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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마리, 먼저 들어가 낮잠 잘 준비를 해 주렴. 따뜻한 물수건도 함께.”
“부인, 제가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마리, 지금 내가 지시한 일을 하는 게 먼저란다.”
“아하, 네! 부인.”
르네는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마리를 살폈다. 트레이에 짐을 싣고서 길을 헤매느라 두리번거리는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헤헤.”
또 저렇게 배시시 웃는다. 나름의 처세술인 것을 알기에 귀여운 생각이 들어 픽 웃고 말았다. 르네는 부채 끝으로 길을 알려 주고 어서 들어가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소. 부인에게 좀 더 능숙한 시녀를 붙였어야 하는데.”
“공작님. 지금도 충분해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해요.”
가까이 서 있으니 클레르건 공작의 푸른 눈동자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마치 머리 위의 하늘색처럼 밝았다.
예쁘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별관에 오신다고 들었어요. 오전, 오후 정도만 알려 주시면 저도 준비하기 편할 것 같아요.”
“밤잠을 설쳐서 늦게 일어나는 것 같던데, 오후가 더 편하겠소?”
사실 아이가 자라고 배가 부를수록 편하게 눕기 힘들었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도 불편하기만 했고, 자연스럽게 쉽게 잠들지 못했다. 부족한 잠은 틈틈이 낮에 잘 수 있었지만 수면 질이 낮아서 늘 피로했다.
그런 르네의 수면 습관을 알아채고 시간을 조정하겠다는 말이 퍽 다정하게 들렸다. 계약 때문인 줄은 알지만 관심을 갖고 돌봐 주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절로 생겼다.
르네는 큰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작은 보폭으로 움직이는 클레르건 공작의 구두코를 내려다봤다. 붙들고 있는 팔도 새삼 단단하고 듬직했다.
“공작님은…… 참 다정하시네요.”
낯선 말을 들었는지 클레르건 공작의 귀 끝이 붉어졌다.
“하마터면 저에게 다정하신 분이라고 오해할 뻔했어요. 계약 때문인데.”
순간 표정 변화 없이 걷던 클레르건 공작의 호흡이 달라졌다.
르네는 자신을 진짜 귀부인처럼 대하는 태도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관계를 명확히 하는 말을 꺼냈다. 물론 서로 예의를 차릴수록 편했고 고마웠지만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도 매력을 뿜어 대는 이 남자를 정말 오해할 것 같았다.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남자에게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매순간 진짜 신분을 의식하는 일은 꽤 정신 소모가 컸다.
“계약에 관한 내용은 아무도 모르나요?”
“기사단장인 알버트 경만 알고 있소.”
“아, 백작가 차남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클레르건 공작은 평소처럼 덤덤한 표정이었다.
“사실 프레오 집사가 괜한 오해를 하는 것 같아요.”
“그렇소?”
“그래도 괜찮아요?”
“…….”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르네는 친근하게 공작의 팔에 매달려 몸을 기울이며 웃었다.
“저는 매일 잘생긴 공작님을 뵐 수 있으니 상관없어요. 태교에 좋을 거 같거든요.”
클레르건 공작은 대답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예전이라면 인상을 찌푸리며 약을 먹었냐고 질책했을 텐데 얼굴만 붉힌 채 말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응에 당황한 사람은 르네였다. 순식간에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벌어지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클레르건 공작은 팔 위로 느껴지는 손의 무게감이 새삼스러웠다.
‘이렇게 작고 여린 사람이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계약 조건을 이행하는 의무감이 컸다.
갑자기 찾아가도 르네는 늘 예의를 갖췄고, 의식하지 않으면 신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가볍지만 지루하지 않은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능력도 탁월했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즐겁다라…… 내가 이 사람과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고 있었나.’
클레르건 공작은 곁에 선 르네를 슬쩍 내려다봤다.
숨 가쁘게 일만 하던 일상에도 르네와 한 공간에 있으면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특유의 여유로움이 그에게는 조금씩 특별해졌다.
“태교……도 하시오?”
