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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르네는 지저분한 자신을 살폈다. 손은 검은 얼룩이 잔뜩 묻어 있고, 얼굴은 뭔가 굳어서 딱딱했다. 문지를수록 알 수 없는 가루가 허공에 날리자 슬며시 손을 내렸다.
‘이 사람들 말처럼 내가 약에 취했던 걸까? 진짜 내 현실은 이곳일지도 몰라.’
문득 남편이란 사람이 거리의 남자들과 비슷할 것 같아 염려되었다.
‘배 속의 아이는 누구 아이지, 시종장이 맞나, 아니면 지금 남편…….’
무거운 배를 쓸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혼자도 아니고 아이까지 있으니 우선순위를 결정하기 어려웠다.
‘내 행색을 봐서는 돈도 없어 보이는데 차라리 근위대에게…….’
그녀는 나란히 걷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험상궂은 인상을 보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배를 감싸 안았다.
남자들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거리와 어울리지 않게 크고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그들을 따라 만난 남편의 첫인상은, 눈이 풀린 약쟁이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르네를 붙잡고 오던 남자가 먼저 방에 들어섰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남자를 보며 르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르반.”
“클레르건 공작님, 르네는 만나셨나요?”
“계약서부터 확실하게 하지.”
“전부 준비했습니다. 제 조건은 잊지 않으셨죠?”
헐렁한 로브를 걸친 세르반은 앞가슴을 풀어 헤치고 반쯤 드러누워 있었다. 르네는 세르반과 제복 입은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무뚝뚝하게 말을 잇는 공작과 웃음기 가득한 남자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남편이라는 자는 저렇게 누워 있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누구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 사람이 남편이라고…… 정말 이곳으로 들어가야 하나.’
대화가 끝났는지 클레르건 공작이 몸을 돌렸다.
“르네, 세르반이 널 한참 찾았어. 이제 그만 들어가 쉬어.”
알버트는 가볍게 르네의 등을 밀며 혀를 찼다. 이 여자는 볼 때마다 이렇게 맹하게 군다. 한 번도 깨끗한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세르반은 뭐가 좋아서 곁에 두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르네는 대화를 마친 공작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알 수 없는 중압감에 작은 몸을 더욱 움츠렸다. 클레르건 공작은 르네를 잠시 쳐다보고 이내 알버트와 함께 돌아갔다.
남편이란 사람과 단둘이 남겨진 그녀는 긴장했다.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당장 앉고 싶었지만, 그래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리의 피로를 풀어 보려고 치마 속에서 조심스레 움직일 때였다.
“르네, 이리 와.”
약에 취한 것 같던 세르반의 눈빛이 금세 다정하게 변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세르반은 다정하게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망설이던 그녀는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흐음…….”
앉는 순간 허리의 긴장이 풀려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라서 치마를 꼭 쥐고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르네는 얼굴로 다가오는 손을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다가 흠칫했다. 혹시나 언짢은 기색인지 눈치를 살피는데 볼을 매만지는 세르반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르네, 또 얼굴에 이런 걸 묻혔네. 굳이 왜 3구역으로 가는 거야? 더 이상 널 쫓아오는 사람들은 없다니까.”
“…….”
세르반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침묵하며 자신을 관찰하는 르네를 천천히 훑어봤다.
“르네?”
세르반의 눈가에 이채가 돌더니 곧 사라졌다. 그는 르네의 손목을 잡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남녀 사이의 몸짓치고는 깔끔하고, 성적 긴장감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르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르네, 고생했지?”
“…….”
“오늘은 어땠어? 힘들었어?”
르네는 긴장했던 몸을 풀고 세르반에게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래, 지난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지금은 나랑 있으니 걱정 마. 넌 언제나 르네야. 얼굴에 이런 걸 묻혀도 어느 곳에 있어도 네가 르네라는 사실은 변함없어.”
르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세르반과 시선을 마주했다.
“함께 온 남자가 레이먼 클레르건 공작이야. 얼굴을 잘 기억해 둬. 뒤따르던 남자는 자센 백작가의 차남 알버트 경이지. 공작가 기사단장을 맡고 있으니까 자주 볼 거야.”
영문을 모를 말이었지만 잊지 않으려고 머릿속에 되뇌었다. 세르반은 섬세한 수가 놓인 손수건을 꺼냈다. 르네의 얼굴을 닦으려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그래. 때가 되면 이런 걸 묻히지 않아도 네가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거야.”
