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오늘도 북적북적한 청화루의 2층으로 올라가 그녀의 요 근래 들어 주된 활동이 된 ‘미공자 관찰 도감美公子 觀察 圖鑑’을 쓰기 위해 챙겨 온 선지와 붓을 꺼냈다. 그런데 뭔가 마음이 찝찝한 것인지 미공자를 찾는 매의 눈이 좀체 발동되지 않았다.
“아가씨, 근심거리라도 있으세요?”
후우 하고 연신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매일 앉는 곳으로 가 창밖을 내려 보던 은화령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소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밖으로 나간다고 하자마자 소미를 꼭 데리고 나가라며 엄포를 놓는 은무적 때문에 그녀와 함께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은화령이 소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얼굴인지 가면 갈수록 궁금해진다. 할아버지께서 존댓말까지 쓰며 말씀하실 정도면 예사 집 자제가 아니란 소린데.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태자를 교육하는 할아버지와 아는 사인지도 아리송하고 말이지.
“소미야.”
“네, 아가씨.”
“너…… 그 할아버지와 같이 왔다는 분, 봤다고 했지?”
“예!”
“어떻게 생겼디?”
무어라 표현해야 하나 하고 잠시 뜸을 들이던 소미가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 눈을 감다가 떴다. 제 아가씨를 위해 ‘그분’에 대해 말하려고 하다가 얼굴이 새빨개졌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 모양이다.
“굉장히…….”
굉장히?
“잘생기셨어요! 저는 태어나서 큰 도련님 외의 남자에게 가슴이 두근거린 적은 처음이어요!”
발그레 홍조를 띤 소미의 외침에 가까운 말에 은화령은 크게 놀랐다. 소미가 말한 ‘큰 도련님’은 그녀의 오라버니이자 현재 무림맹에 파견되어 있는 은가장의 차기 가주 은적월을 말한다.
“웬만한 남자들은 거들떠도 안 보는 소미 네 가슴이 뛰었다고?”
“네!”
“흐음……. 다른 건? 세세하게 좀 표현해 봐!”
화령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소미를 재촉하자 다시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가 말했다.
“키가 6척(약 180cm)은 거뜬히 넘어 보이시는 듯했고, 어깨도 떡 벌어지셨고, 또…….”
은화령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6척을 넘는 사람은 유한성엔 거의 없는데. 게다가 떡 벌어진 어깨라니. 사로잡기만 한다면 주장미나 이소영, 고 계집애들 이기는 건 틀림없군! 소미의 말을 듣던 은화령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눈매도 매서우면서 부드러웠어요. 참, 코도 오뚝하셨던 것 같아요!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눈인데 말이어요, 아휴,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맞다, 마치 여의주 같았어요!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영롱했던 그 눈동자란. 하아.”
완벽한 미남의 조건을 늘어놓는 소미의 말이 약간 의심스러웠으나, 그녀의 시비는 결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존재가 아니다.
“안 되겠다. 직접 찾아봐야겠어.”
소미의 설명을 듣던 은화령은 자신이 한가하게 미공자 관찰 도감을 쓰고 있을 여유 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미남이란, 마냥 기다린다고 다가오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화령은 소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들고 온 물품들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막 그녀가 1층으로 내려가려고 몸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이곳입니다, 공자님.”
……어?
“고맙네.”
“별말씀을. 그럼 잠시 뒤 다시 올라오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저 말고는 거의 들락거리지 않던 2층에 웬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낯선 음성에 고개를 든 은화령의 눈에 소미의 자세하면서도 정확한 설명에 들어맞는 사내가 들어왔다.

제2장. 간만에 건진 왕건이는 알고 보니 골칫거리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사내의 얼굴을 본 은화령은 차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점소이가 사라지자마자 부드럽게 의자를 빼내 자리에 앉는 그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어느덧 파래진 입술은 경련이라도 일듯 부르르 떨렸다.
두근두근.
화령의 열아홉 일생 중 이렇게 벅차오를 정도로 심장이 뛰었던 적이 어디 있었던가!
그 느낌은 마치, 가문의 검법인 은가검법銀家劍法을 아버지에게서 처음 전수받을 때 느꼈던 희열과도 같았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품속에 고이 쥐고 있던 붓과 선지를 바닥으로 떨어뜨릴 뻔한 은화령은 순식간에 격정에 휩싸였다. 아마 소미가 곁에서 아가씨! 하고 그녀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크게 동요한 모습을 저 이름 모를 사내에게 보이고 말았으리라.
