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화
다음날. 여느 때와 같이 오후에 출근한 우현이 결재가 올라온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조사한 작가 이력서를 마뜩찮은 표정으로 훑어 내렸다. 개인전 팜플릿이 추가됐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흔한 수상경력조차 하나 없다.
강산영(姜山影) 0000년생
0000년 대전 H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졸.
0000년 동 대학원 판화과 졸.
0000년 개인전 1회.
그 외 그룹전 다수.
현재 판화가 협회 회원.
무심한 눈으로 여전히 짧은 이력을 확인하던 우현의 표정이 일순 멈칫 굳었다. 그리고는 얄팍한 자료를 새삼 다시 들춰본다.
주소 : 대전시 00구 00동 청사아파트 407동 101호.
주소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우현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청사아파트 407동 102호.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가 사는 아파트 동호수와 딱 한자리만 달랐다. 어이없게도 이 강산영이라는 여자가 앞집에 산다는 말이었다.
자료를 책상 위에 던져놓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우현이 내선을 연결해 선영을 불러 올렸다.
“찾으셨어요.”
“강산영이라는 작가에 대해 따로 아는 내용이 있습니까?”
다짜고짜 날아든 질문에 자못 긴장한 선영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네? 뭐가 잘못됐나요?”
“아, 다시 조사했는데도 달라진 내용이 없어서요. 작가들에 대해선 아무래도 차 실장이 더 잘 아니까, 혹시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이 있나 해서 말입니다.”
“전시 준비하면서 통화는 몇 번 했지만, 저도 정식으로 만나 본 건 반출할 때뿐입니다. 아시다시피 국내 작가의 작품 커미셔너는 따로 있었고요. 아, 왜 얼마 전에 국장님도 잠깐 보셨잖아요. 반출일이 좀 많이 늦어진 작가분요.”
“아, 그 차?”
“네? 차라니요?”
선영이 의아한 눈으로 우현을 보았다.
“아, 아닙니다. 그러니까 전시 자료도 이게 전부란 말이죠?”
“그게, 개인전 이후로 한동안 활동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전의 자료는 저희 미술관 개관 전이라 따로 알아봐야 합니다. 좀 더 찾아볼까요?”
“아니. 됐습니다. 옛날 작품까지 힘들여 찾을 필요는 없어요. 그럼 일 보십시오.”
“저, 그런데 강산영씨는 왜……?”
조심스레 묻는 선영의 눈가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우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냥 확인해보는 겁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선영이 이내 옅은 한숨을 쉬며 돌아나갔다. 작가관리 또한 그녀의 일이었으니 미리 언질을 주어도 무방했지만 반갑지 않은 마음에 말도 꺼내기가 싫었다.
‘이 사실을 아시면 두 분만 신나시겠군.’
몇 장 되지 않는 자료를 다시금 확인한 우현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찾았다. 어차피 진행될 일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소소하게 겹치는 우연에 우현은 괜한 짜증이 일었다. 굳이 신경 쓸 일도 아니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 자꾸 거슬렸다.
‘모른 척 해야 하나.’
더 이상의 잔소리도, 쓸데없는 오해도 절대 사절이었다. 그리고 굳이 작가 주소까지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세부적인 문제는 직원들이 처리할 것이고, 계약에 관한 부분은 우현의 소관이었다. 최 관장은 전체적인 보고만 받을 뿐 실무에 관여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참 대책 없는 여잘세.’
그동안의 일들을 떠올린 우현의 눈가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소소하게 걸리던 모호함이 그제야 딱딱 맞아 떨어진다. 자동차, 액자, 과외, 손으로 새긴 그 이상한 문패까지.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뱉어낸 우현이 출품원서에 붙은 반명함 사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대체 언제 적 사진이야?’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시원한 눈매가 제법 날카로웠지만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이 아직도 젖살이 남은 것 같은 동안의 얼굴이다. 실제 나이를 생각하면 몇 년 묵은 사진을 붙여 놓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
도대체 이 여자의 어떤 부분이 부모님의 마음을 끈 것일까. 우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연히 알게 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와는 절대 안 맞는 성격이었다.
최관장 말대로 작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도 인정하다시피 그는 그리 녹록한 성격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그 이상한 여자는 더더구나.
‘그나마 한 가지 걱정은 덜은 셈인가.’
우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결론지었다. 부모님도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으리라.
