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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손수건을 되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율을 보며 화령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율은 그런 화령의 뚱한 얼굴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어찌…… 아까와는 달라진 것 같소, 은 소저.”
황궁 짬밥 20년이기에 율이 화령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리는 없었다. 처음 그에게 다가왔을 때의 다정했던 모습과는 달리 이제는 말을 걸어도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화령을 바라보며 율이 은근슬쩍 말을 흘리자 화령은 놀라 손사래를 쳤다.
“오, 오호호호.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녀는 처음 그대로이어요.”
“그렇소?”
“예. 서문 공자께서 하루 종일 돌아다니시다 보니 피곤하신 것 같습니다. 오, 오호호호!”
율은 시치미를 떼는 화령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런가 보군.”
‘눈치도 없는 줄 알았더니 귀신같네! 조심해야겠어.’
화령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느새 도착한 은가장의 대문을 가리켰다.
“어, 어머! 버, 벌써 다 왔네요! 얼른 들어가…… 하, 할아버지!”
이 말 많은 왕건이에 대한 처분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화령은 그가 은가장에 기거하는 동안 과한 행동을 삼가야겠다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막 그녀가 대문을 향해 손짓하고 걸어가려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은무열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아니, 어찌 우리 령아와 같이 들어오시는 겁니까?”
화령은 제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의 안위를 먼저 살피는 은무열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율은 빙긋 웃으며 은무열을 향해 말했다.
“은 소저와는 청화루에서 만났습니다.”
헉!
“청화루? 혹 저잣거리의 그 객잔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고개를 끄덕이는 율의 대답에 은무열의 시선이 화령을 향했다. 그녀가 청화루에 가서 남정네들의 얼굴에 점수를 매긴다는 사실을 매번 서찰로 전해 들을 때마다 은무열은 화령을 말렸다. 아무리 무림세가의 여식이라고 하나 그래도 여인이니만큼 시집을 가기 위해서는 조신함을 유지해야 한다며, 가급적 청화루에 들락거리는 것을 삼가라는 명을 내렸던 것이다.
‘아니, 이 왕건이 자식이!’
그냥 어쩌다 만났습니다, 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도 굳이 청화루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율을 죽일 듯 노려보던 화령은 이를 갈았다. 은무열은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화령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들이고는 율에게 물었다.
“그러셨군요! 혹, 우리 령아가 태……공자께 실수를 하진 않았습니까?”
‘실수는 무슨! 내가 얼마나 성심성의껏 저 왕건이를 보살폈는데!’
화령은 이번에도 율이 쓸데없는 말을 내뱉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율의 입술에 눈을 박았다. 율은 은무열의 물음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실수라니요. 아주 즐거웠습니다.”
……어?
“역시, 소문이 사실이던걸요.”
“무슨 소문 말씀이십니까?”
뜬금없는 그의 말에 은무열을 비롯한 화령 역시 의아한 눈빛을 띤다. 율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유한제일미를 보면 없던 기운도 솟아난다는 말, 말입니다.”
율의 말이 끝나자마자 화령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머. 왕건이…… 아니, 서문 공자!’
그에게서 처음 듣는 칭찬에 순간 부끄러워진 화령은 저답지 않게 조신한 미소를 지었다.
“과찬이세요. 서문 공자 덕분에 저도 즐거웠는데요, 뭘.”
“서문 공자?”
은무열은 화령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한 눈빛으로 율을 흘깃거리던 그는 곧, 머릿속에 든 의구심을 지워 버리곤 율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자. 저녁은 드셨습니까? 아직 식사 전이시라면 미리 차려 놓았으니 드시러 가시지요.”
율은 은무열의 제안에 빙긋 웃으며 ‘예.’라고 대답했다.
“참. 은 소저.”
율을 상전 받들 듯 하는 은무열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서문 공자와 할아버지 사이에 뭔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던 화령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려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율의 행동에 걸음을 멈췄다. 율은 잠시 머뭇거리며 쑥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이내 화령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내일 또…… 부탁해도 되겠소?”
……응?
“은 소저와 함께하는 유한 관광이 생각보다 재밌었소.”
“……!”
“그대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일도 은 소저와 함께 움직이고 싶은데…….”
화령은 부드러운 음성의 율의 말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그의 미소에 눈이 부신 것을 보니, 확실히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절세미남인 것은 확실하다. 화령은 그녀가 대답하기만을 기다리는 율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왕건이 자식…….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화령은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왕건이가 말이 많기는 하지만 저리도 조각 같은 얼굴로 살짝 웃어 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가장 피하기 힘들다는 미남계美男計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훌러덩 잘도 넘어간 은화령은 눈꼬리를 살짝 휘며 외쳤다.
