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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이왕이면 얼굴과 상체 쪽으로 잡아주세요.”
“서나림 씨?”
“네, 선생님.”
“사진은 서나림 씨가 아닌 제가 찍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컨셉에 대해서는 알고 왔습니까?”
“컨셉이요?”
“휴…….”
컨셉에 대해 모르고 온 모델은 무용지물이었다. 모델을 차갑게 응시하던 그는 바로 민우를 쳐다봤다. 이런 사소한 일에 대한 체크도 민우의 몫이었다.
“민우야, 서나림 씨 에이전시에 오늘 촬영 컨셉 보냈지?”
“네, 선생님.”
그렇지, 그의 성격을 아는 민우가 실수할 리가 없었다.
“오늘 촬영 컨셉을 모르고 온 것 같으니까 설명해줘.”
일에 있어 프로답지 못한 사람이나 곤란한 일에 부딪혔을 때 대충 무마하려는 사람은 딱 질색이었다. 아마추어처럼 행동하는 모델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줄 인내심 따위 그에겐 없다. 모델의 얼굴을 한껏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곤 카메라에서 손을 뗐다.
“네, 선생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저 모델이 골칫거리가 될 거라는 데 그의 경력을 걸어도 좋았다. 이 일을 오래한 탓에 이젠 모델의 행동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되었다. 물론 단순히 그의 느낌으로 끝나기를 바라지만,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좋은 사진 한 장만 나오면 작업을 끝낼 생각이었다. 스스로의 아둔함으로 인생을 허비하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네, 알겠습니다.”
“끝나면 불러.”
인욱은 민우가 여자모델에게 설명할 동안 렌즈 앞을 떠나 작업장 주변을 살피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열기를 받아 안았다. 눈이 부실 만큼 강한 조명이 쏟아내는 열기는 흡사 한낮의 더위를 방불케 했다.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 될 만큼 세팅이 다 되어 있는 상태라 그가 서 있는 곳은 뜨겁다 못해 익을 지경이었다.
배경이 사막인데 현지로 갈 상황이 아니어서 사막의 느낌과 거의 흡사하게 꾸며야 했는데 결과물을 보니 민우가 꽤나 노력한 모양이었다. 조금 미흡한 면이 보이긴 하지만 눈감아 줄 수 있는 정도였다.
“선생님, 설명 끝났습니다.”
“그럼 시작해.”
모델에게 컨셉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민우가 손을 들고 불렀다. 민우의 표정을 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모델과 포토그래퍼와의 중간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혼나야 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억울할 테지만 그것도 다 경험이었고 민우에겐 필요한 과정이었다.
“네.”
“버터플라이 디퓨저(촬영시 필요한 반사판으로 일반적인 것보다는 큰 크기로 양쪽의 스탠드 위에 세운다)를 약간 더 위로 올려. 한 15도 정도.”
“네, 선생님. 이 정도요?”
“오케이.”
인욱의 지시에 따라 민우가 버터플라이 디퓨저를 위로 약간 올렸다. 그러는 사이 그는 조리개(사람의 동공과 같은 역할, 렌즈의 구경이 열리는 크기를 변화시켜 빛의 양을 조절할 수 있다)를 맞추며 빛의 양을 조절했고, 서 있는 모델에 맞춰 화면을 분할해 가장 이상적인 위치를 잡으려 삼각대를 이동시켰다. 안정적인 사진을 찍기도 해야겠지만 그는 균형이 맞는 사진을 원했다. 그래서 모델과 사막의 배경을 균형적으로 잘 배열한 뒤, 노출부분을 신경 써서 모델과 사막의 디테일을 살릴 위치를 잡았다.
그는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날씨를 조명감독이라고 부르는데 오늘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모양이었다. 저 모델만 잘 협조해준다면 좋은 사진이 나올 테고 그만큼 작업시간도 단축될 것이란 생각에 조금 전의 불쾌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자, 시작.”
찰.
칵.
찰칵, 찰칵, 찰칵.
