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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평일 낮. 미술관은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음악을 음미할 만큼 한가로웠다. 입구 옆 소파에 앉아 큐레이터를 기다리던 산영은 느긋한 기분으로 미술관 내부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의 벽 전체가 유리블록으로 되어 있어 한낮의 햇살이 무지개 빛깔로 부서져 내린다. 전에 왔을 땐 조금 갑갑한 구조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에 따라 그리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잠시 데스크를 봐주는 것인지 한가하게 도록을 뒤적이던 노부인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산영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산영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호감어린 따스한 눈빛에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살짝 간지러운 느낌이다.
‘많이 이상해 보이나?’
화장기 없는 민낯에 느슨하게 대충 묶은 길고 부스스한 머리칼. 흰 면 티에 구김이 있는 셔츠를 걸치고 낡은 청바지를 입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여자. 자신이 어찌 보일지 산영은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작품 디스플레이를 확인하러 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새삼 그 때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침 데스크 너머 사무실에서 화분에 물을 주던 노신사가 부인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뭔가 말을 건네자, 산영을 흘깃 돌아본 그가 왠지 낯익은 미소를 짓는다.
“이런……. 우린 구면 아닌가?”
난데없는 말에 고개를 든 산영이 설핏 인상을 썼다. 구면?
“이번 전시는 어떤지 둘러 볼 생각 없으신가. 판화가 양반?”
시원스런 웃음에 그제야 기억을 떠올린 산영이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아! 그때 이유 없이 태클 거셨던 분!”
“이런, 내가 언제 태클을 걸었나. 작가 선생의 고견을 물은 것뿐인데 말이지.”
“그래서 전시를 너무 대충 보는 것 아니냐고 타박 하셨어요?”
무던한 성격이지만 사교적이지는 못한 산영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두 번째 만남은 왠지 기분 좋게 다가왔다. 그만큼 사려 깊은 눈빛에 분위기가 남다른 어르신이었다.
“그래도 볼 건 다 봤다고 거침없이 대답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하하. 반가워요.”
그가 예의 환한 미소로 악수를 청해왔다. 꾸벅 인사부터 한 산영이 가볍게 웃으며 내민 손을 마주잡았다.
“네, 이렇게 또 뵙네요.”
“그나저나 디피 확인도 늦더니 작품 반출도 늦으신 건가?”
“이런, 또 그러시네요. 아직 눈치 못 채셨어요? 제가 좀 사이비거든요. 하하.”
“허, 그것 참.”
기분 좋게 웃어 보인 그가 옆에 선 부인을 소개했다.
“이쪽은 우리 마나님. 그리고 저쪽은 판화가 아가씨. 아가씨 맞지? 인상이 좋다고 해서 봤더니 낯이 익더군. 아무든 다시 만나 반가워요.”
산영이 다시 부인을 향해 넙죽 인사를 했다.
“좋게 봐주셨다니 고맙습니다. 강산영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예쁘네. 이 양반이랑 구면이라니 더 반가워요.”
손을 잡고 토닥이는 부인의 따스한 미소에 낯선 경계심이 사르르 녹아났다. 마주 웃어 보이던 산영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냥 관람객이 아니셨나 봐요? 오늘은 데스크에 다 계시고.”
“아, 난 그냥 미술 애호가 맞아요. 아들놈 보러 들렀다가 잠깐 봐주고 있는 거라오. 큰놈이 여기서 일을 하거든.”
부인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집이 가까워서 가끔 산책삼아, 전시도 볼 겸 들르고는 해요.”
“아, 네.”
큐레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사심 없이 친근한 분위기에 이런 저런 질문에도 대답이 쉽게 나왔다. 낯을 가리는 편인 산영도 의외일 만큼 첫 만남부터 편한 사람들이었다.
“오셨어요? 작품은 이쪽에 있습니다.”
어느새 내려온 큐레이터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산영이 부부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제 가봐야겠네요. 다시 뵙게 돼서 반가웠습니다.”
“이런, 벌써? 차라도 한잔 하고 가죠?”
부인이 아쉬운 기색으로 산영의 손을 꼭 잡았다. 부드럽게 전해지는 온기에 왠지 마음이 포근해진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수업이 있어서 가봐야 하거든요. 죄송합니다.”
“아, 맞다. 애들 가르친댔지? 내가 늙긴 늙었나 봐. 금방 듣고도 이러네. 다음에 보게 되면 그땐 꼭 차 한 잔해요.”
“저야말로 부탁드려요. 그땐 정말 잊지 않고 꼭 차 한 잔 주셔야 해요?”