“공작님, 책을 더 구할 수 있을까요?”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태교로 책을 읽죠.”
“프레오가 별관 서재를 채웠는데 벌써 다 읽었소?”
“음, 아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유아를 위한 교양 입문서>, <로이센 예법>, <역사 길잡이> 같은 책밖에 없었어요.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공주님과 왕자님이 나오고, 드래곤을 무찌르는 용사가 나오는 그런 동화책을 읽어 주고 싶어요.”
“프레오에게 말해 놓겠소.”
“감사해요. 그리고 자수 원단을 부티크에 판매하고 싶은데 프레오를 통해서 해도 될까요?”
귀를 기울이는 클레르건 공작의 시선이 르네의 작은 손으로 향했다. 가끔 닿는 손은 늘 서늘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시오. 세르반도 경제적 지원을 하고, 공작저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돌보기로 약속했으니.”
“원래 하던 일이니 괘념치 마세요. 공작저에 있으니 나가기 쉽지 않고, 혹 괜한 소문이 돌지 몰라서 프레오를 통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르네는 예법 수업을 완벽히 끝낸 영애처럼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부채를 턱 끝에 대고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 문제는…….”
“클레르건 공작님. 어머, 손님과 함께 계셨군요.”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르네는 정원 입구 쪽에 선 사람을 발견하고 작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구불거리는 금발 위로 푸른빛 공단 리본 장식을 한 영애는 한눈에 봐도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와 연한 하늘빛 눈동자 덕분에 더 여리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공작님, 트린 백작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프레오가 잠시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능숙하게 감췄다.
르네는 트린 영애를 보고 반사적으로 하녀처럼 무릎을 구부렸다. 인사를 하려던 순간 뒤늦게 자신이 하녀가 아니라 자작 부인임을 깨달았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어색하게 움찔거리자, 어떻게 해석했는지 클레르건 공작이 자연스럽게 몸으로 르네를 가렸다.
“트린 영애.”
“공작님, 영식께 약속했던 책을 가져왔답니다.”
“에드워드는 지금 본관에 있소.”
“아…… 알고 있어요. 먼저 공작님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트린 영애의 매끈한 뺨 위로 붉은 꽃물이 들었다.
르네는 곤란한 표정의 두 사람을 보면서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갑자기 배를 붙잡고 고개를 떨군 채 신음을 흘렸다.
모여 있던 모두가 놀랐으나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인 것은 클레르건 공작이었다. 기울어지는 몸을 붙들고 인상을 찌푸린 르네의 표정을 살폈다.
“아일레스 부인, 괜찮소?”
“아무래도 산책 시간이 길었던 것 같네요. 후우…… 그만 돌아가 쉬고 싶어요.”
“그러면 내가 도와…….”
말을 잇던 공작은 신음 섞인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세요.”
“방금 뭐라고…….”
고개 숙인 르네를 향해 얼굴을 기울이자 작은 속삭임이 빠르게 쏟아졌다.
“공작님, 프레오를 불러 주세요. 저기 트린 영애의 표정 좀 보세요, 저렇게 수줍어하면서 용기를 낸 영애를 모르는 척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그리고 배가 나오니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것도 힘들어요.”
걱정하던 클레르건 공작은 눈까지 찡긋거리는 르네를 보는 순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프레오. 부인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게.”
“알겠습니다. 아일레스 부인, 이쪽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르네는 프레오에게 기댄 채 힘겨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트린 영애, 먼저 자리를 떠나서 죄송해요.”
“염려 마세요, 부인. 많이 힘드신 것 같은데 인사는 다음 기회에 하면 되지요.”
르네는 트린 영애의 다정한 말에 무척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재차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떠나는 동안 클레르건 공작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클레르건 공작님, 이번에 들어온 에드워드 영식의 예법 선생님인가요?”
“……맞소.”
“부인은 괜찮으시겠죠? 산모의 안정에 좋은 차가 있는데 제가 선물로 드려도 될까요?”
그제야 클레르건 공작은 트린 영애에게 몸을 돌렸다.
“영애의 친절에 부인도 감사할 것이오.”
