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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물을 마시던 르네는 아르윈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백작 영애? 꿈인가? 이번에 테일 남작님이 새로 만든 연극인가?’
“음식은 입에 맞아?”
“……네.”
“목걸이 잘 어울리네.”
“어! 이거!”
순간 놀란 르네는 턱을 바짝 숙였다. 낯익은 타원형의 로켓 목걸이를 빤히 쳐다봤다.
세바스찬 집사가 준 목걸이와 비슷했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자잘한 다이아몬드가 잔뜩 붙어 있었다.
‘집사님이 주신 목걸이를 보석으로 장식했나?’
아르윈은 르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웃기만 했다.
르네는 천천히 주어진 환경에 적응했고 그렇게 두 번째 삶을 살아갔다. 가족이 주는 애정은 훨씬 따스하고 마음을 몽실몽실하게 했다.
아르윈의 여동생 사랑은 사교계에서도 유명했다.
언제나 르네에게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선물했다. 그리고 자신의 특별한 친구까지 소개해 주었다. 르네는 그 후작 영식과 혼인했다.
“존경받을 수 있는 남편이 되겠소.”
“지혜로운 아내가 될게요.”
모두의 부러움 속에서 혼인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후계 소식이 없었다. 가신들의 압박과 비난은 거세졌고, 어린 르네가 감당하기에는 힘들었다.
가신을 대표해 남편의 사촌 누이가 별채에 머물며 르네를 압박했다.
“후작 부인, 며칠 전 남부의 귀부인들과 티타임을 가졌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르네는 그녀가 할 이야기를 짐작했다. 매번 초대를 거절할 수 없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는데 역시나 똑같은 주제였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저 재물만 축내는 부인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예쁜 장식장이라고 하더군요. 딱히 쓸모는 없으나 보기에는 참 예쁜 장식장이요.”
찻잔을 들어 표정을 가린 르네는 초연했다. 그 모습이 더 불쾌했는지 사촌 누이는 입을 삐죽거렸다.
“흐음, 사실 오늘은 기쁜 소식이 있어서 초대했어요.”
“네. 무척 궁금하네요.”
르네는 무례한 사촌 누이가 괘씸했지만 남편을 생각해서 참았다. 사촌 누이는 말과 다르게 일말의 흥미도 없어 보이는 르네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어제 진료를 봤는데 글쎄…… 여기 귀한 생명이 있다고 하더군요.”
순간 르네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걸 본 사촌 누이는 아랫배에 손을 올리고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들이 틀림없어요.”
르네는 수줍게 웃으며 말하는 사촌 누이가 의아했다. 그녀는 미혼이었다.
“아이 아버지는 알고 있나요?”
“부인, 일단 차부터 드세요. 오늘은 특별한 찻잎을 사용했거든요.”
싱긋 웃는 사촌 누이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르네는 아이를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의원도 찾아가고, 고서에 나오는 민간요법까지 동원했지만 쉽지 않았다. 부러움 반, 염려 반으로 말을 건넸다.
“산모에게 좋은 음식들을 준비할게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걱정 마세요. 아이 아버지가 책임지고 돌봐 주니까요.”
르네는 애써 미소 지으며 찻잔을 비웠다. 늘 사촌 누이가 선물하던 레몬 가향차였다.
그날따라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단맛이 도는 차는 씁쓸한 끝맛으로 입 안을 맴돌았다.
‘흠인 줄도 모르고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때,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과 함께 발작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황급히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쿨럭, 쿨럭, 미안해요. 기침이…… 쿨럭, 컥.”
손을 내린 순간 테이블보를 붉게 적시는 피를 보며 커다랗게 눈을 떴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도움을 청하려고 사촌 누이를 바라보자, 그녀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이 아버지가 알고 있냐고 물었죠? 당신도 아는 사람이에요.”
“쿨럭, 쿨럭…… 의원을, 불러…… 불러 주세요.”
“바로 제 사촌이에요. 아, 부인 생각이 맞아요. 당신 남편, 그 사람이 아이 아빠거든요.”
“쿨럭, 컥, 커헉.”
타는 듯한 가슴을 붙잡은 르네는 왈칵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기울어진 시선 너머 붉게 물드는 드레스와 웃고 있는 남편의 사촌 누이가 보였다. 20살의 르네는 그렇게 치정 살해를 당했다.
***
“헉! 안 돼!”
