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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르네가 기억하는 첫 번째 삶은 고아였다.

“야, 너 이름 뭐야?”

“르네.”

“몇 살인데?”

“5살!”

10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르네의 이마를 사정없이 쥐어박았다.

“윽!”

“이 쪼끄만 게. 어디서 반말이야?”

이마를 붙잡은 르네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소년은 무서운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여기서 시끄럽게 울면 오늘 저녁은 없을 줄 알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또 맞는 거야. 알았어?”

울먹이던 르네는 눈물을 닦고 입을 앙다물었다. 소년이 대답 없는 르네를 향해 눈을 부릅뜨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눈물 때문에 꾀죄죄한 르네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 우읍.”

“가만히 있어 봐!”

르네의 얼굴을 붙잡고 더러운 옷소매로 벅벅 문질렀다.

조금 깨끗해진 얼굴을 보니 제법 반반하게 생겼다. 햇빛을 받은 호박색 눈동자가 예쁜 보석처럼 반짝여서, 멍하게 보던 소년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야, 우리는 마차 역 근처에서 구걸하는 거야. 알았지?”

“응, 아니…… 네.”

소년이 인상을 쓰자 르네는 얼른 말을 바꿨다.

평소처럼 구걸하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따라 비가 많이 왔다.

“잠깐 멈춰라.”

“네, 남작님.”

마차 역으로 향하던 테일 남작은 우연히 르네를 발견했다. 소년은 부유해 보이는 귀족을 알아보고 질퍽한 땅 위에 엎드려 구걸을 했다.

“도와주십시오. 동생이 며칠째 먹질 못해 울기만 합니다.”

“으아앙!”

“흠, 울고 있는 것도 예쁘구나.”

“……네?”

소년이 이상한 표정을 짓자 테일 남작은 슬쩍 웃으며 마차 창문을 닫았다. 마부는 금화 한 닢을 소년에게 던져 줬다.

“자, 이제 네 것이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 이게 진짜 금, 금화구나.”

소년은 얼른 르네를 내려놓고 허겁지겁 금화를 움켜쥐었다. 금화에 묻은 진흙을 털어 내다가 마부의 손에 덜렁 들려지는 르네를 빤히 쳐다봤다.

“네 동생을 남작님이 거둬 주시니 감사해라.”

“네? 잠깐!”

마부의 매서운 눈초리에 소년은 주눅이 들어 넙죽 엎드렸다.

멀어지는 마차를 향해 잠시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지만 금세 손에 쥔 금화로 눈을 돌렸다.

테일 남작이 어린 소녀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기는 했지만, 귀족의 저택에서 지내면 이 거지 같은 생활보다 나을 거라고, 차라리 잘된 일이라며 그렇게 쉽게 르네를 잊었다.

“집사님.”

“이 아이입니까?”

“네.”

젊은 집사는 눈앞의 작은 여자아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르네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쳤다.

“네 이름은 뭐지?”

“르네.”

“르네?”

“……입니다.”

물끄러미 내려 보던 집사가 앞장서서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르네는 빗물에 젖은 신발 때문에 발자국 크기대로 젖어 드는 카펫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몇 번이나 뒤돌아보다가 집사가 부르는 소리에 빠르게 달려갔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방이다.”

“제 방이요?”

르네는 깜짝 놀랐다. 문을 열자 향긋한 냄새가 쏟아져 나와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킁킁거리며 숨을 들이쉬다가 분홍빛 침구로 꾸며진 침대를 보고 침을 삼켰다. 테이블 위의 바구니에는 예쁜 색의 쿠키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의자 위의 귀여운 토끼 인형을 보고 금방이라도 뛰어 들어갈 것처럼 굴던 르네가 순간 멈칫했다. 집사는 움찔거리는 작은 머리통을 보다가 슬쩍 등을 밀었다.

“……아, 잠깐만요.”

르네는 문틀을 붙잡고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텼다. 집사가 다시 한 번 등을 밀자 르네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진짜 들어가도 돼요?”