사랑스럽다는 듯이 르네를 쳐다보면서도 어루만지는 손길은 담백했다.
다정한 말투, 손을 감싸는 온기, 가만가만 두드리는 리듬에 맞춰 르네는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
남편 세르반은 약쟁이처럼 보였지만 첫인상과 다르게 멀쩡했다. 비록 고위 귀족인 공작에게도 무례하게 굴었지만, 적어도 당장 르네에게 해를 가하진 않을 것 같아 내심 안심했다.
그때 우당탕 복도를 뛰어오는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헉헉, 르네는? 르네, 여기 있어?”
앳된 얼굴의 남자가 방 안의 르네를 발견하고 가슴을 쓸었다.
“이 자식들, 갑자기 와서 르네만 데리고 가면 어쩌자는 거야? 또 혼자서 숨은 줄 알고 놀랐네.”
“로이드, 시끄러워. 오늘부터 르네 데리고 돌아다니지 마.”
“내가 데려가는 거 아니야. 르네가 자꾸 도망쳐서 그렇……지.”
한참을 씩씩거리던 로이드는 오늘따라 조용한 르네를 빤히 쳐다보았다.
“흠, 르네?”
르네는 어색해 보이지 않길 바라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 알은척을 했다.
“르네, 또 사람들 앞에서 약에 취한 척 굴었어? 일부러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나저나 오늘따라 얌전하네.”
미묘하게 평소와 다른 르네을 보고 로이드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물끄러미 보던 그는 작은 감탄사와 함께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드디어! 네가 정신을 차렸…….”
“로이드.”
“아……하하…… 그래, 평소랑 똑같네, 똑같아.”
세르반의 목소리에 놀란 로이드는 얼른 말을 바꾸며 태연하게 웃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서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르네의 어깨를 잡고 급하게 일으켜 세웠다. 르네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세르반이 일어나자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아! 알았어, 알았어!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니까.”
겁먹은 말투와 다르게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세르반은 난처한 표정의 르네를 소파에 앉히며, 자연스럽게 등 뒤로 쿠션을 대 주었다.
“로이드, 지금 르네가 씻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새 옷과 따뜻한 음식을 가져오라고 해. 곧 3구역에서 쳐들어올 테니 꼼짝 말고 넌 르네 옆에 있도록 해”
“갑자기 3구역에서? 그동안 시끄럽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잖아.”
“2구역과 연합해서 덤비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이 들었겠지. 하필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
“직접 가려고? 왜? 나 혼자 가도 해결할 수 있는데?”
“차라리 잘됐어. 이번에 이 근처 지저분한 구역을 전부 정리해 버리면 르네도 좋아하겠지.”
말을 하면서도 세르반의 시선은 르네를 떠나지 않았다.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넘겨 주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로이드, 쓸데없는 행동 하지 마. 르네의 몸은 점점 무거워질 거고 옆에서 신경 쓸 사람은 너야. 방금처럼 갑자기 일으켜 세우는 것도 안 돼.”
말을 마친 세르반은 창가 근처의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 안을 뒤적였다. 서류들을 챙겨 가죽 가방에 담아 돌아오는데 대충 걸친 로브가 흘러내려 단단한 상체가 드러났다.
르네는 급하게 고개를 숙였고 로이드는 못 볼 것을 본 표정으로 질색했다. 세르반은 로이드에게 그만 나가 보라며 눈짓했다.
“그래, 알았어. 지금 나간다고. 르네, 준비가 되면 알려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세르반은 로브 앞섶을 단정히 묶고, 르네의 시선을 따라 치맛자락을 보며 머뭇거렸다. 르네는 있지도 않는 치마 주름을 펴고 있었다.
“르네, 가방 안의 물건만큼은 네가 직접 챙기도록 해.”
“…….”
“내가…… 내가 널 아끼는 방법은 틀릴 때도 있었지만, 마음까지 틀렸다고 생각하진 말아 줘.”
르네는 그의 음성에 물기가 어려 의아했다. 막상 고개를 들었을 때, 세르반의 표정은 별다르지 않아 잠시 착각한 것이라 여겼다.
긴장이 풀렸는지 새삼 그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선이 곱고 상처 하나 없는 하얀 피부는 뒷골목을 다스리는 구역의 로드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흑발과 밝은 금안은 별이 뜬 밤하늘 같았다.
“힘들지? 그만 쉴래?”
여전히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은 다정하고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로이드에게 이야기해. 난 내일 아침에 돌아올 거야.”