“당연하지요! 저만 믿으시라구요!”
얼마 전까지 율의 수다스러움을 탓하던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외침이었다.

제3장. 여인을 얼굴로만 판단했다간 된통 당한다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녔던 터라 발바닥이 따끔거린다. 내일 또 움직이기 위해선 아무래도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율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제 거처인 별채로 돌아와 침상에 몸을 뉘려고 했다.
“즐거우셨습니까?”
그때였다. 후우, 하고 낮은 한숨을 내쉬며 침상에 몸을 뉘려던 율은 제 주변에서 인기척이 사라지자마자 숨기고 있던 몸을 드러내는 검은 무복 사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율의 시야에 그의 신변을 항시 보호하고 있는 호위무사 무영이 들어왔다. 율은 무표정한 무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낮게 웃었다.
“재밌는 소녀가 아니냐.”
율은 하루 종일 자신의 말동무이자 길잡이가 되어 준 화령의 모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선녀 같은 얼굴을 하고 다른 여인들에게서 볼 수 없는 재미난 표정들을 지어 보이던 화령은 율이 지난 세월 동안 보아 왔던 여인들과는 달랐다. 혹시 황궁 밖 여인들이 모두 이런 성향을 가진 건가, 하는 생각도 품어 봤지만 가만히 지켜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분명 하는 행동들은 그를 유혹하는 것이 맞건만 보통 여인들의 유혹법과는 미묘하게 다른 그녀의 유혹을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하다란 느낌이 들었다.
그를 유혹하는 건지 아님 마는 건지. 은근한 접촉도 없고 그렇다고 육탄전도 방불케 하던 황궁 여인들의 유혹과는 다른 서툰 그녀의 유혹 방식에 어느덧 말려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 그래서 화령과 함께 움직이는 동안 그녀의 재미난 표정 변화를 놓치기 싫어 계속 입술을 움직였던 거겠지.
“정말로 재밌어.”
눈에 빤히 보이는 화령의 의도는 불순했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불쾌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웠다. 황궁 밖의 여인들이 모두 다 화령 같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그녀와 같이 순수하다면 좋겠다고 여길 만큼.
그가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마구잡이로 일그러뜨리던 화령의 모습을 율은 놓치지 않았다. 율은 은화령이라는 이름의 소녀의 본색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 * *

서문율이라는 은무열의 귀빈을 만난 다음 날이었다. 은화령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제 방 앞의 화원에서 평소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은가장 내의 남자 하인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참나.’
화령에게 아침 세안 물을 대령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던 소미는 그녀의 행동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적어도 그녀가 알고 있는 자신의 아가씨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꽃들에게 인사를 할 만큼 친절한 여인이 아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기는커녕 정오가 될 때까지 잠을 자는 게으름뱅이에 가까운 여인이 그녀가 모시는 아가씨가 아니었던가!
소미는 넋을 놓고 화령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 하인들을 쫓아내곤 가식적인 미소까지 짓고 있는 화령을 향해 다가갔다.
“아가씨.”
분수병을 들고 화분에 물을 주던 화령은 저를 부르는 소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아. 소미구나.”
“……!”
소미는 꽃보다 화사한 미소를 짓는 화령의 얼굴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화령은 자신을 불러 놓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소미를 보곤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미야. 사람을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
“황소미!”
우리 아가씨가, 미친 것인가!
소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화령의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평소 같았으면 ‘불렀으면 말을 하라고!’라고 외치며 성질을 낼 그녀의 아가씨가 다정한 눈웃음을 지으며 소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미는 ‘난 아무것도 몰라요.’란 표정을 짓고 있는 화령의 표정에 할 말을 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래도 우리 아가씨는 하룻밤 새에 변한 것이 틀림없다. 소미는 입술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싱겁긴.”
화령은 소미의 대답에 옅은 미소를 짓더니 다시 화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분수병을 쥐고 있던 그녀의 손길이 어찌나 우아한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길 정도였다. 소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려고 했다.
“아, 아가씨! 그 소, 손은 왜 그렇게 되신 거예요?”
그러나 소미는 발견하고야 말았다. 분수병을 쥐고 있던 화령의 오른손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하얀 천 조각들을. 저 천 조각들은 붕대가 틀림없다. 소미는 화들짝 놀라며 화령에게 달려왔다.
“아아, 이거?”
화령은 제 손을 덥석 잡으며 그녀의 손 구석구석을 관찰하는 소미의 행동에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밤새도록 누군가의 손수건을 만들기 위해 수를 놓다 바늘에 찔려서 이 꼴이 되었다고 어떻게 말하리오. 이것이 다 어떤 이의 눈에 들기 위한 행동이었던지라 새삼 부끄러워졌다.
