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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삐리리리리.
그의 바지 호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날카로운 음을 울리며 차가웠던 분위기를 일시에 깨트렸다. 휴대폰의 발신자를 확인한 인욱의 눈동자에 광채가 일고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다가올 일에 대한 흥분으로 딱딱하게 얼어붙었던 심장마저 떨리자 입술은 바싹 마르고 손바닥에는 땀이 찼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일까?
[접니다.]
“도착했습니까?”
그의 입가가 살짝 풀어진 것이 보였지만 착각이라고 생각될 만큼 순식간에 본연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광채가 일던 눈동자만은 여전히 몸 안에서 머물며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네, 방금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네, 그동안 수고하셨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쥐어짜내듯이 말을 한 인욱은 전화를 끊으며 애달픈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드디어 끝난 건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
“휴우…….”
그의 잇새로 새어나온 것은 한숨이요, 눈동자는 서늘함을 담다 못해 흔들리기까지 했고, 관자놀이는 흥분으로 불끈거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도착했단 말이지…….”
허리를 곧게 펴고 건물 아래로 꼿꼿한 시선을 내렸다. 목구멍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턱턱대다가 숨을 토해내듯 중얼거렸다. 무시무시하게 얼어붙은 눈빛 속에 격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날 사랑하느냐고 몇 번을 물었는지 기억나요? 내가 당신에게 힘들다고, 지쳤다고 몇 번을 말했는지 기억이나 하냐고요? 도대체 얼마나 더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거죠? 나도 당신을 찾는 다른 사람들만큼, 아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당신이 필요했다고요. 힘들 땐 내 말도 들어주고, 달래도 주고 흔들릴 때마다 온전하게 잡아줄 당신이 나도 절실하게 필요했다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졌는지 알아요? 그때마다 내 등을 두드려줄 당신이 필요했다고요.
수많은 말들 중에 왜 유독 그 말이 가슴에 박혀 뽑히지 않는 걸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의 가슴 곳곳에 박힌 채 4년이란 세월동안 그를 놔주지 않고 괴롭혔었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크다고 말했던 어른들의 말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간이었다. 옆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고 했던가. 그가 딱 그랬다.
그녀가 떠나던 날도 무시해버렸다. 강제로라도 잡고 싶을까봐 달려가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이왕 시간을 주기로 한 이상 고통스러울 만큼 힘들어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해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집에 들어선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연한 것처럼 그녀는 늘 집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침묵만이 그를 반겼을 땐 심장은 섬뜩함을 지나 벌떡거렸고,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 있은 후에야 결국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살아온 세월이 길어 그런 외로움을 느끼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스스로의 감정과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에 대해 너무 자신만만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존재를 너무 가볍게 여긴 실수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심장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끔찍한 외로움에 시달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연수!”
어두운 집 안에 들어가는 그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한 기분을 끝낼 수 있다니,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쏟아졌다. 자신이 한 잘못을 알기에 이만큼도 참았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조금의 에누리도 허용치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이미 마음이나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곳까지 도달해 있어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가 손에 딱 잡히는 순간 절대, 다시는 놓아주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혼자 있는 건 정말이지 충분하고도 넘쳤다.
#2. 달라진 상황
“연수야, 드디어 우리의 첫 고객이 생겼어.”
“뭐? 진짜? 벌써?”
연수는 요리학원 안으로 다급히 들어오는 친구 미연의 말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이 술술 풀려 사업을 하게 된 것도 믿기지 않는데, 공사도 다 안 끝난 그들에게 벌써 예약이 들어오다니, 아무래도 있는 줄도 몰랐던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친구의 감언이설에 일을 크게 벌여놓고 혹시나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고 있던 차였다. 자신들의 나이에 감당하기엔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것만 같아 내심 불안했었다.
“응, 그런데 말이야.”
“왜?”
“저기…….”
“왜 무슨 일인데 말을 못해?”
