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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이제 들어가시는 겁니까? 어머님은요?”
“그러잖아도 네놈 보기 싫어 갈 거다. 마나님은 가방 챙기러 잠시 올라가셨지.”
“집으로 가시는 거죠?”
“아니다. 학교에 들러 유교수 좀 보고……. 말 돌리지 마라. 주변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싫은 것도 아니면, 대체 그 나이되도록 왜 결혼 생각이 없는 게냐.”
“오늘은 그만 하시죠. 오전에 끝난 얘긴 줄 알았는데요.”
고집스런 우현의 눈빛에 최관장이 내심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고민 좀 해 보거라. 너 혼자 문제가 아니야.”
“제가 알아서 합니다.”
최관장의 미간에 얼핏 그늘이 졌다. 원래도 다감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차가워지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괜찮을 리가 없는 것을……. 어찌 그리도 무심했을까.’
속 썩이는 일 없이 뭐든 혼자서도 척척 잘 해내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래서 잘 지나갔으리라. 별 문제 없으리라. 무심하게도 그렇게 믿었다. 자식에 대한 믿음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부모의 헛된 욕심과 자만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건만 그리도 무책임했다.
평생 이루고자 했던 계획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그제야 장성한 아들의 인생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크게 어긋난 느낌. 본인은 아무런 불만 없이 충실한 삶이라 여겼지만 정작 중요한 것이 빠져있음을 알지 못했다.
부모 된 자가 자식에 대해 이리도 무심했다니. 최관장은 오랫동안 멀리 떼어 놓고 지켜보지 못한 세월이 새삼 안타까웠다.
“여보, 가요.”
어색한 침묵을 깨고 유여사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최관장이 부인의 손을 잡아주며 우현을 향해 다시 한 번 다짐을 놓았다.
“아무튼 아까 얘기한 작가에 대해 좀 알아 보거라. 왠지 마음에 들어.”
“맞아요. 인상도 좋고, 성격도 소탈하고. 나도 마음에 들어요.”
우현이 인상을 쓰든 말든 최관장은 막무가내였다.
“작품이 인상적이어서 전부터 궁금했다니까. 이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저도 그뿐이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제 겨우 두 번 만난 처자인데 내가 뭘 어쩔까. 네 녀석이야 말로 괜한 오해 말아.”
유여사가 부드럽게 끼어들며 최관장의 편을 들었다.
“그래, 네 아버지 안목이 어디 보통 안목이니. 나도 그 아가씨 작품 봤는데 느낌이 좋더구나.”
우현은 공적인 관심이라 딱 잡아떼는 부모님의 태도에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작품에 관한한 냉정한 분이시니 거짓은 아니리라. 하지만 저 눈빛은 다른 관심 또한 넘치게 많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요즘 부모님의 이목은 주변에 있는 모든 미혼 여성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다하다 이제 일면식도 없는 판화가라니.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차실장에게 말해놨으니 조만간 자료가 올라올 겁니다. 그때 다시 말씀드리죠. 조심해 가세요.”
하루가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부모님을 태울 차를 바라보는 우현의 눈가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지상에 주차할 공간을 찾지 못한 우현이 지하주차장을 돌고 있었다. 다행히 더 내려갈 필요 없이 계단 옆 구석에 빈자리가 보였다. 코너 끝이라 애매하긴 해도 옆에 세워진 차가 작은 덕에 공간은 충분했다.
이사를 하고 한 달여. 전시 마무리와 새로운 기획이 맞물려 제시간에 퇴근한 기억이 까마득했다.
보통 갤러리의 성수기는 5-6월, 9-10월. 딱 웨딩시즌과 겹치는데다 평일보다 주말에 일이 더 많았다. 덕분에 지인들의 결혼식까지 러시를 이뤄 쉴 틈이 없었던 우현은 새로 이사한 집에 적응은커녕 호텔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일반 갤러리가 아닌 미술관 같은 경우엔 여름, 겨울 비수기에도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규모가 큰 기획전부터 상설 전시, 세미나, 문화센터 등, 꾸준히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고 관리, 유지 해야만 한다.