사실 산영은 잠깐 스친 만남에 친근함을 느낄 정도로 성격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이 나왔다. 딱히 약속을 정한 것도 아니요, 서로 연락처도 모르지만 그저 인사치례로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 느껴진 탓이었다.
노신사가 소탈하게 웃으며 산영의 어깨를 따뜻하게 토닥였다.
“허허, 올 때마다 부딪치는 거 보면 조만간 또 만날 일이 있을게야. 안 그런가, 작가양반?”
“그럼요. 차 마시러 꼭 다시 올 건데요? 하하. 그럼, 안녕히 계세요.”
산영이 환하게 마주 웃으며 꾸벅 크게 인사를 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자연스러운 만남이 믿어지는 묘한 기분이었다.
‘오호, 제대론데…….’
큐레이터를 따라 작품 보관실에 들어선 산영은 꼼꼼하게 포장된 액자를 보고 내심 놀랐다. 그녀가 액자만 덜렁 출품했던 것을 생각하면 작품에 대한 미술관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당연하면서도 소홀하기 쉬운 부분이기에 더욱 신뢰가 간다.
작품을 차에 싣고 마지막으로 확인까지 마친 큐레이터에게 산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괜히 저 때문에 수고를 끼치네요. 고맙습니다.”
“저희도 전시일정 때문에 체크가 좀 늦었어요. 다음에 좋은 전시로 또 봬요.”
세부 전시 일정을 조율하느라 통화는 몇 번 했지만 큐레이터를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산영보다 두어 살 아래로 보이는 그녀는 차분한 분위기 그대로 매사에 빈틈없이 야무진 사람 같았다. 예의바른 미소를 잃지 않고 그림처럼 단정하게 산영의 옆에 서 있으니 그런 점이 더욱 도드라진다.
“그럼 수고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산영이 차에 오르려고 할 때였다.
“선영 씨!”
“네에!”
흠칫 돌아보던 산영이 이어지는 큐레이터의 대답에 실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큐레이터의 이름이 그녀와 비슷한 선영이었다. 차선영.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대답하며 급하게 돌아서는 선영의 입가에 봄 햇살처럼 화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훗- 귀여운 구석도 있었네.’
산영은 도도하고 깐깐한 느낌의 큐레이터 선영을 단숨에 화사하게 녹여버린 남자가 누구인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지그시 미간을 모으고 햇살 너머 미술관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늘 아래 숨은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기엔 거리가 좀 있었다. 키가 꽤 크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짐작될 뿐.
종종 걸음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조차 아련한 설렘이 묻어날 것 같은 선영을 잠시 바라보던 산영이 피식 웃으며 차에 올랐다. 어느새 봄이 한창이다.
#2. 언제나 어두운 등잔 밑 Ⅰ
오전의 잔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건만 점심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부모님이 다시 들이닥쳤다. 그리고 다짜고짜 지난 전시에 출품했던 작가의 프로필을 내 놓으라 성화였다. 그것도 젊은 여류작가를 콕 집어서.
우현은 우선 알아보겠다는 핑계를 대고 전시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가 부르자마자 조급하게 뛰어오는 학예실장 선영의 모습에 왠지 기분이 더 흐려졌다.
그가 영 마뜩찮은 얼굴로 팔짱을 끼며 시선을 깔았다. 순간 날카로운 엔진 음이 길게 울려 퍼진다.
- 끼릭끼릭, 끼이이이- 그릉그릉 덜덜덜, 푸식-
무심코 주차장으로 향한 우현의 시야에 깡똥하니 밸런스가 묘하게 이상한 자동차가 보였다. 이젠 단종 되어 찾아보기도 어려운 미니 봉고가 시동이 제대로 걸리지 않는지 힘겹게 툴툴거리고 있었다.
‘거, 소리 한 번 요란하네.’
우현은 순간 복잡한 생각들을 모두 잊고 조그만 깡통 차를 멀거니 보았다.
‘시동이 걸리기는 하는 건가.’
화사한 햇살이 나른하게 부서지는 오후, 산새 소리만 간간히 스치는 조용한 미술관의 주차장에 나타난 불청객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부조화가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두어 번 더 힘겨운 비명을 토해낸 미니 봉고가 드디어 움직이는 모습에 우현은 일없이 웃음이 났다.
‘오호, 굴러는 가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선영이 상기된 얼굴로 눈앞에 도착해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국장님?”
“아, 흠! 저번 전시에 출품했던 국내 작가들 파일 좀 찾아보세요.”
“그건 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선영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한 우현은 다른 질문을 했다.
“지금 나간 차는 뭡니까. 오늘 작품 반출이 있다는 보고는 없었는데요.”
