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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한 달 전, 서울.
결재 서류 위를 오가는 기름한 손가락이 부지런하다. 사각거리는 펜슬 소리, 미약하게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 이따금 허공을 향해 내뱉어지는 피곤이 묻은 한숨소리가 대표 이사실의 밤을 적막에서 꺼내곤 했다. 뉴욕, 도쿄, 제주에 있는 MH 더 비발디 호텔 지사들을 차례대로 방문했던 열흘간의 출장을 끝낸 직후임에도, 지한의 바쁘고 타이트한 일상은 여유라곤 보이지 않았다.
아마 시간적으로 더 여유가 있었다면 두바이 지사와 카사블랑카 지사에도 다녀왔을 것이다. 그 열흘간 하루에 대여섯 건의 회의와 미팅, 세 끼 식사자리마다 진행된 간담회 등을 그는 매우 철저하게 처리했다. 그만큼 숨이 가쁘게 일정에 쫓긴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상 위에 가득 쌓인 결재 서류를 오늘 안에 검토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었다. 늘 그러했듯 직원들이 하는 업무에 책임자로서 절대 차질을 줄 수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똑똑똑.
노크소리가 지한의 시선을 위로 들리게 했다. 벽에 붙은 시계를 본다. 밤 9시. 이 시간에 노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들어와요.”
지한은 펜을 내려놓고 머리 뒤로 손깍지를 꼈다. 회전의자를 좌우로 천천히 돌리며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일 모레면 예순이 될 백발의 노인이 인자한 얼굴을 하고 들어온다. 박 비서는 들어오자마자 깍듯하게 인사를 한 후 지한의 건강을 챙겼다.
“이사님. 비행기에서 내린 지 고작 두 시간도 채 안 됐습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오늘은 이만 쉬시고 내일 나머지 업무를 처리하시는 게…….”
“난 괜찮아요. 그보다 박 비서는 왜 퇴근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사님이 출장을 갔다 돌아오신 날인데다가 아직 퇴근을 하지 않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먼저 날름……그러니까 이 늙은이를 걱정하신다면 이제 그만 퇴근하시지요, 이사님.”
지한은 박 비서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미소에는 박 비서를 향한 예의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만 댁으로 들어가세요. 사모님 잠도 못 주무시고 기다리시겠어요.”
그러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한 후 덧붙였다.
“지금부터 5분, 카운트다운 합니다. 5분 후에 문을 열어 박 비서님이 여전히 계신다면 그땐 일거리를 하나 던져드리죠.”
“흐음. 그럼 냅다 튀어야겠군요. 이사님, 이거…….”
박 비서가 다가와 지한의 책상에 피로회복제 한 병을 갖다 놓았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이사님.”
“네. 들어가세요.”
지한은 박 비서가 공손하게 그를 향해 머리를 숙인 후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찬찬한 눈으로 응시했다. 문이 닫히자 머리 뒤를 받치고 있던 두 팔을 위로 쭈욱 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비서가 놓고 간 피로회복제의 뚜껑을 따고 입에 머금으면서 커다란 전면 통유리 창 가로 다가갔다.
박철용 비서는 지한의 고등학교 은사님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분이었다.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 민주적인 태도를 늘 유지했고 인간 대 인간이라는 원칙을 늘 고수하여서 학생들이 무척 잘 따랐다. 지한이 미국유학을 끝내고 호텔 이사로 취임했던 5년 전에, 돌연 철용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학교 측의 급식 비리를 교육청에 고발했는데, 오히려 학교 측에서 그런 철용의 개인사를 끄집어내어 철용의 신용도에 문제가 있다며 역공을 펼친 것이다. 철용의 부친이 사채업자였다. 어쨌든 졸지에 교사라는 직업을 잃게 된 철용을 지한이 수소문하여 자신의 비서자리에 앉혔다.