연수는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인 미연이 말을 하다 말고 망설이자 의아하게 쳐다봤다. 마구 쏟아놓는 스타일의 친구가 말을 멈췄다는 것에 일말의 불안함이 싹텄지만, 친구와 함께 동고동락한 세월이 긴만큼 믿었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아무래도 고객이 네가 아는 사람 같아서 말이야.”
“뭐? 내가 아는 사람? 누군데?”
“정건도.”
“아…….”
“개인전을 한다고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요리와 음료를 예약했어.”
“그랬어?”
아는 이름을 듣자마자 잠시 공황상태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앞에 앉아 있는 미연을 생각해 머리를 흔들었다. 친구의 시선을 생각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어봤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현실로 닥치고 보니 담담할 수만은 없다는 걸 오늘에야 느꼈다. 전남편을 생각하자 심장에 찬바람이 쓰윽 불어오는 느낌에 가슴이 시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침착하던 심장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휴…….”
잠시 미연의 시선을 피해 햇살이 가득한 창밖을 내다보며 거칠게 날뛰는 심장을 다스리려 심호흡을 길게 했다. 진정하려 애써도 한 번 놀란 심장은 쉬이 누그러지지 않고 속도를 더 빨리 했다. 이 이중적인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4년의 시간이라면 잊혀졌을 거라고 믿었는데, 아니 조금이라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가슴 속에서 옅어졌을 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아니었다니, 모래를 삼킨 듯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실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진 괜찮았었다. 지난 시간 동안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힘들 만큼 육체가 고된 일들을 했기에 그를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다소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람과 연관된 이름 하나 들었다고 이리 심장이 뛰고 상체를 숙여야 할 만큼 쓰라리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참 어지간히도 멍청하고 답답한 심장이었다.
그냥 다 던져버리고 나왔듯이 싹 다 잊는 건 어려울까?
“하지 말까?”
“어?”
“혹시나 몰라서 확실한 답변은 안 하고 왔으니까 싫으면 안 해도 돼. 어차피 오픈도 안 한 상탠데 뭐.”
“……음, 해야지, 왜 안 해. 어찌 되었든 우리의 첫 고객인데 당연히 해야지.”
연수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양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미연을 보는 순간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그러다 만나면 어쩌려고?”
“만나면 어쩔 수 없지 뭐.”
정말 어쩔 수 없을까? 벌써부터 가슴이 이렇게 흔들리는데?
하필 시작부터 그와 이렇게 엮이다니, 후…….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미연에게 대답했듯이 치러야만 할 일이었다. 뒤로 물러나 숨고 아파하는 일 따위 예전에 신물이 나도록 실컷 했으니 그만할 것이다.
“진짜?”
“그럼 그 사람 만나기 두렵다고 일을 안 해?”
“정말 괜찮겠어?”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니까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어서 메뉴나 결정하자.”
연수는 재차 묻는 미연의 질문에 힘 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군더더기 없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친구의 걱정 어린 시선을 더 이상 매달고 살 순 없었다. 처음이야 걱정시킬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그랬지만 앞으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미연이 그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듯이 그녀도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이젠 그럴 때도 되었고 꼭 그렇게 해야만 했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히지만, 그들이 처음 맡게 된 일을 그녀의 두려움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사로운 감정을 떠나 일은 일이니 당당히 해내고 싶었다.
그를 마주치면 어떨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기는 했다. 영원히 피할 수만도 없는 일이기에 나름 각오도 했었다. 그의 보호와 사랑만을 바라며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막상 그를 만나게 되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두려움도 엄습했다.
“되도록이면 부딪치지 않도록 할게.”
“괜찮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괜찮기는,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는.”
“난 신경 쓰지 말라니까.”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한 뒤 눈 속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바로 고개를 돌렸다. 후퇴는 할 수 없으니 미연을 안심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 스스로 결정한 일인데 더 이상 말을 해서 친구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연수는 불쑥불쑥 비집고 들어오는 불안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많은 시간과 땀을 들여 꾸며놓은 요리학원으로 눈을 돌렸다. 건물의 두 층을 임대해 1층은 퓨전 한식레스토랑을, 2층은 요리학원과 그녀가 거주할 공간 겸 사무실로 만들었다. 오래되어 보잘것없었던 낡은 공간이 순식간에 새 옷을 입고 귀엽고 독특한 공간으로 태어났다.
