하게 봤지만 정작 산영은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편했다. 까만 밤이 주는 고요한 적막과 마주하고 있으면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게다가 비오는 날엔 왠지 더 차분해지는 느낌에 작업이 잘 풀린다. 가방 속에 있는 드로잉 북을 확인한 산영이 컴퓨터를 끄고 천천히 문을 나섰다.
집을 나서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한동안 바깥출입을 안했더니 차를 어디에 뒀는지 까마득히 생각나지 않았다.
“차를 어디다 뒀더라.”
아파트 출입구 앞에 멈춰 선 산영이 자분자분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어딘가 버리고 올 우산은 당연히 챙기지 않았다. 들고 나가 봐야 십중팔구 잃어버리다 보니 웬만한 비는 대충 맞고 다니는 까닭이었다.
넉넉한 봄비에 풀 향기와 젖은 흙냄새가 짙게 올라왔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머릿속을 뒤져보던 산영이 설핏 인상을 썼다.
“!”
공기 중에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
‘담배?’
놀란 그녀가 그제야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출입구 안쪽 난간에 낯선 인영이 어른거렸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남자가 난데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얼떨결에 같이 고개를 끄덕인 산영이 당황스러움에 다시 홱 돌아섰다.
‘뭐, 뭐니! 놀래라.’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쪽 차, 짙은 색 미니 봉고 맞지.”
예상치 못한 음성에 놀란 산영이 다시금 남자를 돌아보았다.
“네?”
“그 차 지하에 있어.”
멋대로 제 할 말만 하고 돌아선 남자가 꿈처럼 성큼 멀어져 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반쯤 나간 산영이 동그랗게 뜬 눈을 멍하니 깜박거렸다.
‘사람……, 맞지?’
#1. 인연 만들기 Ⅰ
- 빰! 빠라밤 빠라밤 빰빰!
오전 11시. 휴대전화에서 요란한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머리맡을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은 산영이 거칠게 화면을 껐다. 그리고는 다시 이불을 끌어안고 모로 돌아누우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아아- 죽겠다.”
하지만 오늘은 꼭 오전에 일어나야 했다. 미술관으로부터 확인 전화도 벌써 두 번이나 받지 않았던가. 건망증을 핑계 삼아 세 번째 전화까지 받을 수는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작품 반출 날짜를 까먹다니. 솔직히 핑계를 대기도 민망했다.
그럼에도 날이 밝고서야 잠이 든 산영의 눈꺼풀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시금 옆으로 뭉그적거리며 돌아누운 산영이 홱 일어나며 산발한 머리칼을 벅벅 뒤집었다.
“으아- 내가 미쳐!”
이번에도 미루면 대체 언제 찾으러 갈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작품 반출에 대해 친절한 안내 전화까지 받아놓고 홀랑 까먹는 바람에 시일을 훌쩍 넘긴 것이다. 행여 잊어버릴까 달력 위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도 다시 열흘이나 훌쩍 넘긴 후의 일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두. 번이나 더 연락이 왔었다. 그것도 약속대로라면 어제 오전에 찾으러 갔어야 했다. 마지막 통화 때 수화기 너머 큐레이터에게 분명히 어제 날짜로 찾아가겠다고 씩씩하게 대답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산영은 일어나 앉은 후에도 무겁게 내려앉기만 하는 눈꺼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왜! 일찍 자려고 노력할수록 머리는 더 말똥말똥, 반짝거리는 것일까.
뭔가 아주 많이 억울하다.
1화
#프롤로그
“어떻게 오셨죠?”
데스크에 있는 예쁘장한 직원이 입구에서 머뭇거리는 산영을 보고 친절하게 물었다.
“저기,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간데 디피(display) 확인하러 왔거든요? 오프닝에 참석을 못해서 그러는데……. 입장료를 따로 내야하나요?”