“왜?”

“제가 들어가면 더러워질 것 같아요.”

집사는 고개를 기울이고 꼬질꼬질한 여자아이를 훑어봤다.

“제시.”

“네.”

때마침 지나가던 하녀가 집사의 부름에 얼른 다가왔다.

“이 아이는 네가 돌봐라.”

“알겠습니다. 집사님.”

이 날 세바스찬 집사를 처음 만났다.

시간이 지나 10살이 되자 남작의 방문이 줄어들고, 제시도 새로운 동생을 돌보느라 자주 볼 수 없었다.

르네는 괜찮았다. 젊은 집사는 무뚝뚝했지만 이야기를 잘 들어 줬고 늘 르네 곁에 있었다.

그날은 무척 추운 겨울이었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려서 꼼짝없이 방 안에만 있었다.

“르네.”

“어? 집사님!”

김 서린 유리창을 도화지 삼아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바스찬의 웃는 얼굴을 그리는 중이었다.

“원래 저녁 식사가 끝나면 안 오시잖아요. 무슨 일이세요?”

늦은 시간에 찾아온 세바스찬이 반가워 르네는 활짝 웃었다.

“산책을 갈까?”

“지금요?”

세바스찬이 진한 초록빛 코트를 내밀자 르네는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우와! 이게 겨울에 입는 옷이에요?”

“그래.”

정원으로 나갈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은 평소와 다르게 마차를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

“우리 어디 가요?”

“서둘러라, 네 나이가 되면 모두 남작의 성에서 사라진다. 들키기 전에 먼저 빠져나가야 해.”

르네는 세바스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신났다. 하얀 눈길 위에 흔적을 남기는 마차 바퀴를 보느라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허름한 여관들 사이에 있는 작은 가정집이었다.

“……아침에 올 테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그저 해맑은 르네를 보며 세바스찬은 주머니에서 작은 로켓 목걸이를 꺼냈다.

“이건 뭐예요?”

찰랑. 르네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빤히 쳐다봤다.

양각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목걸이는 어린 르네가 봐도 특별했다. 세바스찬 품에서 데워진 따뜻한 로켓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가져도 돼요?”

“그래, 목에 걸고 있어라. 절대 빼면 안 돼.”

“네! 감사해요!”

처음 받은 선물이었다. 평소처럼 예쁘게 웃으며 인사하자 집사는 어서 자라고 채근했다. 집사가 나가는 것을 보고 르네는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벗었다.

“자다가 줄이 끊어지면 안 되니까, 여기 내려놓자.”

안고 있던 토끼에게 설명하며 금빛의 로켓 목걸이를 협탁 위에 살짝 내려놨다. 몇 번이나 목걸이를 흘깃거리고 손끝으로 만져 보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문득 한밤중에 잠이 깬 르네는 잠결에 당황했다. 제시에게 말도 없이 나와서 맘에 걸렸다. 혹시 남작님이 알게 되면 영영 저택에서 쫓겨날까 봐 두려웠다.

성으로 돌아가기 위해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마차를 타고 금방 도착해서 테일 남작의 저택과 멀지 않은 줄 알았다.

“으, 집사님…… 제시…… 으앙.”

몇 년 만에 나온 영지는 낯설었고, 겨울밤은 무척 추웠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너! 뭐야, 혼자야?”

“꺄아!”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술 냄새를 풍기며 르네를 붙잡았다. 놀란 르네는 꽉 붙잡은 남자의 손에 코트가 벗겨진 줄도 모른 채 무작정 앞으로 뛰어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 건물 구석에 몸을 숨겼다. 뒤따르던 인기척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눈물 젖은 뺨을 닦아 냈다.

“흑, 제시…… 집사님…….”

어느새 푸르스름한 새벽녘이 되고 있었다. 밤새 추위에 떨던 르네는 천천히 의식을 잃었다.

“후우…… 후우.”