그래도 민우가 컨셉 설명을 잘했는지 모델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치껏 포즈를 잘 취해 촬영은 무난하게 시작되었다. 셔터의 열림 소리인 ‘찰’소리가 남과 동시에 다시 닫히자 ‘칵’소리를 냈다. 세지 못할 정도의 찰칵거리는 소리만이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열려 있는 시간으로 빛의 광량을 조절하는 셔터스피드가 점점 빨라지는 그의 손길에 모두의 시선이 닿았다. 셔터 누르는 것을 절대 아끼지 않는 그의 손가락 끝과 날카로운 눈매는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느라 바빴다.
“컨셉.”
“네?”
“하고 싶은 포즈가 아닌 컨셉이 원하는 포즈를 취하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델이 집중력을 놓치고 컨셉과 맞지 않는 자세를 취하자 그의 빈틈없는 질책이 그대로 날아가 꽂혔다. 이 업종에서 성격이 깐깐하기로 소문난 그는 일이 시작되면 조금의 잡음이나 산만함을 용서치 않는 스타일이었다. 찰나의 순간을 잡아야 해서 집중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사소한 것에서 발견하는 특별함을 느끼고 싶어 방해되는 건 어떤 것도 싫어했다.
그는 손은 바쁘게 움직여도 마음만은 느긋함을 가지고 눈앞에 있는 피사체의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아 나갔다. 일할 때만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참 좋았다. 누구든, 무엇을 담든 간에 일을 하고 있는 동안은 그의 머릿속을, 그의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이 떠오르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필름 한 통을 다 썼는지 도로록 돌아가는 소리가 스튜디오를 울리자 인욱도 그제야 카메라에서 손을 뗐다.
“민우야, 필름 가는 동안 잠시 쉬자.”
“네, 선생님.”
인욱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미약한 한숨을 내뱉은 후 잠시 쉴 겸 창가로 다가가 섰다.
스튜디오는 동양적인 풍광을 가진 경기도 어느 한 도시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스튜디오를 가진 것은 행운이었다. 해가 지면 온통 붉은 낙조를 볼 수가 있었는데 대지를 태워버릴 만큼 붉디붉은 강렬한 색채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었다. 밤에 이곳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으면 야경이라기보다는 까맣게 드리워진 벽에 박힌 작은 조명들 같기도 했다.
‘넌 행복하니?’
조용히 내뱉은 그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은 심해처럼 깊기만 했다. 이곳에만 서면 심장이 차분해지는 건 습관이 아닌 그리움의 발악이었고 참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일을 하다가도 가슴에서 뜨거움이 치솟을 때면 이곳에 서서 가슴을 달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탁 트인 풍경들이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놓아 그나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 커피라도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일 외적인 관심은 필요 없다고 말했을 텐데요?”
“개인적인 관심이 아니라 그저 절 찍어주시는 선생님에게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담담하게 대해도 될 텐데도 요즘 들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그의 신경이 그 누구에게도 너그럽지 못하게 만들었다. 스케줄을 타이트하게 잡아 무리한 탓에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져 통증을 호소했지만,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아 그의 육체에게 휴식을 줄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젠장, 언제까지 참아야 하냐고.’
인욱은 등을 돌리고 두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한 뒤 불쑥불쑥 찾아들며 피폐하게 만드는 무기력감에 나직이 욕설을 읊조렸다. 결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고통의 흔적들이 아주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껏 견뎌왔는데 지금에 와서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선생님?”
“젠장.”
“아잉, 선생님.”
“남의 말을 일부러 안 듣는 겁니까? 아니면 못 들은 척 하는 겁니까?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인욱은 등 뒤에서 여자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인상부터 찌푸렸다. 팔 안쪽으로 파고들어오는 손과 뒤이어 느껴지는 가슴의 말캉함에 입매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그의 소문을 듣지 못하고 촬영에 온 모양이었다. 그의 입가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이, 선생님…… 화내지 마세요. 네?”
“놓지? 당최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그렇게 화난 얼굴을 하시면 너무 무서워요, 선생님.”
