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숨결

1화


#프롤로그


침대 위로 털썩 주저앉은 연수의 주위로 보이지 않는 먼지와 침통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화장대 위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가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험한 습기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그리곤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결혼사진 옆에 놓인 서류를 한껏 노려봤다.

눈앞에 닥친 현실에 쓴물이 위를 역류해 입으로 달려들자 큰 들숨과 함께 억지로 삼켜내며 담담하려 애썼다. 하지만 오기였을까, 눈동자를 가득 채우던 습기가 기어이 얼굴 위를 길게 가로질렀다. 흐릿해지려는 시야 사이로 그리도 외면하려던 결혼사진이 들어왔다.

심장이 욱신욱신 조여지다 못해 쓰라려 미칠 것 같아 연수는 상체를 뒤틀었다. 그간 적잖이 겪었으니 이젠 심리적인 고통이 무뎌질 만도 하건만 여전히 명치끝이 아리고 답답한 걸 보니 아직 끝이 아닌 모양이다.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후후, 이연수. 꼴좋다.”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웃어젖힐 사람이 적어도 다섯 명은 될 터였다. 그리 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참아보려 해봤지만 안 되는 걸 어쩌겠는가. 그러기엔 자신은 너무나 어렸고 참아주기엔 인내심이 적었다.

“하아…… 그래, 이연수. 넌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가슴을 한 번 긁어낸 상처의 칼날이 목으로 다시 치달아 오르기 전에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연수는 숨을 쭉 들이켰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내뱉으며 겨우겨우 가슴을 누르고 휴대폰을 들었다. 단축번호 1번을 누르면 될 텐데도 검지에 힘을 줘가며 고집스럽게 번호를 하나하나 눌렀다. 신호가 가고 덜컥 전화 받는 소리가 들리자 당장에라도 끊고 싶은 충동에 두 손이 들썩거렸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선생님 많이 바쁘세요?”

[네, 조금 바쁘시긴 한데……. 잠깐만요.]

늘 그렇듯이 조수인 민우가 그의 휴대폰을 받았다. 성능 좋은 휴대폰으로 그가 있는 곳의 분주한 소리가 마구 쏟아지자 습관적으로 귀를 더 바짝 가져다댔다. 아마 이 소리를 듣는 것도 마지막이리라.

[왜?]

“왜라…….”

며칠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의 첫마디치곤 참으로 무심하고 냉정했다. 떨리고 아팠던 가슴이 억울할 만큼 짜증이 난 연수는 턱이 얼얼할 정도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끝난 사이라지만 냉정해도 너무 냉정하지 않은가.

[무슨 일이야?]

“법원에 다녀오고 나서 벌써 며칠째 집에 안 들어왔는지 알아요?”

[이혼 노래를 해서 해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

“하아, 그렇다고 보란 듯이 외박을 해요?”

이젠 그에게 추궁할 자격이 없음에도 연수의 입은 통제권 밖을 벗어나버렸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 헤어지는 건 더 힘들어 차라리 안 봤으면 했는데, 막상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볼 수 없자 그 배신감에 콧등이 시큰거린다.

[이연수, 내게 그런 말 할 권리가 없을 텐데?]

“그러네요, 내가 실언했어요. 됐어요?”

[혹시 마음이 바뀌었나?]

“아니요.”

[그럼 왜 전화했는데?]

“아…… 당신, 참 냉정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아니에요, 됐어요. 더 이상 말해서 뭐하겠어요. 바쁜데 전화해서 미안해요.”

최대한 냉정을 가장해 매몰차게 대꾸하려 했지만 떨리는 음성만은 잡을 길이 없다. 아무리 가슴이 아리고 두려워도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에게 웃어주며 담담하게 작별을 고하고 싶었는데, 그 일마저도 쉽지 않은 걸 보니 행운의 여신은 완전히 돌아선 모양이다.

[이연수?]

“선생님…….”