지한이 ‘MH 더 비발디 호텔’ 이사직을, 철용이 그 비서직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지한의 파격적인 인사에 그룹 회장인 아버지 명호조차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한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지한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비서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상식들을, 철용은 매우 빠르게 습득했다.
60세를 정년으로 못 박아 놓은 이 호텔의 사칙 상, 철용은 이제 곧 호텔도 떠나야 할 상황이었다. 지한은 철용이 마지막 하루까지 남아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붓길 바랐다. 훗날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으려면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조리 짜내야 한다.
그것이 지한의 인생수칙이었다.
봄이 거의 끝나가는, 여름의 초입이었다. 유리창 밖의 세상은 흑과 백,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처럼 극과 극의 사이에 세상이 놓여 있다. 들이켜지는 한숨이 썼다. 이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외로움 때문이다.
밤이 오기 전의 낮 동안 한껏 들떠 있던 가슴은 어둠이 찾아오자마자 앙상하게 메말라갔다. 이젠 습관이 된 듯 무심해지려 노력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늘 밖으로 내쳐지는, 그들의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그 많은 현실들을 기꺼이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출장에서 돌아왔는데도 전화 연락 한 번 없는, 그의 무늬뿐인 가족들의 존재를.
아니, 아니다.
지한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생각을 수정했다.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의 두 발은 마땅히 어둠에 속해 있다. 그래서 그들과 섞일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 서글프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서류를 훑어나갔다. 비운 머릿속으로 서류 속 글자들을 빼곡하게 채워나갔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적막이 좀 더 길어지고,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려갈 때쯤, 지한은 마지막 서류를 덮었다.
일어나 전등 스위치를 끄고 책상 옆에 있는 키가 큰 스탠드를 켰다. 파란 불빛이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지한은 의자에 몸을 묻었다. 퇴근해 빌라로 돌아가야 옳았지만 지금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의자가 주는 안락함을 잠시나마 누리고 싶어졌다. 지한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가 잠에서 깬 건 새벽 두 시가 지나서였다. 느닷없이 고막을 찌르는 시끄러운 노크소리에 그는 잠결임에도 미간을 거칠게 구겼다. 스르르 뜬 시야에 이미 퇴근했을 박 비서가 다시 비쳐들었다. 양복을 벗고 간단한 반소매 티셔츠에 얇은 면바지를 입은 박 비서가 무척 초조한 표정으로 그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지한은 상체를 등받이에서 떼어내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맑은 정신을 담기 위해 몇 차례 마른세수를 한 후에야 고개를 들고 박 비서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시죠? 이 시간에?”
“이사님. 지금 본가에 좀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남동 말입니까?”
“예.”
어지간해선 긴장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 침착함을 지닌 철용이다. 그런 철용이 MH그룹 회장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영우가 함께 살고 있는 한남동 본가에 가봐야 한다며 새벽에 찾아온 이유는 분명히 평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한은 이유를 묻기도 전에 이미 일어나 재킷에 팔을 꿰고 있었다. 철용은 스탠드와 에어컨을 끄고 지한이 나가기 쉽도록 문을 열어두었다.
“이유는 나가면서 듣겠습니다.”
“네. 이사님.”
지한은 문을 통과하면서 표정을 굳혔다.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나 불안감을 수반했다. 그 불안감으로 인해 2년 전의 일이 문득 떠오른 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차에 올라타면서 지한이 물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철용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다급히 호텔을 나와 철용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타며 철용은 ‘영우에 대한 일’이라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자세한 건 철용도 잘 모르는 상황이고 무작정 지한을 데리고 본가로 와달라는 명호의 지시만 있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피곤과 함께 골치가 지끈거렸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새벽의 도심이 한껏 가라앉은 회색으로 보였다. 그렇게 30분을 달려 도착한 집 앞에서 차가 멈추었다.
지한과 철용이 동시에 차에서 내렸다.
“들어가십시오, 박 비서님.”
간단하게 인사를 전한 후 돌아서려는데, 돌연 철용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지한아.”