화령은 ‘어떻게 된 거예요, 아가씨!’라고 외치는 소미를 눈을 피해 버렸다. 아무래도 소미의 눈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화령은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서문율.
얼굴만 제 취향인 왕건이 자식을 대체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입을 열지만 않는다면 제 낭군으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건만. 그놈의 입을 나불거리는 것을 잠시도 쉬질 않으니, 원.
그렇다고 해서 왕건이를 포기하는 것은 못내 아쉽기만 해 화령은 그의 마음에 들 몇 가지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일이 바로 왕건이가 잃어버렸다는 손수건을 직접 제작하는 것이었다.
‘바느질을 해 봤어야 말이지!’
검으로 나무를 베어 본 적은 있어도 천 조각 위에 수를 놓는 지극히 여성적인 행동은 해 본 적이 없었던 화령은 소미도 몰래 율에게 선물할 손수건을 손수 제작했다. 그로 인해 그녀의 고사리 같은 손은 상처투성이로 변했지만, 밤까지 꼴딱 새며 율에게 줄 손수건을 완성시킨 화령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했다. 덕분에 눈길도 주지 않던 화원의 꽃을 가꿀 생각까지 했으니까.
“은 소저, 좋은 아침입니다.”
이 상처는 어디서 난 거냐며 소미가 화령을 닦달하고 있을 때였다. 화령은 자신이 있던 곳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가슴이 미친 듯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율이 아침부터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갑작스러운 율의 등장에 소미는 화령을 몰아붙이는 것을 그만두고 뒤로 물러났다. 화령은 율의 미소에 화답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서문 공자시군요.”
그녀는 답지 않은 다소곳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렇게 이른 시각부터 화원을 가꾸고 계시는군요. 보기 좋습니다.”
율은 화령에게 다가오다 그녀의 손에 들린 분수병을 발견하곤 말을 건넸다. 화령은 수줍게 웃었다.
“꽃들엔 늘 관심을 가져 줘야 하거든요.”
“은 소저는 부지런하시군요.”
“예전부터 해 오던 일인데요, 뭘.”
후훗, 하고 낮게 웃던 화령의 대답에 그녀의 뒤에 있던 소미가 경악을 한다. 화령은 자신을 보며 웃는 율의 모습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려들고 있군! 혹시나 싶어 꾸몄던 약간의 연극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율의 눈빛이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에 대한 왕건이의 관심도가 높아 가는 것을 느낄 무렵, 화령은 준비했던 ‘그것’을 율에게 건네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저…… 서문 공자.”
함께 아침을 먹으러 가자고 말한 율의 뒤를 따라 움직이던 화령은 그의 커다란 등을 가만히 응시하다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러시오, 은 소저?”
율은 화령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쿵쿵.
화령의 가슴은 율의 영롱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거세게 요동쳤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품에 지니고 있던 손수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이오?”
율은 얼떨결에 화령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령은 쑥스러운 듯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제, 공자께서 손수건을 잃어버리셨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
“함께 찾으러 가지 못한 것이 줄곧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여, 부족하지만 직접 만들어 보았어요. 공자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화령은 말을 끝내곤 율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잠자코 기다렸다. 자신 같은 미인이 직접 만들어 준 손수건에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남자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보이는 그의 짙은 미소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고맙소, 은 소저.”

* * *

“왕건이 자식의 웃음 한 번에 정신을 못 차리다니. 은화령, 너 왜 이렇게 되었냐.”
아무리 지워 내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번 뛰기 시작한 심장은 도통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화령은 그녀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들고 눈부신 미소를 쏘아 대던 율의 얼굴을 잊지 못한 채 고개를 휙휙 저었다.
“하여간 얼굴 하나는 대박이라니까.”
그리 말이 많아도 화령이 율에게 관심을 떨칠 수 없는 까닭은 그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제 남자로 만들 수 있을까? 일단 호감은 산 것 같은데. 타인을 유혹해 본 경험이라곤 없었던 화령은 한숨만 푹푹 내쉬며 닿을 듯 닿지 않는 율과의 거리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은화령!”
……!
율에게 당과의 맛을 보여 주겠다며 그와 함께 저잣거리로 나온 화령은 오늘따라 긴 상점 앞의 줄에서 제 차례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미에게 직접 심부름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왠지 제가 직접 율에게 당과를 건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제 차례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는 생각에 입술을 삐죽이던 화령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제길.’
주장미와 이소영. 천천히 고개를 돌렸던 화령의 눈에는 불이라도 뿜어낼 기세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두 여인이 들어왔다. 화령은 성난 얼굴로 제게 다가오고 있는 두 명의 여인들을 바라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된 거야! 어제 그 남자는 대체 누구야!”