겉으로 보기에 한없이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문화공간이지만 그 커다란 공간을 채우려면 일 년 내내 끝없이 준비하고 기획해야 하는 노고가 필요했다
미술관은 아버지의 평생 꿈이자 노년을 위한 소망이었다. 외교관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수많은 미술품을 수집했고, 그 모든 걸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퇴직을 하고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소장품을 기반으로 미술관을 건립하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우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재단과 미술관에 관련된 법적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따로 법무법인까지 설립했으니 반쯤은 그가 이루어낸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생각지 않았던 일을 천직인 양 하고 있는 지금이 가끔은 낯설기도 하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한가하겠군.’
이제야 프랑스 미술관과 서류 절차까지 말끔하게 마무리 됐다. 국제 교류전 같은 경우는 절차뿐 아니라 계약에서 작품 섭외, 우송, 보험, 보관 등 신경 써야 할 문제들이 곱절은 많았다.
시동을 끄고 타이를 느슨하게 푼 우현이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 삑.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데 문득 옆에 세워진 차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이미 단종 된 고물 차가 참 자주도 눈에 띄었다.
‘이건……?’
기묘한 기시감에 우현의 시선이 무심코 차를 살폈다. 선팅이 되지 않은 창을 통해 내부가 고스란히 보였다.
‘허! 어지간하네.’
얼핏 눈에 비친 차안의 풍경은 우현의 눈살을 저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 쓰레기라고 하기도 애매한 물건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굴러다니고 있었다. 남의 일에 무관심한 그였지만 순간 차 주인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우현은 자기도 모르게 차 안을 쓱 훑어보았다. 짐칸처럼 보이는 뒷좌석에 은박으로 이중 포장된 물건이 포개져 있었다. 꼭 액자 같은.
문득 미술관 주차장에서 보았던 차를 떠올린 우현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 저벅 저벅.
갑작스런 인기척에 돌아보니 경비원이 차량 점검을 하고 있었다.
‘최우현, 이제 하다하다 별짓을 다…….’
우현은 순간 어이없는 기분에 기막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남의 차는 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일까.
다음날.
미술관에 오후쯤 출근할 거라 미리 말해 놓은 우현은 오랜만에 운동을 나섰다.
전에 살던 오피스텔이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미술관에서 좀 멀었고 비즈니스 중심이라 주변이 번잡스럽고 시끄러웠다.
조금 더 조용하고 여유 있는 장소를 물색하던 중 마침 해외 발령을 받은 친구 녀석이 집을 부탁해 왔다. 가구도 그대로 두고 간다는 조건에 가볍게 몸만 들어온 참이었다.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는 것도 번거로워 일층이라 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공무원 아파트답게 청사가 바로 앞에 있어 공무에 관계된 일을 보기도 편했고, 분양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아 깨끗하고 주차시설도 잘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조용해서 좋았다.
바로 앞에 흐르는 천변을 따라 조깅코스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바쁜 와중에 급하게 옮긴 것치고는 아직까지 불만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느긋하게 오전 시간을 보낸 우현이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설 때였다.
지금껏 본적 없는 이상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앞집 현관 앞에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광경에 우현은 출근하려던 것도 잊고 지켜보았다.
- 쿵쿵.
“아무도 없나?”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가 문가에 귀를 대고 중얼거렸다. 옆에 서 있던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다시 문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아직 안 일어나신 거 아닐까?”
“미술 샘은 만날 늦더라.”
남자아이가 퉁명스레 끼어들자 문을 두드리던 여자아이가 팩 돌아서며 노려본다.
“늦게 주무신다잖아.”
“메- 마녀할망구.”