마치 학창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정겨움과 따뜻함에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철용처럼 그도 짧은 순간 과거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네. 선생님.”
“힘 내. 별 일 아닐 거야.”
“그러길 바라야죠.
철용의 눈빛에 든 염려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철용도 2년 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부당함을 잘 아는 철용이, 그런 눈빛을 보내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지한은 철용이 탄 차가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잠시 보고 섰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벨소리가 두 번도 채 울리기도 전에 ‘삑’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대문을 통과하는 지한의 마음은 무척 무거웠다.
잘 손질된 잔디가 심긴 넓은 정원의 양 옆으로 석등이 일렬로 서 있는데, 각각의 등마다 내뿜는 불빛의 색깔이 달랐다. 파란 빛 붉은 빛 백색의 빛에다 오렌지 빛이나 초록빛도 있다. 그 불빛들이 비추는 정원의 한 가운데 길은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그 대리석 길은 곧장 현관문으로 향해 있다.
어려서부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이 넓은 정원의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서서 이 거대한 저택으로 들어가는 길. 마치 박수와 환호처럼 불빛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장하는, 그야말로 황태자가 된 기분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래,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그가 이 집의 황태자라고 생각했다.
“어서 와, 지한아.”
현관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어머니인 선화가 그를 맞이했다. 새벽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선화는 무척 눈빛이 뚜렷한 걸로 보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언제나처럼 단아한 홈드레스를 갖추어 입은 모친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면서도 어쩐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출장 다녀온 길이라며. 피곤해서 어쩌니.”
“괜찮습니다. 아버지는요?”
“응. 서재에 계셔.”
차분하고 찬찬한 목소리가 그의 피곤을 어루만졌다. 어머니인 선화만큼은 여전히 그의 피곤을 달래주는 존재였다. 지한은 선화의 손을 한 번 잡아주곤 계단으로 발을 들였다.
#1
한 달 전, 서울.
결재 서류 위를 오가는 기름한 손가락이 부지런하다. 사각거리는 펜슬 소리, 미약하게 돌아가는 에어컨 소리, 이따금 허공을 향해 내뱉어지는 피곤이 묻은 한숨소리가 대표 이사실의 밤을 적막에서 꺼내곤 했다. 뉴욕, 도쿄, 제주에 있는 MH 더 비발디 호텔 지사들을 차례대로 방문했던 열흘간의 출장을 끝낸 직후임에도, 지한의 바쁘고 타이트한 일상은 여유라곤 보이지 않았다.
아마 시간적으로 더 여유가 있었다면 두바이 지사와 카사블랑카 지사에도 다녀왔을 것이다. 그 열흘간 하루에 대여섯 건의 회의와 미팅, 세 끼 식사자리마다 진행된 간담회 등을 그는 매우 철저하게 처리했다. 그만큼 숨이 가쁘게 일정에 쫓긴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상 위에 가득 쌓인 결재 서류를 오늘 안에 검토하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었다. 늘 그러했듯 직원들이 하는 업무에 책임자로서 절대 차질을 줄 수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똑똑똑.
노크소리가 지한의 시선을 위로 들리게 했다. 벽에 붙은 시계를 본다. 밤 9시. 이 시간에 노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들어와요.”
지한은 펜을 내려놓고 머리 뒤로 손깍지를 꼈다. 회전의자를 좌우로 천천히 돌리며 문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일 모레면 예순이 될 백발의 노인이 인자한 얼굴을 하고 들어온다. 박 비서는 들어오자마자 깍듯하게 인사를 한 후 지한의 건강을 챙겼다.
“이사님. 비행기에서 내린 지 고작 두 시간도 채 안 됐습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오늘은 이만 쉬시고 내일 나머지 업무를 처리하시는 게…….”
“난 괜찮아요. 그보다 박 비서는 왜 퇴근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사님이 출장을 갔다 돌아오신 날인데다가 아직 퇴근을 하지 않고 계시는데, 제가 어떻게 먼저 날름……그러니까 이 늙은이를 걱정하신다면 이제 그만 퇴근하시지요, 이사님.”