팔에 여자의 풍만한 가슴이 더 바짝 밀착되어지는 게 느껴지자 그의 이마에 퍼런 핏줄이 울퉁불퉁 튀어나오고 턱 근육이 경직되었다. 막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과 같은 분노가 입구를 열고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한층 더 깊어지며 어두워졌다.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하면 들어먹어야 하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고 빙그레 웃고 있는 여자들이 꼭 있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여자는 그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말만 골라 하고 있었다.
“뭐 이런…….”
“와…… 우리 선생님, 팔 근육이 장난 아니시다.”
“놔.”
그의 단호한 거절에도 눈치 없이 애교어린 콧소리를 내는 모델을 향해 이를 악물며 내씹었다. 오늘은 그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인 상태라 더 이상 봐주기가 힘들었다. 이런 날은 가만히 내버려둘 것이지, 건드린 여자의 잘못이 크다.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는 인내심을 내팽개치는 순간, 누르고 있던 짜증이 그를 집어삼켰다. 경고는 이쯤에서 되었다.
인욱은 더러운 물건을 떨쳐내듯 자신의 팔에서 여자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내 쓰레기를 버리듯 바닥으로 확 밀쳐버렸다. 순간 쾅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엄마야! 선생님……?”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일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해. 괜히 너 같이 개념 없는 사람들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까지 욕먹게 하지 말고.”
그의 강한 힘에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붉어지며 억울함이 가득하다는 표정이 보였다. 단호한 거절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눈에 물기를 가득 담고 입술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그라는 사람 자체가 좋아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수십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일이었다. 언제가 되어야 제대로 코스를 밟은 사람이 속도위반을 한 사람보다 잘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려는지, 답답한 마음이 커지는 만큼 분노도 크다는 걸 저 풋내기가 알기는 할까?
“전 단지 선생님과 잘 지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상처 입은 듯이 울먹이며 핑계를 대는 여자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서 더 많은 눈물을 짜낸다고 해도, 그 어떠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의 가슴은 말랑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단 한 여자를 제외하고는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민우야?”
인욱은 메말라버린 눈으로 그때까지도 바닥에서 일어나지 않는 여자를 지켜보다가 망설임 한 점 없이 민우를 찾았다. 그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스튜디오를 쩌렁쩌렁 울렸다. 누가 뭐라고 하든, 스튜디오에 어떤 일이 생기든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네, 선생님.”
“지금까지 이 여자하고 찍었던 사진은 전부 폐기하고, 오늘 촬영 그만 접어.”
“네?”
“한빛에 다른 모델하고 작업을 하면 하겠지만 이 여자하고는 절대 안 한다고 연락해.”
그의 거절에 감정적으로 나올 것이 분명한 여자를 데리고 작업을 재개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니 그만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으흐흑…… 마음대로 취소하는 게 어디 있어요?”
“위약금을 물든 말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넌 회사에 가서 어떻게 변명할지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민우야, 정리해.”
인욱은 두 눈을 도로록 굴려대며 소리를 지르는 여자에게 피식 웃으며 친절히 설명하고는 등을 돌렸다. 출렁이는 감정을 억누르는 사이 여자가 그에 대한 욕설을 입에 담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오히려 홀가분했다.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 그는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에 시선 한 자락조차 주기 싫었다.
‘진즉에 이리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매몰차게 행동했더라면…….’
인욱은 과거, 그의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에 자신만만했었다. 그를 향한 감정이 어떤 것이든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을 때는 변명이 아닌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후회가 가슴을 후벼 팠지만 후회는 항상 늦는 법이었다. 예전의 일을 생각하자 치밀어 오르는 부아가 갈 곳을 잃고 심장으로 고스란히 파고들었다. 뼈에 사무치도록 아픈 통증에 어금니를 사리물며 쓰디쓴 한숨을 터트렸다.
“이왕이면 얼굴과 상체 쪽으로 잡아주세요.”
“서나림 씨?”
“네, 선생님.”
“사진은 서나림 씨가 아닌 제가 찍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컨셉에 대해서는 알고 왔습니까?”
“컨셉이요?”
“휴…….”