벌떡 일어난 르네는 가슴을 붙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피! 분명 방금 전까지 피를 토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살피자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푹 꺼진 침대와 낡은 가구,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허름한 작은 방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천장 가까이 있는 작은 창문들을 보고서야 하녀들이나 머무는 반지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거친 옷감의 하녀복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팍을 쥐던 손을 풀어내고 뻣뻣한 치마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밖에 아무도 없나.’
“르네! 빨리 일어나!”
“으, 응?”
벌컥 문이 열리고 또래로 보이는 어린 하녀가 씩씩거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매몰차게 말하는 어린 하녀를 보며 르네는 어안이 벙벙했다.
“오늘 별채 대청소하느라 다들 바쁜데 아직까지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해?”
“……나 말이니?”
르네는 감히 후작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하녀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린 하녀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야! 대답 안 해?”
“아…… 그래. 내가…… 내가 지금은, 몸이 조금 안 좋아서.”
“뭐? 며칠 전에 들어와서 벌써 꾀병 부리는 거야? 난 몰라. 분명히 깨웠으니까 알아서 해!”
어린 하녀는 제 할 말만 마치고 휙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거칠게 문 닫는 소리가 들리고 혼자 남은 르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거리낌 없이 귀족의 이름을 부르는 하녀, 열악한 방, 질 낮은 드레스. 자신이 누운 침대는 테일 남작의 저택에서 쓰던 것보다 질이 나빴다.
‘어린 소녀를 좋아하던 테일 남작과 세바스찬 집사.’
생각에 잠긴 르네는 테일 남작과 세바스찬이 생각나자 갑자기 두려웠다.
“아무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현실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습한 반지하에 누워 있는 자신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테일 남작의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한밤중에 나왔다가 길을 잃고 쓰러졌지…… 그리고.’
손끝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잡혔다. 하녀라면 이렇게 잘 손질된 머리카락과 매끈한 피부를 갖기 힘들다.
‘셀리움 백작 영애가 되었지. 그리고 후작 부인이 되어서……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쓰러졌는데.’
“아직 꿈속인가…….”
혼잣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꿈속이라고 하기에 이곳은 너무 현실적이었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 희미하게 스며드는 햇빛과 먼지, 퀴퀴한 냄새, 자신에게 윽박지르던 어린 하녀까지 너무 생생했다.
피를 토하고 죽은 줄 알았는데 지금도 이렇게 살아 있다.
‘말도 안 돼, 죽고 되살아나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어. 그것도 똑같은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문득 남편이 떠올랐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남편은 왜 나를 배신했을까…….’
르네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당장 처한 상황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흘 동안 드러누워 울기만 하자 아픈 하녀는 필요 없다며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어쩔 수 없이 일을 시작했지만 귀족 생활을 버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일의 고됨을 떠나, 마음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놨다. 현실을 인정한 르네는 성실한 하녀가 되었다.
“저 계집이야?”
“어때? 최근 들어온 하녀들 중에 제일 곱상해. 그전에 어디서 일했는지 모르겠는데 험한 일은 하지 않았나 봐. 꼭 귀족처럼 생겼어.”
“귀족 나리의 밤 상대였나? 꽤 대접받고 지낸 것 같은데.”
“그렇지? 손에 작은 상처도 하나 없고, 저 머리카락 좀 봐. 비싼 향유를 들이부어야 저렇게 될걸?”
“내가 쟤 목에 걸린 목걸이를 봤는데 꽤 값비싸 보였어.”
“쳇, 그렇게 귀한 걸 받아도 결국 쫓겨나서 여기 있잖아? 우리와 다를 것도 없네.”
하녀들과 시종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르네 귀까지 들렸다. 애써 모르는 척을 해 봐도 피할 수 없었다.
“지금 뭣들 하느냐.”
“헉, 시녀장님!”
모여 있던 무리가 흩어지고 빨랫감을 들고 가던 르네에게 시녀장이 다가섰다.
“후작 영애께서 부르시니 옷을 단정히 하고 따라와라.”
“이건 어떻게 할까요?”
“거기 내려놓아라. 다른 아이에게 시킬 테니.”
“알겠습니다.”
르네는 앞치마의 먼지를 털고 허리끈을 다시 묶으며 시녀장을 쫓았다.
“아가씨, 말씀하신 하녀를 데려왔습니다.”
“그래, 네가 르네니?”
“네, 아가씨.”
르네를 훑어보는 영애의 눈초리가 반짝거렸다. 옷만 제대로 입으면 귀족이라고 착각할 만큼 어여쁜 르네가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내가 가는 티타임에 너도 함께 갈 거야. 얼마 전에 공작 영애가 꽤 그럴싸한 시녀를 들였던데 너를 데려가면 내 얼굴이 부끄럽진 않겠구나.”
