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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연애담


1화

제1장. 귀빈 찾아 삼만 리


대륙의 패권을 쥐고 있는 진振나라의 중요 도시 중 하나인 유한劉閑에는 청화루靑花樓라는 이름의 객잔이 유명하다. 최신식 건물에 맛있는 음식, 친절한 종업원들까지. 유한성 내의 주민들을 비롯하여 관광객들까지 사로잡을 만큼, 충분히 금액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청화루의 인기비결은 놀랍게도 맛있는 음식도, 친절한 종업원도, 새로 지어진 건물도 아닌, 텅 빈 2층을 전세 내다시피 사용하고 있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물론 청화루가 예전부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 온 것은 사실이나 그녀가 청화루에 드나든 뒤부터는 몇 달 전부터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매일 일정한 시각에 청화루의 2층 창가에 앉아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그 여인은 실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작고 하얀 얼굴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거리는 커다란 눈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고, 붉디붉은 탐스러운 입술은 뭇 남성들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천신이 빚어낸 것이 틀림없는 오뚝한 코를 비롯하여 비단결 같은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그녀의 매력을 더욱 증폭시켰으며 항상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은 우수에 찬 눈빛은 많은 이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청화루의 2층 창가엔 아리따운 선녀가 산다!’
유한성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관광객들은 청화루를 지나갈 때마다 보이는 여인의 그림과 같은 자태에 감탄을 하기 시작했고, 관광객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망할!”
청화루의 절세가인.
유한의 선녀.
유한제일미.
숱한 소문의 주인공인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청화루의 2층 창가에 앉아 감히 상상을 할 수 없는 상스러운 욕을 입 밖으로 꺼내며 꽃보다 눈부신 얼굴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리고 있는 중이다.
탁!
“이래서는 절대로 못 찾아!”
들고 있던 붓을 탁자 위로 세게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난 여인은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것 같았다. 그녀의 오밀조밀한 콧구멍 사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콧김은 탁자 위에 올라와 있던 선지를 흩날리게 할 만큼 기세가 등등했고, 부르르 떨리는 전신은 여인의 분노를 쉽게 짐작하게 만들었다.
“아……아니야, 은화령. 침착하자. 그래, 침착해. 처음부터 그렇게 간단히 얻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잖아. 안 그래?”
잠깐 동안 벌떡 일어나 있던 그녀는 돌연 마음을 가라앉히곤 크게 심호흡을 한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구. 조금만 더…… 기다리자.”
부글부글 끓던 가슴이 점차 안정을 되찾자 화용월태花容月態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여인, 은가장의 가주 은무적銀無敵의 둘째 딸, 은화령銀花怜은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천천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녀는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내려놓았던 붓을 집어 들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바라본다.’라는 표현보다 ‘관찰한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언가 빽빽이 적혀 있는 선지 위로 열심히 붓을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고뇌에 가득 찬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은화령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린 것은 얼마 후의 일이었다.
“어머! 저 공자는 아버지 회갑연 때 보았던 나지존 공자!”
오늘도 허탕이다! 를 되뇌고 있던 그녀의 눈에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황의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은화령의 관심은 순식간에 수그러든다.
“아, 맞다. 나 공자는 바람기가 많지…….”
생긴 게 괜찮은 것은 확실하나 황의를 입은 남자가 지나가는 모든 여인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풍류공자가 아닌 그녀만을 사랑하는 남자를 원했다.
입을 쩝쩝거리며 아쉽다는 표정을 짓던 그녀의 눈에 이번엔 백의의 남자가 들어왔다.
“오, 저 공잔 이미남 공자! 이 공자는 유한성 내에서도 상위 안에 드는 미남이…… 아.”
나지존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새로운 인물을 찾던 중 발견한 백의의 남자를 향해 방긋 미소 짓던 그녀는 다시금 붓을 움직이려 하다가 문득 떠오른 사실에 금세 시무룩해졌다.
“얼마 전에 혼례를 올렸지. 쳇.”
그렇다. 이미남 공자는 은화령의 신랑 후보 순위에 끼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꼴도 보기 싫은 주가장의 둘째 딸, 주장미에게 몇 달 전 장가를 들었다.
“하아아.”
꾹 다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뜨거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해가 뜨고부터 낭군을 찾기 위해 줄곧 청화루에 앉아 있었건만 오늘의 수확은 안타깝게도 둘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둘마저도 그녀의 신랑으로 삼기엔 역부족이었다. 화령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낭군을 그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아아. 내 낭군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이냐.
어찌나 꼭꼭 숨으셨는지 머리털 하나 보이지 않는구나!
