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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2층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간 지한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치솟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고 있는 아버지 명호의 표정이었다. 명호의 맞은편에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동생 영우가 보였고, 문 옆에는 명호의 개인비서인 황민철이 보였다.
“어서 와라, 김 이사.”
명호가 지한을 부르는 호칭은 늘 ‘김 이사’였다. 그리고 영우를 부를 땐 ‘김 대리’라 한다. MH그룹 본사의 기획조정본부에서 기획팀 대리직을 맡고 있는 영우는 지한보다 일곱 살이 어렸다. 명호의 음성에 영우가 잠시 눈에 힘을 주고 지한을 쳐다보더니 다시 풀썩 고꾸라졌다. 영우의 얼굴에는 핏자국이며 멍 자국이 선명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버지.”
“후우……네 동생 영우가 또 사고를 쳤구나.”
지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영우를 향했다. 얼굴에 퍼진 붉은 핏자국과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심상치가 않다. 동시에 2년 전 일을 떠올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때에도 새벽시간에 이 서재로 불려왔었다. 영우는 그때에도 얼굴이며 팔, 다리가 피와 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명호가 영우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피해자는 지금 황 비서가 다른 곳에 데려다놨어. 그쪽도 술을 좀 마신 상태긴 한데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겠다고 난리야. 합의금도 안 먹히고. 나 참, 이런 상황 하나 제대로 컨트롤 못해서 나까지 나서야 하겠니?”
지한은 명호의 말을 듣고 영우에게 다가갔다. 인사불성인 영우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명호가 다시 말했다.
“친구 하나랑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나서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은 모양이야. 발단은 영우 이 녀석이 술김에 담배꽁초를 그 사람한테 던졌다고 해. 덕분에 피해자의 셔츠 아래 부분이 좀 탔고. 그걸로 시비가 붙은 게지.”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버지는.”
“너한테 맡기마.”
지한의 눈썹이 비틀렸다. 그에게 맡긴다는 말은 2년 전에도 들었던 말이다. 명호의 해결책은 결국 2년 전의 일을 반복하자는 뜻이었다. 2년 전 그때도, 영우는 술을 마신 채로 행인을 폭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을 지한이 뒤집어썼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였다.
“하지만 영우는 이제 막 시작인 녀석이야. 너야 워낙 능력도 출중하고 이루어놓은 것이 많으니 이깟 일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흠집이 남지는 않지. 이런 사건이야 일주일이면 흐지부지 될 테고 넌 아주 잠시 땅에 떨어졌던 이미지를 금세 복구하면 돼. 넌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는 놈이잖아. 그러니까 아비 말은 피해자가 결국 합의를 하지 않고 신고를 한다는 가정 하에서다.”
다행히 새벽시간이라 길거리에 행인이라곤 영우와 피해자뿐이었고, 행여 피해자가 신고를 한다고 해도 가해자가 명백한 상황이라면 굳이 CCTV를 확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 역시 술에 찌들려 있는 상태니 가해자의 존재를 기억할 수 없을 거라는 게 명호의 판단이었다. 그러니 지한이 영우 대신 가해자로 나서도 별 무리는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명호로서는 최대한 합의에 신경을 쓰겠지만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한 역시 부친의 입장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늘, 언제나,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한의 몫이 되었다.
명호는 그 말만 남기고 황 비서와 함께 서재를 나갔다. 남은 일은 지한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무언의 암시인 셈이다.
지한은 무너지듯 소파에 앉았다. 까칠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쓸어내린 후 맞은편에 있는 영우를 쳐다봤다. 좀 전과는 달리 영우는 반쯤 뜬 눈으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지한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다.
“정신이 들어?”
“또 형이 뒤집어쓰는 거야? 나 때문에?”
영우의 발음은 무척 불분명했다. 고주망태가 된 녀석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게 그를 매우 의지하고 있는 녀석이라, 지한은 차갑게 그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시끄러워. 정신이나 얼른 차려.”
“차라리 내가 입양아였으면 좋겠다. 그치? 형?”
“김영우. 그만해.”
“형이 친아들이고 내가 입양아였다면…….”
“그만하랬다.”
“늘 미안해, 형.”
“미안하면 이제 이런 사고는 그만 쳐. 너 하나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 황 비서까지 이 새벽에 잠도 못 주무시고 계시잖아. 알아들어? 김영우?”
지한의 야단에 영우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지한의 옆에 풀썩 몸을 묻었다. 그러곤 지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치댄다. 술 냄새가 지한의 코끝으로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형은 날 지켜주려고 이 집에 온 것 같아. 그렇지?”
이렇게 여리고 예민하기만 한 녀석을, 자신과는 다른 처지라고 해서 내칠 수가 있을까. 자신을 거슬리게 하는 타인에게 발동하는 방어기제 또한 이토록 여린 심성에서 나온 것일 텐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형의 이름으로, 동생의 이름으로, 이미 형제가 되어버린 인연인데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을까.
