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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건 그래요. 고모 부부는 안 그런데 우현이는 대체 누굴 닮은 거예요?”

“할아버지를 닮긴 했는데, 그때 혼자 떼놓고 가는 게 아니었나 봐요. 아무래도 너무 오래 혼자 지낸 것 같아요.”

최관장이 퉁명스레 말을 이었다.

“인석아, 뭐라고 말 좀 해봐라. 지 얘기 하는데 어째 그리 관심이 없어?”

“할 말 없습니다.”

아무리 괜찮다 해도 이해할 생각들을 안 하시니 우현으로선 진짜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유교수가 흥미로운 눈으로 새삼 물었다.

“허, 그놈 참. 우현아 진짜 관심이 없는 게냐. 아니면 없는 척 하는 게냐.”

“관심 없습니다.”

숙모 영숙이 고개를 갸웃하며 거들었다.

“그렇게 딱 자르지만 말고 생각이라도 좀 해보지 그러니. 이제 미술관도 자리 잡았겠다. 너도 슬슬 안정이 필요하지 않아?”

“지금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숙모님.”

깍듯하게 잘라내는 우현의 태도에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술잔을 비우며 우현을 건너보던 유교수가 다시 운을 뗐다.

“사내로 태어나서 지금껏 사랑하는 여자 하나 없었다는 게 말이 되나. 그 정도 열정도 없으면 사내가 아니지. 암.”

“아직 생각 없습니다.”

“에라- 이놈아. 사랑을 생각으로 하나? 화영아 네 아들놈 말하는 거 봐라. 진짜 문제 있다. 대체 어떻게 키우면 저렇게 재미없는 놈이 될 수 있는 거냐?”

“낸들 아우. 저 혼자 큰 걸 왜 나한테 물어요. 쟤가 저렇다니까요. 심각하다니까 농담인 줄 알았어요?”

못마땅한 눈으로 우현을 스쳐 본 최관장이 술잔을 비우고 유교수의 잔을 채웠다.

“다 큰 아들놈 이제와 줘 팰 수도 없고, 유가야 참한 처자 좀 알아봐라. 또 아냐. 늦바람이라도 날지.”

유교수가 마주 잔을 채우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라? 형님이라고 못 하냐, 최가야. 이거 또 은근슬쩍 하극상일세.”

“에라- 이놈아. 내가 아무리 네놈 동생이랑 결혼을 했어도 그렇지, 다 늙은 친구한테 형님 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더냐.”

“허허, 네놈이야말로 외국물 오래 먹더니 동방예의지국을 물로 보는구나.”

“어허- 전직 외교관의 품위를 어찌 보고, 네놈이야말로 타지 떠돌면서 예술 한다고 나대더니 친구도 못 알아보는 게야?”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던 유교수가 낙향해 재야에 묻혀 후진을 양성한지 10여년. 그와 죽마고우인 최관장이 퇴직을 하고 뜻을 같이해 만든 것이 지금의 미술관이었다. 지방이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고향에 뿌리내리고자하는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숙부와 아버지의 관계는 그만큼 오래되고 깊었다. 같은 목표를 세우로 여생을 함께할 만큼.

매번 똑같은 실랑이에 유여사가 웃으며 두 사람을 흘겨보았다.

“이 양반들이? 우현이 색시감 얘기하다가 왜 또 삼천포로 빠져요? 어째 날이 갈수록 더 애들 같아지는지 몰라. 철 좀 들어요.”

“그러게 말예요. 이이 이런 모습을 학생들이 봐야 하는데. 호호호.”

숙모가 맞장구를 치며 소녀처럼 밝게 웃었다. 두 부인네들의 말을 흘려내며 술을 마신 최관장이 화제를 돌렸다.

“참, 유가야. 강산영이라고 혹시 아는 처자야?”

“아버지!”

우현이 대뜸 말을 잘랐다. 하지만 최관장은 외려 그를 타박했다.

“왜 이놈아. 작품 때문에 의견 좀 구하는데 뭐가 문젠고?”

두 사람의 신경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교수가 되물었다.

“산영이를 어찌 아누?”

“오호, 유교수도 알아?”

“알지. 졸업한지 좀 됐을 걸? 그 녀석 주변머리가 영 없어 놔서, 졸업하고 나선 얼굴 보기 힘들어. 가끔 전시는 있는 것 같던데 어찌 지내는지도 모르고……. 그나마 한동안 소식이 없었지. 근데 그놈은 왜?”

“저번 판화 교류전에 출품했었잖아. 제자라면서 것도 모르고 무심하구먼?”