세르반은 귀가 빨개진 르네를 살며시 끌어안고, 동그란 이마 위로 숨결을 더했다.
한참 동안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숨 쉬는 소리와 오르락내리락 작게 들썩이는 가슴만이 느껴졌다.
어색해진 르네가 몸을 움찔하자, 세르반은 마지못해 몸을 떼어 냈다.
“금방 로이드가 올 거야. 잠시 기다려.”
다녀올게. 그는 르네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일어섰다. 곧이어 하녀가 들어와 르네를 방으로 안내했다.
“목욕을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귀족의 삶을 살 때는 당연한 대접이었지만 하녀로 살면서 스스로 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시중을 받는 일이 낯설어 거절하니 하녀는 순순히 물러났다.
제법 부른 배를 안고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후우…….”
르네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먹을 음식과 머물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르네, 씻고 나니까 이제 사람 같네. 식사를 준비했으니 어서 먹어 둬.”
“고마워요.”
“여기 앉아.”
로이드를 따라 응접실에 들어갔을 때 르네는 준비된 음식을 보고 작게 입을 벌렸다. 정작 로이드는 낯설어하는 르네의 태도에 별 의문을 갖지 않았다.
“뭐 해? 어서 앉아.”
“……네.”
부드러운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자 눈물이 날 뻔했다. 하녀로 살면서 먹던 딱딱한 빵이 아니라, 귀족의 삶을 살며 먹었던 부드럽고 고소한 빵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더운 여름날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베리와, 각종 허브와 채소를 곁들인 오리구이까지 먹음직스럽게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단순히 꿈이라면 이 맛과 향을 기억할 수 없어.’
익숙하게 반응하는 감각들이 지난 삶들은 모두 현실이라고 알렸다. 누가, 왜 자신의 삶을 흔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제발 이번 삶이 마지막이길 바랐다.
오랜만에 풍족한 식사를 마친 르네는 홀로 침대에 누웠다. 팡팡 소리가 나도록 침구를 두드리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푹신하다.”
르네는 지저분한 자신을 살폈다. 손은 검은 얼룩이 잔뜩 묻어 있고, 얼굴은 뭔가 굳어서 딱딱했다. 문지를수록 알 수 없는 가루가 허공에 날리자 슬며시 손을 내렸다.
‘이 사람들 말처럼 내가 약에 취했던 걸까? 진짜 내 현실은 이곳일지도 몰라.’
문득 남편이란 사람이 거리의 남자들과 비슷할 것 같아 염려되었다.
‘배 속의 아이는 누구 아이지, 시종장이 맞나, 아니면 지금 남편…….’
무거운 배를 쓸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혼자도 아니고 아이까지 있으니 우선순위를 결정하기 어려웠다.
‘내 행색을 봐서는 돈도 없어 보이는데 차라리 근위대에게…….’
그녀는 나란히 걷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험상궂은 인상을 보고 작은 한숨을 내쉬며 배를 감싸 안았다.
남자들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거리와 어울리지 않게 크고 아름다운 저택이었다. 그들을 따라 만난 남편의 첫인상은, 눈이 풀린 약쟁이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르네를 붙잡고 오던 남자가 먼저 방에 들어섰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남자를 보며 르네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르반.”
“클레르건 공작님, 르네는 만나셨나요?”
“계약서부터 확실하게 하지.”
“전부 준비했습니다. 제 조건은 잊지 않으셨죠?”
헐렁한 로브를 걸친 세르반은 앞가슴을 풀어 헤치고 반쯤 드러누워 있었다. 르네는 세르반과 제복 입은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무뚝뚝하게 말을 잇는 공작과 웃음기 가득한 남자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남편이라는 자는 저렇게 누워 있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누구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저 사람이 남편이라고…… 정말 이곳으로 들어가야 하나.’
대화가 끝났는지 클레르건 공작이 몸을 돌렸다.
“르네, 세르반이 널 한참 찾았어. 이제 그만 들어가 쉬어.”
알버트는 가볍게 르네의 등을 밀며 혀를 찼다. 이 여자는 볼 때마다 이렇게 맹하게 군다. 한 번도 깨끗한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세르반은 뭐가 좋아서 곁에 두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르네는 대화를 마친 공작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알 수 없는 중압감에 작은 몸을 더욱 움츠렸다. 클레르건 공작은 르네를 잠시 쳐다보고 이내 알버트와 함께 돌아갔다.
남편이란 사람과 단둘이 남겨진 그녀는 긴장했다.