일장춘몽(一場春夢), 부모님의 기대가 만들어낸 헛된 환상이리라.
#3. 언제나 어두운 등잔 밑 Ⅱ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마지막 장소를 나설 즈음엔 도로가 흠뻑 젖어 있었다. 제법 굵은 빗줄기에 간간히 스쳐가는 차들이 짙은 물보라를 흩뿌린다.
조금 늦은 감은 있었지만 결산 겸, 운영 자문 위원 어른들과 회식이 있었다. 말이 운영 자문이지 유교수를 필두로 열 명 남짓, 나이 지긋한 노 화백들은 사실상 미술관의 후원자이지 든든한 배경이기도 했다.
가까이 유교수부터 시작해 우현의 집안은 학문, 예술계 인맥이 두터운 편이었다. 하지만 예술가적 분위기에 익숙한 것과 별개로 우현은 그들 특유의 사고방식을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이가 들어도, 아니 나이가 들수록 더 아이 같아지는 사람들. 특유의 예리함으로 대단한 집중력을 보이기도 하지만 종종 어이없고 불가해할 만큼 엉뚱한 실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 남다른 감수성이란 것이 그런 것일까. 극으로 예민하고, 극으로 허술하다.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디든 별 다를 것 없겠지만, 소위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좀 더 극단적인 무언가가 당연하게 혼재했다.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선, 한없이 편한 듯 불편한 사람들. 우현에겐 그들이 그랬다.
결국 이쪽 일을 하게 됐지만 우현은 여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해관계가 더 편했다. 감정이라는 것이 개입되면 복잡해지기 밖에 더한가 말이다.
자리를 정리하고 집에 도착하니 어느새 새벽이 깊었다. 적막이 맴도는 지하 주차장에 빗물 흐르는 소리가 스산하게 퍼진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구석의 빈자리에 주차를 하고, 기사를 보낸 우현은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차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버려진 것도 아닌데 열흘 가까이 그대로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현관 출입구에 잠시 멈춰선 우현은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골초는 아니지만 가끔 즐기는 것 중 하나가 담배였다. 그리고 이렇게 비오는 날엔 담배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공기 중에 가득한 습기 때문일까.
우현이 출입구 난간에 기대어 흐릿한 조명 아래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띠리리.
복도 안쪽에서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이어 느릿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예의 여자가 무심하게 우현의 눈앞을 스쳐 출입구 끄트머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가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만져본다.
허리에 살짝 못 미치는 까맣고 긴 머리를 손수건으로 대충 묶은 여자는 편한 트레이닝 차림에 커다란 크로스백을 느슨하게 매고 있었다. 고개를 빼고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차를 어디에 뒀더라.”
우현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픽 헛웃음을 지었다.
‘친절하게 확인까지 해주신다 이거지.’
저 여자 (그가 알기로 강산영이 분명한)가 지금 찾는 것이 분명 그 ‘차’이리라. 열흘이 넘도록 꼼짝도 하지 않는 그 ‘차’ 말이다.
산영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우현이 빙긋 웃으며 천천히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듯 그녀의 어깨가 흠칫 굳어진다. 그리고 이내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그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현은 왠지 지금의 상황이 묘하게 유쾌했다. 산영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담배를 베어 문 그가 느릿하게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의 인사랄까. 어찌됐든 자신은 그녀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현의 인사에 당황한 듯 그녀가 덩달아 애매한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는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이마를 찡그리며 잽싸게 휙 돌아선다.
딱히 감정을 드러낸 것도 아닌데 뒷모습만으로도 그녀의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타인의 감정에 무심한 우현으로선 생소한, 꽤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반쯤 남은 담배를 끈 그가 마침 빗속으로 뛰어들려는 산영에게 말을 던졌다.
“그쪽 차, 짙은 색 미니 봉고 맞지.”
“네?”
홱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우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말을 뱉었다.
“그 차 지하에 있어.”
어지간히 놀랐는지 대답조차 못하고 굳어버린 그녀의 모습에 우현은 지금까지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두 눈 가득 떠오른 산영의 의구심을 풀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동안 그를 고민하게 만든 것에 대한 예의랄까.
‘댁도 고민 좀 해보라고. 훗-.’
돌아서는 우현의 등 뒤로 산영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현관문을 여는 그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그림처럼 걸려있었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역시나 여러모로 이상한 여자였다.
‘사람……, 맞지?’