“제자가 한두 놈이냐. 서양화 때려치우고 뜬금없이 판화하고 있는 녀석 뭐가 예쁘다고……. 그나마 기억이라도 하고 있는 게 어디야? 꽤 오래 소식이 없어서 접었나 했는데 다행히 계속 하나 보네.”

“내 보기엔 작품이 괜찮던데. 성격도 좋은 것 같고. 자네 생각은 어때?”

“뭐, 판화가 의외로 적성에 맞는가 보더군. 양화도 나쁘지 않았는데, 판화는 또 다른 맛이 나. 쯧, 그럼 뭐하누. 들쭉날쭉 도깨비 같은 녀석이라. 무슨 생각인지 활동도 뜸하고……, 그냥 묻히기엔 아까워도 어쩌겠나. 그렇게 생겨먹은 걸.”

말은 그리해도 유교수가 바로 떠올릴 만큼 기억에 남는 제자라는 사실에 최관장은 내심 만족스러웠다. 퉁명스러운 말 속에 은근한 칭찬이 묻어난다. 격식 따지지 않고 소탈한 성격이지만 작품에 관해선 까다롭기로 유명한 유교수에게서 나쁘지 않다는 평을 받을 정도면 상당한 퀄리티를 인정받는 셈이었다.

의외로 높은 평가에 우현도 정색을 하고 유교수를 보았다. 최관장이 눈을 빛내며 재차 확인을 했다.

“아무튼 자네 눈에 들기는 했었군 그래.”

“나쁘진 않았지. 그런데 하는 짓이 영 답 없어. 이건 뭐, 당최 어디 나서지를 않으니 볼 수가 있어야지. 하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그 정도야? 숫기가 아주 없어 뵈진 않던데. 안 그래, 여보?”

“그러게요. 서글서글하니 막힌 데도 없고…….”

부부의 말에 유교수가 짓궂게 웃었다.

“허, 너무 서글서글해서 문제지. 어디서 뭘 하는지 영판 안 보이다가 한 번씩 불쑥 그림 들고 나타나는데, 계집애가 사내놈들보다 더 엉뚱했어. 하하.”

“거 맘에 든다. 자네야 교수라는 입장도 있고, 제자도 많으니 그 정도 관심에서 끝났겠지만 작업을 계속 하려면 너무 틀에 박힌 것보다 낫잖아. 안 그런가?”

“뭐, 그렇긴 하지.”

최관장이 기대어린 눈으로 우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우현아 어떠냐.”

“뭐가요.”

“저번에 좀 알아보라 했더니, 아직 이야?”

“좀 더 자세한 자료를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경력이 다섯줄도 안 되더군요.”

여전히 부러질 듯 뚝뚝한 우현의 태도에 숙모가 부드럽게 거들었다.

“어머, 확실히 시원스런 성격인가 보네. 호호.”

“쓸 만한 경력이 없었던 거겠죠.”

냉정한 우현의 평가에 최관장이 인상을 흐렸다.

“지금 유교수와 내 보는 눈이 틀렸다는 게냐.”

“그런 게 아니라. 조건 되는 다른 작가들도 많은데 유독 관심을 보이시는 이유가 궁금해서요.”

“가능성 있어 보이는 젊은 작가 좀 키워 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불만이냐.”

서늘한 눈빛과 함께 우현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말 그 이유뿐입니까.”

“다른 이유가 있으면? 부모가 돼서 자식 걱정 좀 하겠다는데, 꼭 그렇게 빡빡하게 굴어야 하누? 인간미 좀 길러봐라, 이놈아. 한 번쯤 부드럽게 넘어가면 어디가 부러지기라도 한다든?”

우현이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스치듯 짧게 잠깐 본 여자였다. 그는 대놓고 밀어붙이는 아버지의 막무가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작품이 좋은 것도 핑계일 뿐, 괜한 고집을 부리시는 것이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싸하게 가라앉는 분위기에 숙모가 조심스레 달랬다.

“그래 우현아, 별일도 아닌데 얼굴 굳힐 거 뭐 있니. 당장 어떻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때 혼자 두는 게 아니었는데…….”

이어지는 유여사의 한숨에 최관장이 버럭 성질을 냈다.

“아, 지난 얘기는 왜 자꾸 꺼내나!”

자신으로 인해 삐걱대는 분위기에 우현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결과는 항상 그의 잘못이 되어버리는지 모르겠다. 근심 가득한 어른들의 눈초리에 갑갑함을 느낀 우현이 목을 축이며 애써 표정을 풀었다.

