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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대체 어디가 고장인 게야? 멀쩡하게 잘만 낳아 놨구먼 뭐가 문제니?”

오전 회의를 끝내고 마무리 지어야 할 서류가 밀려있건만 오늘따라 일찌감치 시작된 유여사의 잔소리는 끝날 줄을 몰랐다. 언제나 밝고 활달한 그녀의 미간에 가득한 근심이 자신 때문임을 잘 알면서도 우현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어머니 말씀대로 저 너무나 멀쩡합니다. 왜 또 그러세요.”

“아들,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고개를 들고 마주보는 것이 예의란다.”

“듣고 있습니다.”

역시나 미동도 않는 우현을 옆에서 지켜보던 최관장이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최우현!”

그제야 마지못해 고개를 든 우현이 굳은 얼굴로 손에 들린 서류를 툭툭 쳤다. 시위라도 하는 양 적나라한 시선에 최관장의 안색이 더욱 엄해졌다.

“그러게 멀쩡한 놈이 결혼은 왜 안 하누!”

“언젠가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때가 아닌가 보죠.”

“지금이 아니면 대체 언제가 그 ‘때’ 라는 건데?”

“글쎄요. 아직은 혼자가 편합니다.”

그 어떤 말에도 남 얘기하듯 덤덤한 아들의 태도에 최관장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이놈아, 지겹지도 않아? 혼자 지낸 지가 대체 얼만데, 어찌 아직도 좋다는 소리가 나오누! 네 놈 나이도 생각해야지!”

“그럼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역시나 짧고 건조한 대답 돌아왔다. 허탈하게 바라보는 최관장과 함께 유여사가 이마를 짚으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사람 기운 빼는 재주가 남다른 아들이었다. 최관장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천천히 다시 물었다.

“이유가 뭐냐. 이유라도 좀 알자.”

“귀찮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불쑥 대답한 우현이 다시 서류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찰나 그의 대답을 오해한 유여사가 놀란 눈으로 최관장을 바라봤다.

“여보, 우현이가 지금 우리더러 귀찮다고 한 거예요?”

“후- 그런 말이 아니잖습니까.”

우현의 한숨에 최관장이 눈에 불을 켜고 다그쳤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런 놈을 봤나. 뭐? 부모더러 귀찮아? 내가 너를 그리 가르쳤……!”

“이유를 알고 싶다 하셨잖아요. 이. 유. 말입니다.”

내내 무심함으로 일관하던 우현의 미간에 급기야 굵은 주름이 잡혔다. 아무리 부자간이라도 업무시간이 아닌가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이 최관장에게 통할 리 만무했다.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유여사가 무안한 얼굴로 분위기 수습에 나섰다.

“이런, 아들. 그렇게 본대 없이 말하니까 쓸데없는 오해를 사잖니.”

“크-흠! 말버릇 하고는. 대체 누구를 닮았는지……. 그래 뭐가 귀찮다는 게냐. 결혼? 여자?”

짐짓 말을 돌리는 최관장의 눈빛이 다시금 집요하게 빛났다.

“둘 다요.”

우현의 대답이 더욱 짧아졌다.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아들을 쳐다보던 최관장이 돌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이건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

“설마, 여자 경험은 있겠지?”

“아버지!”

유여사도 어이없는 얼굴로 최관장을 타박했다.

“이이가! 쟤 나이가 몇인데 그런 말을……. 군대도 멀쩡히 갔다 왔잖아요.”

어이없는 얼굴로 최관장을 나무라던 유여사가 기막혀 하는 우현의 시선에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설마……, 진짜 총각이니?”

“어머니!”

우현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차마 믿고 싶지 않았다. 이성적이고 점잖으며 고아하고 품격 높은 그의 부모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하지만 기막혀 하는 우현과은 아랑곳 않고 최관장이 돌연 심각한 얼굴로 엉뚱한 소릴 했다.

“그럼? 설마……, 여자가 싫으냐?”

“여보!”

화들짝 놀란 유여사가 이내 근심어린 눈으로 우현을 돌아본다. 절로 터지는 한숨을 애써 삼킨 우현이 정색을 했다.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 겁니까! 그만 좀 하세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부부가 머쓱한 얼굴로 비실 웃는다. 내심 고개를 저은 우현이 서늘한 눈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아무튼 아직은 결혼 생각 없으니까 그리 아세요.”

기가 막혀 더 이상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던 부모님에 대해 회의가 생기는 요즘이었다. 아니, 평소엔 여전히 다정다감하고 사려 깊은 분들이셨다. 다만 요 근래 급속도로 심각해지는 잔소리가 낯설게 다가올 뿐.

철들 무렵부터 혼자 떨어져 지내는 생활에 익숙한 우현이었다. 외교관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지만, 고등학교와 대학은 그의 고집으로 한국에서 다녔다.

부모님의 걱정과 달리 외국 생활이 힘들어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사실 우현은 어디를 가든 무리의 중심에 서는 편이었고, 구하지 않아도 따르는 이들이 많았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주변의 과한 관심과 배려가 더 귀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현은 환경이 바뀔 때마다 또 다른 관심 속에 놓이는 반복이 번거로웠을 뿐. 그가 한국을 택한 진짜 이유는 그렇게나 단순했다. 부모님조차 가끔 고개를 저을 만큼 우현은 아기 때부터 사람에게 잘 안기지도 않았고, 잔정도 없었다. 타고난 천성이랄까.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던 모자라거나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없었다. 그만큼 우현은 모든 일을 남보다 빠르게, 또 쉽게 해냈고 항상 앞서나가는 편이었다.

좋은 환경에 거칠 것 없는 기질을 타고난 그는 기본 성향 자체가 타인에게 무관심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편한 구석 없이 차갑고 무뚝뚝한 성격임에도 끊임없이 사람이 따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손 내밀지 않아도 부족함을 몰랐고 아쉬울 일도 없었다.