딱히 못 낼 것도 없었지만 출품까지 해놓고 입장료를 내자니 뭔가 그랬다. 산영이 어정쩡하게 웃어 보이자 직원의 눈초리가 설핏 가늘어진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네? 아, 강산영이라고 합니다.”
흘깃 명단을 훑어본 직원이 그래도 뭔가 마음에 차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자못 고자세로 다시 물었다.
“실례지만 어떤 작품을 내셨어요?”
실례인걸 알면서 왜 묻는 것일까. 어지간히 어설프게 보였는지 어려보이는 직원의 눈빛이 수위를 넘기고 있었다. 내심 혀를 찬 산영이 빙긋 웃으며 슬쩍 말을 깔았다.
“말하면 아나요? 정식 도록은 다음 주나 되어야 나온다고 들었는데.”
순간 직원의 눈가에 당혹감이 스쳤다. 산영이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가볍게 다시 물었다.
“입장료 낼까요?”
“아, 아니요. 작가분이신데 그럴 필요는 없죠. 들어가 확인해보세요.”
“고마워요.”
꾸벅 인사를 하며 금세 태도를 바꾸는 직원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산영이 터덜터덜 갤러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거슬릴 것도 없었다. 서른이나 되는 나이로 보기엔 나름 동안인 까닭에 간혹 오해를 사고는 했다. 사실 자다 일어난 것 같은 부스스한 외모도 한 몫 하는 것을 모르지 않는 산영이었다.
프랑스에서 어렵게 공수해 왔다는 작품들을 무심하게 지나치며 작품을 찾던 그녀가 낯선 목소리에 멈춰 섰다.
“작품은 찾았습니까.”
깔끔하게 정리된 반백의 머리에 꽤 큰 키, 멋스런 스트라이프 정장이 잘 어울리는 노신사였다. 데스크에서의 상황을 보았는지 연륜이 묻어나는 서늘한 눈가에 호기심 어린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 아직요. 돌다보면 나오겠죠.”
“어떤 작품이죠?”
이어지는 질문에 설핏 미소를 지은 산영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동판인데 폭이 좁고 아래위로 긴 세 개의 연작이에요. 블랙 잉킹.”
“찾으면 나한테도 알려줄래요?”
“네? 아, 뭐, 그러죠.”
언뜻 과한 관심이라 여겨졌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따스한 눈빛너머 순수한 호의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산영은 계속해서 작품 앞을 휙휙 빠르게 지나쳤다. 간혹 걸음을 멈추고 뚫어져라 보는 것도 잠시, 일견 참 무성의한 관람 태도였다.
미로처럼 이어진 벽을 따라 느릿하게 걷던 그녀가 국내 작가들의 부스에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중앙 벽에 좁고 기다란 작품 세 개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오프닝은 물론 디피에도 당연히(?) 빠진 관계로 내심 걱정했던 산영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렸다. 아무도 챙기지 않는 작품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으로 밀려나거나, 연작임에도 띄엄띄엄 걸리는 불상사를 겪을 수도 있었다. 이번처럼 참여 작가가 많은 대규모 전시에서는 더더구나 좋은 위치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
“그쪽 작품입니까?”
갑작스런 음성에 놀란 산영이 흠칫 고개를 돌렸다.
“아, 네.”
예의 노신사가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었다. 낯선 관심이 새삼 부담스러워지려고 했다. 산영의 기색을 읽었는지 그가 스스럼없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작가라고 하기에 어떤 작품을 출품했는지 궁금했을 뿐이니까. 그나저나 동양화에 관심이 많아요?”
“네? 아니, 전 서양화 전공인데요.”
“하하,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작품을 보니까 동양적이랄까. 고요하고 섬세한 흐름이 수묵화 같은 느낌이 나서요.”
“아, 네.”
제법 진솔한 감상평에 산영은 그제야 자신의 작품을 다시 돌아보았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부분 부식으로 흐르듯 자연스레 표현된 농담(濃淡)이 그리 보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작품을 인상 깊게 봐준 것 같아서 왠지 기분이 좋았다.