지한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영우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술기운으로 인해 델 것 같은 동생의 체온이 위태롭다.
“자라. 기대서.”
지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우는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형의 손길이 있어야 깊은 잠에 들곤 했던 영우다. 지한은 그런 영우가 짧은 순간만이라도 편한 잠을 자길 바랐다.
잠든 영우를 서재의 소파에 눕힌 후 불을 끄고 나온 지한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화와 마주쳤다. 모친의 얼굴 가득 오른 죄책감, 미안함 등이 지한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왜 안 주무시고 나와 계세요.”
“네가 걱정돼서.”
“전 괜찮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괜찮다는 말, 거짓말이라는 거 알아. 지한아. 지금이라도 그렇게 못 하겠다고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응?”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선화의 진심 또한 명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가 가진 출중한 능력으로 불리한 판 따위는 얼마든지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지한이, 이번에도 책임을 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지한은 엷은 미소와 함께 선화의 어깨를 다독였다.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선화는 마지못해 계단을 내려갔다.
지한이 고등학교 3학년일 때, 학교와 개인과외로 인해 제법 바쁜 날을 보냈다. 성적은 늘 학교 전체에서 1등. 착실하고 성실하기도 하여 교사들의 신뢰도 두터웠고 학우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선망의 대상인 존재였다.
MH그룹의 황태자.
친구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자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수식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두는 오로지 지한이 아버지 명호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동생 영우가 태어나기 전까지, 명호와 선화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던 지한은, 영우가 태어나면서부터 눈에 띄게 줄어든 부모님의 사랑 때문에 내내 상처를 받았다.
그것은 그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도 계속 되어 사춘기인 그를 쓰러뜨리고 무너뜨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명호는 영우의 손만 잡았으며, 어떻게 해도 선화는 영우만 보았다.
어렸을 때 여름만 되면 자신과 늘 함께 가던 시칠리아의 별장에도 영우가 태어난 후에는 영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넌 잘하잖아. 영우는 동생이고 아직 어리니까.’
지한이 불평할 때마다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런 생활에 지한의 마음이 차츰 닫혀갈 무렵이었던 고등학교 3학년. 그런 지한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지 명호와 선화는 지한을 불러 놓고 지한의 출생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아주 옛날, 지한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선화가 불임이라는 것을 안 조부모님은 비밀리에 수소문하여 아직 백일도 채 되지 않은 그를 입양했다는 것을. 그들의 인생에 자식이라곤 지한밖에 없을 줄 알았던 명호와 선화는 성심성의껏 지한을 키웠다는 것을.
하지만 불임인 줄 알았던 선화가 지한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우연찮게 임신이 되었고, 그 아이가 영우였다. 영우가 그들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혈육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끈끈한 정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그들의 가족이 된 지한에겐 절대 가질 수 없는. 느껴지지도 않는 그런 진하고 깊은 정일 것이다. 일곱 해가 거듭되면서 기른 정이 켜켜이 쌓이기도 전에 영우가 태어난 바람에 두 분 모두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이 갔다.
특히 여자로 모성애가 두터웠던 선화보다 명호의 냉철한 이성이 분명하게 선을 그어버렸다.
넌, 엄밀하게 우리 가족이 아니야.
그때부터 지한은 모든 것을 인정했다. 자신에게 쌀쌀맞은 아버지의 태도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뜻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선화의 입장도. 이제는 그들의 사랑을 갈구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 보답을 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그는 결코 황태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이미 돌아가신 조부모, 명호와 선화, 그리고 영우, 황 비서뿐이었던지라 외부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바깥에선 여전히 지한을 MH의 황태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는 더 이상 그 수식어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안다.
그저 지금은 명호와 선화를 위해 회사 일을 돕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의 전부였다. 타고난 머리로 두 분과 회사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자신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니 이번 일도 그가 모조리 책임을 져야 할 것이었다.
지한은 황 비서가 다른 곳에 데려다놨다던 피해자를 만났고 극적으로 합의에 성공했다. 피해자 역시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라 가해자라 밝히고 다가온 지한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대했다. 돈 욕심이 없는 걸로 보아 명호의 말대로 자칫 잘못했다간 영락없이 폭행죄로 끌려갈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피해자를 만나고 합의를 도출하는 바람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지한이 아침에 호텔로 출근했을 땐, 상황이 180도 달라져있었다. 철용이 무척 심각한 낯빛을 하고 가져온 유력 일간지의 한 귀퉁이에 작게 실린 기사 하나가 지한의 아침을 망쳐버린 것이다.