당연히 그의 인생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부모님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삭막해서 인간미가 없어?’

사막도 아니고 이젠 너무 삭막하다고 성화였다. 감정이 메말라서 문제고, 너무 차가워서 문제고, 너무 까다롭고, 날카롭고, 무심하고……. 그렇게 시작된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그의 나이 이제 서른 넷. 지금껏 잔소리는커녕 큰 소리 한 번 없던 부모님이 갑자기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소란을 떨었다. 실질적인 운영은 우현이 하고 있었지만 그 외 대외적인 활동은 전직 외교관이었던 최관장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많아서 미술관 출입을 막을 수도 없었다.

오히려 무심하고 분명한 성격 덕분에 감정적으로 얽히는 일 없이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는 우현이었다.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문제가 될 만큼 대인관계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성인군자까지는 아니어도 도덕성에 하자는 없었다.

단지 사람이 조금 귀찮은 것뿐,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잖은가. 지금껏 어느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고, 우현도 딱히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적 없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자식 걱정으로 무장한 부모의 잔소리에는 논리나 이성이 필요 없었다. 무조건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으므로.



산영이 미술관 앞에 주차를 하고 시간을 보니 12시가 살짝 넘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피한다고 굳이 11시에 일어났건만 침대에서 벗어나기까지의 여정이 험난해 예상보다 조금 늦었다.

“그래도 뭐 누구든 있겠지.”

부드럽게 내려앉는 맑은 햇살이 생경할 정도로 오랜만의 대낮 외출이었다. 이유가 어찌됐든 미술관 전체를 넉넉하게 감싸고도는 풋풋한 숲 향기가 나쁘지 않았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린 산영이 눈부신 햇살에 슬쩍 인상을 쓰며 장하게 기지개를 켰다.

“으-함! 좋-다.”

<아인 미술관>

꽤 독특한 이름이라 산영은 미술관 소개에 명시된 ‘아인’이란 단어의 의미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자로는 아인雅人,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 영어로는 eyen, eye의 복수형이라던가.

공방을 통해 처음 출품 의사를 타진해 왔을 때 산영은 ‘아인 미술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전시에 대해 설명을 듣고서야 인터넷을 뒤져봤으니.

개관한지 2년 만에 미술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저력 있는 사립미술관이었다. 그럼에도 한동안 활동이 뜸했던 산영은 그 존재조차 몰랐다. 대체 미술계에 속해 있는 인간이기는 한 것인지 순간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개인이 지은 규모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립 미술관으로도 유명했다. 미술 애호가가 세계를 다니며 평생 동안 모은 소장품을 전시도 할 겸 미술관을 지었다는데, 그 소장품만 10만점에 이른다던가.

이름난 대기업이나 재벌가의 마나님들이 훈장처럼 달고 있는 미술관 관장이라는 직함이 아닌, 순수한 미술 애호가라는 점 또한 이채로웠다. 관장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지만 오프닝에 불참한 산영으로선 더 이상 알 길이 없었다.

‘그러게 밤낮이 바뀌면 인간 생활이 안 된다니까.’

번잡스러운 오프닝 행사엔 미련이 없지만 그 부분만큼은 산영도 아쉬움이 남았다.

미술관 건물은 시립이나 국립 미술관처럼 틀에 박힌 디자인을 지양하고 개성을 살리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거친 시멘트벽과 함께 드문드문 붉은 철 구조물이 고스란히 드러난 외양이 모던함을 물씬 풍긴다.

자칫 삭막할 수 있는 미술관 전면에 연두 빛이 고운 연못을 배치한 것도 독특했다. 사선으로 길게 이층 테라스까지 이어진 나무계단이 거칠고 차가운 시멘트벽에 여유로운 공간을 만들어준다.

이층 테라스엔 특이하게 한옥을 그대로 옮겨온 카페가 있었고 그 너머로 용도를 알 수 없는 탑처럼 둥근 구조물이 보였다. 나름 큰 규모임에도 운치 있는 미술관이라는 소개에 공감이 간다.

꾸준히 수준 높고 색다른 전시들을 선보이며 기획력도 인정받았고, 덕분에 인지도도 높았다. 지방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후원을 끌어내는 능력이나 외국 미술관과의 연계 또한 서울의 유명 미술관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이었다.

무엇보다 드문드문 연구소와 학교만 있는 시 외곽에 지어져, 초록이 무성한 배경과 맑은 공기가 마음에 들었다.

한 달 남짓 전시에 참여 했지만 사실 산영은 미술관에 딱 한 번 와봤다.

출품은 공방에서 작품을 모아 한꺼번에 보냈고, 디피(display)와 오프닝에도 빠졌으니, 전시 초반, 디피 확인을 위해 와본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낮은 산자락을 배경삼아 느긋하게 자리한 미술관의 전경이 꽤나 친숙하게 느껴졌다.

커다란 유리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 데스크 너머 나이 지긋한 어르신 두 분이 보였다. 부부인 듯 눈매가 고운 노부인과 뒷모습만으로도 중후한 멋이 전해지는 노신사였다. 산영을 발견한 노부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넙죽 고개를 숙이며 데스크로 다가선 산영이 입장료를 낼 생각은 않고 두리번거리자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저번 전시에 출품한 사람인데요. 작품을 찾으러 왔거든요.”

“그래요? 잠시 사무실에 연락해볼게요.”

내선으로 용건을 전한 그녀가 다정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바로 내려온다 하네요. 잠시 기다리세요.”

“네. 고맙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작은 동작 하나에도 몸에 배인 우아함이 느껴지는 고운 부인이었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미소에 저절로 마주 웃게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