“아, 저번 판화 전시에 출품했던 작가분인데 반출이 좀 늦어졌어요.”
“반출 전에 미리 연락을 한 걸로 아는데, 누락된 겁니까?”
“그게, 미리 연락을 해도 날짜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작가 분들이 종종 계세요. 그런데 저분은 유난히 늦어져서 엊그제 다시 확인전화를 드렸거든요.”
전시 끝난 지가 언젠데 이제야 작품을 찾아가다니, 이 계통 사람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 결벽하게 정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책 없이 느슨한 경우도 많았다. 극과 극. 그 또한 소위 예술가 기질이라고 봐야 할까.
시간 개념이 희박한 사람을 싫어하는 우현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선영 씨가 괜한 수고를 하는군요.”
“뭘요. 그것도 다 제 일인걸요. 작가 파일은 올라가는 데로 찾아 드릴게요.”
선영이 가볍게 웃으며 뭔가 기대하는 눈으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지나가도록 한발 비켜선 우현의 눈빛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해도 됩니다. 그럼 일 보세요.”
멀어지는 발소리를 확인하며 담배를 꺼내 문 우현이 천천히 연기를 뱉어 냈다.
미술관을 반 강제로 떠맡아 운영한지도 일 년여. 처음엔 생소한 분야라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 나름대로 자리도 잡았고 일에도 재미를 찾아가고 있었다.
본업의 보수적이고 딱딱한 분위기에 쉬 질려버렸던 우현으로선 오히려 지금 일이 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제한 없이 능력껏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에게 딱 맞는 일인 것도 같았다. 다만 일과 함께 가까이 지내게 된 부모님의 새삼스러운 관심이 간섭 수준에 이르고 있어 문제였을 뿐.
“쯧- 인간미 없는 놈.”
직원에게 데스크를 넘기고 밖으로 나온 최관장이 우현을 보며 혀를 찼다.
“왜 또 그러십니까.”
“몰라서 묻누?”
“네,”
최관장이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쯧- 진짜 모르는 건지 알면서 그러는 건지, 저 속을 누가 알꼬.”
최관장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반쯤 태운 담배를 끈 우현이 딴소릴 했다.
평일 낮. 미술관은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음악을 음미할 만큼 한가로웠다. 입구 옆 소파에 앉아 큐레이터를 기다리던 산영은 느긋한 기분으로 미술관 내부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의 벽 전체가 유리블록으로 되어 있어 한낮의 햇살이 무지개 빛깔로 부서져 내린다. 전에 왔을 땐 조금 갑갑한 구조라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에 따라 그리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잠시 데스크를 봐주는 것인지 한가하게 도록을 뒤적이던 노부인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산영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산영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호감어린 따스한 눈빛에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살짝 간지러운 느낌이다.
‘많이 이상해 보이나?’
화장기 없는 민낯에 느슨하게 대충 묶은 길고 부스스한 머리칼. 흰 면 티에 구김이 있는 셔츠를 걸치고 낡은 청바지를 입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여자. 자신이 어찌 보일지 산영은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작품 디스플레이를 확인하러 왔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던가. 새삼 그 때를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침 데스크 너머 사무실에서 화분에 물을 주던 노신사가 부인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웃는 얼굴로 뭔가 말을 건네자, 산영을 흘깃 돌아본 그가 왠지 낯익은 미소를 짓는다.
“이런……. 우린 구면 아닌가?”
난데없는 말에 고개를 든 산영이 설핏 인상을 썼다. 구면?
“이번 전시는 어떤지 둘러 볼 생각 없으신가. 판화가 양반?”
시원스런 웃음에 그제야 기억을 떠올린 산영이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아! 그때 이유 없이 태클 거셨던 분!”
“이런, 내가 언제 태클을 걸었나. 작가 선생의 고견을 물은 것뿐인데 말이지.”
“그래서 전시를 너무 대충 보는 것 아니냐고 타박 하셨어요?”
무던한 성격이지만 사교적이지는 못한 산영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두 번째 만남은 왠지 기분 좋게 다가왔다. 그만큼 사려 깊은 눈빛에 분위기가 남다른 어르신이었다.
“그래도 볼 건 다 봤다고 거침없이 대답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하하. 반가워요.”
그가 예의 환한 미소로 악수를 청해왔다. 꾸벅 인사부터 한 산영이 가볍게 웃으며 내민 손을 마주잡았다.
“네, 이렇게 또 뵙네요.”
“그나저나 디피 확인도 늦더니 작품 반출도 늦으신 건가?”