그녀가 거주할 공간은 진즉부터 공사를 한 탓에 광촉매작업(시멘트 등 각종 인공 건축소재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이미 그녀가 들어가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연아, 우리 잘할 수 있겠지?”
“그럼. 이렇게 잘 꾸며놓았는데 잘 안 되겠어?”
그녀의 불안에 떠는 질문에 씩씩하다 못해 터프한 미연의 대답이 날아들었다. 그저 미연의 자신감이 부러울 뿐인 연수는 그들이 꾸며놓은 요리학원을 한 번 더 눈여겨보며 마음을 다독였다.
주방기기만이 가득해 절로 웃음이 났지만 무엇이라도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생길 정도로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자연채광과 인공조명을 적절히 조화시킨 공간이라 지금 이 시간만큼은 굳이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환해 마음까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주방가구는 일반 가구 개념의 수납 시스템을 적용해 유리, 금속, 플라스틱, 라미네이트, 천연대리석 등을 마감재로 사용해 독특했다. 냉장고를 시작으로 개수대까지 전부 빌트인으로 꾸몄고, 전체적인 색깔은 옅은 브라운으로 통일했다.
오븐이나 냉장고, 전자렌지는 학원생과 따로 사용할 수 있도록 분리해 놓았고, 양쪽 벽면으로는 수납을 위한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을 이용해 냄비 등 주방기기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작은 스푼 하나까지도 미연이와 다리품을 팔며 구입해 놓은 것이라서 더 애착이 가는지도 모른다.
‘그래, 난 할 수 있어.’
미연의 부모님이 두 사람에게 덜컥 투자를 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사업을 하기엔 그들의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도 부모님이 어떻게 그들을 믿고 투자를 하셨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공부와 실습이 끝나고 취업난을 겪지 않아 좋긴 하지만 그만큼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니 무조건 잘 해내야 했고 자신의 과거쯤은 묻어둬야만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공들인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일에 들어가면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을 십분 발휘하겠지만 더 열심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경험에 의해서 깨닫지 않았던가.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이 힘들 때보단 덜 아팠다.
“난 걱정 안 한다네, 친구. 선생님도 칭찬하신 이연수가 있는데 내가 무슨 걱정?”
“뭐? 난 너를 믿는데?”
“그래? 그럼 우리 서로를 믿고 잘해 보자고.”
“그래, 잘해 보자고, 친구.”
연수는 미연의 너스레에 가슴이 한결 가벼워졌다. 미연은 4년 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온 후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그녀를 구원해준 고마운 친구였다.
미연은 대학 동기로, 학업을 중퇴한 그녀와 유일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던 친구였다. 그리고 그 일 이후로도 외로울 때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나, 힘이 들 때마다 늘 옆에서 힘이 되어준 미연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선물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단 한 명의 진정한 친구를 가진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들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너무 과한 성공을 한 셈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지내서일까, 미연의 씩씩한 면이 전염이 되어 결혼생활 동안 연약해졌던 모습은 찾기 힘들 정도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배웠기에 지금의 그녀는 그 어떤 현실도 무섭지 않았다. 성격도 예전 학교에 다닐 때처럼 밝아졌고, 더 이상 주눅 드는 법도 없었으며 더 이상 눈치 보지도, 참지도 않았다. 4년이란 시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녀를 폭풍성장 시켰다.
처음엔 어떻게 살아갈까 막막했지만 사람은 닥치면 다 하게 된다는 것을 철저히 배우고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오고 그 기회를 어떻게 잡느냐는 스스로의 몫임을 배웠기에 어떤 고객이더라도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삐리리리리.
그의 바지 호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날카로운 음을 울리며 차가웠던 분위기를 일시에 깨트렸다. 휴대폰의 발신자를 확인한 인욱의 눈동자에 광채가 일고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다가올 일에 대한 흥분으로 딱딱하게 얼어붙었던 심장마저 떨리자 입술은 바싹 마르고 손바닥에는 땀이 찼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일까?