남자아이가 혀를 빼물고 약을 올리더니 초인종을 서너 번 연달아 눌렀다. 그제야 문 안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잠깐 기다려! 나가, 나간다고!
이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갔다. 아이들이 말한 대로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듯 한껏 기지개를 켜며 돌아서는 여자의 뒷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천천히 닫히는 문 너머로 연신 하품을 하는 여자와 아이들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 으아함- 어이, 꼬맹이들 왜 벌써 와서 수선이야?
- 두 시 넘었거든요? 쌤이 늦은 거예요.
- 다른 때는 30분이나 되어야 왔잖아.
- 오늘은 바빠요.
- 아함, 그러셔?
대체 누가 어른이고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과외 같은 건가?’
미술을 가르치는 듯 언뜻 보인 거실 벽에 그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멀거니 앞집 현관을 바라보던 우현의 눈가에 이채가 떠올랐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
문패(?)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 모르고 지낸 것이 이상할 만큼 꽤 눈길을 끄는 명패였다.
폭이 십 여cm 정도 되어 보이는 나무 패널이 눈높이 쯤 가로질러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직접 새긴 듯 정형화 되지 않은 글씨체가 자연스러웠다. 그 아래 조금 작은 나무엔 전화번호까지 새겨져 있었다.
아파트란 것이 오피스텔과는 달리 가정집이 많아 번잡하지 않을까 걱정했건만 의외로 조용한 분위기에 안심하던 참이었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이 이어지는 바람에 지금껏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꼬맹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모양이라니. 어째 속은 기분이다.
우현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는데 사실을 증명하듯 문 너머에서 소란스러움이 흘러나왔다.
- 우당탕!
- 이것들이! 아예 부셔라, 부셔!
네 잘못이네, 쟤 잘못이네 따지며 다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수선스레 울려 퍼진다.
- 시끄럽다고 했지? 조용히 해! 웬수들아-!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긴 우현이 일순 조용해진 아파트 복도를 나서며 중얼거렸다.
‘아줌마, 당신이 더 시끄러워.’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주차장에 내려온 우현은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렸다. 드문드문 헐겁게 비워진 주차장에 예의 미니 봉고가 그대로 서 있었다.
‘영업용차가 아니었나?’
새삼 주위를 둘러본 우현이 그제야 옆의 차가 자꾸 눈에 거슬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중·대형의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한 가운데 낡은 미니 봉고라니. 눈에 띌 만도 했다.
리모컨으로 차 시동을 걸며 흘깃 돌아보니 별다른 변화는 없어 보였다. 아니, 밝은데서 다시 보니 한 가지 더 눈에 띄었다. 톡 튀어나온 저것은 잠금장치가 분명한데…….
차문을 잠그지 않았다.
‘허, 가지가지…….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평소 같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일이다. 답지 않은 일의 연속에 우현은 과감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
“오라버니 어디 참한 색시 없어요? 저 나이 되도록 혼자 있는 거 보기도 싫고, 오빠도 좀 알아봐줘요. 내 아들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저 정도면 멀끔하게 잘 생긴데다 능력도 남부럽지 않잖아요. 괜찮은 신랑감 아니에요?”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숙부 내외와 저녁을 하는 자리였다. 유여사의 하소연에 숙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유화영 여사. 아직 아들을 잘 모르나 본데. 저 녀석 찬바람 부는 면상 봐라. 눈빛은 또 어떻고? 거, 무서워서 어떤 여자가 옆에 가겠나. 성격부터 고치기 전엔 어려울 걸?”
한국 미술계의 거장 유재호 교수. 우현의 외숙부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숙모 김영숙 여사가 한마디 거든다.
“이제 들어가시는 겁니까? 어머님은요?”
“그러잖아도 네놈 보기 싫어 갈 거다. 마나님은 가방 챙기러 잠시 올라가셨지.”
“집으로 가시는 거죠?”