“이런, 또 그러시네요. 아직 눈치 못 채셨어요? 제가 좀 사이비거든요. 하하.”
“허, 그것 참.”
기분 좋게 웃어 보인 그가 옆에 선 부인을 소개했다.
“이쪽은 우리 마나님. 그리고 저쪽은 판화가 아가씨. 아가씨 맞지? 인상이 좋다고 해서 봤더니 낯이 익더군. 아무든 다시 만나 반가워요.”
산영이 다시 부인을 향해 넙죽 인사를 했다.
“좋게 봐주셨다니 고맙습니다. 강산영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예쁘네. 이 양반이랑 구면이라니 더 반가워요.”
손을 잡고 토닥이는 부인의 따스한 미소에 낯선 경계심이 사르르 녹아났다. 마주 웃어 보이던 산영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냥 관람객이 아니셨나 봐요? 오늘은 데스크에 다 계시고.”
“아, 난 그냥 미술 애호가 맞아요. 아들놈 보러 들렀다가 잠깐 봐주고 있는 거라오. 큰놈이 여기서 일을 하거든.”
부인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집이 가까워서 가끔 산책삼아, 전시도 볼 겸 들르고는 해요.”
“아, 네.”
큐레이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사심 없이 친근한 분위기에 이런 저런 질문에도 대답이 쉽게 나왔다. 낯을 가리는 편인 산영도 의외일 만큼 첫 만남부터 편한 사람들이었다.
“오셨어요? 작품은 이쪽에 있습니다.”
어느새 내려온 큐레이터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산영이 부부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제 가봐야겠네요. 다시 뵙게 돼서 반가웠습니다.”
“이런, 벌써? 차라도 한잔 하고 가죠?”
부인이 아쉬운 기색으로 산영의 손을 꼭 잡았다. 부드럽게 전해지는 온기에 왠지 마음이 포근해진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수업이 있어서 가봐야 하거든요. 죄송합니다.”
“아, 맞다. 애들 가르친댔지? 내가 늙긴 늙었나 봐. 금방 듣고도 이러네. 다음에 보게 되면 그땐 꼭 차 한 잔해요.”
“저야말로 부탁드려요. 그땐 정말 잊지 않고 꼭 차 한 잔 주셔야 해요?”
사실 산영은 잠깐 스친 만남에 친근함을 느낄 정도로 성격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망설임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이 나왔다. 딱히 약속을 정한 것도 아니요, 서로 연락처도 모르지만 그저 인사치례로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 느껴진 탓이었다.
노신사가 소탈하게 웃으며 산영의 어깨를 따뜻하게 토닥였다.
“허허, 올 때마다 부딪치는 거 보면 조만간 또 만날 일이 있을게야. 안 그런가, 작가양반?”
“그럼요. 차 마시러 꼭 다시 올 건데요? 하하. 그럼, 안녕히 계세요.”
산영이 환하게 마주 웃으며 꾸벅 크게 인사를 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자연스러운 만남이 믿어지는 묘한 기분이었다.
‘오호, 제대론데…….’
큐레이터를 따라 작품 보관실에 들어선 산영은 꼼꼼하게 포장된 액자를 보고 내심 놀랐다. 그녀가 액자만 덜렁 출품했던 것을 생각하면 작품에 대한 미술관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당연하면서도 소홀하기 쉬운 부분이기에 더욱 신뢰가 간다.
작품을 차에 싣고 마지막으로 확인까지 마친 큐레이터에게 산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괜히 저 때문에 수고를 끼치네요. 고맙습니다.”
“저희도 전시일정 때문에 체크가 좀 늦었어요. 다음에 좋은 전시로 또 봬요.”
세부 전시 일정을 조율하느라 통화는 몇 번 했지만 큐레이터를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산영보다 두어 살 아래로 보이는 그녀는 차분한 분위기 그대로 매사에 빈틈없이 야무진 사람 같았다. 예의바른 미소를 잃지 않고 그림처럼 단정하게 산영의 옆에 서 있으니 그런 점이 더욱 도드라진다.
“그럼 수고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산영이 차에 오르려고 할 때였다.
“선영 씨!”
“네에!”
흠칫 돌아보던 산영이 이어지는 큐레이터의 대답에 실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큐레이터의 이름이 그녀와 비슷한 선영이었다. 차선영.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대답하며 급하게 돌아서는 선영의 입가에 봄 햇살처럼 화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훗- 귀여운 구석도 있었네.’
산영은 도도하고 깐깐한 느낌의 큐레이터 선영을 단숨에 화사하게 녹여버린 남자가 누구인지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지그시 미간을 모으고 햇살 너머 미술관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늘 아래 숨은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기엔 거리가 좀 있었다. 키가 꽤 크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짐작될 뿐.
