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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오피스
1화
#프롤로그
그건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퇴근 후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홀로 찾은 카페에서 절친한 회사 동료 커플을 만나 장장 두 시간을 합석하는 것이란. 게다가 커플 중 남자가, 존재만으로도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보며 부럽다는 눈빛을 간간이 쏘아주어야 하고, 남자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저 남자 어때?’라고 묻는 여자 동료의 속삭임에 ‘괜찮은 것 같아.’라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해야 하며, 남자 앞에서 여자 동료가 더 빛이 날 수 있도록 스스로 알아서 매력 없게도 굴어야 한다. 이를 테면 묻는 말에 대답을 늦게 한다거나, 내내 인상을 팍팍 써서 불쾌감을 조장한다거나.
그러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여 되도록 이 커플과의 합석은 앞으로도 영영 피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카사블랑카에서 한 달에 한 번 있는‘Meeting day’였다. 그래서 무슬림이든 이민자들이든 혹은 여행객들이든,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카페며 커피숍, 또는 드문드문 보이는 술집에서 지인이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즐기는 날인 것이다.
라미도 그 행렬에 끼고자 했지만 맹세코 혁주와 민영커플과 함께는 아니었다.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도 닭살커플이라 정평이 나 있는 이들과는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두 시간을 견딘 후 라미는 밤 9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시지도 않은 칵테일 핑계를 대며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자 민영이 필요이상으로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떡해, 라미야. 내일 아침 7시에 회의 잡혀 있는데. 하필 새로 온 이사 놈이 그렇게 부지런할 건 뭐야, 정말. 잘생기면 다냐고! 그냥 놈팡이처럼 탱자탱자 놀기만 할 것이지 말이야.”
민영의 전혀 와 닿지 않는 염려를 들으며, 라미는 차라리 아침 7시 회의가 지금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오피스텔에 가서 쉬면 돼. 그럼 나 먼저 갈게. 혁주 씨, 민영이 취하지 않게 잘 보필하세요.”
“걱정 마요, 라미 씨. 어차피 우리 민영이는 제가 책임집니다.”
우리 민영이…….
라미는 내심 씁쓸해진 입맛을 다시며 두 사람에게 다시 인사를 한 후 카페를 나왔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면 유리창 앞에 서서, 물끄러미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귀엽게 수다를 떠는 민영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는 혁주.
라미의 시선이 매우 자연스럽게 혁주에게 맞추어졌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어째서 난 혁주 씨에 대한 마음이 접어지지 않는 걸까요.”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를 힐끔거렸다. 카사블랑카에서 두 번째로 맞는 이 여름은 왠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왜 하필 저 두 사람은 이곳으로 파견을 나온 건지. 두 사람을 피해 일부러 이곳까지 날아왔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저들과 마주하게 되다니.
“억지로 접으려고 하진 않을 거예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라미는 쓰게 웃으며 혁주를 쳐다봤다. 사랑의 총알을 쏘는 모션을 취하며 알아채지도 못할 그에게 찡긋 윙크를 보냈다.
“열심히 사랑하시게, 혁주 씨.”
비록 그 대상은 내가 아니지만.
라미는 돌아섰다. 낮 동안 후텁지근했던 공기가 밤이 되니 서늘한 그것으로 바뀌었다. 하루 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오피스텔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카사블랑카에선 구하기 힘든 맥주를 마시고 잠이 들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라미의 발길은 오피스텔 건물이 아닌 ‘MH 더 비발디 호텔’로 향했다. 한국에 있는 본사 호텔의 지사이며, 조금 전 혁주 커플과 함께 머물렀던 카페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 그녀의 직장이자 카사블랑카에 여행을 오는 관광객들이나 출장을 오는 직장인들, 혹은 국가 간 업무를 위해 방문하는 외교관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현지의 호텔이었다.