“혹시 공작님만 괜찮으시면 저도 차 한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수줍은 미소를 짓는 트린 영애는 무척 사랑스러웠지만, 정작 클레르건 공작은 르네를 생각했다.
‘그런 속임수를…….’
잠시나마 진심으로 걱정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가녀린 체구에 부푼 배는 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이성은 그녀가 슬럼가 여인이라고 알리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면 그 사실을 잊기 일쑤였다.
“공작님?”
“아, 에드워드를 불러서 함께 차를 마시면 될 것 같소.”
“네, 감사합니다.”
클레르건 공작은 밝게 웃는 트린 영애와 함께 본관으로 향했다.
르네는 별관이 가까워지자 슬쩍 뒤를 돌아봤다.
“프레오.”
“부인, 괜찮으십니까?”
“공작님과 영애가 자리를 옮겼는가?”
“네. 지금 본관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그럼 됐네. 이제 힘들지 않으니 자네도 그만 물러가 보게.”
허리를 꼿꼿이 세운 르네는 싱긋 웃으며 마리를 찾았다.
“부인?”
“신경 써 줘 고맙네. 그늘에 들어오니 한결 몸이 좋아졌다네.”
“하지만 부인, 혹시 모르니 공작저에 거하는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괜찮네. 필요하면 마리를 통해서 의원을 부를 테니 그만 가 보게.”
르네가 걱정 말라며 자꾸 밀어 내자, 프레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리를 불러왔다. 그는 마리에게 언제든지 의원을 부르라는 당부를 남기고 마지못해 본관으로 돌아갔다.
“부인, 따뜻한 수건을 챙겨 왔는데 발에 올려 드릴까요?”
“마리, 현숙한 부인이라면 응접실에서 발을 내놓고 있지 않는단다.”
“앗, 죄송해요! 제가…… 제가 아직 잘 모르는 게 많아서, 헤헤.”
“하지만 나는 해도 된단다. 여기 올려 주겠니.”
“네……? 네! 여기 수건을 올려 드릴게요!”
어느새 신발을 벗은 르네는 응접실 소파에 누워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을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피로했다.
‘이제 겨우 데뷔탕트를 치렀을까?’
르네는 조금 전에 만난 트린 영애를 떠올렸다.
자신과 다른 진짜 귀족 영애,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 클레르건 공작을 보며 감추지 못하는 풋풋한 감정들. 괜히 입맛이 썼다.
마리에게 듣기로 공작 부인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공자가 올해 4살이었다.
‘아직 젊은 공작은 여전히 인기가 있겠지.’
사실 클레르건 공작이 미혼의 영애들에게 여전히 호감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자신과 상관없었다.
이곳에서 대접받으며 지내니까 정말 귀족이 된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았다. 더구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필요를 채워 주고, 임신한 자신을 배려하는 모습을 볼 때면, 다정한 부부처럼 느껴져서 혼자 얼굴 붉힌 적도 있었다.
“공작님 외모가 문제네. 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한눈에 봐도 사랑스러운 트린 영애는 클레르건 공작이 마음에 들어서 온 게 분명했다.
공자를 위한 선물을 가져왔다면서 공작부터 찾아오는 걸 보면 뻔했다. 수줍게 얼굴에 홍조를 띠며, 책을 껴안은 팔을 꼭 쥔 모습이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였다.
문득 서재에 비슷한 가죽 염색과, 같은 바느질법으로 제본된 책들이 떠올랐다.
‘4살짜리 아이한테 역사, 예법 책을 사다 준 게 누군가 했는데 트린 영애의 선물이었구나.’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었지만,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지낼 마음도 없었다. 어쨌든 위조한 신분이었고 나중에 자수 원단을 판매하다가 마주치면 설명하기 난처했다.
성실하지만 눈치는 조금 없어 보이는 공작님이 트린 영애의 기분을 잘 살폈으면 했다. 괜한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지 않도록.
“마리, 먼저 들어가 낮잠 잘 준비를 해 주렴. 따뜻한 물수건도 함께.”