“아가씨를 모시기에 부족함이 많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됐어, 나가 봐.”
이후부터 고된 날이 더 많았다.
성숙해진 몸과 두드러지는 외모 때문에 늘 조심스러웠다. 틈만 나면 희롱하는 시종들과 순찰을 핑계로 숙소에 들이닥치는 기사들을 피해야 했다. 밤마다 의자를 받쳐 놓고 문고리를 잡은 채 잠들기 일쑤였다.
후작 영애는 ‘하녀까지 예쁜 아름다운 후작 영애’ 라는 명칭이 좋아서 언제나 르네를 동반했다.
하녀 주제에 영애의 시중을 들자 시기하는 하녀들과 시녀장으로 인해 궂은일도 많았다. 무엇보다 먹을 것을 빼돌려 잘 먹지 못하는 날이 흔했다.
게다가 후작 영애는 아름다웠지만 섬세한 만큼 예민했다.
“채찍을 가져와!”
“아, 아가씨.”
“입 다물어, 한 마디만 더하면 그 곱상한 얼굴을 다 갈아엎어 버릴 테니까.”
연회에서 르네를 향한 관심이 길어지면, 그날은 영애의 분이 풀릴 때까지 맞아야 했다. 겉으로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영애의 폭력성은 시녀장과 시종장만 알고 있었다.
그날도 한차례 소동이 끝나고 시종장의 도움을 받아 숙소로 가는 중이었다.
시종장 도노반은 르네에게 친절했다. 어린 주인의 눈치를 보며 몰래 약과 음식을 챙겨 줬는데, 의지할 곳 없이 외롭던 르네는 그 작은 호의가 무척 소중했다.
“도노반, 어제는 고마웠어요.”
“네가 고생이 많구나.”
“전 괜찮아요. 여기, 손수건에 도노반 이름과 수를 놓아 봤어요.”
“내게 주는 거야?”
소중하게 받아 드는 그를 보며 르네는 씁쓸히 웃었다.
며칠 전, 부모님을 찾기 위해 셀리움 백작가를 찾아갔었다.
물을 마시던 르네는 아르윈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백작 영애? 꿈인가? 이번에 테일 남작님이 새로 만든 연극인가?’
“음식은 입에 맞아?”
“……네.”
“목걸이 잘 어울리네.”
“어! 이거!”
순간 놀란 르네는 턱을 바짝 숙였다. 낯익은 타원형의 로켓 목걸이를 빤히 쳐다봤다.
세바스찬 집사가 준 목걸이와 비슷했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자잘한 다이아몬드가 잔뜩 붙어 있었다.
‘집사님이 주신 목걸이를 보석으로 장식했나?’
아르윈은 르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웃기만 했다.
르네는 천천히 주어진 환경에 적응했고 그렇게 두 번째 삶을 살아갔다. 가족이 주는 애정은 훨씬 따스하고 마음을 몽실몽실하게 했다.
아르윈의 여동생 사랑은 사교계에서도 유명했다.
언제나 르네에게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선물했다. 그리고 자신의 특별한 친구까지 소개해 주었다. 르네는 그 후작 영식과 혼인했다.
“존경받을 수 있는 남편이 되겠소.”
“지혜로운 아내가 될게요.”
모두의 부러움 속에서 혼인했지만 3년이 지나도록 후계 소식이 없었다. 가신들의 압박과 비난은 거세졌고, 어린 르네가 감당하기에는 힘들었다.
가신을 대표해 남편의 사촌 누이가 별채에 머물며 르네를 압박했다.
“후작 부인, 며칠 전 남부의 귀부인들과 티타임을 가졌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르네는 그녀가 할 이야기를 짐작했다. 매번 초대를 거절할 수 없어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는데 역시나 똑같은 주제였다.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저 재물만 축내는 부인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예쁜 장식장이라고 하더군요. 딱히 쓸모는 없으나 보기에는 참 예쁜 장식장이요.”
찻잔을 들어 표정을 가린 르네는 초연했다. 그 모습이 더 불쾌했는지 사촌 누이는 입을 삐죽거렸다.
“흐음, 사실 오늘은 기쁜 소식이 있어서 초대했어요.”
“네. 무척 궁금하네요.”
르네는 무례한 사촌 누이가 괘씸했지만 남편을 생각해서 참았다. 사촌 누이는 말과 다르게 일말의 흥미도 없어 보이는 르네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어제 진료를 봤는데 글쎄…… 여기 귀한 생명이 있다고 하더군요.”