산영은 놀라움에 앞서 잠시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비 내리는 깊은 밤 희미한 담배 연가와 낯선 남자. 까맣고 기다란 그림자.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과 반대로 네 가지를 상실한 삐딱한 태도에 묘하게 기분 나쁜 미소까지. 휙 돌아서 멀어지는 남자의 등짝을 보면서도 산영은 현실감 없는 풍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혹시나 하고 내려와 본 지하 주차장에 정말 그녀의 차가 있었다. 놀란 산영이 다시금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대체…….’
귀신이 곡할 노릇도 잠시, 차 문을 열고 뒤에 실린 짐을 발견한 산영은 순간 낯선 남자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워, 이걸 어째. 내가 못산다, 정말.”
그러니까 저건 일주일도 전에 찾아온 작품이었다.
‘액자 상했겠다. 오늘은 잊지 말고 내려놔야지.’
새삼 각오를 다지며 차에 오른 산영은 그렇게 십여 일만에 집을 나서 공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전시에 참여하느라 작업을 강행했던 것이 산영에겐 역시나 무리였다. 전시 기간 내내 방치했던 아이들의 수업을 보충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웬 미술대회가 그렇게나 많은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전시가 끝나 있었다.
뒤늦게 작품을 찾아오고 다시 열흘 남짓, 산영은 집에 콕 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번에 한 가지 일 밖에 못하는 주제가 일과 작업을 병행하려니 부작용이 날 밖에. 작품을 준비하면서 소홀해 질 수 밖에 없었던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건 확실히 정신건강에 좋지 않았다. 인간이 삭막해지는 기분이랄까. 머릿속도 덩달아 사막처럼 휑하게 비어 멈춰버린다.
산영의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오후엔 4-5시간 아이들을 가르치고, 저녁 시간은 느긋하게 말 그대로 논. 다. 그리고 깜깜한 밤이 되면 새벽까지 작업을 하고 돌아와 해가 떠오를 즈음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여느 때와 같이 오후에 출근한 우현이 결재가 올라온 서류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조사한 작가 이력서를 마뜩찮은 표정으로 훑어 내렸다. 개인전 팜플릿이 추가됐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흔한 수상경력조차 하나 없다.
강산영(姜山影) 0000년생
0000년 대전 H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졸.
0000년 동 대학원 판화과 졸.
0000년 개인전 1회.
그 외 그룹전 다수.
현재 판화가 협회 회원.
무심한 눈으로 여전히 짧은 이력을 확인하던 우현의 표정이 일순 멈칫 굳었다. 그리고는 얄팍한 자료를 새삼 다시 들춰본다.
주소 : 대전시 00구 00동 청사아파트 407동 101호.
주소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우현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청사아파트 407동 102호.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그가 사는 아파트 동호수와 딱 한자리만 달랐다. 어이없게도 이 강산영이라는 여자가 앞집에 산다는 말이었다.
자료를 책상 위에 던져놓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우현이 내선을 연결해 선영을 불러 올렸다.
“찾으셨어요.”
“강산영이라는 작가에 대해 따로 아는 내용이 있습니까?”
다짜고짜 날아든 질문에 자못 긴장한 선영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네? 뭐가 잘못됐나요?”
“아, 다시 조사했는데도 달라진 내용이 없어서요. 작가들에 대해선 아무래도 차 실장이 더 잘 아니까, 혹시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이 있나 해서 말입니다.”
“전시 준비하면서 통화는 몇 번 했지만, 저도 정식으로 만나 본 건 반출할 때뿐입니다. 아시다시피 국내 작가의 작품 커미셔너는 따로 있었고요. 아, 왜 얼마 전에 국장님도 잠깐 보셨잖아요. 반출일이 좀 많이 늦어진 작가분요.”
“아, 그 차?”
“네? 차라니요?”
선영이 의아한 눈으로 우현을 보았다.
“아, 아닙니다. 그러니까 전시 자료도 이게 전부란 말이죠?”
“그게, 개인전 이후로 한동안 활동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전의 자료는 저희 미술관 개관 전이라 따로 알아봐야 합니다. 좀 더 찾아볼까요?”
“아니. 됐습니다. 옛날 작품까지 힘들여 찾을 필요는 없어요. 그럼 일 보십시오.”
“저, 그런데 강산영씨는 왜……?”