“부인, 제가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마리, 지금 내가 지시한 일을 하는 게 먼저란다.”
“아하, 네! 부인.”
르네는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마리를 살폈다. 트레이에 짐을 싣고서 길을 헤매느라 두리번거리는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헤헤.”
또 저렇게 배시시 웃는다. 나름의 처세술인 것을 알기에 귀여운 생각이 들어 픽 웃고 말았다. 르네는 부채 끝으로 길을 알려 주고 어서 들어가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소. 부인에게 좀 더 능숙한 시녀를 붙였어야 하는데.”
“공작님. 지금도 충분해요.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해요.”
가까이 서 있으니 클레르건 공작의 푸른 눈동자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마치 머리 위의 하늘색처럼 밝았다.
예쁘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별관에 오신다고 들었어요. 오전, 오후 정도만 알려 주시면 저도 준비하기 편할 것 같아요.”
“밤잠을 설쳐서 늦게 일어나는 것 같던데, 오후가 더 편하겠소?”
사실 아이가 자라고 배가 부를수록 편하게 눕기 힘들었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도 불편하기만 했고, 자연스럽게 쉽게 잠들지 못했다. 부족한 잠은 틈틈이 낮에 잘 수 있었지만 수면 질이 낮아서 늘 피로했다.
그런 르네의 수면 습관을 알아채고 시간을 조정하겠다는 말이 퍽 다정하게 들렸다. 계약 때문인 줄은 알지만 관심을 갖고 돌봐 주는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절로 생겼다.
르네는 큰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작은 보폭으로 움직이는 클레르건 공작의 구두코를 내려다봤다. 붙들고 있는 팔도 새삼 단단하고 듬직했다.
“공작님은…… 참 다정하시네요.”
낯선 말을 들었는지 클레르건 공작의 귀 끝이 붉어졌다.
“하마터면 저에게 다정하신 분이라고 오해할 뻔했어요. 계약 때문인데.”
순간 표정 변화 없이 걷던 클레르건 공작의 호흡이 달라졌다.
르네는 자신을 진짜 귀부인처럼 대하는 태도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관계를 명확히 하는 말을 꺼냈다. 물론 서로 예의를 차릴수록 편했고 고마웠지만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도 매력을 뿜어 대는 이 남자를 정말 오해할 것 같았다.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남자에게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매순간 진짜 신분을 의식하는 일은 꽤 정신 소모가 컸다.
“계약에 관한 내용은 아무도 모르나요?”
“기사단장인 알버트 경만 알고 있소.”
“아, 백작가 차남이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클레르건 공작은 평소처럼 덤덤한 표정이었다.
“사실 프레오 집사가 괜한 오해를 하는 것 같아요.”
“그렇소?”
“그래도 괜찮아요?”
“…….”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르네는 친근하게 공작의 팔에 매달려 몸을 기울이며 웃었다.
“저는 매일 잘생긴 공작님을 뵐 수 있으니 상관없어요. 태교에 좋을 거 같거든요.”
클레르건 공작은 대답 없이 앞만 보고 걸었다. 예전이라면 인상을 찌푸리며 약을 먹었냐고 질책했을 텐데 얼굴만 붉힌 채 말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응에 당황한 사람은 르네였다. 순식간에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벌어지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클레르건 공작은 팔 위로 느껴지는 손의 무게감이 새삼스러웠다.
‘이렇게 작고 여린 사람이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을까.’
처음에는 계약 조건을 이행하는 의무감이 컸다.
갑자기 찾아가도 르네는 늘 예의를 갖췄고, 의식하지 않으면 신분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가볍지만 지루하지 않은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 가는 능력도 탁월했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즐겁다라…… 내가 이 사람과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하고 있었나.’
클레르건 공작은 곁에 선 르네를 슬쩍 내려다봤다.
숨 가쁘게 일만 하던 일상에도 르네와 한 공간에 있으면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특유의 여유로움이 그에게는 조금씩 특별해졌다.
“태교……도 하시오?”
“공작님, 책을 더 구할 수 있을까요?”
동시에 입을 연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태교로 책을 읽죠.”