허리와 다리가 아파서 당장 앉고 싶었지만, 그래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리의 피로를 풀어 보려고 치마 속에서 조심스레 움직일 때였다.
“르네, 이리 와.”
약에 취한 것 같던 세르반의 눈빛이 금세 다정하게 변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세르반은 다정하게 웃으며,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망설이던 그녀는 쉬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흐음…….”
앉는 순간 허리의 긴장이 풀려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라서 치마를 꼭 쥐고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르네는 얼굴로 다가오는 손을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피하다가 흠칫했다. 혹시나 언짢은 기색인지 눈치를 살피는데 볼을 매만지는 세르반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르네, 또 얼굴에 이런 걸 묻혔네. 굳이 왜 3구역으로 가는 거야? 더 이상 널 쫓아오는 사람들은 없다니까.”
“…….”
세르반은 고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침묵하며 자신을 관찰하는 르네를 천천히 훑어봤다.
“르네?”
세르반의 눈가에 이채가 돌더니 곧 사라졌다. 그는 르네의 손목을 잡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남녀 사이의 몸짓치고는 깔끔하고, 성적 긴장감은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르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르네, 고생했지?”
“…….”
“오늘은 어땠어? 힘들었어?”
르네는 긴장했던 몸을 풀고 세르반에게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래, 지난 시간은 중요하지 않아. 지금은 나랑 있으니 걱정 마. 넌 언제나 르네야. 얼굴에 이런 걸 묻혀도 어느 곳에 있어도 네가 르네라는 사실은 변함없어.”
르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세르반과 시선을 마주했다.
“함께 온 남자가 레이먼 클레르건 공작이야. 얼굴을 잘 기억해 둬. 뒤따르던 남자는 자센 백작가의 차남 알버트 경이지. 공작가 기사단장을 맡고 있으니까 자주 볼 거야.”
영문을 모를 말이었지만 잊지 않으려고 머릿속에 되뇌었다. 세르반은 섬세한 수가 놓인 손수건을 꺼냈다. 르네의 얼굴을 닦으려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그래. 때가 되면 이런 걸 묻히지 않아도 네가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을 거야.”
사랑스럽다는 듯이 르네를 쳐다보면서도 어루만지는 손길은 담백했다.
다정한 말투, 손을 감싸는 온기, 가만가만 두드리는 리듬에 맞춰 르네는 조금씩 긴장을 풀었다.
남편 세르반은 약쟁이처럼 보였지만 첫인상과 다르게 멀쩡했다. 비록 고위 귀족인 공작에게도 무례하게 굴었지만, 적어도 당장 르네에게 해를 가하진 않을 것 같아 내심 안심했다.
그때 우당탕 복도를 뛰어오는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헉헉, 르네는? 르네, 여기 있어?”
앳된 얼굴의 남자가 방 안의 르네를 발견하고 가슴을 쓸었다.
“이 자식들, 갑자기 와서 르네만 데리고 가면 어쩌자는 거야? 또 혼자서 숨은 줄 알고 놀랐네.”
“로이드, 시끄러워. 오늘부터 르네 데리고 돌아다니지 마.”
“내가 데려가는 거 아니야. 르네가 자꾸 도망쳐서 그렇……지.”
한참을 씩씩거리던 로이드는 오늘따라 조용한 르네를 빤히 쳐다보았다.
“흠, 르네?”
르네는 어색해 보이지 않길 바라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 알은척을 했다.
“르네, 또 사람들 앞에서 약에 취한 척 굴었어? 일부러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나저나 오늘따라 얌전하네.”
미묘하게 평소와 다른 르네을 보고 로이드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물끄러미 보던 그는 작은 감탄사와 함께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드디어! 네가 정신을 차렸…….”
“로이드.”
“아……하하…… 그래, 평소랑 똑같네, 똑같아.”
세르반의 목소리에 놀란 로이드는 얼른 말을 바꾸며 태연하게 웃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서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르네의 어깨를 잡고 급하게 일으켜 세웠다. 르네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뭔가 말을 꺼내려고 했지만, 세르반이 일어나자 서둘러 뒤로 물러났다.
“아! 알았어, 알았어!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니까.”
겁먹은 말투와 다르게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세르반은 난처한 표정의 르네를 소파에 앉히며, 자연스럽게 등 뒤로 쿠션을 대 주었다.
“로이드, 지금 르네가 씻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새 옷과 따뜻한 음식을 가져오라고 해. 곧 3구역에서 쳐들어올 테니 꼼짝 말고 넌 르네 옆에 있도록 해”
“갑자기 3구역에서? 그동안 시끄럽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잖아.”