조심스레 묻는 선영의 눈가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하지만 우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냥 확인해보는 겁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잠시 머뭇거리던 선영이 이내 옅은 한숨을 쉬며 돌아나갔다. 작가관리 또한 그녀의 일이었으니 미리 언질을 주어도 무방했지만 반갑지 않은 마음에 말도 꺼내기가 싫었다.
‘이 사실을 아시면 두 분만 신나시겠군.’
몇 장 되지 않는 자료를 다시금 확인한 우현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찾았다. 어차피 진행될 일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소소하게 겹치는 우연에 우현은 괜한 짜증이 일었다. 굳이 신경 쓸 일도 아니고,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 자꾸 거슬렸다.
‘모른 척 해야 하나.’
더 이상의 잔소리도, 쓸데없는 오해도 절대 사절이었다. 그리고 굳이 작가 주소까지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세부적인 문제는 직원들이 처리할 것이고, 계약에 관한 부분은 우현의 소관이었다. 최 관장은 전체적인 보고만 받을 뿐 실무에 관여하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참 대책 없는 여잘세.’
그동안의 일들을 떠올린 우현의 눈가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소소하게 걸리던 모호함이 그제야 딱딱 맞아 떨어진다. 자동차, 액자, 과외, 손으로 새긴 그 이상한 문패까지.
한숨처럼 담배 연기를 뱉어낸 우현이 출품원서에 붙은 반명함 사진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대체 언제 적 사진이야?’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시원한 눈매가 제법 날카로웠지만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이 아직도 젖살이 남은 것 같은 동안의 얼굴이다. 실제 나이를 생각하면 몇 년 묵은 사진을 붙여 놓았다고 해도 믿을 만큼.
도대체 이 여자의 어떤 부분이 부모님의 마음을 끈 것일까. 우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연히 알게 된 몇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와는 절대 안 맞는 성격이었다.
최관장 말대로 작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도 인정하다시피 그는 그리 녹록한 성격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그 이상한 여자는 더더구나.
‘그나마 한 가지 걱정은 덜은 셈인가.’
우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어이없는 해프닝으로 결론지었다. 부모님도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으리라.
일장춘몽(一場春夢), 부모님의 기대가 만들어낸 헛된 환상이리라.
#3. 언제나 어두운 등잔 밑 Ⅱ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했는지 마지막 장소를 나설 즈음엔 도로가 흠뻑 젖어 있었다. 제법 굵은 빗줄기에 간간히 스쳐가는 차들이 짙은 물보라를 흩뿌린다.
조금 늦은 감은 있었지만 결산 겸, 운영 자문 위원 어른들과 회식이 있었다. 말이 운영 자문이지 유교수를 필두로 열 명 남짓, 나이 지긋한 노 화백들은 사실상 미술관의 후원자이지 든든한 배경이기도 했다.
가까이 유교수부터 시작해 우현의 집안은 학문, 예술계 인맥이 두터운 편이었다. 하지만 예술가적 분위기에 익숙한 것과 별개로 우현은 그들 특유의 사고방식을 여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나이가 들어도, 아니 나이가 들수록 더 아이 같아지는 사람들. 특유의 예리함으로 대단한 집중력을 보이기도 하지만 종종 어이없고 불가해할 만큼 엉뚱한 실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다. 남다른 감수성이란 것이 그런 것일까. 극으로 예민하고, 극으로 허술하다.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디든 별 다를 것 없겠지만, 소위 예술가라는 사람들은 좀 더 극단적인 무언가가 당연하게 혼재했다.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선, 한없이 편한 듯 불편한 사람들. 우현에겐 그들이 그랬다.
결국 이쪽 일을 하게 됐지만 우현은 여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해관계가 더 편했다. 감정이라는 것이 개입되면 복잡해지기 밖에 더한가 말이다.
자리를 정리하고 집에 도착하니 어느새 새벽이 깊었다. 적막이 맴도는 지하 주차장에 빗물 흐르는 소리가 스산하게 퍼진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구석의 빈자리에 주차를 하고, 기사를 보낸 우현은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은 차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버려진 것도 아닌데 열흘 가까이 그대로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현관 출입구에 잠시 멈춰선 우현은 처마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골초는 아니지만 가끔 즐기는 것 중 하나가 담배였다. 그리고 이렇게 비오는 날엔 담배가 더 진하게 느껴진다. 공기 중에 가득한 습기 때문일까.
우현이 출입구 난간에 기대어 흐릿한 조명 아래 흩어지는 담배 연기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 띠리리.