“아니다. 학교에 들러 유교수 좀 보고……. 말 돌리지 마라. 주변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여자가 싫은 것도 아니면, 대체 그 나이되도록 왜 결혼 생각이 없는 게냐.”
“오늘은 그만 하시죠. 오전에 끝난 얘긴 줄 알았는데요.”
고집스런 우현의 눈빛에 최관장이 내심 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고민 좀 해 보거라. 너 혼자 문제가 아니야.”
“제가 알아서 합니다.”
최관장의 미간에 얼핏 그늘이 졌다. 원래도 다감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더 차가워지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괜찮을 리가 없는 것을……. 어찌 그리도 무심했을까.’
속 썩이는 일 없이 뭐든 혼자서도 척척 잘 해내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래서 잘 지나갔으리라. 별 문제 없으리라. 무심하게도 그렇게 믿었다. 자식에 대한 믿음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부모의 헛된 욕심과 자만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건만 그리도 무책임했다.
평생 이루고자 했던 계획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그제야 장성한 아들의 인생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크게 어긋난 느낌. 본인은 아무런 불만 없이 충실한 삶이라 여겼지만 정작 중요한 것이 빠져있음을 알지 못했다.
부모 된 자가 자식에 대해 이리도 무심했다니. 최관장은 오랫동안 멀리 떼어 놓고 지켜보지 못한 세월이 새삼 안타까웠다.
“여보, 가요.”
어색한 침묵을 깨고 유여사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최관장이 부인의 손을 잡아주며 우현을 향해 다시 한 번 다짐을 놓았다.
“아무튼 아까 얘기한 작가에 대해 좀 알아 보거라. 왠지 마음에 들어.”
“맞아요. 인상도 좋고, 성격도 소탈하고. 나도 마음에 들어요.”
우현이 인상을 쓰든 말든 최관장은 막무가내였다.
“작품이 인상적이어서 전부터 궁금했다니까. 이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저도 그뿐이기를 바랍니다.”
“그럼? 이제 겨우 두 번 만난 처자인데 내가 뭘 어쩔까. 네 녀석이야 말로 괜한 오해 말아.”
유여사가 부드럽게 끼어들며 최관장의 편을 들었다.
“그래, 네 아버지 안목이 어디 보통 안목이니. 나도 그 아가씨 작품 봤는데 느낌이 좋더구나.”
우현은 공적인 관심이라 딱 잡아떼는 부모님의 태도에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작품에 관한한 냉정한 분이시니 거짓은 아니리라. 하지만 저 눈빛은 다른 관심 또한 넘치게 많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요즘 부모님의 이목은 주변에 있는 모든 미혼 여성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다하다 이제 일면식도 없는 판화가라니.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차실장에게 말해놨으니 조만간 자료가 올라올 겁니다. 그때 다시 말씀드리죠. 조심해 가세요.”
하루가 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부모님을 태울 차를 바라보는 우현의 눈가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절로 한숨이 나온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지상에 주차할 공간을 찾지 못한 우현이 지하주차장을 돌고 있었다. 다행히 더 내려갈 필요 없이 계단 옆 구석에 빈자리가 보였다. 코너 끝이라 애매하긴 해도 옆에 세워진 차가 작은 덕에 공간은 충분했다.
이사를 하고 한 달여. 전시 마무리와 새로운 기획이 맞물려 제시간에 퇴근한 기억이 까마득했다.
보통 갤러리의 성수기는 5-6월, 9-10월. 딱 웨딩시즌과 겹치는데다 평일보다 주말에 일이 더 많았다. 덕분에 지인들의 결혼식까지 러시를 이뤄 쉴 틈이 없었던 우현은 새로 이사한 집에 적응은커녕 호텔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일반 갤러리가 아닌 미술관 같은 경우엔 여름, 겨울 비수기에도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규모가 큰 기획전부터 상설 전시, 세미나, 문화센터 등, 꾸준히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고 관리, 유지 해야만 한다.