친혈육이 아니었더라면 낭군님을 찾겠다며 미공자 관찰 도감을 들고 성 곳곳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이 마구잡이로 들이대었을 그녀의 자랑거리이자 현 무림의 신성인 은가장의 소가주, 옥면검玉面劍 은적월만 한. 솔직히 말해 은적월보다 훨씬 더 잘생긴, 눈앞의 사내를 보고 화령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와, 왕건이다!’
소미의 말은 단 한 치도 틀린 바가 없었다.
아니, 그녀의 설명은 오히려 부족해 보였다. 은화령은 난생 백의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 사내는 처음 보았다. 그녀보다도 보드라워 보이는 탱탱한 피부와 날이 선 오뚝한 코,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는 웬만한 미남자를 보고도 방방 뛰지 않던 은화령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아가씨?”
화령이 자신을 응시하는 게 아니라 그 뒤편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발견한 사내를 보고 은화령 못잖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저, 저분이세요!”
그래.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단다, 소미야.
은화령은 대답 대신 천천히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소미를 향해 다가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정말 여의주를 머금은 것 같은 아름다운 눈이지요?”
소미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화령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주를 머금다 못해 직접 만들어 낼 만큼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어디 하나 부족한 점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정도로 대단한 외모의 사내. 웬만한 미남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은화령의 미공자 관찰 도감에서도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낼 만큼, 그녀가 그토록 찾던 낭군 후보 1순위로 두어도 손색이 없을 사내였다.
‘좋아!’
사내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피려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화령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어디 사는 누구신진 모르지만 은가장에 찾아온 저 귀빈을 반드시 내 낭군으로 만들리라!
그녀의 결의에 찬 마음가짐은 다음 행동으로부터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화령은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던 물품들을 소미에게 떠넘기듯 줘 버리곤 품속에서 비단부채를 꺼내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곤 부채에 달려 있는 거울로 제 얼굴을 확인한 뒤,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만연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확신한 그녀는 이내 천천히 사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 *

과연 황궁에서 서책으로 접했을 때와 직접 두 눈으로 보았을 때는 큰 차이가 있었다.
진나라가 자랑하는 미美의 도시, 유한.
아름다운 절경과 풍성한 볼거리, 그리고 숨 막히는 미인들로 가득하다는 유한의 명성은 가히 거짓은 아니었다.
은가장을 나온 이래로 한 식경가량 걸었을 뿐이건만 지나다니는 여인들조차 황궁에 기거하는 여인들 못지않아 어찌나 놀랐는지. 율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궁에서 보지 못했던 신기한 물품들과 재미난 구경거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황도인 한월의 바로 옆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꼬박 삼 일은 마차를 타고 나가야만 도착할 수 있는 유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얼마나 오고 싶어 했던가.
전쟁 한 번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진나라에서 태자라는 신분을 가진 율이 궁 밖을 나갈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은무열이 그의 화사부 자리를 내어놓고 낙향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황제에 간청하여 황궁 밖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은 거의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가급적 이번 유람을 뜻 깊게 보낼 생각이었다.
미래에 그의 사람들이 될 진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두 눈으로 보고 싶었고, 사람들이 하늘을 난다는 무림이라는 세계 또한 접하고 싶었으며, 황궁의 여인들이 아닌 평범하고 순수한 여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진율이 이 세 가지 목적을 다 이루기 전까지 자신은 절대로 환궁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것은 그를 가까이서 보필하는 호위무사 무영밖에 알지 못했다.
‘조금 쉬었다 갈까.’
지천에 널린 볼거리들에 시선을 빼앗겨 정신없이 걸음을 움직이던 율은 고개를 들자 보이는 화려한 객잔 하나를 발견하고 발을 멈췄다.
황도의 봉황루鳳凰樓라는 객잔만큼이나 유명한 듯한 유한의 청화루라는 객잔. 마침 목이 마르기도 해서 숨도 돌릴 겸 쉬었다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율은 청화루로 발걸음을 돌렸다.
열린 문 사이로 발을 내딛는 율을 발견한 점소이가 두 눈을 크게 뜨며 달려와 그를 2층으로 안내하였다.
북적거리는 1층보단 비교적 한적한 편에 속하는 2층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율은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백성들과 함께 어울려 풍류를 즐기고 싶었건만 그 기회를 잃어버린 꼴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러나 그런 아쉬움도 잠시. 그는 본디 한적한 것을 좋아했기에 2층에서 백성의 삶을 내려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응?’