로비에 들어선 그녀는 지나가는 밤 근무 담당 직원들과 눈인사를 했다. 꿀꿀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왜 일터로 다시 왔는지 스스로가 한심할 지경이었지만 이대로 오피스텔로 간다면 맥주를 마시기도 전에 엉엉 울기부터 할지도 몰랐다. 짝사랑은 이래서 고달프다. 늘 눈물을 매달고 살아야 하니.
로비를 중심으로 양 옆에 두 개씩 있는 엘리베이터들 중, 라미는 늘 이용하는 왼편의 2호기 앞에 섰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지만 거기까지 갈 힘이 발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때마침 안에 누군가가 탔는지 문이 스르르 닫히고 있는 중이었다. 서둘러 버튼을 누른 그녀는 문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닥으로부터 시선을 든 라미는, 엘리베이터 안을 쳐다보곤 미간을 구겼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은 김지한 이사였다. 그러니까 조금 전 민영이 말한 ‘새로 온 이사 놈’이자, 비서인 라미가 모시는 상사였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타이는 풀어헤쳐져 있었으며 양팔을 넓게 벌려 등 뒤의 바(bar)를 붙잡고 있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무척 피곤한 모습이자 표정이었다.
문이 천천히 열려 있는 그 몇 초의 짧은 시간 동안, 라미의 머릿속에서 무수한 생각들이 오고갔다. 이사님의 오늘 저녁 일정이 뭐였더라. 아, 맞다. 카사블랑카 내 호텔 이사 연합 모임이 있었지. 술을 마셨을 수도 있겠다. 워낙 국적이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니까.
들어갈까 말까, 하는 갈등도 머릿속 한편에 자리했다. 존재부터 부담스러운 그와 좁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은 역시 불편하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해도 말이다. 라미는 그가 눈을 뜨기 전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후 재빨리 닫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천천히 닫혀갔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쉰 것도 잠시, 문은 그녀의 눈앞에서 재차 스르르 열렸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자마자 라미는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뒷머리를 기댔기 때문일까. 무척 날카롭고 예민하다고 느낀 평소와는 달리 지금의 그의 시선은 나른해보인다. 라미는 얼떨결에 꾸벅 인사를 했다.
“안 타요?”
“어……네.”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어떻게 안 거지?
라미는 주저 어린 발길을 겨우 안에 들였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서자 두 번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입문 자체가 하나의 거울이라 영락없이 그의 시야 안에 갇힌 셈이 된 것이다. 두 사람의 모습이 무척 선명한 상태로 맞은편 거울에 훤히 비치고 있었다.
라미는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동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얼핏 본 거울 속에선 꼼짝없이 그의 눈빛과 닿아 있었다. 왜 저렇게 뚫어지게 보는 거야, 부담되게.
“상사가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일부러 피하는 거 촌스러워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위잉, 소리를 내며 느린 상승을 하고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의 음성은 무척 굵고 깊게 울렸다. 라미는 생긋 웃어보였다. 몇 년 동안 비서로 일하면서 나름대로 잘 훈련된 웃음 정도는 지을 줄 알았다.
“죄송합니다. 이사님이 피곤해 보이셔서요. 모임은 잘 끝나셨는지…….”
“지금은 오피스텔에 있어야 할 시간이 아닌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피한 채 다른 걸 물어오는 그를, 라미는 잠시 빤히 쳐다보다 다급히 변명했다.
“어, 그게……마무리해야 할 업무가 생각나서요.”
“쓰레기 같은 자식.”
응? 라미는 앞뒤 없이 튀어나온 그의 한마디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지금?”
거울 속에서, 그가 비싯 웃는다. 조금 당황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잘 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라미는 매우 정중하게 부인했다.
“아닙니다, 이사님. 제가 어떻게 감히…….”
“아니긴.”
조소 같은 것이 그의 입가에 어리는 것을, 라미는 무척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했다. 네가 아니라 해도 네 진심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투다. 그는 이따금 저런 식으로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진다. 그럴 땐 어떻게 응수해야 하는지, 아니 대꾸라는 걸 도대체 해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참 성실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럴 땐 정말이지 민영의 말이 맞다.