2층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간 지한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치솟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고 있는 아버지 명호의 표정이었다. 명호의 맞은편에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동생 영우가 보였고, 문 옆에는 명호의 개인비서인 황민철이 보였다.
“어서 와라, 김 이사.”
명호가 지한을 부르는 호칭은 늘 ‘김 이사’였다. 그리고 영우를 부를 땐 ‘김 대리’라 한다. MH그룹 본사의 기획조정본부에서 기획팀 대리직을 맡고 있는 영우는 지한보다 일곱 살이 어렸다. 명호의 음성에 영우가 잠시 눈에 힘을 주고 지한을 쳐다보더니 다시 풀썩 고꾸라졌다. 영우의 얼굴에는 핏자국이며 멍 자국이 선명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버지.”
“후우……네 동생 영우가 또 사고를 쳤구나.”
지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영우를 향했다. 얼굴에 퍼진 붉은 핏자국과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심상치가 않다. 동시에 2년 전 일을 떠올린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때에도 새벽시간에 이 서재로 불려왔었다. 영우는 그때에도 얼굴이며 팔, 다리가 피와 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명호가 영우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피해자는 지금 황 비서가 다른 곳에 데려다놨어. 그쪽도 술을 좀 마신 상태긴 한데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겠다고 난리야. 합의금도 안 먹히고. 나 참, 이런 상황 하나 제대로 컨트롤 못해서 나까지 나서야 하겠니?”
지한은 명호의 말을 듣고 영우에게 다가갔다. 인사불성인 영우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명호가 다시 말했다.
“친구 하나랑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나서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은 모양이야. 발단은 영우 이 녀석이 술김에 담배꽁초를 그 사람한테 던졌다고 해. 덕분에 피해자의 셔츠 아래 부분이 좀 탔고. 그걸로 시비가 붙은 게지.”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버지는.”
“너한테 맡기마.”
지한의 눈썹이 비틀렸다. 그에게 맡긴다는 말은 2년 전에도 들었던 말이다. 명호의 해결책은 결국 2년 전의 일을 반복하자는 뜻이었다. 2년 전 그때도, 영우는 술을 마신 채로 행인을 폭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을 지한이 뒤집어썼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였다.
“하지만 영우는 이제 막 시작인 녀석이야. 너야 워낙 능력도 출중하고 이루어놓은 것이 많으니 이깟 일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흠집이 남지는 않지. 이런 사건이야 일주일이면 흐지부지 될 테고 넌 아주 잠시 땅에 떨어졌던 이미지를 금세 복구하면 돼. 넌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는 놈이잖아. 그러니까 아비 말은 피해자가 결국 합의를 하지 않고 신고를 한다는 가정 하에서다.”
다행히 새벽시간이라 길거리에 행인이라곤 영우와 피해자뿐이었고, 행여 피해자가 신고를 한다고 해도 가해자가 명백한 상황이라면 굳이 CCTV를 확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 역시 술에 찌들려 있는 상태니 가해자의 존재를 기억할 수 없을 거라는 게 명호의 판단이었다. 그러니 지한이 영우 대신 가해자로 나서도 별 무리는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명호로서는 최대한 합의에 신경을 쓰겠지만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한 역시 부친의 입장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늘, 언제나,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한의 몫이 되었다.
명호는 그 말만 남기고 황 비서와 함께 서재를 나갔다. 남은 일은 지한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무언의 암시인 셈이다.
지한은 무너지듯 소파에 앉았다. 까칠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두어 번 쓸어내린 후 맞은편에 있는 영우를 쳐다봤다. 좀 전과는 달리 영우는 반쯤 뜬 눈으로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지한의 눈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간다.
“정신이 들어?”
“또 형이 뒤집어쓰는 거야? 나 때문에?”
영우의 발음은 무척 불분명했다. 고주망태가 된 녀석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하게 그를 매우 의지하고 있는 녀석이라, 지한은 차갑게 그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시끄러워. 정신이나 얼른 차려.”
“차라리 내가 입양아였으면 좋겠다. 그치? 형?”
“김영우. 그만해.”
“형이 친아들이고 내가 입양아였다면…….”
“그만하랬다.”
“늘 미안해, 형.”
“미안하면 이제 이런 사고는 그만 쳐. 너 하나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 황 비서까지 이 새벽에 잠도 못 주무시고 계시잖아. 알아들어? 김영우?”
지한의 야단에 영우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지한의 옆에 풀썩 몸을 묻었다. 그러곤 지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치댄다. 술 냄새가 지한의 코끝으로 몰려들었다.
“아무래도 형은 날 지켜주려고 이 집에 온 것 같아. 그렇지?”
이렇게 여리고 예민하기만 한 녀석을, 자신과는 다른 처지라고 해서 내칠 수가 있을까. 자신을 거슬리게 하는 타인에게 발동하는 방어기제 또한 이토록 여린 심성에서 나온 것일 텐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형의 이름으로, 동생의 이름으로, 이미 형제가 되어버린 인연인데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을까.
