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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



며칠 전 클레르건 공작에게 말한 덕분에 별관 서재는 책을 옮기는 시종들로 소란스러웠다.

르네는 동화책 몇 권을 챙겨 한가롭게 응접실 소파에 누웠다. 달콤한 쿠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트린? 내가 아는 트린 영애?”

“네, 부인. 트린 백작 영애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이 아가씨는 연락 없이 방문하는 것이 특기인가? 드러누워 책을 보던 르네는 가슴 위에 흘린 쿠키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콕콕 눌러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지금 어디 계시지?”

“문 앞.”

한껏 목소리를 낮춘 로이드는 르네에게 속삭였다.

“그냥 돌아가라고 할까?”

“흐음…….”

“산모에게 좋은 차를 가져왔다는데?”

갑작스럽게 트린 영애가 방문했지만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안면을 트지 않겠다고 했지만 르네의 기억에 그녀는 너무 사랑스러웠다. 태교를 위해서 예쁜 것은 자주 보기로 마음먹었고, 무엇보다 걱정해서 방문했다는 사람에게 차마 되돌아가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문 앞에 있는 사람을.

“아니야. 모시고 와.”



트린 영애는 예쁜 얼굴만큼 다정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셨죠? 며칠 전 부인의 안색이 나빠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그날은 실례가 많았어요.”

“그런 말씀 마세요. 건강이 우선이죠. 그리고 산모에게 도움 되는 차가 있어서 챙겨 왔어요. 마음에 드시면 더 구할 수 있으니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더라도 접대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며칠 전에는 이 근처를 지나다가 방문하셨다고 했는데, 오늘은 저 때문에 일부러 오신 건가요?”

“사실 공작님을 뵙고 싶어서 왔어요.”

“네…… 그러셨군요.”

트린 영애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수줍게 웃었고, 르네는 솔직한 대답에 당황했다.

“사실 공작님은 저를 아이 취급하세요. 아버지를 따라 황궁에 갔다가 공작님을 처음 뵙고 그때부터 연모했는데…….”

“네,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셨군요.”

“사실…… 제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녔어요.”

“네, 그러셨군요.”

부끄럽다는 표정이었지만 실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공작님이 혼인하셨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혼자되시고 4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저는 여인이 될 수 없는 사람인가 봐요.”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쉽지 않죠.”

“그…… 부인께서는.”

르네는 반쯤은 흘려들으며 앵무새처럼 영애의 말을 반복했다.

앉아 있으니 골반이 짓눌려 어떤 자세를 취해도 편하지 않았다. 임신한 몸에 적응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처음부터 신체 변화를 겪었으면 조금 적응이 쉬웠을까.’

“……신가요?”

“네?”

딴생각을 하느라 이야기를 놓친 르네는 미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부인께서는 어떻게 공작님과 알게 되셨나요?”

르네는 자신의 배를 쳐다봤다. 눈앞의 초조한 하늘빛 눈동자를 보고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은 어려운 사람이 도움을 청할 때 무시하지 않으시는 분이죠.”

“어머, 부인도 알고 계시는군요!”

짜 맞추려 하는 말이었으니 특별히 알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르네는 미리 준비했던 말들을 술술 풀어냈다.

“남편이 죽고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았어요. 그러다가 영지 시찰을 나온 공작님께 연이 닿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답니다.”

“아, 어려운 사정이 있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실례했어요.”

괜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트린 영애의 얼굴이 처연해졌다.

“괜찮아요. 공작님은 저를 에드워드 영식의 예법 선생으로 고용해 주시고, 임신 중에는 무리하게 수업을 하지 않아도 좋다고 하셨죠.”

참 다정하시죠? 르네의 말에 격한 공감을 하며 트린 영애는 활짝 웃었다. 그녀는 공작과 르네의 사이가 특별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는지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공작님은 이곳에 자주 오시나요?”

“음…… 자주라고 하기에는.”

“며칠 전에 방문했을 때도 함께 별관 정원을 산책하고 계셔서 자주 오시는 줄 알았어요.”