그렇게 1층으로 내려간 점소이가 다시 2층으로 올라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남다른 감각을 지닌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확실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일까.
고개를 돌린 후로 몇 초간.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게 자라 왔던 진율의 스물 인생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라고 칭할 수 있을 만한 일이 벌어졌다.
하늘거리는 옷자락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새하얀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
붉디붉은 앵두 같은 입술과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모두 나온, 풍만한 몸매까지.
유한의 거리를 지나며 수많은 미인들의 얼굴을 보았고 또 황궁을 돌아다니며 미녀 소리를 듣는 여인들의 얼굴을 수도 없이 마주했던 그였지만, 이렇게 그의 마음을 뒤흔들 만큼 아리따운 여인은 그에게 느릿하게 걸어오는 홍의의 소녀가 처음이었다.
‘뭐, 뭐지!’
천상의 선녀가 지상에 강림이라도 하는 것처럼 느린 시간이 흘러갔고 그 시간 속에서 율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을 만큼 율은 멍하니 제 눈앞에 다가와 빙긋 웃는 소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합석하겠다는 말도 없이 그의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제게 말을 건네는 홍의 소녀는 듣기 좋은 미성을 흘리며 싱긋 웃었다. 율은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흐릿한 초점을 바로잡았다.
“누구……신지.”
율이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손짓으로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키고 있을 무영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이 홍의 소녀의 목에는 무영의 차가운 검 끝이 닿았으리라.
귀신에 홀린 듯 잠시 넋을 놓긴 했지만, 분명 신분을 속이고 유한에 왔던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자연스레 그에게 아는 척을 하는 이름 모를 소녀를 보고 율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물었다. 그러자 홍의 소녀는 아, 하고 낮은 탄성을 터뜨리며 말했다.
“반가운 마음이 앞서 소개가 늦었네요. 소녀, 화령이라 하옵니다.”
“화령?”
“공자께선 저의 할아버님과 함께 오셨다던 그 귀빈, 맞으시지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던 율은 순간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유한으로 오기 전 조사했던 은가장의 식솔들에 대한 내용 중 유한제일미라 불리는 은무열의 손녀딸에 대한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생긴 인물이길래 그렇게 칭송이 자자한지 궁금해져 그녀를 만나려고 시도했으나 아쉽게도 자리를 비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 기회를 노린 것이 어제였건만.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에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홍의 소녀, 아니 은화령은 제 소개를 마치고 나서야 제게서 천천히 경계를 거두는 율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공자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사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 점, 이해 바라요.”
“괘, 괜……찮소.”
율은 고개를 숙이는 화령에게 손을 내저었다.
“이해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저…… 그런데 말예요.”
응?
“제가 누군지 알게 되셨으니, 이제 공자의 성명을 물어도 될까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말끝을 살짝 흐리는 화령을 가만히 바라보던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듣지 못한 게로군.’
유한에 도착하기 전, 자신에 대한 신분을 철저히 숨겨 달라 은무열에게 부탁했기에 아마 화령 역시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틀림없다. 율은 화령의 다소곳한 웃음 뒤에 숨겨진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발견하고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율이라고 하오.”
“아아. 율 공자시구나. 그럼 성은요?”
성을 묻는 화령을 보고 율은 잠시 머뭇거렸다. 제 성이 ‘진’이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화령이 바보가 아닌 이상 율이 진나라의 태자, 진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태자의 화사부인 은무열과 함께 그녀의 집에 방문을 했고 또 태자와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제길.’
가능하면 유람하는 동안은 율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신분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공자?”
화령은 조금 굳어지는 율의 얼굴을 발견하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 서문!”
“예?”
“서문율.”
어떤 성을 대어야 그녀가 의심을 하지 않으려나, 하고 고민을 하다 자신의 절친한 친우인 서문휘가 떠올랐다. 그의 성을 빌리는 강수를 두며 율이 크게 외치자 화령은 화사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의 이름을 평생 기억하려는 듯, 작게 되뇌며.
‘휘. 미안하네. 잠시 자네의 성을 좀 빌리지.’
그리고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며 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 * *

서문율.
은가장에 들른 귀빈인 절세미남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황도의 무림세가 중 하나인 서문세가의 막내아들이라고 했다. 서문세가의 장자인 서문휘에 대해선 귀가 닳도록 들었던 화령이었다. 그러나 막내아들인 서문율에 대해선 금시초문이었던 그녀는 허술한 정보를 알고 지낸 스스로를 책망하며 제 옆에 떡하니 서선 신기한 것이라도 보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율의 모습을 힐긋거렸다.