겉으로 보기에 한없이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문화공간이지만 그 커다란 공간을 채우려면 일 년 내내 끝없이 준비하고 기획해야 하는 노고가 필요했다
미술관은 아버지의 평생 꿈이자 노년을 위한 소망이었다. 외교관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수많은 미술품을 수집했고, 그 모든 걸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퇴직을 하고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 소장품을 기반으로 미술관을 건립하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우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재단과 미술관에 관련된 법적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따로 법무법인까지 설립했으니 반쯤은 그가 이루어낸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생각지 않았던 일을 천직인 양 하고 있는 지금이 가끔은 낯설기도 하다.
‘앞으로 한 달 정도는 한가하겠군.’
이제야 프랑스 미술관과 서류 절차까지 말끔하게 마무리 됐다. 국제 교류전 같은 경우는 절차뿐 아니라 계약에서 작품 섭외, 우송, 보험, 보관 등 신경 써야 할 문제들이 곱절은 많았다.
시동을 끄고 타이를 느슨하게 푼 우현이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 삑.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데 문득 옆에 세워진 차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이미 단종 된 고물 차가 참 자주도 눈에 띄었다.
‘이건……?’
기묘한 기시감에 우현의 시선이 무심코 차를 살폈다. 선팅이 되지 않은 창을 통해 내부가 고스란히 보였다.
‘허! 어지간하네.’
얼핏 눈에 비친 차안의 풍경은 우현의 눈살을 저절로 찌푸리게 만들었다. 쓰레기라고 하기도 애매한 물건들이 이리저리 뒤섞여 굴러다니고 있었다. 남의 일에 무관심한 그였지만 순간 차 주인이 궁금해질 정도였다.
우현은 자기도 모르게 차 안을 쓱 훑어보았다. 짐칸처럼 보이는 뒷좌석에 은박으로 이중 포장된 물건이 포개져 있었다. 꼭 액자 같은.
문득 미술관 주차장에서 보았던 차를 떠올린 우현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 저벅 저벅.
갑작스런 인기척에 돌아보니 경비원이 차량 점검을 하고 있었다.
‘최우현, 이제 하다하다 별짓을 다…….’
우현은 순간 어이없는 기분에 기막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남의 차는 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일까.
다음날.
미술관에 오후쯤 출근할 거라 미리 말해 놓은 우현은 오랜만에 운동을 나섰다.
전에 살던 오피스텔이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미술관에서 좀 멀었고 비즈니스 중심이라 주변이 번잡스럽고 시끄러웠다.
조금 더 조용하고 여유 있는 장소를 물색하던 중 마침 해외 발령을 받은 친구 녀석이 집을 부탁해 왔다. 가구도 그대로 두고 간다는 조건에 가볍게 몸만 들어온 참이었다.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는 것도 번거로워 일층이라 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공무원 아파트답게 청사가 바로 앞에 있어 공무에 관계된 일을 보기도 편했고, 분양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아 깨끗하고 주차시설도 잘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조용해서 좋았다.
바로 앞에 흐르는 천변을 따라 조깅코스가 잘 정비되어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바쁜 와중에 급하게 옮긴 것치고는 아직까지 불만은 없었다. 아직까지는.
느긋하게 오전 시간을 보낸 우현이 출근을 하려고 집을 나설 때였다.
지금껏 본적 없는 이상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앞집 현관 앞에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광경에 우현은 출근하려던 것도 잊고 지켜보았다.
- 쿵쿵.
“아무도 없나?”
양 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자아이가 문가에 귀를 대고 중얼거렸다. 옆에 서 있던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다시 문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아직 안 일어나신 거 아닐까?”
“미술 샘은 만날 늦더라.”
남자아이가 퉁명스레 끼어들자 문을 두드리던 여자아이가 팩 돌아서며 노려본다.
“늦게 주무신다잖아.”
“메- 마녀할망구.”