순간 르네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걸 본 사촌 누이는 아랫배에 손을 올리고 거들먹거리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들이 틀림없어요.”
르네는 수줍게 웃으며 말하는 사촌 누이가 의아했다. 그녀는 미혼이었다.
“아이 아버지는 알고 있나요?”
“부인, 일단 차부터 드세요. 오늘은 특별한 찻잎을 사용했거든요.”
싱긋 웃는 사촌 누이를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르네는 아이를 갖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의원도 찾아가고, 고서에 나오는 민간요법까지 동원했지만 쉽지 않았다. 부러움 반, 염려 반으로 말을 건넸다.
“산모에게 좋은 음식들을 준비할게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걱정 마세요. 아이 아버지가 책임지고 돌봐 주니까요.”
르네는 애써 미소 지으며 찻잔을 비웠다. 늘 사촌 누이가 선물하던 레몬 가향차였다.
그날따라 혀끝이 아릴 정도로 단맛이 도는 차는 씁쓸한 끝맛으로 입 안을 맴돌았다.
‘흠인 줄도 모르고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인가.’
그때,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과 함께 발작적으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황급히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쿨럭, 쿨럭, 미안해요. 기침이…… 쿨럭, 컥.”
손을 내린 순간 테이블보를 붉게 적시는 피를 보며 커다랗게 눈을 떴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도움을 청하려고 사촌 누이를 바라보자, 그녀는 사랑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이 아버지가 알고 있냐고 물었죠? 당신도 아는 사람이에요.”
“쿨럭, 쿨럭…… 의원을, 불러…… 불러 주세요.”
“바로 제 사촌이에요. 아, 부인 생각이 맞아요. 당신 남편, 그 사람이 아이 아빠거든요.”
“쿨럭, 컥, 커헉.”
타는 듯한 가슴을 붙잡은 르네는 왈칵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기울어진 시선 너머 붉게 물드는 드레스와 웃고 있는 남편의 사촌 누이가 보였다. 20살의 르네는 그렇게 치정 살해를 당했다.
***
“헉! 안 돼!”
벌떡 일어난 르네는 가슴을 붙잡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피! 분명 방금 전까지 피를 토하고 있었는데!”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살피자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푹 꺼진 침대와 낡은 가구, 퀴퀴한 곰팡내가 나는 허름한 작은 방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천장 가까이 있는 작은 창문들을 보고서야 하녀들이나 머무는 반지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거친 옷감의 하녀복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팍을 쥐던 손을 풀어내고 뻣뻣한 치마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내가 왜 여기 있지? 밖에 아무도 없나.’
“르네! 빨리 일어나!”
“으, 응?”
벌컥 문이 열리고 또래로 보이는 어린 하녀가 씩씩거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매몰차게 말하는 어린 하녀를 보며 르네는 어안이 벙벙했다.
“오늘 별채 대청소하느라 다들 바쁜데 아직까지 누워 있으면 어떻게 해?”
“……나 말이니?”
르네는 감히 후작 부인의 이름을 부르는 하녀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린 하녀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야! 대답 안 해?”
“아…… 그래. 내가…… 내가 지금은, 몸이 조금 안 좋아서.”
“뭐? 며칠 전에 들어와서 벌써 꾀병 부리는 거야? 난 몰라. 분명히 깨웠으니까 알아서 해!”
어린 하녀는 제 할 말만 마치고 휙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거칠게 문 닫는 소리가 들리고 혼자 남은 르네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거리낌 없이 귀족의 이름을 부르는 하녀, 열악한 방, 질 낮은 드레스. 자신이 누운 침대는 테일 남작의 저택에서 쓰던 것보다 질이 나빴다.
‘어린 소녀를 좋아하던 테일 남작과 세바스찬 집사.’
생각에 잠긴 르네는 테일 남작과 세바스찬이 생각나자 갑자기 두려웠다.
“아무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현실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습한 반지하에 누워 있는 자신을 생각하니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테일 남작의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한밤중에 나왔다가 길을 잃고 쓰러졌지…… 그리고.’
손끝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잡혔다. 하녀라면 이렇게 잘 손질된 머리카락과 매끈한 피부를 갖기 힘들다.
‘셀리움 백작 영애가 되었지. 그리고 후작 부인이 되어서……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쓰러졌는데.’
“아직 꿈속인가…….”
혼잣말을 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꿈속이라고 하기에 이곳은 너무 현실적이었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 희미하게 스며드는 햇빛과 먼지, 퀴퀴한 냄새, 자신에게 윽박지르던 어린 하녀까지 너무 생생했다.