이 싸가지 없는 ‘이사 놈.’
“정말 아닙니다, 이사 노……ㅁ……님!”
라미는 자신의 망측한 입을 재빨리 다스린 후 제대로 된 발음을 내뱉었다. 그가 혹여 알아듣지나 않았는지 아주 비굴한 눈빛으로 눈치를 봤지만 다행히 그에게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딩동 소리를 내며 10층에 도착했다. 10층엔 이사실과 함께 비서실이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라미는 지한을 두고 먼저 내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13층, 즉 꼭대기에 있는 펜트하우스가 목적지였다.
“먼저 내리겠습니다.”
라미는 머뭇거리다 걸음을 옮겼다. 열린 문을 통과하는데 등으로 나직한 음성이 꽂힌다.
“인.샬.라.”
엘리베이터 밖 복도에 선 라미는 뒤돌아보았다. 그는 아까처럼 웃고 있었다.
“그 말은 나보다 이 비서한테 해주어야 할 말 같은데.”
그러곤 그는 사랑의 총알을 쏘는 모션을 취했다. 한쪽 눈까지 찡긋하면서. 좀 전에 카페 밖에서 창문을 통해 혁주에게 취했던 자신의 행동이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다시 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올라가고 없는데 라미의 멍멍한 시선은 여전히 엘리베이터 문에 꽂혀 있었다.
두 가지가 얼핏 라미의 머릿속에 스쳤다.
인샬라. 그 말은 지한이 이곳으로 전근 온 첫날, 그녀가 잠들어 있던 그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혁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표정이 얼음조각처럼 싸늘해졌다.
1화
#프롤로그
그건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퇴근 후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홀로 찾은 카페에서 절친한 회사 동료 커플을 만나 장장 두 시간을 합석하는 것이란. 게다가 커플 중 남자가, 존재만으로도 여전히 그녀의 가슴을 온통 점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자리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보며 부럽다는 눈빛을 간간이 쏘아주어야 하고, 남자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저 남자 어때?’라고 묻는 여자 동료의 속삭임에 ‘괜찮은 것 같아.’라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해야 하며, 남자 앞에서 여자 동료가 더 빛이 날 수 있도록 스스로 알아서 매력 없게도 굴어야 한다. 이를 테면 묻는 말에 대답을 늦게 한다거나, 내내 인상을 팍팍 써서 불쾌감을 조장한다거나.
그러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하여 되도록 이 커플과의 합석은 앞으로도 영영 피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카사블랑카에서 한 달에 한 번 있는‘Meeting day’였다. 그래서 무슬림이든 이민자들이든 혹은 여행객들이든,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카페며 커피숍, 또는 드문드문 보이는 술집에서 지인이나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즐기는 날인 것이다.
라미도 그 행렬에 끼고자 했지만 맹세코 혁주와 민영커플과 함께는 아니었다.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도 닭살커플이라 정평이 나 있는 이들과는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두 시간을 견딘 후 라미는 밤 9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시지도 않은 칵테일 핑계를 대며 머리가 어지럽다고 하자 민영이 필요이상으로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떡해, 라미야. 내일 아침 7시에 회의 잡혀 있는데. 하필 새로 온 이사 놈이 그렇게 부지런할 건 뭐야, 정말. 잘생기면 다냐고! 그냥 놈팡이처럼 탱자탱자 놀기만 할 것이지 말이야.”
민영의 전혀 와 닿지 않는 염려를 들으며, 라미는 차라리 아침 7시 회의가 지금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오피스텔에 가서 쉬면 돼. 그럼 나 먼저 갈게. 혁주 씨, 민영이 취하지 않게 잘 보필하세요.”
“걱정 마요, 라미 씨. 어차피 우리 민영이는 제가 책임집니다.”