남자아이가 혀를 빼물고 약을 올리더니 초인종을 서너 번 연달아 눌렀다. 그제야 문 안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잠깐 기다려! 나가, 나간다고!
이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갔다. 아이들이 말한 대로 조금 전까지 자고 있었던 듯 한껏 기지개를 켜며 돌아서는 여자의 뒷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천천히 닫히는 문 너머로 연신 하품을 하는 여자와 아이들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 으아함- 어이, 꼬맹이들 왜 벌써 와서 수선이야?
- 두 시 넘었거든요? 쌤이 늦은 거예요.
- 다른 때는 30분이나 되어야 왔잖아.
- 오늘은 바빠요.
- 아함, 그러셔?
대체 누가 어른이고 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과외 같은 건가?’
미술을 가르치는 듯 언뜻 보인 거실 벽에 그림들이 잔뜩 붙어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멀거니 앞집 현관을 바라보던 우현의 눈가에 이채가 떠올랐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
문패(?)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 모르고 지낸 것이 이상할 만큼 꽤 눈길을 끄는 명패였다.
폭이 십 여cm 정도 되어 보이는 나무 패널이 눈높이 쯤 가로질러 붙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직접 새긴 듯 정형화 되지 않은 글씨체가 자연스러웠다. 그 아래 조금 작은 나무엔 전화번호까지 새겨져 있었다.
아파트란 것이 오피스텔과는 달리 가정집이 많아 번잡하지 않을까 걱정했건만 의외로 조용한 분위기에 안심하던 참이었다. 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생활이 이어지는 바람에 지금껏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꼬맹이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모양이라니. 어째 속은 기분이다.
우현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는데 사실을 증명하듯 문 너머에서 소란스러움이 흘러나왔다.
- 우당탕!
- 이것들이! 아예 부셔라, 부셔!
네 잘못이네, 쟤 잘못이네 따지며 다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수선스레 울려 퍼진다.
- 시끄럽다고 했지? 조용히 해! 웬수들아-!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긴 우현이 일순 조용해진 아파트 복도를 나서며 중얼거렸다.
‘아줌마, 당신이 더 시끄러워.’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주차장에 내려온 우현은 다시 한 번 눈살을 찌푸렸다. 드문드문 헐겁게 비워진 주차장에 예의 미니 봉고가 그대로 서 있었다.
‘영업용차가 아니었나?’
새삼 주위를 둘러본 우현이 그제야 옆의 차가 자꾸 눈에 거슬리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중·대형의 고급 승용차들이 즐비한 가운데 낡은 미니 봉고라니. 눈에 띌 만도 했다.
리모컨으로 차 시동을 걸며 흘깃 돌아보니 별다른 변화는 없어 보였다. 아니, 밝은데서 다시 보니 한 가지 더 눈에 띄었다. 톡 튀어나온 저것은 잠금장치가 분명한데…….
차문을 잠그지 않았다.
‘허, 가지가지…….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평소 같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일이다. 답지 않은 일의 연속에 우현은 과감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또 일주일이 지나갔다.
“오라버니 어디 참한 색시 없어요? 저 나이 되도록 혼자 있는 거 보기도 싫고, 오빠도 좀 알아봐줘요. 내 아들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저 정도면 멀끔하게 잘 생긴데다 능력도 남부럽지 않잖아요. 괜찮은 신랑감 아니에요?”
오랜만에 시간을 내어 숙부 내외와 저녁을 하는 자리였다. 유여사의 하소연에 숙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유화영 여사. 아직 아들을 잘 모르나 본데. 저 녀석 찬바람 부는 면상 봐라. 눈빛은 또 어떻고? 거, 무서워서 어떤 여자가 옆에 가겠나. 성격부터 고치기 전엔 어려울 걸?”
한국 미술계의 거장 유재호 교수. 우현의 외숙부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숙모 김영숙 여사가 한마디 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