“출품도 하셨는데 이제야 전시를 보러 왔나 봅니다.”
“네? 아……, 어쩌다 보니 그리 됐네요.”
노신사의 사심 없는 태도에 산영이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늦잠자다 오프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그녀가 가볍게 목례하며 돌아서는데 그가 다시 말을 건넸다.
“작가 선생은 이번 전시를 어떻게 봅니까. 난 미술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 판화는 생소하기도 하고…….”
난데없는 질문에 노신사를 잠시 바라본 산영이 가볍게 대답했다.
“저라고 뭐 아나요. 판화도 그림이니까 그냥 보이는 대로 보시면 되죠. 말씀대로 생소할 수도 있는 장르니까 작가나 기법에 대한 설명이 좀 더 보충되면 좋지 않을까요? 쉽게 접할 수 없는 외국 작가들의 작품들도 많아서 판화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으면 감상하는데 더 도움이 되겠죠.”
별다를 것도 없는 감상이건만 노신사가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아가씨는 작간데도 감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아는군. 휙휙 지나치며 보기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지. 하하. 그런 의미에서 전시에 대한 의견을 좀 더 들을 수 있을까요?”
“네? 아, 저기, 그…….”
당황한 산영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솔직하게 말을 이었다.
“저도 많이 아는 건 아닌데요. 사실 어떤 작가들이 출품했는지도 잘 모르면서 참여했거든요. 뭐,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한 작가들 작품도 많고, 동료 작가도 있지만 제대로 설명을 할 만큼 작품에 대해 아는 바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이런, 나야말로 실례를 했나 보네. 미안합니다. 작품보다, 작가 입장에서 보는 전시는 어떤지, 궁금했거든. 부담주려한건 아니에요. 하하.”
소위 생각하는 작품 설명이 아닌, 전시에 대한 의견을 묻다니 산영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전시 자체가 어떤지 말해 달라는 건가?
일반적으로 화가라 하면 작품에 대해 잘 알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산영은 화가라는 말에 대뜸 그림 설명부터 요구하면 난색을 표하고는 했다. 그저 느껴지는 대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감상법인 것을. 이론으로 무장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감상자가 아닌 평론가들의 몫이다.
골치 아픈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은 산영이 편하게 입을 열었다.
“전시에 대한 개인적인 소감이라면,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해요. 말씀하신 대로 판화 자체가 생소할 수 있는 장르인데다, 더더욱 외국 작가의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잖아요. 어떻게 이런 전시를 기획했는지 모르지만 발상도 좋고, 준비도 많이 한 것 같네요.”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처럼 보여서 난 또 이번 전시가 마음에 안 드는 줄 알았지. 그렇지는 않은가 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장난기 가득한 그의 눈빛에 산영이 마주 웃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도 볼 건 다 봤는데요? 음……, 제가 이래봬도 판화가 맞거든요. 하하.”
처음 보는 낯선 어른인데도 격의 없이 선한 눈빛에 산영은 왠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이른 봄날, 별 다를 것도 없는 평범한 오후였다.
두 달 후.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늦은 밤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깊어 가는 봄 날, 대지를 넉넉하게 적셔주는 빗소리가 적막한 밤공기를 따스하게 가로지른다.
깜깜한 어둠이 내려앉은 늦은 밤. 인적 없이 어두운 아파트 거실 구석에 희미한 불빛이 어른 거렸다.
“아, 심심해. 이제 뭐 하지.”
저녁 내내 온라인 고스톱 게임에 올인 하다 남은 잔액을 홀랑 까먹은 산영이 멍하니 모니터를 보며 중얼거렸다.
문득 빗소리에 고개를 드니 어느새 자정도 훨씬 지난 깊은 밤이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산영은 남은 시간을 어찌 보낼까 궁리하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었다. 놀만큼 놀았는지 한동안 미뤄둔 작업이 떠오른 것이다.
“간만에 작업이나 하러 갈까.”