올해 열아홉인 그녀가 이렇게 불을 켜고 남자들을 관찰하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자신을 향해 낭군 자랑을 쉴 새 없이 늘어놓는 망할 친구들에게 찬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단둘밖에 없는 친구들이 모조리 혼례를 올리게 되면서 은화령은 자연스레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와 함께 수다를 떨며, 즐겁게 시간을 보내던 친구들이 각자의 낭군들과 밀회를 가지느라 그녀를 내버려 두는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가진 다과회에서까지 낭군 찬양을 하는 걸로도 모자라 아직 혼례는커녕 연애 한 번 못 해 본 그녀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는 것은, 도무지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다.
‘너희들, 적당히 좀 해!’
사람은 참다 참다 못 하면, 폭발한다. 처음 몇 번 정도는 ‘신혼이니까, 이해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저를 보며 혀를 차는 그들의 시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런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은화령은 자신을 앞에 두고 은화령이 시집을 가지 않는 이유를 논하는 친구들을 향해 소리를 지른 적이 있었다. 그러자 두 명의 친구들은 불같이 화를 내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쯧쯧. 화령이 너는…… 그러니까 아직 혼자인 거야.’
‘맞아. 저 성질머리로는…… 절대로 혼례 같은 건 못 올리지.’
‘말이 나온 김에, 화령이 너한테도 좀 묻자. 너, 왜 아직 혼인을 안 해?’
‘그러네! 설마, 그 누구한테도 청혼을 못 받은 거 아니야?’
‘오호호호! 그거 말 되네!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성격이 왈가닥이라 데려가고 싶어 할 사람이 없나 보다.’
‘힘내라, 은화령! 뭐, 우리 남랑보단 못해도 꽤 괜찮은 남자가 언젠간 네 앞에도 나타날 거야.’
‘그래. 우리 천랑보단 훨씬 떨어지겠지만 곧, 나타나겠지. 후후후.’
청초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다혈질 성향이 있었던 은화령은 그만하라는 자신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깔깔 웃어 대는 친구들을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나도 낭군을 찾을 거야!’라고 그들을 향해 선포한 후 당당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달이 흘렀다.
“제기랄!”
친한 친구를 가장한 빌어먹을 천적들에게 낭군을 찾겠다는 선언을 하고 난 뒤로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도통 마음에 드는 남자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낭군이고 뭐고 아무 남자와 혼인을 올려 낭군 자랑을 해 보고 싶지만 그녀의 높디높은 자존심상 평범한 남자를 낭군으로 삼아선 안 되는 일이었다.
주장미와 이소영이 유한성 내에서 미남 축에 속하는 두 명을 몽땅 다 채어 가 버렸으니 그녀의 속 시원한 복수를 위해선 반드시 은화령의 낭군은 미남, 그것도 주장미와 이소영의 기를 팍 죽여 버릴 만한 엄청난 미남이어야만 했다.
‘거봐. 화령이 너는, 평생 홀로 살 팔자라니까?’
매일같이 청화루에 들러 유한성 내의 내로라는 미남들을 살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은화령의 낭군감에 알맞은 사내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 정말로 장미의 말대로 화령은 평생 홀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주장미의 오만한 웃음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해 그녀의 마음은 더더욱 우울해졌다.
타타타탁!
그때였다.
“아가씨! 도대체 여기서 또 뭘 하시고 계시는 거예요? 제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세요?”
어두운 얼굴로 긴 한숨을 내뱉고 있던 화령은 갑자기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뛰어왔는지 헥헥거리며 땀까지 흘리는 자신의 시비, 소미가 화령의 시야로 들어왔다.
“어머, 소미야. 무슨 일 있니?”
화령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소미에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보냈다. 그러자 소미는 미치고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외친다.
“아이고, 아가씨!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으셨어요?”
화령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낭군은커녕 낭군 후보도 찾지 못한 은화령에게 대체 이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라고 생각하며 소미를 바라보자 그녀는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르신이 돌아오시는 날이잖아요! 아가씨의 할아버지이자 가주님의 아버님, 은 어르신이요!”
아아. 맞다.
붓과 선지만 챙겨 들고 산뜻한 마음으로 집을 나설 때 뭔가 걸리는 게 있긴 했다. 은화령은 소미의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미는 그런 화령을 향해 외쳤다.
“어서 가요! 벌써 오셔서 아가씰 기다리고 계세요!”
황궁에 계시다가 1년 만에 돌아오시는 할아버지의 일을 잊고 있었다니.
그녀는 이 일을 어떻게 사죄해야 하나 걱정하며 소미의 뒤를 따르면서도 화령은 제 주위를 지나가는 뭇 남성들의 얼굴을 힐끔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 * *

진율은 난생처음의 나들이에 들떠 있었다.