[접니다.]
“도착했습니까?”
그의 입가가 살짝 풀어진 것이 보였지만 착각이라고 생각될 만큼 순식간에 본연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광채가 일던 눈동자만은 여전히 몸 안에서 머물며 흔들리고 있는 상태였다.
[네, 방금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네, 그동안 수고하셨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쥐어짜내듯이 말을 한 인욱은 전화를 끊으며 애달픈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드디어 끝난 건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
“휴우…….”
그의 잇새로 새어나온 것은 한숨이요, 눈동자는 서늘함을 담다 못해 흔들리기까지 했고, 관자놀이는 흥분으로 불끈거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편안해 보였다.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도착했단 말이지…….”
허리를 곧게 펴고 건물 아래로 꼿꼿한 시선을 내렸다. 목구멍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턱턱대다가 숨을 토해내듯 중얼거렸다. 무시무시하게 얼어붙은 눈빛 속에 격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가 당신에게 날 사랑하느냐고 몇 번을 물었는지 기억나요? 내가 당신에게 힘들다고, 지쳤다고 몇 번을 말했는지 기억이나 하냐고요? 도대체 얼마나 더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거죠? 나도 당신을 찾는 다른 사람들만큼, 아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당신이 필요했다고요. 힘들 땐 내 말도 들어주고, 달래도 주고 흔들릴 때마다 온전하게 잡아줄 당신이 나도 절실하게 필요했다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가 된 것처럼 느껴졌는지 알아요? 그때마다 내 등을 두드려줄 당신이 필요했다고요.
수많은 말들 중에 왜 유독 그 말이 가슴에 박혀 뽑히지 않는 걸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의 가슴 곳곳에 박힌 채 4년이란 세월동안 그를 놔주지 않고 괴롭혔었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크다고 말했던 어른들의 말을 뼈저리게 느꼈던 시간이었다. 옆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고 했던가. 그가 딱 그랬다.
그녀가 떠나던 날도 무시해버렸다. 강제로라도 잡고 싶을까봐 달려가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이왕 시간을 주기로 한 이상 고통스러울 만큼 힘들어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혹시라도 마음이 변해 집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집에 들어선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연한 것처럼 그녀는 늘 집에 있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침묵만이 그를 반겼을 땐 심장은 섬뜩함을 지나 벌떡거렸고,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 있은 후에야 결국 혼자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혼자 살아온 세월이 길어 그런 외로움을 느끼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스스로의 감정과 자신을 향한 그녀의 사랑에 대해 너무 자신만만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존재를 너무 가볍게 여긴 실수로 인해 감당해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심장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끔찍한 외로움에 시달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연수!”
어두운 집 안에 들어가는 그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한 기분을 끝낼 수 있다니,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쏟아졌다. 자신이 한 잘못을 알기에 이만큼도 참았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조금의 에누리도 허용치 않을 생각이었다. 아니, 이미 마음이나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곳까지 도달해 있어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녀가 손에 딱 잡히는 순간 절대, 다시는 놓아주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혼자 있는 건 정말이지 충분하고도 넘쳤다.
#2. 달라진 상황
“연수야, 드디어 우리의 첫 고객이 생겼어.”
“뭐? 진짜? 벌써?”
연수는 요리학원 안으로 다급히 들어오는 친구 미연의 말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일이 술술 풀려 사업을 하게 된 것도 믿기지 않는데, 공사도 다 안 끝난 그들에게 벌써 예약이 들어오다니, 아무래도 있는 줄도 몰랐던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친구의 감언이설에 일을 크게 벌여놓고 혹시나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하고 있던 차였다. 자신들의 나이에 감당하기엔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것만 같아 내심 불안했었다.
“응, 그런데 말이야.”
“왜?”
“저기…….”
“왜 무슨 일인데 말을 못해?”
연수는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인 미연이 말을 하다 말고 망설이자 의아하게 쳐다봤다. 마구 쏟아놓는 스타일의 친구가 말을 멈췄다는 것에 일말의 불안함이 싹텄지만, 친구와 함께 동고동락한 세월이 긴만큼 믿었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아무래도 고객이 네가 아는 사람 같아서 말이야.”