“프레오가 별관 서재를 채웠는데 벌써 다 읽었소?”
“음, 아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유아를 위한 교양 입문서>, <로이센 예법>, <역사 길잡이> 같은 책밖에 없었어요.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공주님과 왕자님이 나오고, 드래곤을 무찌르는 용사가 나오는 그런 동화책을 읽어 주고 싶어요.”
“프레오에게 말해 놓겠소.”
“감사해요. 그리고 자수 원단을 부티크에 판매하고 싶은데 프레오를 통해서 해도 될까요?”
귀를 기울이는 클레르건 공작의 시선이 르네의 작은 손으로 향했다. 가끔 닿는 손은 늘 서늘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시오. 세르반도 경제적 지원을 하고, 공작저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돌보기로 약속했으니.”
“원래 하던 일이니 괘념치 마세요. 공작저에 있으니 나가기 쉽지 않고, 혹 괜한 소문이 돌지 몰라서 프레오를 통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르네는 예법 수업을 완벽히 끝낸 영애처럼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부채를 턱 끝에 대고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 문제는…….”
“클레르건 공작님. 어머, 손님과 함께 계셨군요.”
부드러운 음성이 들리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르네는 정원 입구 쪽에 선 사람을 발견하고 작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구불거리는 금발 위로 푸른빛 공단 리본 장식을 한 영애는 한눈에 봐도 아름다웠다. 하얀 피부와 연한 하늘빛 눈동자 덕분에 더 여리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공작님, 트린 백작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프레오가 잠시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능숙하게 감췄다.
르네는 트린 영애를 보고 반사적으로 하녀처럼 무릎을 구부렸다. 인사를 하려던 순간 뒤늦게 자신이 하녀가 아니라 자작 부인임을 깨달았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어색하게 움찔거리자, 어떻게 해석했는지 클레르건 공작이 자연스럽게 몸으로 르네를 가렸다.
“트린 영애.”
“공작님, 영식께 약속했던 책을 가져왔답니다.”
“에드워드는 지금 본관에 있소.”
“아…… 알고 있어요. 먼저 공작님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트린 영애의 매끈한 뺨 위로 붉은 꽃물이 들었다.
르네는 곤란한 표정의 두 사람을 보면서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갑자기 배를 붙잡고 고개를 떨군 채 신음을 흘렸다.
모여 있던 모두가 놀랐으나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인 것은 클레르건 공작이었다. 기울어지는 몸을 붙들고 인상을 찌푸린 르네의 표정을 살폈다.
“아일레스 부인, 괜찮소?”
“아무래도 산책 시간이 길었던 것 같네요. 후우…… 그만 돌아가 쉬고 싶어요.”
“그러면 내가 도와…….”
말을 잇던 공작은 신음 섞인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세요.”
“방금 뭐라고…….”
고개 숙인 르네를 향해 얼굴을 기울이자 작은 속삭임이 빠르게 쏟아졌다.
“공작님, 프레오를 불러 주세요. 저기 트린 영애의 표정 좀 보세요, 저렇게 수줍어하면서 용기를 낸 영애를 모르는 척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그리고 배가 나오니 이런 자세를 취하는 것도 힘들어요.”
걱정하던 클레르건 공작은 눈까지 찡긋거리는 르네를 보는 순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프레오. 부인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게.”
“알겠습니다. 아일레스 부인, 이쪽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르네는 프레오에게 기댄 채 힘겨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트린 영애, 먼저 자리를 떠나서 죄송해요.”
“염려 마세요, 부인. 많이 힘드신 것 같은데 인사는 다음 기회에 하면 되지요.”
르네는 트린 영애의 다정한 말에 무척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재차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떠나는 동안 클레르건 공작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클레르건 공작님, 이번에 들어온 에드워드 영식의 예법 선생님인가요?”
“……맞소.”
“부인은 괜찮으시겠죠? 산모의 안정에 좋은 차가 있는데 제가 선물로 드려도 될까요?”
그제야 클레르건 공작은 트린 영애에게 몸을 돌렸다.