복도 안쪽에서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이어 느릿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예의 여자가 무심하게 우현의 눈앞을 스쳐 출입구 끄트머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가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손을 내밀어 빗방울을 만져본다.
허리에 살짝 못 미치는 까맣고 긴 머리를 손수건으로 대충 묶은 여자는 편한 트레이닝 차림에 커다란 크로스백을 느슨하게 매고 있었다. 고개를 빼고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차를 어디에 뒀더라.”
우현은 순간 자기도 모르게 픽 헛웃음을 지었다.
‘친절하게 확인까지 해주신다 이거지.’
저 여자 (그가 알기로 강산영이 분명한)가 지금 찾는 것이 분명 그 ‘차’이리라. 열흘이 넘도록 꼼짝도 하지 않는 그 ‘차’ 말이다.
산영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우현이 빙긋 웃으며 천천히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그제야 이상함을 느낀 듯 그녀의 어깨가 흠칫 굳어진다. 그리고 이내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그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현은 왠지 지금의 상황이 묘하게 유쾌했다. 산영을 빤히 바라보며 천천히 담배를 베어 문 그가 느릿하게 연기를 뿜어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의 인사랄까. 어찌됐든 자신은 그녀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우현의 인사에 당황한 듯 그녀가 덩달아 애매한 고갯짓을 했다. 그리고는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이마를 찡그리며 잽싸게 휙 돌아선다.
딱히 감정을 드러낸 것도 아닌데 뒷모습만으로도 그녀의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타인의 감정에 무심한 우현으로선 생소한, 꽤나 새로운 경험이었다. 반쯤 남은 담배를 끈 그가 마침 빗속으로 뛰어들려는 산영에게 말을 던졌다.
“그쪽 차, 짙은 색 미니 봉고 맞지.”
“네?”
홱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우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말을 뱉었다.
“그 차 지하에 있어.”
어지간히 놀랐는지 대답조차 못하고 굳어버린 그녀의 모습에 우현은 지금까지의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두 눈 가득 떠오른 산영의 의구심을 풀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동안 그를 고민하게 만든 것에 대한 예의랄까.
‘댁도 고민 좀 해보라고. 훗-.’
돌아서는 우현의 등 뒤로 산영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현관문을 여는 그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그림처럼 걸려있었다.
‘그나저나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지?’
역시나 여러모로 이상한 여자였다.
‘사람……, 맞지?’
산영은 놀라움에 앞서 잠시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비 내리는 깊은 밤 희미한 담배 연가와 낯선 남자. 까맣고 기다란 그림자.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과 반대로 네 가지를 상실한 삐딱한 태도에 묘하게 기분 나쁜 미소까지. 휙 돌아서 멀어지는 남자의 등짝을 보면서도 산영은 현실감 없는 풍경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혹시나 하고 내려와 본 지하 주차장에 정말 그녀의 차가 있었다. 놀란 산영이 다시금 눈을 끔뻑거렸다.
‘이게 대체…….’
귀신이 곡할 노릇도 잠시, 차 문을 열고 뒤에 실린 짐을 발견한 산영은 순간 낯선 남자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워, 이걸 어째. 내가 못산다, 정말.”
그러니까 저건 일주일도 전에 찾아온 작품이었다.
‘액자 상했겠다. 오늘은 잊지 말고 내려놔야지.’
새삼 각오를 다지며 차에 오른 산영은 그렇게 십여 일만에 집을 나서 공방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전시에 참여하느라 작업을 강행했던 것이 산영에겐 역시나 무리였다. 전시 기간 내내 방치했던 아이들의 수업을 보충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봄이라지만 웬 미술대회가 그렇게나 많은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전시가 끝나 있었다.
뒤늦게 작품을 찾아오고 다시 열흘 남짓, 산영은 집에 콕 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 번에 한 가지 일 밖에 못하는 주제가 일과 작업을 병행하려니 부작용이 날 밖에. 작품을 준비하면서 소홀해 질 수 밖에 없었던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을 하는 건 확실히 정신건강에 좋지 않았다. 인간이 삭막해지는 기분이랄까. 머릿속도 덩달아 사막처럼 휑하게 비어 멈춰버린다.
산영의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오후엔 4-5시간 아이들을 가르치고, 저녁 시간은 느긋하게 말 그대로 논. 다. 그리고 깜깜한 밤이 되면 새벽까지 작업을 하고 돌아와 해가 떠오를 즈음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