그녀를 부르는 그의 음성이 착각처럼 꽤나 다정히 들려오자 가슴이 묵직해지고 목이 따끔거렸다. 연수는 전화를 끊으려던 손에 힘을 줘 아프리만치 귀에 눌렀다.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되었다는 것을 그는 알까? 연애하던 시절에 불렀던 호칭으로 그를 나지막이 부르고는 마른 침을 삼키는데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순간, 누구에게 한 대 맞은 듯 강한 통증이 심장을 관통했다. 온몸을 파고드는 고통에 연수는 머리를 숙여 무릎에 박고는 연거푸 거친 호흡을 뱉어내며 진정하려 애썼다. 이 지독한 사람들과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인욱아, 너 찾아.]

[알았어.]

[빨리.]

[알았다니까.]

잠시 흔들렸던 가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여자가 버젓이 옆에 있는 걸 확인하자 더한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왜?

어쩌면 그에게 전화한 건 지푸라기라도 부여잡고 싶은 미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후후,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가슴이 희망을 품었나 보다.

‘하아, 마지막까지 착각이라니. 이연수 너, 너무 추하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초췌하다 못해 거죽만 남은 꼴이라니.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슬픔에 잠겨 섧디섧게 울고 싶은 걸 꾹꾹 누르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두 눈을 부릅떴다.

‘후후, 그래. 망설일 필요조차 없었던 거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애초에 없었던 거니 사라져주면 되는 것이다.’

[말해.]

“민정 언니 촬영장에 와 있어요?”

[너와 상관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전화한 이유나 말해.]

“그렇죠, 부부였던 동안에도 상관없던 일들이 이제 남남인데 제가 뭐라고…… 괜한 참견을 했네요. 죄송해요.”

그 여자 말만 하면 되레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에게 건조하고 메마른 어조로 사과하고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했을까? 끝없이 자신을 몰아치며 아파하고 상처받는 일 따위 이젠 하지 않기로 하고서. 그저 자신이 귀찮기만 한 그와 깔끔하게 정리하고 빠져주면 될 일이다.

[휴…… 연수야?]

“죄송하다고 했으니 됐잖아요. 식사 잘 챙겨 드세요.”

그의 한숨에, 또 그의 부름에 습관처럼 대꾸를 하고 짜증을 냈다. 그리고 또 그를 챙겼다. 미쳤다.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거다.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헤어져도 모자랄 판에 달달한 마무리 인사라니, 한 번 바보 멍충이는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할 말이 겨우 그거야? 네 결정이 바뀌었길 기대했는데.]

“겨우 이거라서 죄송한데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기억해둬요. 속옷은 화장대 두 번째 서랍에 있고 양말은 맨 아래 서랍에 있어요. 그리고 드라이한 옷은 세탁소에서 찾아 옷장에 넣어뒀으니 잘 챙겨 입으시고, 식사는…… 바쁘다고 굶지 말고 잘 챙겨 드세요.”

떠날 마당에 불필요한 염려란 걸 알지만 그의 다정한 목소리에 가슴이 팔랑거려 또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얼마 전까진 행복한 마음으로 했던 일들이라 생각하니 가슴속이 싸하다. 남편이 자리를 옮겼는지 조금 전까지 시끄럽던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연수야?]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은 못하겠지만 후회는 안 해요.”

[연수야?]

낮고 강경한, 하지만 어쩐지 감정이 조금 담긴 듯도 한 그의 부름에 목 아래 잠긴 침을 삼키며 차분하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왠지 다급함이 느껴지는 그의 음성에 조금은 통쾌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기분이었다.

[구청에는…… 내가 접수할게.]

“후우, 그래요.”

하아, 그래서 다급하게 부른 거였는데 또 착각하다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건만, 이유 모를 배신감으로 부들부들 떨며 휴대폰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연수는 화장대 앞으로 다가갔다. 이제 다 끝났다. 두 사람의 이혼이 기정사실임을 알려주는 협의이혼의사확인서의 어떤 내용도 시야에 보이지 않을 만큼 두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의 결혼생활이 이 서류 한 장으로 종지부를 찍는다는 것이 믿기 어려웠다.

‘행복했던 때도 있었는데…….’