“영애의 친절에 부인도 감사할 것이오.”
“혹시 공작님만 괜찮으시면 저도 차 한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수줍은 미소를 짓는 트린 영애는 무척 사랑스러웠지만, 정작 클레르건 공작은 르네를 생각했다.
‘그런 속임수를…….’
잠시나마 진심으로 걱정한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가녀린 체구에 부푼 배는 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이성은 그녀가 슬럼가 여인이라고 알리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면 그 사실을 잊기 일쑤였다.
“공작님?”
“아, 에드워드를 불러서 함께 차를 마시면 될 것 같소.”
“네, 감사합니다.”
클레르건 공작은 밝게 웃는 트린 영애와 함께 본관으로 향했다.
르네는 별관이 가까워지자 슬쩍 뒤를 돌아봤다.
“프레오.”
“부인, 괜찮으십니까?”
“공작님과 영애가 자리를 옮겼는가?”
“네. 지금 본관으로 향하고 계십니다.”
“그럼 됐네. 이제 힘들지 않으니 자네도 그만 물러가 보게.”
허리를 꼿꼿이 세운 르네는 싱긋 웃으며 마리를 찾았다.
“부인?”
“신경 써 줘 고맙네. 그늘에 들어오니 한결 몸이 좋아졌다네.”
“하지만 부인, 혹시 모르니 공작저에 거하는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괜찮네. 필요하면 마리를 통해서 의원을 부를 테니 그만 가 보게.”
르네가 걱정 말라며 자꾸 밀어 내자, 프레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리를 불러왔다. 그는 마리에게 언제든지 의원을 부르라는 당부를 남기고 마지못해 본관으로 돌아갔다.
“부인, 따뜻한 수건을 챙겨 왔는데 발에 올려 드릴까요?”
“마리, 현숙한 부인이라면 응접실에서 발을 내놓고 있지 않는단다.”
“앗, 죄송해요! 제가…… 제가 아직 잘 모르는 게 많아서, 헤헤.”
“하지만 나는 해도 된단다. 여기 올려 주겠니.”
“네……? 네! 여기 수건을 올려 드릴게요!”
어느새 신발을 벗은 르네는 응접실 소파에 누워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을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피로했다.
‘이제 겨우 데뷔탕트를 치렀을까?’
르네는 조금 전에 만난 트린 영애를 떠올렸다.
자신과 다른 진짜 귀족 영애, 아름답고 화려한 외모, 클레르건 공작을 보며 감추지 못하는 풋풋한 감정들. 괜히 입맛이 썼다.
마리에게 듣기로 공작 부인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공자가 올해 4살이었다.
‘아직 젊은 공작은 여전히 인기가 있겠지.’
사실 클레르건 공작이 미혼의 영애들에게 여전히 호감의 대상이라는 사실은 자신과 상관없었다.
이곳에서 대접받으며 지내니까 정말 귀족이 된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았다. 더구나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필요를 채워 주고, 임신한 자신을 배려하는 모습을 볼 때면, 다정한 부부처럼 느껴져서 혼자 얼굴 붉힌 적도 있었다.
“공작님 외모가 문제네. 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아.”
한눈에 봐도 사랑스러운 트린 영애는 클레르건 공작이 마음에 들어서 온 게 분명했다.
공자를 위한 선물을 가져왔다면서 공작부터 찾아오는 걸 보면 뻔했다. 수줍게 얼굴에 홍조를 띠며, 책을 껴안은 팔을 꼭 쥔 모습이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였다.
문득 서재에 비슷한 가죽 염색과, 같은 바느질법으로 제본된 책들이 떠올랐다.
‘4살짜리 아이한테 역사, 예법 책을 사다 준 게 누군가 했는데 트린 영애의 선물이었구나.’
굳이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었지만, 다시 보지 않을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지낼 마음도 없었다. 어쨌든 위조한 신분이었고 나중에 자수 원단을 판매하다가 마주치면 설명하기 난처했다.
성실하지만 눈치는 조금 없어 보이는 공작님이 트린 영애의 기분을 잘 살폈으면 했다. 괜한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