피를 토하고 죽은 줄 알았는데 지금도 이렇게 살아 있다.
‘말도 안 돼, 죽고 되살아나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어. 그것도 똑같은 이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문득 남편이 떠올랐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남편은 왜 나를 배신했을까…….’
르네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당장 처한 상황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흘 동안 드러누워 울기만 하자 아픈 하녀는 필요 없다며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어쩔 수 없이 일을 시작했지만 귀족 생활을 버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일의 고됨을 떠나, 마음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놨다. 현실을 인정한 르네는 성실한 하녀가 되었다.
“저 계집이야?”
“어때? 최근 들어온 하녀들 중에 제일 곱상해. 그전에 어디서 일했는지 모르겠는데 험한 일은 하지 않았나 봐. 꼭 귀족처럼 생겼어.”
“귀족 나리의 밤 상대였나? 꽤 대접받고 지낸 것 같은데.”
“그렇지? 손에 작은 상처도 하나 없고, 저 머리카락 좀 봐. 비싼 향유를 들이부어야 저렇게 될걸?”
“내가 쟤 목에 걸린 목걸이를 봤는데 꽤 값비싸 보였어.”
“쳇, 그렇게 귀한 걸 받아도 결국 쫓겨나서 여기 있잖아? 우리와 다를 것도 없네.”
하녀들과 시종들이 모여 수군거리는 소리가 르네 귀까지 들렸다. 애써 모르는 척을 해 봐도 피할 수 없었다.
“지금 뭣들 하느냐.”
“헉, 시녀장님!”
모여 있던 무리가 흩어지고 빨랫감을 들고 가던 르네에게 시녀장이 다가섰다.
“후작 영애께서 부르시니 옷을 단정히 하고 따라와라.”
“이건 어떻게 할까요?”
“거기 내려놓아라. 다른 아이에게 시킬 테니.”
“알겠습니다.”
르네는 앞치마의 먼지를 털고 허리끈을 다시 묶으며 시녀장을 쫓았다.
“아가씨, 말씀하신 하녀를 데려왔습니다.”
“그래, 네가 르네니?”
“네, 아가씨.”
르네를 훑어보는 영애의 눈초리가 반짝거렸다. 옷만 제대로 입으면 귀족이라고 착각할 만큼 어여쁜 르네가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내가 가는 티타임에 너도 함께 갈 거야. 얼마 전에 공작 영애가 꽤 그럴싸한 시녀를 들였던데 너를 데려가면 내 얼굴이 부끄럽진 않겠구나.”
“아가씨를 모시기에 부족함이 많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됐어, 나가 봐.”
이후부터 고된 날이 더 많았다.
성숙해진 몸과 두드러지는 외모 때문에 늘 조심스러웠다. 틈만 나면 희롱하는 시종들과 순찰을 핑계로 숙소에 들이닥치는 기사들을 피해야 했다. 밤마다 의자를 받쳐 놓고 문고리를 잡은 채 잠들기 일쑤였다.
후작 영애는 ‘하녀까지 예쁜 아름다운 후작 영애’ 라는 명칭이 좋아서 언제나 르네를 동반했다.
하녀 주제에 영애의 시중을 들자 시기하는 하녀들과 시녀장으로 인해 궂은일도 많았다. 무엇보다 먹을 것을 빼돌려 잘 먹지 못하는 날이 흔했다.
게다가 후작 영애는 아름다웠지만 섬세한 만큼 예민했다.
“채찍을 가져와!”
“아, 아가씨.”
“입 다물어, 한 마디만 더하면 그 곱상한 얼굴을 다 갈아엎어 버릴 테니까.”
연회에서 르네를 향한 관심이 길어지면, 그날은 영애의 분이 풀릴 때까지 맞아야 했다. 겉으로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기에 영애의 폭력성은 시녀장과 시종장만 알고 있었다.
그날도 한차례 소동이 끝나고 시종장의 도움을 받아 숙소로 가는 중이었다.
시종장 도노반은 르네에게 친절했다. 어린 주인의 눈치를 보며 몰래 약과 음식을 챙겨 줬는데, 의지할 곳 없이 외롭던 르네는 그 작은 호의가 무척 소중했다.
“도노반, 어제는 고마웠어요.”
“네가 고생이 많구나.”
“전 괜찮아요. 여기, 손수건에 도노반 이름과 수를 놓아 봤어요.”
“내게 주는 거야?”
소중하게 받아 드는 그를 보며 르네는 씁쓸히 웃었다.
며칠 전, 부모님을 찾기 위해 셀리움 백작가를 찾아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