뿌옇게 차오른 눈동자로 처음 이 집에 입성했을 때를 떠올리며 연수는 아프게 웃었다. 아니 울었다. 그와 함께 고른 가구들과 전자제품들을 보자 꾸역꾸역 슬픈 감정이 차올랐다. 이런 우스꽝스런 상황에 빠지려고 남들보다 이른 결혼을 선택한 게 아니었는데. 약아빠진 계산 한 번 없이 사랑을 선택했는데 결국 이런 꼴이 되다니, 비참해 헛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후후후, 엄마의 말대로 되긴 싫었는데 이리 되고 말았네.”

물기 어린 눈으로 다시 한 번 침실을 쭉 훑어본 연수는 고통어린 침을 삼키며 침실을 나왔다. 그녀의 축 처진 어깨 사이로 사랑했던 남자와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여자의 결혼사진이 멀어지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가는 것임에도 왜 절벽으로 굴러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 걸까?



#1. 기다림의 끝


“선생님, 준비되었습니다.”

인욱은 민우의 보고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의자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갔다. 팔뚝까지 걷어 올린 블랙 와이셔츠에 타이트한 바지를 입은 인욱이 스튜디오에 등장하자 시끄럽던 내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스튜디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장신의 그가 한 발씩 내딛을 때마다 바지에 감싸인 그의 불끈거리는 허벅지에 여자들의 시선이 뜨겁게 달라붙었다.

외부생활을 오래한 것을 드러내주기라도 하듯이 초콜릿 빛의 피부가 그의 남성다운 매력을 더해줬다. 날카롭지만 귀족적인 콧날은 그의 서구적인 마스크를 더욱 눈에 띄게 해줬고, 음침하리만치 어둡고 고요한 검은 눈동자는 여자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섹시함이 존재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무심함이 여자들의 시선을 더 잡아끄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인욱은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아니, 관심을 가질만한 마음의 여유가 그에겐 한 귀퉁이도 없었다. 여러 명을 가져 행복할 수 있는 성격이었다면 벌써 고개를 돌렸을 테지만 지금 그에겐 딱 한 사람만 있으면 되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스튜디오에 있는 사람들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하자 그는 가볍게 응수하고는 준비된 카메라 앞에 섰다.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나른했던 표정이 카메라 앞에 서자 순식간에 돌변해 강렬하게 빛났다. 그의 몸짓,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시선들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사진으로 남길 피사체에만 시선을 주는 그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사람의 생각뿐이었다.

‘언제 나타날 거야?’

그의 마음을 훔쳐 달아난 그녀를 제외하곤 그에게 여자는 그저 피사체일 뿐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만큼은 그 피사체와 사랑에 빠지는 동료 포토그래퍼가 들으면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놀리겠지만, 그에겐 고수하고 싶은 소중한 감정이었다.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가 바보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가 자초한 운명이었다. 칼자루는 자신이 아닌 그녀가 쥐고 있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때가 되어 그에게 다시 기회가 오면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번 호 잡지화보 모델 서나림입니다.”

“네.”

“예쁘게 봐주세요.”

“사진이 말해주겠죠.”

“아휴, 선생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서 끝냅시다.”

인욱은 조수인 민우가 맞춰둔 카메라 렌즈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여자모델이 다가오자 고개를 들었다. 제 딴에는 섹시한 웃음을 보이며 그의 팔에 손을 올리는 서나림을 향해 불쾌한 시선을 던졌다.

“우리 커피 한 잔 하고 할까요?”

“서나림 씨?”

“네?”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 잘 들어요.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일했는지 모르지만 난 서나림 씨에게 일 외적인 어떤 것도 관심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 컨셉에 맞는 포즈나 취하는 게 서로에게 이득일 겁니다.”

장신의 육감적인 여자 모델이 웃음을 흘리며 노골적인 유혹의 눈빛을 보내도 그의 심장은 뛰질 않는다. 딱딱하다 못해 냉기가 뚝뚝 흐르는 일침에 서나림이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더니 피식 웃는다. 이해되지 않는 모델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자신과는 상관없으니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