“뭐? 내가 아는 사람? 누군데?”
“정건도.”
“아…….”
“개인전을 한다고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요리와 음료를 예약했어.”
“그랬어?”
아는 이름을 듣자마자 잠시 공황상태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앞에 앉아 있는 미연을 생각해 머리를 흔들었다. 친구의 시선을 생각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어봤지만 뜻대로 되질 않았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현실로 닥치고 보니 담담할 수만은 없다는 걸 오늘에야 느꼈다. 전남편을 생각하자 심장에 찬바람이 쓰윽 불어오는 느낌에 가슴이 시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침착하던 심장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휴…….”
잠시 미연의 시선을 피해 햇살이 가득한 창밖을 내다보며 거칠게 날뛰는 심장을 다스리려 심호흡을 길게 했다. 진정하려 애써도 한 번 놀란 심장은 쉬이 누그러지지 않고 속도를 더 빨리 했다. 이 이중적인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4년의 시간이라면 잊혀졌을 거라고 믿었는데, 아니 조금이라도 자신의 머릿속에서, 가슴 속에서 옅어졌을 거라고 믿고 싶었는데 아니었다니, 모래를 삼킨 듯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사실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진 괜찮았었다. 지난 시간 동안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힘들 만큼 육체가 고된 일들을 했기에 그를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다소 방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사람과 연관된 이름 하나 들었다고 이리 심장이 뛰고 상체를 숙여야 할 만큼 쓰라리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참 어지간히도 멍청하고 답답한 심장이었다.
그냥 다 던져버리고 나왔듯이 싹 다 잊는 건 어려울까?
“하지 말까?”
“어?”
“혹시나 몰라서 확실한 답변은 안 하고 왔으니까 싫으면 안 해도 돼. 어차피 오픈도 안 한 상탠데 뭐.”
“……음, 해야지, 왜 안 해. 어찌 되었든 우리의 첫 고객인데 당연히 해야지.”
연수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양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미연을 보는 순간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였다.
“그러다 만나면 어쩌려고?”
“만나면 어쩔 수 없지 뭐.”
정말 어쩔 수 없을까? 벌써부터 가슴이 이렇게 흔들리는데?
하필 시작부터 그와 이렇게 엮이다니, 후…….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미연에게 대답했듯이 치러야만 할 일이었다. 뒤로 물러나 숨고 아파하는 일 따위 예전에 신물이 나도록 실컷 했으니 그만할 것이다.
“진짜?”
“그럼 그 사람 만나기 두렵다고 일을 안 해?”
“정말 괜찮겠어?”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니까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어서 메뉴나 결정하자.”
연수는 재차 묻는 미연의 질문에 힘 있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군더더기 없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친구의 걱정 어린 시선을 더 이상 매달고 살 순 없었다. 처음이야 걱정시킬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 그랬지만 앞으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미연이 그녀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듯이 그녀도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이젠 그럴 때도 되었고 꼭 그렇게 해야만 했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히지만, 그들이 처음 맡게 된 일을 그녀의 두려움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사로운 감정을 떠나 일은 일이니 당당히 해내고 싶었다.
그를 마주치면 어떨까하고 생각한 적이 있기는 했다. 영원히 피할 수만도 없는 일이기에 나름 각오도 했었다. 그의 보호와 사랑만을 바라며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막상 그를 만나게 되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두려움도 엄습했다.
“되도록이면 부딪치지 않도록 할게.”
“괜찮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괜찮기는, 얼굴이 하얗게 변해서는.”
“난 신경 쓰지 말라니까.”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한 뒤 눈 속의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바로 고개를 돌렸다. 후퇴는 할 수 없으니 미연을 안심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 스스로 결정한 일인데 더 이상 말을 해서 친구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연수는 불쑥불쑥 비집고 들어오는 불안한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많은 시간과 땀을 들여 꾸며놓은 요리학원으로 눈을 돌렸다. 건물의 두 층을 임대해 1층은 퓨전 한식레스토랑을, 2층은 요리학원과 그녀가 거주할 공간 겸 사무실로 만들었다. 오래되어 보잘것없었던 낡은 공간이 순식간에 새 옷을 입고 귀엽고 독특한 공간으로 태어났다.