대대로 진나라를 지켜온 수많은 장군들을 배출해 낸 명가의 인물이라 그런지 확실히 옷이며 얼굴이며 귀티가 좔좔 흐르기는 한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무공 하나 운용할 줄 모르는 백면서생처럼 보이지만 뭐. 사람을 겉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뭣 하나 부족한 것이 없네. 흐흐.’
관광을 시켜 주겠다는 명목으로 율을 청화루 밖으로 끌고 나온 화령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와 함께 길을 거닐 때마다 시샘 어린 눈길을 쏘아 대는 여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마침 제 낭군과 함께 청화루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주장미 고 계집애와 잠시 마주쳤었으니까.
‘너, 너!’
장미의 낭군인 이미남 공자보다 몇 배는 더 훤칠한 율의 모습에 장미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던 것은 오늘 그녀가 올린 최고의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아주 짧은 만남이었기에 후일 다시 만난다면 율의 정체를 놓고 그녀의 귀가 따가울 정도로 물어 댈 장미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단 잠깐의 복수는 했으니 상관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녀 옆의 이 남자를 제 낭군으로 만드는 일.
얼굴 하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다고 자부하는 화령에게 있어서 자신의 왈가닥 같은 성격만 드러내지 않는다면 눈앞의 남자를 함락시킬 자신이 있었다. 덕분에 취미에 없는 내숭을 떨어야 했지만 그를 유혹하는 며칠 정도야 충분히 참을 수 있다고 여겼다.
‘아가씨.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부디 정신을 차리세요!’
워낙 다혈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검으로 위협하는 요상한 취미를 가진 화령이 절세미남인 율을 만나 다소곳한 여염집 요조숙녀 같은 모습을 보이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화령의 시비 소미는 경악 했다. 때문에 화령은 율이 잠시 시선을 돌릴 때마다 저를 향해 간절히 외치는 소미의 입을 막느라 고생을 해야만 했다.
이렇듯 여러 난관이 있기는 했으나 화령은 훌륭하게 율의 유한성 관광 안내원이 되어 주었다. 오늘 하루 열심히 관광을 시켜 주고, 제게 환심을 사게 만든 다음 눈 깜짝할 사이에 입술을 부딪쳐서 순결을 빌미로 저를 책임지게 만들리라!
그와 함께 움직이는 종일 내내 은화령의 머릿속에 가득 찼던 계획은 오직 이것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벌어졌다.
“은 소저, 이것은 무엇이오?”
“은 소저, 이것은 어디에 사용하는 거요?”
“은 소저. 이건 어떻게 먹는 거요?”
“은 소저. 이건 대체 뭐요?”
“소저. 이건…… 정말 너무 맛있소!”
조각 같은 얼굴만 보고 그가 과묵하다 못해 말이 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은 단순한 그녀의 오판이었을까. 세상에서 얼굴 잘생긴 사람은 좋아해도 말 많은 사람은 그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편에 속했던 화령의 심기를 자극할 만큼, 율은…… 말이 많았다.
거기다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 어찌나 많은지. 얼굴이 잘생기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말 많고 바보 같은 남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거라며 중얼거리던 화령은 그가 보지 않는 사이 열심히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서문세가 자제들은 집 밖을 안 나오나? 길거리 음식 한 번 안 먹어 봤다는 게 말이나 돼?’
겉만 번지르르한 사내인 것일까. 저잣거리 음식을 발견하고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땐 신기한 기분도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새로운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방방 뛰는 그의 모습은 멀리서 그를 지켜본 그녀의 머릿속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율의 이미지는 고고한 선비처럼 경건하고 때와 장소를 구분하여 침묵을 지킬 줄 알았으며 보기만 해도 듬직한 느낌을 주었건만, 지금 화령의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은…….
“은 소저. 거기 있지 마시고 이쪽으로 와 보시오. 지금부터 재미난 볼거리가 펼쳐진다고 하니!”
“아, 저는 괜찮…… 으윽!”
두 시진을 돌아다니다 보니 꽤 친해졌다 여긴 것일까.
율은 아찔한 눈웃음을 지으며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곤 외쳤다. 그리고 주저하는 화령의 손을 그녀가 말릴 사이도 없이 덥석 잡더니 관중들의 틈을 파고들며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 인간, 왜 이렇게 힘이 세!’