지한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영우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술기운으로 인해 델 것 같은 동생의 체온이 위태롭다.
“자라. 기대서.”
지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우는 코까지 골며 잠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형의 손길이 있어야 깊은 잠에 들곤 했던 영우다. 지한은 그런 영우가 짧은 순간만이라도 편한 잠을 자길 바랐다.
잠든 영우를 서재의 소파에 눕힌 후 불을 끄고 나온 지한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화와 마주쳤다. 모친의 얼굴 가득 오른 죄책감, 미안함 등이 지한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왜 안 주무시고 나와 계세요.”
“네가 걱정돼서.”
“전 괜찮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괜찮다는 말, 거짓말이라는 거 알아. 지한아. 지금이라도 그렇게 못 하겠다고 아버지한테 말씀드려. 응?”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선화의 진심 또한 명호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가 가진 출중한 능력으로 불리한 판 따위는 얼마든지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지한이, 이번에도 책임을 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지한은 엷은 미소와 함께 선화의 어깨를 다독였다.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선화는 마지못해 계단을 내려갔다.
지한이 고등학교 3학년일 때, 학교와 개인과외로 인해 제법 바쁜 날을 보냈다. 성적은 늘 학교 전체에서 1등. 착실하고 성실하기도 하여 교사들의 신뢰도 두터웠고 학우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선망의 대상인 존재였다.
MH그룹의 황태자.
친구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이자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수식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두는 오로지 지한이 아버지 명호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동생 영우가 태어나기 전까지, 명호와 선화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던 지한은, 영우가 태어나면서부터 눈에 띄게 줄어든 부모님의 사랑 때문에 내내 상처를 받았다.
그것은 그가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도 계속 되어 사춘기인 그를 쓰러뜨리고 무너뜨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명호는 영우의 손만 잡았으며, 어떻게 해도 선화는 영우만 보았다.
어렸을 때 여름만 되면 자신과 늘 함께 가던 시칠리아의 별장에도 영우가 태어난 후에는 영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넌 잘하잖아. 영우는 동생이고 아직 어리니까.’
지한이 불평할 때마다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런 생활에 지한의 마음이 차츰 닫혀갈 무렵이었던 고등학교 3학년. 그런 지한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지 명호와 선화는 지한을 불러 놓고 지한의 출생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아주 옛날, 지한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 선화가 불임이라는 것을 안 조부모님은 비밀리에 수소문하여 아직 백일도 채 되지 않은 그를 입양했다는 것을. 그들의 인생에 자식이라곤 지한밖에 없을 줄 알았던 명호와 선화는 성심성의껏 지한을 키웠다는 것을.
하지만 불임인 줄 알았던 선화가 지한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우연찮게 임신이 되었고, 그 아이가 영우였다. 영우가 그들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혈육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끈끈한 정이 생겨버린 것이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그들의 가족이 된 지한에겐 절대 가질 수 없는. 느껴지지도 않는 그런 진하고 깊은 정일 것이다. 일곱 해가 거듭되면서 기른 정이 켜켜이 쌓이기도 전에 영우가 태어난 바람에 두 분 모두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이 갔다.
특히 여자로 모성애가 두터웠던 선화보다 명호의 냉철한 이성이 분명하게 선을 그어버렸다.
넌, 엄밀하게 우리 가족이 아니야.
그때부터 지한은 모든 것을 인정했다. 자신에게 쌀쌀맞은 아버지의 태도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뜻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선화의 입장도. 이제는 그들의 사랑을 갈구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 보답을 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그는 결코 황태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이미 돌아가신 조부모, 명호와 선화, 그리고 영우, 황 비서뿐이었던지라 외부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바깥에선 여전히 지한을 MH의 황태자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는 더 이상 그 수식어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안다.
그저 지금은 명호와 선화를 위해 회사 일을 돕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의 전부였다. 타고난 머리로 두 분과 회사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자신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니 이번 일도 그가 모조리 책임을 져야 할 것이었다.
지한은 황 비서가 다른 곳에 데려다놨다던 피해자를 만났고 극적으로 합의에 성공했다. 피해자 역시 술에 거나하게 취한 상태라 가해자라 밝히고 다가온 지한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대했다. 돈 욕심이 없는 걸로 보아 명호의 말대로 자칫 잘못했다간 영락없이 폭행죄로 끌려갈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피해자를 만나고 합의를 도출하는 바람에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지한이 아침에 호텔로 출근했을 땐, 상황이 180도 달라져있었다. 철용이 무척 심각한 낯빛을 하고 가져온 유력 일간지의 한 귀퉁이에 작게 실린 기사 하나가 지한의 아침을 망쳐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