컨셉에 대해 모르고 온 모델은 무용지물이었다. 모델을 차갑게 응시하던 그는 바로 민우를 쳐다봤다. 이런 사소한 일에 대한 체크도 민우의 몫이었다.
“민우야, 서나림 씨 에이전시에 오늘 촬영 컨셉 보냈지?”
“네, 선생님.”
그렇지, 그의 성격을 아는 민우가 실수할 리가 없었다.
“오늘 촬영 컨셉을 모르고 온 것 같으니까 설명해줘.”
일에 있어 프로답지 못한 사람이나 곤란한 일에 부딪혔을 때 대충 무마하려는 사람은 딱 질색이었다. 아마추어처럼 행동하는 모델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줄 인내심 따위 그에겐 없다. 모델의 얼굴을 한껏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곤 카메라에서 손을 뗐다.
“네, 선생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저 모델이 골칫거리가 될 거라는 데 그의 경력을 걸어도 좋았다. 이 일을 오래한 탓에 이젠 모델의 행동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되었다. 물론 단순히 그의 느낌으로 끝나기를 바라지만,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좋은 사진 한 장만 나오면 작업을 끝낼 생각이었다. 스스로의 아둔함으로 인생을 허비하든 말든 그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네, 알겠습니다.”
“끝나면 불러.”
인욱은 민우가 여자모델에게 설명할 동안 렌즈 앞을 떠나 작업장 주변을 살피며 스멀스멀 올라오는 열기를 받아 안았다. 눈이 부실 만큼 강한 조명이 쏟아내는 열기는 흡사 한낮의 더위를 방불케 했다.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 될 만큼 세팅이 다 되어 있는 상태라 그가 서 있는 곳은 뜨겁다 못해 익을 지경이었다.
배경이 사막인데 현지로 갈 상황이 아니어서 사막의 느낌과 거의 흡사하게 꾸며야 했는데 결과물을 보니 민우가 꽤나 노력한 모양이었다. 조금 미흡한 면이 보이긴 하지만 눈감아 줄 수 있는 정도였다.
“선생님, 설명 끝났습니다.”
“그럼 시작해.”
모델에게 컨셉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민우가 손을 들고 불렀다. 민우의 표정을 보니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모델과 포토그래퍼와의 중간 역할을 제대로 못하면 혼나야 하는 건 당연했다. 물론 억울할 테지만 그것도 다 경험이었고 민우에겐 필요한 과정이었다.
“네.”
“버터플라이 디퓨저(촬영시 필요한 반사판으로 일반적인 것보다는 큰 크기로 양쪽의 스탠드 위에 세운다)를 약간 더 위로 올려. 한 15도 정도.”
“네, 선생님. 이 정도요?”
“오케이.”
인욱의 지시에 따라 민우가 버터플라이 디퓨저를 위로 약간 올렸다. 그러는 사이 그는 조리개(사람의 동공과 같은 역할, 렌즈의 구경이 열리는 크기를 변화시켜 빛의 양을 조절할 수 있다)를 맞추며 빛의 양을 조절했고, 서 있는 모델에 맞춰 화면을 분할해 가장 이상적인 위치를 잡으려 삼각대를 이동시켰다. 안정적인 사진을 찍기도 해야겠지만 그는 균형이 맞는 사진을 원했다. 그래서 모델과 사막의 배경을 균형적으로 잘 배열한 뒤, 노출부분을 신경 써서 모델과 사막의 디테일을 살릴 위치를 잡았다.
그는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날씨를 조명감독이라고 부르는데 오늘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낼 모양이었다. 저 모델만 잘 협조해준다면 좋은 사진이 나올 테고 그만큼 작업시간도 단축될 것이란 생각에 조금 전의 불쾌했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었다.
“자, 시작.”
찰.
칵.
찰칵, 찰칵, 찰칵.