무림세가의 여식인지라 힘 하나는 장사였던 화령이었지만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속절없이 그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이 인간, 왕건이 맞아?’

* * *

진나라의 태자, 진율과 한 번이라도 마주쳤던 사람이라면 쉬이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본디 진율이란 남자는 말이 많지 않았다. 그는 하루에 하는 말이 채 몇 마디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과묵했으며, 홀로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였고, 친한 지기들이나 존경하는 사부들을 제외하면 말을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현재 은화령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율의 입에선 쉴 새 없이 말이 쏟아져 나왔다. 살아가면서 앞으로 내뱉을 말 중 절반 정도를 뱉어 내고 있는 자신을 보며 그 역시 얼마나 놀랐던가!
그의 지기 중 하나인 서문휘가 이 모습을 목격했다면 ‘우리 태자 전하가 달라졌어요!’하고 놀라 거품을 뿜어낼 일이었을 거다.
율은 그런 자신의 변화를 의아하게 여겼지만 곧 별일 아닌 듯 치부해 버렸다. 그의 입술이 이렇게 계속 움직이는 것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황궁을 벗어나 그렇게 고대하던 유한 관광을 하게 됨으로 인하여 발생했다는 것으로, 말이지.
어차피 저를 알아볼 이도 없으니 이런 새로운 모습을 하고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 또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율은 물 만난 고기마냥 팔딱이며 곁에 있는 화령을 말로써 괴롭히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반면, 진율의 옆에서 쉬지 않고 설명을 해 주어야 하는 입장에 놓인 은화령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율의 목에 겨누고 싶을 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화령의 열아홉 인생 중 이렇게 말 많은 남자가 어디 있었냔 말이다.
본디 남자는 과묵하고 진중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은화령에겐 현재의 상황이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자꾸만 물어 대는 율에게 살의를 느꼈다가도 그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얼굴만 보면 이상할 정도로 분노가 누그러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런 모순적 상황에 화령은 속으로만 부글부글 화를 삭이며 율에게 억지웃음을 지어 주고 있었다. 덕분에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도 느껴졌다.
“아, 아가씨. 괜……찮으세요?”
적어도 일주일은 돌아보아야 유한성 내의 모든 것들을 볼 수 있을 거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율은 은가장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화령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율은 먼저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던 은화령의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어둡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소미가 화령의 곁으로 다가와선 부채를 부쳐 주며 속삭이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괜찮은 걸로 보여?”
“아, 아가씨?”
소미는 갑자기 눈을 치켜뜨는 화령을 보고 크게 당황했다. 화령은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 율의 듬직한 뒷모습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다시 고민해 봐야겠어.”
“예?”
“쉽게 볼 수 없는 왕건이라도…… 저렇게 말이 많아서야 원. 쳇.”
소미는 화령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는 소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
그때였다. 화령은 한참을 앞서 걸어가던 율이 돌연 걸음을 멈추자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얼굴을 활짝 폈다. 율이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화령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왜 그러십니까, 공자님?”
율은 방긋 웃는 화령을 가만히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은 소저. 그게……. 후우. 사실 아무래도 물건을 잃어버린 듯하여…….”
화령은 한숨을 푹 내쉬는 율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어떤 물건이요?”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아니지만?”
“손수건을 잃어버렸소.”
“……!”
“아까 들렀던 냇가에서 잃어버린 건지. 아님 혹 객잔에서였나…….”
화령은 난처한 표정을 짓는 율의 말에 허탈한 숨을 토해 냈다. 아주 난감한 얼굴이기에 중요한 것을 떨어뜨린 줄 알았더니 겨우 손수건이라니.
‘난 또 뭐라고.’
율을 처음 본 그 순간, 화령은 그가 그토록 찾고 헤매던 그녀의 낭군님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얼굴이면 얼굴, 키면 키, 어깨면 어깨. 겉으로 보기엔 어느 곳 하나 부실한 점이 없어 보였던 서문세가의 자제, 율.
하지만 통성명을 나누고 몇 마디를 더 주고받으며 그에게 유한성 관광을 시켜 줄수록 쌓여 있던 좋은 인상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알고 보면 왕건이가 아니라 골칫거리 아냐?’
말이 많은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길치인 걸로도 모자라 이젠 칠칠치 못하기까지 하다니.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율의 행동에 화령은 입술을 삐죽였다.
“다시 돌아가야 하나…….”
“돌아가긴 뭘 돌아가요.”
“응?”
“잃어버렸으면 그냥 다시 하나를 사면 되잖아요.”
“……!”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