“그날은 공작님이 황실에 가지 않으셨고 정원에서는 우연히 만났어요. 마침 필요한 책이 있어서 부탁드리던 중이었죠.”

“제가 때를 잘 맞춰서 방문했었네요. 그러면 오늘 공작님은…….”

“오늘은 따로 뵙지 못해 잘 모르겠어요. 공작님께서 본인의 일정을 굳이 저에게 알리지는 않으시거든요.”

“그렇죠.”

시무룩한 표정을 보니 르네는 저도 모르게 구구절절 이야기를 늘어놨다.

“기회가 있으면 또 만날 수 있겠죠.”

“사실, 연모한다고 하지만 동경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아버님도 그걸 아셔서 딱히 절 말리지 않으시고요.”

“네, 동경하는 마음이 크셨구나.”

“최근에는 아버님이 제 혼처를 알아보시는 것 같아요. 혼인하면 지금처럼 방문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자주 오려고요.”

“네, 곧 혼인하실 수도 있군요.”

“부인, 오늘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셔서 감사해요. 이야기를 나눠 보니 너무 잘 맞는 것 같아서 좋아요.”

“네…… 무척 좋으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친구라도 생긴 것처럼 기뻐하는 트린 영애를 보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트린 영애는 친근하게 이름으로 부르라 했고, 르네는 흔쾌히 알았다고 했다.

“앞으로 데이나라고 불러 주세요.”

“네, 데이나 영애. 저도 르네라고 편히 불러 주세요.”

“부인, 사실 클레르건 공작님이 에드워드 영식의 교육을 위해 별관에 자주 방문하실 줄 알았어요.”

“아직 정식 수업은 시작 전이에요. 수업을 하더라도 굳이 직접 찾아오실 이유는 흔치 않아요.”

“하지만 공작님은 에드워드 영식에게 관심이 많으세요. 좋은 아버지시죠. 그래서…….”

데이나 영애는 종종 르네를 찾아왔다.

친밀하게 구는 데이나 영애가 불편했지만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면 금세 잊었다. 뒤늦게 클레르건 공작을 만나고 싶어 들락날락했다는 것을 알고 그 깜찍한 수가 귀여워 웃고 말았다.

적어도 대놓고 솔직히 말하는 데이나 영애를 얌체 같다며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순진해 보였으니까.



***



「롤랑은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았어요.

“엄마, 달님이 사라졌어요!”

“롤랑, 달님도 이제는 잠드는 시간이란다. 달님은 구름 이불을 덮고 자거든.”

“어! 엄마! 달님이 다시 보여요!”

“저런, 달님도 잠잘 때 이불을 잘 덮지 않나 봐.”

“엄마! 달님이 구름 이불을 차 버리면 제가 덮어 줄게요! 그래도 되죠?”

“그럼, 롤랑이 바람에게 부탁하면 롤랑 대신 달님에게 구름 이불을 덮어 줄 거야.”」



“흐음…….”

살랑살랑.

눈을 감은 르네는 부채를 흔들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 주는 데이나 영애의 음성이 응접실에 가득했다.

……사실 언제쯤 자연스럽게 쫓아낼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었다.

오늘도 데이나 영애는 산모에게 좋다는 차를 들고 방문했다.

“데이나 영애.”

“르네 부인, 힘드실 텐데 앉아 계세요.”

르네는 눈웃음으로 답을 대신하며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데이나 영애는 테이블 위의 책을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수도에 알렌 살롱이라고 유명한 독서 모임이 있어요. 알렌 드부아 백작 부인이 운영하는 곳이죠. 제가 그곳의 5년째 회원이에요.”

“굉장히 마음이 맞는 모임인가 봐요.”

“네, 다양한 취향의 서적을 읽고 의견을 나눌 수 있거든요. 기회가 되면 함께 가 봐요.”

“네, 기회가 되면 좋겠네요.”

“아! 르네 부인과 아이를 위해서 제가 책을 읽어 드릴게요. 부끄럽지만 독서회에서도 책 읽기 솜씨로 칭찬을 많이 받았거든요.”