지한은 박 비서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미소에는 박 비서를 향한 예의도 갖추어져 있었다.
“그만 댁으로 들어가세요. 사모님 잠도 못 주무시고 기다리시겠어요.”
그러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한 후 덧붙였다.
“지금부터 5분, 카운트다운 합니다. 5분 후에 문을 열어 박 비서님이 여전히 계신다면 그땐 일거리를 하나 던져드리죠.”
“흐음. 그럼 냅다 튀어야겠군요. 이사님, 이거…….”
박 비서가 다가와 지한의 책상에 피로회복제 한 병을 갖다 놓았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이사님.”
“네. 들어가세요.”
지한은 박 비서가 공손하게 그를 향해 머리를 숙인 후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찬찬한 눈으로 응시했다. 문이 닫히자 머리 뒤를 받치고 있던 두 팔을 위로 쭈욱 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비서가 놓고 간 피로회복제의 뚜껑을 따고 입에 머금으면서 커다란 전면 통유리 창 가로 다가갔다.
박철용 비서는 지한의 고등학교 은사님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분이었다.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 민주적인 태도를 늘 유지했고 인간 대 인간이라는 원칙을 늘 고수하여서 학생들이 무척 잘 따랐다. 지한이 미국유학을 끝내고 호텔 이사로 취임했던 5년 전에, 돌연 철용은 학교에서 쫓겨났다.
학교 측의 급식 비리를 교육청에 고발했는데, 오히려 학교 측에서 그런 철용의 개인사를 끄집어내어 철용의 신용도에 문제가 있다며 역공을 펼친 것이다. 철용의 부친이 사채업자였다. 어쨌든 졸지에 교사라는 직업을 잃게 된 철용을 지한이 수소문하여 자신의 비서자리에 앉혔다.
지한이 ‘MH 더 비발디 호텔’ 이사직을, 철용이 그 비서직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지한의 파격적인 인사에 그룹 회장인 아버지 명호조차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한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지한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비서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상식들을, 철용은 매우 빠르게 습득했다.
60세를 정년으로 못 박아 놓은 이 호텔의 사칙 상, 철용은 이제 곧 호텔도 떠나야 할 상황이었다. 지한은 철용이 마지막 하루까지 남아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붓길 바랐다. 훗날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으려면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조리 짜내야 한다.
그것이 지한의 인생수칙이었다.
봄이 거의 끝나가는, 여름의 초입이었다. 유리창 밖의 세상은 흑과 백,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신의 존재처럼 극과 극의 사이에 세상이 놓여 있다. 들이켜지는 한숨이 썼다. 이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외로움 때문이다.
밤이 오기 전의 낮 동안 한껏 들떠 있던 가슴은 어둠이 찾아오자마자 앙상하게 메말라갔다. 이젠 습관이 된 듯 무심해지려 노력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늘 밖으로 내쳐지는, 그들의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그 많은 현실들을 기꺼이 인정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출장에서 돌아왔는데도 전화 연락 한 번 없는, 그의 무늬뿐인 가족들의 존재를.
아니, 아니다.
지한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생각을 수정했다.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의 두 발은 마땅히 어둠에 속해 있다. 그래서 그들과 섞일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 서글프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아까보다 빠른 속도로 서류를 훑어나갔다. 비운 머릿속으로 서류 속 글자들을 빼곡하게 채워나갔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적막이 좀 더 길어지고,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려갈 때쯤, 지한은 마지막 서류를 덮었다.