“그만 하십시오. 그런 문제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새삼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똑똑한 놈이 모르긴 퍽도 모르겠다. 진짜 모른다면 그야말로 문제 있는 거지. 허허.”

우현에게 일침을 놓은 유교수가 짓궂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나야 못난 제자 놈 키워준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지. 그나저나 내 기억에 산영이 그 녀석 덩치가 꽤 있었는데, 보기에 괜찮던가?”

“복스럽고 좋던데 뭐. 이 나이 되니까 비쩍 말라서 화려하기만 한 요즘 애들이 오히려 부담스러워.”

“하긴 그녀석이 둥글둥글 모난데 없이 유한 구석은 있지.”

유여사가 생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리 큰아들 성격에 너무 어린 아이는 오히려 배겨나기 힘들 거예요. 넉넉하게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죠. 안 그래요, 언니?”

“그건 그래요. 우현이 성격이 쉽지는 않죠.”

대화가 심각하게 삼천포로 빠지고 있었다. 연신 물 잔을 비워내던 우현의 눈매가 가늘게 굳어졌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어른들의 폭풍 잔소리는 밤이 늦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간만의 가족모임이라 마음처럼 일찍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술잔이 돌고 돌아 얼큰하게 취한 어른들을 챙겨 보내드리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이 깊어가고 있었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돌며 무언가 확인한 우현이 슬쩍 인상을 썼다.

‘여전하군. 쯧.’

예의 미니 봉고가 변함없이 우직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젠 빈자리가 있어도 습관처럼 시선이 갈 정도였다. 주변과 격리된 채 방치된 것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그의 신경을 건드린다. 뒤에 실려 있는 짐과 함께.

‘아무래도 액자가 맞는 것 같은데…….’

외형도 포장방식도 미술관의 그것과 동일한 점이 유난히 거슬렸다. 직업이 직업인만큼 우현은 작가들 보다 작품 관리에 더 철저했다. 주인이 누구인지 한심하다 못해 짜증이 일었다.

‘도대체 뭐하는 차야.’

처음 며칠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다시 늦어진 귀가에 예의 이상한 봉고 옆이 어느새 우현의 지정석처럼 되어있었다.

미술관 업무가 한가해지자 이번엔 비공식 대외 일정이 줄줄이 대기 중이었다. 작가를 비롯한 각종 후원회와 세미나, 지인, 가족, 전시회과 박람회까지 크고 작은 파티와 모임이 끝없이 이어졌다.

우현은 그 모든 일정들을 서류에 도장 찍듯 몰아서 해치우고 있었다. 그에겐 그조차도 사회생활의 연속이자 익숙한 일상이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훌쩍 넘기자 이젠 정말 궁금해지고 있었다. 저 고물 미니 봉고의 용도와 주인이.

‘후, 최우현 네코가 석자다.’

차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온 우현은 고요한 밤공기에 묻어나는 젖은 풀 향기에 발걸음을 늦췄다. 문득 상관도 없는 문제에 신경을 세우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나이가 들면 걱정도 많아지는 것일까. 항상 유쾌함을 모토로 하던 외숙 부부까지 가세한 폭풍 잔소리라니. 무엇보다 아버지의 고집이 쉽게 누그러질 것 같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는 한숨이 늘 만큼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앞으로 시달릴 생각에 머릿속에 암담해 진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던 우현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조용히 흘러나오는 클래식 선율. 까만 밤을 배경으로 꿈결처럼 흐르는 피아노 음색이 복잡한 머릿속을 정화시켜 주듯 조용하고 맑았다. 그대로 서서 잠시 귀를 기울이던 우현이 설핏 실소를 지었다.

‘하! 최우현, 엉뚱한 짓의 연속이군. 시달리기는 했나 보네.’

잔소리의 위력은 역시 대단했다. 아니면 부모님의 말씀대로 그도 나이를 먹는 것일까. 문득 너무 앞만 보고 뛰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뒤늦게 부모님이 그리 나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밤중에 어디서 나는 소리지?’

새벽 2시가 가까운 늦은 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던 우현이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방범창도 없는 앞집의 베란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무방비하게 열려 있는 창 너머 듬성듬성한 버티칼 사이로 희미한 불빛과 함께 음악이 새어나온다.

문득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이 흐트러진 뒷모습의 여자가 떠올랐다. 그런 여자와 사는 남자가 진심으로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겁이 없는 건가.’

평소와 다르게 이런 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떠돌았다. 지친 다는 것이 무엇인지 언뜻 알 것도 같은 깊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