한적한 골목길에 빠른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세바스찬은 낯익은 초록빛 코트를 발견하고 급히 주변을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석에 웅크린 아이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헝클어진 아이의 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그는 뻣뻣하게 식은 르네의 몸을 껴안고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



르네는 포근한 온기를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떴다. 화려한 가구와 넓은 방을 보고 테일 남작의 저택이라 생각하며 안심했다.

“집사님! 제시?”

푹신한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르네는 길게 늘어지는 잠옷을 흔들었다.

한눈에 봐도 질 좋은 잠옷은 평소와 차원이 달랐다. 매끄러운 감촉이 신기해서 몇 번이나 손에 쥐고 문질렀다.

“남작님이 더 좋은 방을 주셨나?”

“아가씨! 아가씨!”

벌컥 문이 열리고 푸근한 몸매를 가진 중년의 부인이 들어왔다.

“누구……세요?”

“호호호, 아직도 잠이 덜 깼어요? 백작님과 백작 부인, 도련님까지 전부 기다리는데 아가씨도 서둘러 일어나세요.”

“네?”

르네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부인을 멍하게 쳐다봤다.

“읏차! 오늘의 주인공이 이렇게 늑장을 부려서 어떻게 해요? 이 유모만 믿어요!”

호들갑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막연하게 새로운 하녀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향유로 머리를 감고,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한 옷을 입어도 별생각이 없었다.

‘오늘따라 좋은 대접을 받네.’

유모에게 이끌려 식당에 들어선 르네는 헛숨을 들이켰다. 늘 방 안에서만 식사를 한 탓에 처음 본 식당의 모습은 놀랍기만 했다.

천장에 매달린 보석 같은 불빛, 제시보다 좋은 의복을 입은 하녀와 시종들. 벽을 채우는 화려한 그림과 곳곳에 놓인 장식품들. 처음 보는 풍경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아이고, 우리 아가씨가 놀라서 걷지도 못하시네. 오늘 주방장이 특별히 신경 썼죠. 호호호.”

“르네, 어서 와서 앉거라.”

“아가, 아르윈도 일찍부터 와서 기다렸단다.”

르네는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 중년의 부인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아르윈이라고 불린 소년이 다가왔다.

“르네, 네 생일 아침은 꼭 함께 식사하겠다고 부모님도 기다리셨어. 어서 앉아.”

“부모님이?”

처음 듣는 단어에 기이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아르윈은 르네가 감격했다고 여기고 작게 웃었다.

르네는 고개를 빼고 주변을 살폈다. 부모님이라는 사람들은 흐뭇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르윈이 안내해 준 자리에 앉아 식탁을 홀린 듯이 쳐다봤다. 수십 명이 앉아도 될 것 같은 식탁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음식이 가득했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손이 덜덜 떨렸다.

“마, 맛있겠다.”

“르네,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괜찮아.”

무심코 말했는데 아르윈이 답하자 깜짝 놀랐다. 식탁 위로 뻗던 손을 황급히 내리고 눈치를 살폈다.

아르윈이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르네의 손에 식기를 쥐여 줬다. 르네는 식탐을 참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부터 먹기 시작했다.

“르네, 생일 축하한다. 맛있게 먹으렴.”

“축하한 다. 르네.”

마침 입 안에 고기를 잔뜩 밀어 넣어 답하기가 어려웠다. 다정하게 미소 짓는 중년의 남녀를 보며 르네는 불룩해진 볼로 어색하게 웃었다.

“르네, 천천히 먹어.”

르네는 제 옆에서 웃는 소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윈은 열심히 고기를 씹는 르네에게 물잔을 건넸다.

“르네, 내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위해 올해 생일 선물도 아주 특별한 것을 준비했지.”

“음…… 오라버니?”

“맞아, 내가 네 오라버니지. 넌 셀리움 백작가의 하나뿐인 영애야. 부유한 부모님이 계시니 이럴 때라도 마음껏 누려야지.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