“2구역과 연합해서 덤비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이 들었겠지. 하필 오늘이 될 줄은 몰랐지만.”
“직접 가려고? 왜? 나 혼자 가도 해결할 수 있는데?”
“차라리 잘됐어. 이번에 이 근처 지저분한 구역을 전부 정리해 버리면 르네도 좋아하겠지.”
말을 하면서도 세르반의 시선은 르네를 떠나지 않았다. 흐트러진 귀밑머리를 넘겨 주는 손길이 퍽 다정했다.
“로이드, 쓸데없는 행동 하지 마. 르네의 몸은 점점 무거워질 거고 옆에서 신경 쓸 사람은 너야. 방금처럼 갑자기 일으켜 세우는 것도 안 돼.”
말을 마친 세르반은 창가 근처의 책상으로 걸어가 서랍 안을 뒤적였다. 서류들을 챙겨 가죽 가방에 담아 돌아오는데 대충 걸친 로브가 흘러내려 단단한 상체가 드러났다.
르네는 급하게 고개를 숙였고 로이드는 못 볼 것을 본 표정으로 질색했다. 세르반은 로이드에게 그만 나가 보라며 눈짓했다.
“그래, 알았어. 지금 나간다고. 르네, 준비가 되면 알려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세르반은 로브 앞섶을 단정히 묶고, 르네의 시선을 따라 치맛자락을 보며 머뭇거렸다. 르네는 있지도 않는 치마 주름을 펴고 있었다.
“르네, 가방 안의 물건만큼은 네가 직접 챙기도록 해.”
“…….”
“내가…… 내가 널 아끼는 방법은 틀릴 때도 있었지만, 마음까지 틀렸다고 생각하진 말아 줘.”
르네는 그의 음성에 물기가 어려 의아했다. 막상 고개를 들었을 때, 세르반의 표정은 별다르지 않아 잠시 착각한 것이라 여겼다.
긴장이 풀렸는지 새삼 그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선이 곱고 상처 하나 없는 하얀 피부는 뒷골목을 다스리는 구역의 로드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흑발과 밝은 금안은 별이 뜬 밤하늘 같았다.
“힘들지? 그만 쉴래?”
여전히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은 다정하고 조심스럽기까지 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로이드에게 이야기해. 난 내일 아침에 돌아올 거야.”
세르반은 귀가 빨개진 르네를 살며시 끌어안고, 동그란 이마 위로 숨결을 더했다.
한참 동안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숨 쉬는 소리와 오르락내리락 작게 들썩이는 가슴만이 느껴졌다.
어색해진 르네가 몸을 움찔하자, 세르반은 마지못해 몸을 떼어 냈다.
“금방 로이드가 올 거야. 잠시 기다려.”
다녀올게. 그는 르네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일어섰다. 곧이어 하녀가 들어와 르네를 방으로 안내했다.
“목욕을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혼자 할 수 있어요.”
귀족의 삶을 살 때는 당연한 대접이었지만 하녀로 살면서 스스로 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시중을 받는 일이 낯설어 거절하니 하녀는 순순히 물러났다.
제법 부른 배를 안고 평소보다 조심스럽게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
“후우…….”
르네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먹을 음식과 머물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르네, 씻고 나니까 이제 사람 같네. 식사를 준비했으니 어서 먹어 둬.”
“고마워요.”
“여기 앉아.”
로이드를 따라 응접실에 들어갔을 때 르네는 준비된 음식을 보고 작게 입을 벌렸다. 정작 로이드는 낯설어하는 르네의 태도에 별 의문을 갖지 않았다.
“뭐 해? 어서 앉아.”
“……네.”
부드러운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자 눈물이 날 뻔했다. 하녀로 살면서 먹던 딱딱한 빵이 아니라, 귀족의 삶을 살며 먹었던 부드럽고 고소한 빵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더운 여름날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베리와, 각종 허브와 채소를 곁들인 오리구이까지 먹음직스럽게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단순히 꿈이라면 이 맛과 향을 기억할 수 없어.’
익숙하게 반응하는 감각들이 지난 삶들은 모두 현실이라고 알렸다. 누가, 왜 자신의 삶을 흔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제발 이번 삶이 마지막이길 바랐다.
오랜만에 풍족한 식사를 마친 르네는 홀로 침대에 누웠다. 팡팡 소리가 나도록 침구를 두드리며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푹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