일어나 전등 스위치를 끄고 책상 옆에 있는 키가 큰 스탠드를 켰다. 파란 불빛이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지한은 의자에 몸을 묻었다. 퇴근해 빌라로 돌아가야 옳았지만 지금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의자가 주는 안락함을 잠시나마 누리고 싶어졌다. 지한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그가 잠에서 깬 건 새벽 두 시가 지나서였다. 느닷없이 고막을 찌르는 시끄러운 노크소리에 그는 잠결임에도 미간을 거칠게 구겼다. 스르르 뜬 시야에 이미 퇴근했을 박 비서가 다시 비쳐들었다. 양복을 벗고 간단한 반소매 티셔츠에 얇은 면바지를 입은 박 비서가 무척 초조한 표정으로 그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지한은 상체를 등받이에서 떼어내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맑은 정신을 담기 위해 몇 차례 마른세수를 한 후에야 고개를 들고 박 비서를 쳐다봤다.
“무슨 일이시죠? 이 시간에?”
“이사님. 지금 본가에 좀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남동 말입니까?”
“예.”
어지간해선 긴장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 침착함을 지닌 철용이다. 그런 철용이 MH그룹 회장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 영우가 함께 살고 있는 한남동 본가에 가봐야 한다며 새벽에 찾아온 이유는 분명히 평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한은 이유를 묻기도 전에 이미 일어나 재킷에 팔을 꿰고 있었다. 철용은 스탠드와 에어컨을 끄고 지한이 나가기 쉽도록 문을 열어두었다.
“이유는 나가면서 듣겠습니다.”
“네. 이사님.”
지한은 문을 통과하면서 표정을 굳혔다.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나 불안감을 수반했다. 그 불안감으로 인해 2년 전의 일이 문득 떠오른 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차에 올라타면서 지한이 물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철용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다급히 호텔을 나와 철용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타며 철용은 ‘영우에 대한 일’이라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자세한 건 철용도 잘 모르는 상황이고 무작정 지한을 데리고 본가로 와달라는 명호의 지시만 있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피곤과 함께 골치가 지끈거렸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새벽의 도심이 한껏 가라앉은 회색으로 보였다. 그렇게 30분을 달려 도착한 집 앞에서 차가 멈추었다.
지한과 철용이 동시에 차에서 내렸다.
“들어가십시오, 박 비서님.”
간단하게 인사를 전한 후 돌아서려는데, 돌연 철용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지한아.”
마치 학창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정겨움과 따뜻함에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철용처럼 그도 짧은 순간 과거로 돌아가 보기로 했다.
“네. 선생님.”
“힘 내. 별 일 아닐 거야.”
“그러길 바라야죠.
철용의 눈빛에 든 염려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어쩌면 철용도 2년 전의 일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부당함을 잘 아는 철용이, 그런 눈빛을 보내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지한은 철용이 탄 차가 골목 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잠시 보고 섰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벨소리가 두 번도 채 울리기도 전에 ‘삑’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대문을 통과하는 지한의 마음은 무척 무거웠다.
잘 손질된 잔디가 심긴 넓은 정원의 양 옆으로 석등이 일렬로 서 있는데, 각각의 등마다 내뿜는 불빛의 색깔이 달랐다. 파란 빛 붉은 빛 백색의 빛에다 오렌지 빛이나 초록빛도 있다. 그 불빛들이 비추는 정원의 한 가운데 길은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그 대리석 길은 곧장 현관문으로 향해 있다.
어려서부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이 넓은 정원의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서서 이 거대한 저택으로 들어가는 길. 마치 박수와 환호처럼 불빛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장하는, 그야말로 황태자가 된 기분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래,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그가 이 집의 황태자라고 생각했다.
“어서 와, 지한아.”
현관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어머니인 선화가 그를 맞이했다. 새벽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선화는 무척 눈빛이 뚜렷한 걸로 보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언제나처럼 단아한 홈드레스를 갖추어 입은 모친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면서도 어쩐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출장 다녀온 길이라며. 피곤해서 어쩌니.”
“괜찮습니다. 아버지는요?”
“응. 서재에 계셔.”
차분하고 찬찬한 목소리가 그의 피곤을 어루만졌다. 어머니인 선화만큼은 여전히 그의 피곤을 달래주는 존재였다. 지한은 선화의 손을 한 번 잡아주곤 계단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