그녀가 거주할 공간은 진즉부터 공사를 한 탓에 광촉매작업(시멘트 등 각종 인공 건축소재에서 발생하는 유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까지 마친 상태였다. 그래서 이미 그녀가 들어가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연아, 우리 잘할 수 있겠지?”
“그럼. 이렇게 잘 꾸며놓았는데 잘 안 되겠어?”
그녀의 불안에 떠는 질문에 씩씩하다 못해 터프한 미연의 대답이 날아들었다. 그저 미연의 자신감이 부러울 뿐인 연수는 그들이 꾸며놓은 요리학원을 한 번 더 눈여겨보며 마음을 다독였다.
주방기기만이 가득해 절로 웃음이 났지만 무엇이라도 만들고 싶은 욕구가 생길 정도로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자연채광과 인공조명을 적절히 조화시킨 공간이라 지금 이 시간만큼은 굳이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환해 마음까지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주방가구는 일반 가구 개념의 수납 시스템을 적용해 유리, 금속, 플라스틱, 라미네이트, 천연대리석 등을 마감재로 사용해 독특했다. 냉장고를 시작으로 개수대까지 전부 빌트인으로 꾸몄고, 전체적인 색깔은 옅은 브라운으로 통일했다.
오븐이나 냉장고, 전자렌지는 학원생과 따로 사용할 수 있도록 분리해 놓았고, 양쪽 벽면으로는 수납을 위한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을 이용해 냄비 등 주방기기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작은 스푼 하나까지도 미연이와 다리품을 팔며 구입해 놓은 것이라서 더 애착이 가는지도 모른다.
‘그래, 난 할 수 있어.’
미연의 부모님이 두 사람에게 덜컥 투자를 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사업을 하기엔 그들의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지 않은가. 지금 생각해도 부모님이 어떻게 그들을 믿고 투자를 하셨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공부와 실습이 끝나고 취업난을 겪지 않아 좋긴 하지만 그만큼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니 무조건 잘 해내야 했고 자신의 과거쯤은 묻어둬야만 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공들인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일에 들어가면 지금까지 공부했던 것을 십분 발휘하겠지만 더 열심히 할 필요가 있었다.
경험에 의해서 깨닫지 않았던가.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이 힘들 때보단 덜 아팠다.
“난 걱정 안 한다네, 친구. 선생님도 칭찬하신 이연수가 있는데 내가 무슨 걱정?”
“뭐? 난 너를 믿는데?”
“그래? 그럼 우리 서로를 믿고 잘해 보자고.”
“그래, 잘해 보자고, 친구.”
연수는 미연의 너스레에 가슴이 한결 가벼워졌다. 미연은 4년 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온 후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그녀를 구원해준 고마운 친구였다.
미연은 대학 동기로, 학업을 중퇴한 그녀와 유일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던 친구였다. 그리고 그 일 이후로도 외로울 때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나, 힘이 들 때마다 늘 옆에서 힘이 되어준 미연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선물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단 한 명의 진정한 친구를 가진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들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너무 과한 성공을 한 셈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지내서일까, 미연의 씩씩한 면이 전염이 되어 결혼생활 동안 연약해졌던 모습은 찾기 힘들 정도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배웠기에 지금의 그녀는 그 어떤 현실도 무섭지 않았다. 성격도 예전 학교에 다닐 때처럼 밝아졌고, 더 이상 주눅 드는 법도 없었으며 더 이상 눈치 보지도, 참지도 않았다. 4년이란 시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녀를 폭풍성장 시켰다.
처음엔 어떻게 살아갈까 막막했지만 사람은 닥치면 다 하게 된다는 것을 철저히 배우고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오고 그 기회를 어떻게 잡느냐는 스스로의 몫임을 배웠기에 어떤 고객이더라도 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