그가 20년간 살았던 황궁은 넓었지만 황궁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어 하던 율에게 있어선 갑갑한 곳이었다. 그는 부디 한 번쯤은, 황궁을 벗어나 그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 중의 하나인 화畵 사부, 은무열이 고향으로 내려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황제께 은무열을 따라 유람을 가보고 싶다는 청을 드렸다.
반대를 할 것이라 생각했던 황제가 예상 외로 흔쾌히 허락을 하였기에 율은 황제의 명을 듣고 난감해하는 은무열과 함께 그의 고향에 내려와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은 사부의 손녀딸이 그렇게 미인이라는 게 사실입니까?”
진율은 은무열의 가족들과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집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은무열의 제안에 따라 며칠간 자신이 머무를 별채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문득 생각난 사실에 한창 설명을 하고 있던 은무열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허허, 미인이라니요. 그저 남들보다 조금 고울 뿐입니다.”
흰색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멋스러운 노인 은무열은 율의 말에 껄껄 웃으며 답했다. 은무열의 집으로 오기 전 미리 그의 가족들에 대해 조사를 해 두었던 율은 조사 내용과는 달리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그의 대답에 빙긋 미소 지었다.
“유한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고 하던데, 역시 은 사부께선 겸손하시군요.”
“태, 아니, 공자께서 그 아일 직접 보지 못하셔서 그렇습니다. 황궁에는 그 아이보다 아름다우신 분들이 널렸잖습니까?”
‘하지만 황궁의 여인들은 모두 황제 폐하의 여인이 아닙니까. 제 여인이 아니지요.’
율은 손사래를 치는 은무열을 향한 말이 목구멍을 넘으려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여하튼, 기대됩니다. 얼마나 미인이실지.”
“허허헛, 실망하시진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율은 대답을 하려다 별채 앞 정원에 화려하게 수놓인 꽃들을 바라봤다.
여태껏 그가 만난 모든 여인들은 특별한 목적을 품고 있었다. 그를 이용하여 권력의 중심으로 갈 수 있는 발판을 얻겠다든가, 앞으로의 전망이 밝은 곳에 미리 줄을 서 있겠다든가 하는.
때문에 여인에 대한 깊은 불신이 생겨 버려 약관의 나이가 될 때까지 제대로 여인 한 번 품어 본 적이 없는 숙맥 중의 숙맥이 바로 그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토록 갈망하던 여인과의 평범한 만남을 그리며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끼던 율은 은무열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왠지, 무료한 그의 삶에 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즐거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도대체 어딜 갔다 온 것이냐! 어제가 무슨 날이었는지 잊었더냐!”
잠에서 깨자마자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웅 하고 눈을 비비며 침상에서 일어나던 화령은 야차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 은무적을 발견했다.
‘이런.’
은무적의 잔소리는 거의 한 식경(약 30분)동안 이어졌다. 이유는 집안에 손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귀가하지 않고 밖으로 싸돌아다니던 그녀의 행동 때문이었다. 화령은 쩌렁쩌렁한 아버지의 호통 소리에 귀가 얼얼해지는 것을 느꼈다.
“죄송해요, 아버님. 일부러 늦으려고 그런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붉으락푸르락하는 은무적의 얼굴을 보면서 화령은 잠시 그가 말을 멈추었을 때 어서 말을 끊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은화령의 태도에 은무적의 가슴은 순간 찔끔거렸다. 은화령이 제 어미와 언니를 닮은 그 사슴같이 아리따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잘못은 그녀가 했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아서였다.
은씨 집안 여자들에겐 모두 약한 은무적이지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유독 은화령을 아끼던 그는 한 식경이면 충분하단 생각에 혼내는 것을 멈추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조심하거라. 일찍일찍 다니고.”
조금만 지체했다간 저 커다란 눈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을 와르르 쏟아 낼 것 같아 두려워졌다. 은무적은 하는 수 없이 잔뜩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펴곤 은화령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네에. 이제 밤늦게까지 돌아다니지 않을게요!”
그러자 은화령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흠흠, 알겠다. 그럼 어서 씻고 나오거라. 할아버지께서 귀빈을 데려오셨으니 할아버지는 물론 그분께도 인사를 올려야 할 것이다.”