그래도 민우가 컨셉 설명을 잘했는지 모델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눈치껏 포즈를 잘 취해 촬영은 무난하게 시작되었다. 셔터의 열림 소리인 ‘찰’소리가 남과 동시에 다시 닫히자 ‘칵’소리를 냈다. 세지 못할 정도의 찰칵거리는 소리만이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열려 있는 시간으로 빛의 광량을 조절하는 셔터스피드가 점점 빨라지는 그의 손길에 모두의 시선이 닿았다. 셔터 누르는 것을 절대 아끼지 않는 그의 손가락 끝과 날카로운 눈매는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느라 바빴다.
“컨셉.”
“네?”
“하고 싶은 포즈가 아닌 컨셉이 원하는 포즈를 취하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델이 집중력을 놓치고 컨셉과 맞지 않는 자세를 취하자 그의 빈틈없는 질책이 그대로 날아가 꽂혔다. 이 업종에서 성격이 깐깐하기로 소문난 그는 일이 시작되면 조금의 잡음이나 산만함을 용서치 않는 스타일이었다. 찰나의 순간을 잡아야 해서 집중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사소한 것에서 발견하는 특별함을 느끼고 싶어 방해되는 건 어떤 것도 싫어했다.
그는 손은 바쁘게 움직여도 마음만은 느긋함을 가지고 눈앞에 있는 피사체의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아 나갔다. 일할 때만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참 좋았다. 누구든, 무엇을 담든 간에 일을 하고 있는 동안은 그의 머릿속을, 그의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이 떠오르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필름 한 통을 다 썼는지 도로록 돌아가는 소리가 스튜디오를 울리자 인욱도 그제야 카메라에서 손을 뗐다.
“민우야, 필름 가는 동안 잠시 쉬자.”
“네, 선생님.”
인욱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미약한 한숨을 내뱉은 후 잠시 쉴 겸 창가로 다가가 섰다.
스튜디오는 동양적인 풍광을 가진 경기도 어느 한 도시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스튜디오를 가진 것은 행운이었다. 해가 지면 온통 붉은 낙조를 볼 수가 있었는데 대지를 태워버릴 만큼 붉디붉은 강렬한 색채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에 들었다. 밤에 이곳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으면 야경이라기보다는 까맣게 드리워진 벽에 박힌 작은 조명들 같기도 했다.
‘넌 행복하니?’
조용히 내뱉은 그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은 심해처럼 깊기만 했다. 이곳에만 서면 심장이 차분해지는 건 습관이 아닌 그리움의 발악이었고 참기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인가 일을 하다가도 가슴에서 뜨거움이 치솟을 때면 이곳에 서서 가슴을 달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탁 트인 풍경들이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놓아 그나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생님, 커피라도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일 외적인 관심은 필요 없다고 말했을 텐데요?”
“개인적인 관심이 아니라 그저 절 찍어주시는 선생님에게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담담하게 대해도 될 텐데도 요즘 들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그의 신경이 그 누구에게도 너그럽지 못하게 만들었다. 스케줄을 타이트하게 잡아 무리한 탓에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져 통증을 호소했지만,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아 그의 육체에게 휴식을 줄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젠장, 언제까지 참아야 하냐고.’
인욱은 등을 돌리고 두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한 뒤 불쑥불쑥 찾아들며 피폐하게 만드는 무기력감에 나직이 욕설을 읊조렸다. 결코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고통의 흔적들이 아주 잠깐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껏 견뎌왔는데 지금에 와서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선생님?”
“젠장.”
“아잉, 선생님.”
“남의 말을 일부러 안 듣는 겁니까? 아니면 못 들은 척 하는 겁니까?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인욱은 등 뒤에서 여자의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인상부터 찌푸렸다. 팔 안쪽으로 파고들어오는 손과 뒤이어 느껴지는 가슴의 말캉함에 입매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그의 소문을 듣지 못하고 촬영에 온 모양이었다. 그의 입가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아이, 선생님…… 화내지 마세요. 네?”
“놓지? 당최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그렇게 화난 얼굴을 하시면 너무 무서워요, 선생님.”