거절할 틈도 없이 데이나 영애는 우아한 자세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음성과 정확한 발음은 분명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다만 롤랑 이야기가 벌써 세 권째였고, 르네는 간절하게 누워서 쉬고 싶었다. 한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는 건 고역이었다.

‘맙소사. 이렇게 오래 앉아 있으면 임신 중인 내 허리와 골반이 버티기 힘들어!’



「롤랑은 바람에게 부탁했어요.

“바람아, 바람아. 달님에게 달콤한 구름 이불을 덮어 줘. 그러면 절대 차 버리지 않을 거야.”」



‘그래. 미혼인 영애가 임신한 내 사정을 알기 어렵지.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좋은 생각, 좋은 생각.’

르네는 밑이 빠질 것 같다는 말의 의미를 처음으로 이해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살랑거리며 흔들던 부채를 빠르게 움직였다.

“부인, 트린 영애께서 준비해 오신 차를 내올까요?”

로이드 덕분에 겨우 동화책 낭독이 끊겼다.

“아, 모처럼 귀한 차를 선물받았는데 좋은 것은 함께 나눠야지.”

그리고 서둘러 이 사태의 해결책을 불러냈다.



***



“아일레스 부인, 트린 영애.”

르네는 반가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리자 기뻐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머, 클레르건 공작님.”

“……훌쩍.”

요즘따라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터뜨렸다.

로이드는 임신 중에는 감정 기복이 심할 수 있다며 손수건만 잔뜩 사다 줬다. 한가득 손수건을 선물받고 놀리는 것 같아 발끈했지만 정작 유용하게 사용했다.

마리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자 클레르건 공작은 성큼성큼 걸어와 르네의 팔을 붙들었다.

“인사는 됐으니 그만 앉으시오.”

“감사해요. 공작님.”

르네는 주책맞게 나오는 눈물을 자연스럽게 두드리며 맞은편을 쳐다봤다. 뺨을 붉힌 데이나 영애는 내심 기다리던 클레르건 공작을 만나자 어쩔 줄 몰랐다.

“공작님, 데이나 영애가 특별히 저를 위해 준비한 차랍니다.”

“네, 산모에게 좋다는 차가 있어서 방문할 때마다 여러 종류의 차를 들고 와 봤어요.”

“데이나 영애의 차 고르는 솜씨가 좋더군요.”

“심신 안정에 좋아 평소에도 드실 수 있어요. 공작님도 드시겠어요?”

르네의 칭찬 섞인 언질에 데이나 영애는 수줍게 시선을 내리고 직접 찻물을 따랐다. 그 설레는 감정이 느껴져 르네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

낯설지 않은 향이 코 속으로 훅 끼쳤다.

기분까지 상큼해질 만한 레몬 가향차였지만 너무나 익숙했고 거북했다. 마시는 시늉이라도 하고 잔을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상큼한 레몬향이 점점 역하게 느껴졌다.

후작 부인이었던 때, 남편의 내연녀였던 사촌 누이와 함께 마시던 차가 기억났다.

가슴이 타는 듯한 고통과 발작적인 기침, 붉게 물드는 드레스와 테이블 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바닥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티 내지 않으려는 마음과 달리 찻잔과 접시가 부딪혀 가볍게 달그락거렸다.

“부인.”

“…….”

“아일레스 부인.”

클레르건 공작은 찻물이 넘치는 르네의 잔을 보고 있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잔을 쥔 그녀를 보고 다가가 곁에 앉았다. 기척을 못 느끼는지 부들거리며 들고 있던 잔을 대신 받아 들었다.

“트린 영애, 잠시 실례하겠소.”

“르네 부인 몸이 안 좋아지셨나요?”

그제야 르네의 이상함을 알아챈 데이나 영애는 당황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는 르네를 보고 놀란 기색이었다.

“부인을 모셔다드리고 올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시오.”

“저도, 저도 함께 가서 도와드릴게요.”

“아니오.”

클레르건은 마음이 급했다.

어디가 불편한지 대답조차 하지 않는 르네를 보고 서둘렀다. 데이나 영애에게 딱 잘라 대답한 것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