은무적은 방금까지 화를 냈던 사람이 아닌 양 ‘예, 아버님!’이라고 소리치는 화령에게 은근한 미소를 날려 주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어젯밤에 집에 늦게 들어온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물론 할아버지인 은무열의 귀환이 중요하긴 해서 소미와 함께 청화루에서 열심히 집으로 향하긴 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집으로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있던 화령은 정말 우연찮게도 해질 무렵까지 보이지 않던 미공자 무리가 유한 서원에서 무더기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화령의 머릿속에 할아버지의 ‘할’자도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꾸만 집으로 가자고 조르는 소미의 팔을 강력한 힘으로 부여잡고선 공자들의 뒤를 조르르 따라가 어느 녀석이 괜찮은가 면밀히 살펴보는 걸 거의 반 시진(약 1시간) 동안 하다 보니 귀가가 늦어 버렸다.
늦은 시각이라도 할아버지의 처소에 방문하여 인사를 올렸어야 했지만 은화령은 밀려오는 잠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고, 눈을 뜨자마자 은무적의 불같은 화를 보게 되는 일까지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귀빈?’
은무적이 그녀의 방을 빠져나가자마자 언제 풀이 죽어 있었냐는 듯 본래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은 은화령은 아버지의 말을 되씹어 보다 할아버지란 단어 뒤에 나온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왕이면 미남이면 좋겠는데 말이지.’
소미에게 씻을 물을 받으라는 지시를 내리고 침상에서 벗어나던 은화령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령이 아니니!”
그녀가 이른 아침부터 꽃단장을 하고 할아버님의 귀빈께 인사를 올리러 사뿐사뿐 발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화령은 등 뒤에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머, 언니!”
그녀의 언니이자 은무적의 장녀인 은미경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화령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은화령처럼 빼어나게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나 조신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활짝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화령의 앞에 섰다.
“어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
은미경은 밤늦게까지 얼굴을 비치지 않던 은화령을 걱정한 눈치였다. 화령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음, 그게…… 급히 할 일이 있어서.”
“급히 할 일?”
“헤헷. 그, 그것보다…… 할아버지랑 같이 온 사람, 남자라며?”
“아.”
“어느 댁 공자야? 얼굴은 어때? 죽여줘?”
은화령은 차마 은미경에게 ‘유한 서원의 서생들을 뒤쫓느라 할아버지의 귀빈이 왔다는 걸 잊어버렸어!’라고 말할 수 없어 화제를 돌렸다. 그러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음을 던진다.
“얘는. 언니가 그런 표현은 삼가랬지?”
“에이! 언니, 그러지 말고 어서 말해 봐. 응?”
“참나.”
“언니이!”
은미경은 ‘앞으론 일찍 다녀.’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은화령의 이마에 꿀밤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런 은미경의 손길을 살짝 피하던 화령은 자신의 시비인 소미에게 들었던 정보를 떠올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질문을 해 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은미경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보기엔 네가 너무너무 좋아할 것 같은 얼굴이더라. 솔직히 말하면 내 눈이 호강하기도 했지.”
헉!
“우리 유랑보다는 못하지만 꽤…… 아니, 많이 훤칠하더라구.”
여기서 ‘유랑’은 은미경의 남편이자 은화령의 형부인 남궁유를 가리킨다.
‘언니의 형부 사랑은 하늘을 찌를 정돈데 그런 언니가 인정할 정도면…… 흐하핫!’
남자 보는 기준이 은화령 못지않게 까다로운 은미경이다. 형부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말하는 은미경의 입에서 ‘훤칠’이란 단어가 나올 정도면 주장미와 이소영의 기를 팍 꺾어 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했다.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그 귀빈이 벌써부터 자신의 낭군이라도 된 것마냥 마음이 뿌듯해져 왔다.
“언니, 나 어서 보고 싶어! 먼저 갈게!”
콩닥콩닥거리던 심장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훤칠한 낯짝을 제 두 눈으로 봐야만 이 박동이 진정될 것 같았다. 은미경은 제 말이 끝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은무열의 처소로 뛰어가기 시작하는 은화령의 뒷모습을 보며 정말 얼굴과 행동이 들어맞지 않는 아이라며 조용히 웃었다.

* * *

‘유한성을 구경하신다고 나가셨다. 나가신 지 한 일다경(약 15∼20분)정도 되는 듯싶구나.’
오랜만에 뵙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 귀빈은 어디 있어!’라고 외치는 은화령을 향해 은무열은 꿀밤 세례를 날렸다. 그제야 자신이 귀빈을 찾는 데 급급해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화령은 은무열과 뒤늦은 포옹을 하며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은무열은 아직도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사랑하는 손녀딸을 더는 구박할 수 없어 자신의 귀빈이 한 말을 은화령에게 들려 주었다.
“참, 보기 힘든 얼굴이네.”
당연히 은가장 안에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밖으로 나갔단다. 드넓은 유한성 곳곳을 샅샅이 뒤질 수가 없었던 화령은 하는 수 없이 그 ‘귀빈’을 보는 걸 포기하고 청화루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