종종 걸음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에서 조차 아련한 설렘이 묻어날 것 같은 선영을 잠시 바라보던 산영이 피식 웃으며 차에 올랐다. 어느새 봄이 한창이다.
#2. 언제나 어두운 등잔 밑 Ⅰ
오전의 잔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건만 점심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부모님이 다시 들이닥쳤다. 그리고 다짜고짜 지난 전시에 출품했던 작가의 프로필을 내 놓으라 성화였다. 그것도 젊은 여류작가를 콕 집어서.
우현은 우선 알아보겠다는 핑계를 대고 전시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가 부르자마자 조급하게 뛰어오는 학예실장 선영의 모습에 왠지 기분이 더 흐려졌다.
그가 영 마뜩찮은 얼굴로 팔짱을 끼며 시선을 깔았다. 순간 날카로운 엔진 음이 길게 울려 퍼진다.
- 끼릭끼릭, 끼이이이- 그릉그릉 덜덜덜, 푸식-
무심코 주차장으로 향한 우현의 시야에 깡똥하니 밸런스가 묘하게 이상한 자동차가 보였다. 이젠 단종 되어 찾아보기도 어려운 미니 봉고가 시동이 제대로 걸리지 않는지 힘겹게 툴툴거리고 있었다.
‘거, 소리 한 번 요란하네.’
우현은 순간 복잡한 생각들을 모두 잊고 조그만 깡통 차를 멀거니 보았다.
‘시동이 걸리기는 하는 건가.’
화사한 햇살이 나른하게 부서지는 오후, 산새 소리만 간간히 스치는 조용한 미술관의 주차장에 나타난 불청객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그 기묘한 부조화가 단번에 시선을 끌었다.
두어 번 더 힘겨운 비명을 토해낸 미니 봉고가 드디어 움직이는 모습에 우현은 일없이 웃음이 났다.
‘오호, 굴러는 가네.’
잠시 딴 생각을 하는 사이 선영이 상기된 얼굴로 눈앞에 도착해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국장님?”
“아, 흠! 저번 전시에 출품했던 국내 작가들 파일 좀 찾아보세요.”
“그건 왜……?”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선영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한 우현은 다른 질문을 했다.
“지금 나간 차는 뭡니까. 오늘 작품 반출이 있다는 보고는 없었는데요.”
“아, 저번 판화 전시에 출품했던 작가분인데 반출이 좀 늦어졌어요.”
“반출 전에 미리 연락을 한 걸로 아는데, 누락된 겁니까?”
“그게, 미리 연락을 해도 날짜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작가 분들이 종종 계세요. 그런데 저분은 유난히 늦어져서 엊그제 다시 확인전화를 드렸거든요.”
전시 끝난 지가 언젠데 이제야 작품을 찾아가다니, 이 계통 사람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 결벽하게 정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책 없이 느슨한 경우도 많았다. 극과 극. 그 또한 소위 예술가 기질이라고 봐야 할까.
시간 개념이 희박한 사람을 싫어하는 우현이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선영 씨가 괜한 수고를 하는군요.”
“뭘요. 그것도 다 제 일인걸요. 작가 파일은 올라가는 데로 찾아 드릴게요.”
선영이 가볍게 웃으며 뭔가 기대하는 눈으로 우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지나가도록 한발 비켜선 우현의 눈빛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해도 됩니다. 그럼 일 보세요.”
멀어지는 발소리를 확인하며 담배를 꺼내 문 우현이 천천히 연기를 뱉어 냈다.
미술관을 반 강제로 떠맡아 운영한지도 일 년여. 처음엔 생소한 분야라 썩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 나름대로 자리도 잡았고 일에도 재미를 찾아가고 있었다.
본업의 보수적이고 딱딱한 분위기에 쉬 질려버렸던 우현으로선 오히려 지금 일이 마음에 들었다.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제한 없이 능력껏 시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에게 딱 맞는 일인 것도 같았다. 다만 일과 함께 가까이 지내게 된 부모님의 새삼스러운 관심이 간섭 수준에 이르고 있어 문제였을 뿐.
“쯧- 인간미 없는 놈.”
직원에게 데스크를 넘기고 밖으로 나온 최관장이 우현을 보며 혀를 찼다.
“왜 또 그러십니까.”
“몰라서 묻누?”
“네,”
최관장이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쯧- 진짜 모르는 건지 알면서 그러는 건지, 저 속을 누가 알꼬.”
최관장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반쯤 태운 담배를 끈 우현이 딴소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