우리 민영이…….
라미는 내심 씁쓸해진 입맛을 다시며 두 사람에게 다시 인사를 한 후 카페를 나왔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전면 유리창 앞에 서서, 물끄러미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귀엽게 수다를 떠는 민영을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는 혁주.
라미의 시선이 매우 자연스럽게 혁주에게 맞추어졌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어째서 난 혁주 씨에 대한 마음이 접어지지 않는 걸까요.”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녀를 힐끔거렸다. 카사블랑카에서 두 번째로 맞는 이 여름은 왠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왜 하필 저 두 사람은 이곳으로 파견을 나온 건지. 두 사람을 피해 일부러 이곳까지 날아왔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저들과 마주하게 되다니.
“억지로 접으려고 하진 않을 거예요. 그저 흘러가는 대로.”
라미는 쓰게 웃으며 혁주를 쳐다봤다. 사랑의 총알을 쏘는 모션을 취하며 알아채지도 못할 그에게 찡긋 윙크를 보냈다.
“열심히 사랑하시게, 혁주 씨.”
비록 그 대상은 내가 아니지만.
라미는 돌아섰다. 낮 동안 후텁지근했던 공기가 밤이 되니 서늘한 그것으로 바뀌었다. 하루 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이제 오피스텔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카사블랑카에선 구하기 힘든 맥주를 마시고 잠이 들면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라미의 발길은 오피스텔 건물이 아닌 ‘MH 더 비발디 호텔’로 향했다. 한국에 있는 본사 호텔의 지사이며, 조금 전 혁주 커플과 함께 머물렀던 카페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다. 그녀의 직장이자 카사블랑카에 여행을 오는 관광객들이나 출장을 오는 직장인들, 혹은 국가 간 업무를 위해 방문하는 외교관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현지의 호텔이었다.
로비에 들어선 그녀는 지나가는 밤 근무 담당 직원들과 눈인사를 했다. 꿀꿀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왜 일터로 다시 왔는지 스스로가 한심할 지경이었지만 이대로 오피스텔로 간다면 맥주를 마시기도 전에 엉엉 울기부터 할지도 몰랐다. 짝사랑은 이래서 고달프다. 늘 눈물을 매달고 살아야 하니.
로비를 중심으로 양 옆에 두 개씩 있는 엘리베이터들 중, 라미는 늘 이용하는 왼편의 2호기 앞에 섰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면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지만 거기까지 갈 힘이 발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때마침 안에 누군가가 탔는지 문이 스르르 닫히고 있는 중이었다. 서둘러 버튼을 누른 그녀는 문이 다시 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닥으로부터 시선을 든 라미는, 엘리베이터 안을 쳐다보곤 미간을 구겼다.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은 김지한 이사였다. 그러니까 조금 전 민영이 말한 ‘새로 온 이사 놈’이자, 비서인 라미가 모시는 상사였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타이는 풀어헤쳐져 있었으며 양팔을 넓게 벌려 등 뒤의 바(bar)를 붙잡고 있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무척 피곤한 모습이자 표정이었다.
문이 천천히 열려 있는 그 몇 초의 짧은 시간 동안, 라미의 머릿속에서 무수한 생각들이 오고갔다. 이사님의 오늘 저녁 일정이 뭐였더라. 아, 맞다. 카사블랑카 내 호텔 이사 연합 모임이 있었지. 술을 마셨을 수도 있겠다. 워낙 국적이 다양한 사람들의 모임이니까.
들어갈까 말까, 하는 갈등도 머릿속 한편에 자리했다. 존재부터 부담스러운 그와 좁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은 역시 불편하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해도 말이다. 라미는 그가 눈을 뜨기 전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후 재빨리 닫기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은 천천히 닫혀갔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쉰 것도 잠시, 문은 그녀의 눈앞에서 재차 스르르 열렸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자마자 라미는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뒷머리를 기댔기 때문일까. 무척 날카롭고 예민하다고 느낀 평소와는 달리 지금의 그의 시선은 나른해보인다. 라미는 얼떨결에 꾸벅 인사를 했다.