전형적인 올빼미 형 인간인 산영은 해 뜨는 새벽에 잠이 들고, 아이들이 들이닥치는 오후 레슨 시간 직전에 눈을 떴다. 주 활동 시간이 까만 밤이다 보니 작업도 사람이 없는 새벽에 주로 했다.
남들은 이상하게 봤지만 정작 산영은 혼자 있는 시간이 제일 편했다. 까만 밤이 주는 고요한 적막과 마주하고 있으면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집중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게다가 비오는 날엔 왠지 더 차분해지는 느낌에 작업이 잘 풀린다. 가방 속에 있는 드로잉 북을 확인한 산영이 컴퓨터를 끄고 천천히 문을 나섰다.
집을 나서는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한동안 바깥출입을 안했더니 차를 어디에 뒀는지 까마득히 생각나지 않았다.
“차를 어디다 뒀더라.”
아파트 출입구 앞에 멈춰 선 산영이 자분자분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어딘가 버리고 올 우산은 당연히 챙기지 않았다. 들고 나가 봐야 십중팔구 잃어버리다 보니 웬만한 비는 대충 맞고 다니는 까닭이었다.
넉넉한 봄비에 풀 향기와 젖은 흙냄새가 짙게 올라왔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머릿속을 뒤져보던 산영이 설핏 인상을 썼다.
“!”
공기 중에 낯선 냄새가 섞여 있었다.
‘담배?’
놀란 그녀가 그제야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출입구 안쪽 난간에 낯선 인영이 어른거렸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남자가 난데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얼떨결에 같이 고개를 끄덕인 산영이 당황스러움에 다시 홱 돌아섰다.
‘뭐, 뭐니! 놀래라.’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쪽 차, 짙은 색 미니 봉고 맞지.”
예상치 못한 음성에 놀란 산영이 다시금 남자를 돌아보았다.
“네?”
“그 차 지하에 있어.”
멋대로 제 할 말만 하고 돌아선 남자가 꿈처럼 성큼 멀어져 갔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반쯤 나간 산영이 동그랗게 뜬 눈을 멍하니 깜박거렸다.
‘사람……, 맞지?’
#1. 인연 만들기 Ⅰ
- 빰! 빠라밤 빠라밤 빰빰!
오전 11시. 휴대전화에서 요란한 행진곡이 흘러나왔다. 머리맡을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은 산영이 거칠게 화면을 껐다. 그리고는 다시 이불을 끌어안고 모로 돌아누우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아아- 죽겠다.”
하지만 오늘은 꼭 오전에 일어나야 했다. 미술관으로부터 확인 전화도 벌써 두 번이나 받지 않았던가. 건망증을 핑계 삼아 세 번째 전화까지 받을 수는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작품 반출 날짜를 까먹다니. 솔직히 핑계를 대기도 민망했다.
그럼에도 날이 밝고서야 잠이 든 산영의 눈꺼풀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다시금 옆으로 뭉그적거리며 돌아누운 산영이 홱 일어나며 산발한 머리칼을 벅벅 뒤집었다.
“으아- 내가 미쳐!”
이번에도 미루면 대체 언제 찾으러 갈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작품 반출에 대해 친절한 안내 전화까지 받아놓고 홀랑 까먹는 바람에 시일을 훌쩍 넘긴 것이다. 행여 잊어버릴까 달력 위에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도 다시 열흘이나 훌쩍 넘긴 후의 일이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두. 번이나 더 연락이 왔었다. 그것도 약속대로라면 어제 오전에 찾으러 갔어야 했다. 마지막 통화 때 수화기 너머 큐레이터에게 분명히 어제 날짜로 찾아가겠다고 씩씩하게 대답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산영은 일어나 앉은 후에도 무겁게 내려앉기만 하는 눈꺼풀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가! 왜! 일찍 자려고 노력할수록 머리는 더 말똥말똥, 반짝거리는 것일까.
뭔가 아주 많이 억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