팔에 여자의 풍만한 가슴이 더 바짝 밀착되어지는 게 느껴지자 그의 이마에 퍼런 핏줄이 울퉁불퉁 튀어나오고 턱 근육이 경직되었다. 막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과 같은 분노가 입구를 열고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한층 더 깊어지며 어두워졌다.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하면 들어먹어야 하는데, 말귀를 못 알아듣고 빙그레 웃고 있는 여자들이 꼭 있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여자는 그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말만 골라 하고 있었다.
“뭐 이런…….”
“와…… 우리 선생님, 팔 근육이 장난 아니시다.”
“놔.”
그의 단호한 거절에도 눈치 없이 애교어린 콧소리를 내는 모델을 향해 이를 악물며 내씹었다. 오늘은 그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인 상태라 더 이상 봐주기가 힘들었다. 이런 날은 가만히 내버려둘 것이지, 건드린 여자의 잘못이 크다.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는 인내심을 내팽개치는 순간, 누르고 있던 짜증이 그를 집어삼켰다. 경고는 이쯤에서 되었다.
인욱은 더러운 물건을 떨쳐내듯 자신의 팔에서 여자의 손을 매몰차게 떼어내 쓰레기를 버리듯 바닥으로 확 밀쳐버렸다. 순간 쾅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엄마야! 선생님……?”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일을 했는지 모르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해. 괜히 너 같이 개념 없는 사람들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까지 욕먹게 하지 말고.”
그의 강한 힘에 볼썽사납게 바닥에 주저앉은 여자의 얼굴이 창피함으로 붉어지며 억울함이 가득하다는 표정이 보였다. 단호한 거절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눈에 물기를 가득 담고 입술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그라는 사람 자체가 좋아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수십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는 일이었다. 언제가 되어야 제대로 코스를 밟은 사람이 속도위반을 한 사람보다 잘 성장한다는 것을 알게 되려는지, 답답한 마음이 커지는 만큼 분노도 크다는 걸 저 풋내기가 알기는 할까?
“전 단지 선생님과 잘 지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상처 입은 듯이 울먹이며 핑계를 대는 여자를 향해 코웃음을 쳤다.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서 더 많은 눈물을 짜낸다고 해도, 그 어떠한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의 가슴은 말랑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단 한 여자를 제외하고는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민우야?”
인욱은 메말라버린 눈으로 그때까지도 바닥에서 일어나지 않는 여자를 지켜보다가 망설임 한 점 없이 민우를 찾았다. 그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스튜디오를 쩌렁쩌렁 울렸다. 누가 뭐라고 하든, 스튜디오에 어떤 일이 생기든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네, 선생님.”
“지금까지 이 여자하고 찍었던 사진은 전부 폐기하고, 오늘 촬영 그만 접어.”
“네?”
“한빛에 다른 모델하고 작업을 하면 하겠지만 이 여자하고는 절대 안 한다고 연락해.”
그의 거절에 감정적으로 나올 것이 분명한 여자를 데리고 작업을 재개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니 그만두는 것이 상책이었다.
“으흐흑…… 마음대로 취소하는 게 어디 있어요?”
“위약금을 물든 말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넌 회사에 가서 어떻게 변명할지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민우야, 정리해.”
인욱은 두 눈을 도로록 굴려대며 소리를 지르는 여자에게 피식 웃으며 친절히 설명하고는 등을 돌렸다. 출렁이는 감정을 억누르는 사이 여자가 그에 대한 욕설을 입에 담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오히려 홀가분했다. 여자가 무슨 짓을 하든 그는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에 시선 한 자락조차 주기 싫었다.
‘진즉에 이리 다가오는 여자들에게 매몰차게 행동했더라면…….’
인욱은 과거, 그의 감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에 자신만만했었다. 그를 향한 감정이 어떤 것이든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지켜야 할 사람이 있을 때는 변명이 아닌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후회가 가슴을 후벼 팠지만 후회는 항상 늦는 법이었다. 예전의 일을 생각하자 치밀어 오르는 부아가 갈 곳을 잃고 심장으로 고스란히 파고들었다. 뼈에 사무치도록 아픈 통증에 어금니를 사리물며 쓰디쓴 한숨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