“안 타요?”
“어……네.”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어떻게 안 거지?
라미는 주저 어린 발길을 겨우 안에 들였다. 그의 옆에 나란히 서자 두 번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출입문 자체가 하나의 거울이라 영락없이 그의 시야 안에 갇힌 셈이 된 것이다. 두 사람의 모습이 무척 선명한 상태로 맞은편 거울에 훤히 비치고 있었다.
라미는 시선을 어디다 둘지 몰라 동공을 이리저리 굴렸다. 얼핏 본 거울 속에선 꼼짝없이 그의 눈빛과 닿아 있었다. 왜 저렇게 뚫어지게 보는 거야, 부담되게.
“상사가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일부러 피하는 거 촌스러워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위잉, 소리를 내며 느린 상승을 하고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의 음성은 무척 굵고 깊게 울렸다. 라미는 생긋 웃어보였다. 몇 년 동안 비서로 일하면서 나름대로 잘 훈련된 웃음 정도는 지을 줄 알았다.
“죄송합니다. 이사님이 피곤해 보이셔서요. 모임은 잘 끝나셨는지…….”
“지금은 오피스텔에 있어야 할 시간이 아닌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피한 채 다른 걸 물어오는 그를, 라미는 잠시 빤히 쳐다보다 다급히 변명했다.
“어, 그게……마무리해야 할 업무가 생각나서요.”
“쓰레기 같은 자식.”
응? 라미는 앞뒤 없이 튀어나온 그의 한마디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죠, 지금?”
거울 속에서, 그가 비싯 웃는다. 조금 당황했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잘 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라미는 매우 정중하게 부인했다.
“아닙니다, 이사님. 제가 어떻게 감히…….”
“아니긴.”
조소 같은 것이 그의 입가에 어리는 것을, 라미는 무척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했다. 네가 아니라 해도 네 진심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투다. 그는 이따금 저런 식으로 농담 아닌 농담을 던진다. 그럴 땐 어떻게 응수해야 하는지, 아니 대꾸라는 걸 도대체 해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려진 것과는 달리 참 성실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럴 땐 정말이지 민영의 말이 맞다.
이 싸가지 없는 ‘이사 놈.’
“정말 아닙니다, 이사 노……ㅁ……님!”
라미는 자신의 망측한 입을 재빨리 다스린 후 제대로 된 발음을 내뱉었다. 그가 혹여 알아듣지나 않았는지 아주 비굴한 눈빛으로 눈치를 봤지만 다행히 그에게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딩동 소리를 내며 10층에 도착했다. 10층엔 이사실과 함께 비서실이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라미는 지한을 두고 먼저 내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는 13층, 즉 꼭대기에 있는 펜트하우스가 목적지였다.
“먼저 내리겠습니다.”
라미는 머뭇거리다 걸음을 옮겼다. 열린 문을 통과하는데 등으로 나직한 음성이 꽂힌다.
“인.샬.라.”
엘리베이터 밖 복도에 선 라미는 뒤돌아보았다. 그는 아까처럼 웃고 있었다.
“그 말은 나보다 이 비서한테 해주어야 할 말 같은데.”
그러곤 그는 사랑의 총알을 쏘는 모션을 취했다. 한쪽 눈까지 찡긋하면서. 좀 전에 카페 밖에서 창문을 통해 혁주에게 취했던 자신의 행동이다.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는 다시 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올라가고 없는데 라미의 멍멍한 시선은 여전히 엘리베이터 문에 꽂혀 있었다.
두 가지가 얼핏 라미의 머릿속에 스쳤다.
인샬라. 그 말은 지한이 이곳으로 전근 온 첫날, 그녀가 잠들어 있던 그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혁주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표정이 얼음조각처럼 싸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