“그래! 은화령. 사실대로 말해! 장미가 봤다는 남자가 대체 누군데 얘가 이 난리야! 무슨 사인데?”
‘아니, 이것들이 대체 누구한테 이렇게 들이대는 거야! 당장 안 떨어져?’ 라고 대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화령은 최대한 본색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어머, 내 소중한 친구들이 아니니.”
“……뭐?”
“으, 은화령?”
“너희도 당과를 먹으려고 그러는 거야? 후후. 그럼 진작 말을 하지. 내가 너희들 것까지 사 주면 되잖아.”
화령은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절친한 친구들이자 숙명의 천적들이나 다름없는 두 여인은 저들의 외침에 버럭 소리를 지를 것이라 예상했던 화령이 돌연 내숭을 떨자 입을 쩍 벌렸다.
“은화령. 왜 이래?”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야. 정신 차리고 얼른 안 불어? 그 남자 누구냐구!”
두 사람은 화령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그녀들은 무지막지했다. 화령의 가녀린 어깨를 잡아 흔들면서 바락바락 외쳤다.
‘이것들이 어딜 잡는 거야!’
너무 세게 그녀의 몸을 흔드는 그들로 인해 순간 성질이 나 본색을 드러내려 했던 화령은 당과점 앞에서 일어나는 소란에 다른 곳을 구경하던 율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화령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힘없이 중얼거렸다.
“으윽. 얘. 얘들아. 너무 아파.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니…….”
무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무공과 함께 자라 온 은화령에게 있어선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두 여인들의 행동은 간지럼에 불과했다. 그러나 율의 앞에서 자신이 그 어떤 여인들보다 가련하고 보살펴 주고 싶을 만큼 여리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했다. 화령이 작정하고 연극을 시작하자 당황했던 것은 오히려 두 여인들이었다.
“뭐?”
“아니 얘가 진짜 왜 이러는 거…… 헉!”
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은 소저, 괜찮소?”
예상대로 율은 소란의 한가운데 화령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헐레벌떡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화령은 픽 쓰러져 버린 자신을 부축하는 율의 손길에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구 말구. 얘들이 꼬집는 건 별거 아니어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화령은 꾹 참았다.
“서, 서문 공자…….”
대신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율을 바라봤다.
갑자기 들이닥친 웬 사내로 인해 얼굴을 일그러뜨리려던 두 여인은 그의 얼굴을 보곤 한참 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순식간에 그에게 시선을 빼앗겨 버린 두 여인들을 보고 화령의 입꼬리가 사악할 정도로 길게 찢어졌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오.
그녀들은 어느새 화령을 꽉 잡았던 팔을 스르르 풀어 버리며 뒤로 물러났다. 율은 비틀거리는 화령을 부축해 주곤 날카로운 눈으로 넋을 놓고 있는 두 여인들을 향해 말했다.
“소저들은 누구신데 은 소저를 이렇게 괴롭히시는 거요?”
“예?”
“저, 저희가요?”
“은 소저가 이리도 괴로워하는 것이 안 보이오? 은 소저. 진짜 괜찮소?”
화령은 가련한 얼굴로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녜요! 저희는 괴롭히려던 게 아니라…….”
“괴롭히려던 게 아니라면 왜 은 소저가 이렇게 창백한 거요?”
“그, 그건……!”
율의 미모에 얼이 빠진 주장미가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소영이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장미야. 이, 일단 가자. 상황을 보니, 저게 작정을 했어. 다음에 다시 오자!”
“뭐? 그, 그래도!”
“일보 후퇴다! 은화령. 오늘 일은 꼭 해명해야 해. 알았어?”
화령이 감쪽같은 연극을 하고 있는 만큼 그녀를 쉽게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여긴 이소영이 머뭇거리는 주장미를 데리고 내빼자 화령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저 여인들은 대체 누구요?”
말릴 사이도 없이 사라지는 그녀들을 가만히 보고 있던 율이 의아한 얼굴로 화령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화령은 어두운 표정으로 율의 질문에 답했다.
“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여인들이에요. 가끔씩…… 저렇게 몰려와 저를 괴롭힌답니다. 흑.”
“아니, 그런!”
고개를 떨구는 화령을 보고 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론 단단히 주의를 주는 것이 좋겠소.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저렇게 질이 나쁜 여인들을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은 소저께서 더욱 고통을 입으실 테니 말이오.”
“어머……. 공자.”
화령은 감격했다는 눈으로 율을 바라봤다.
이로써 주장미와 이소영은 율에게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리라.
친구들을 팔아서까지 그에게 환심을 사려던 그녀의 계획이 성공을 거두자 자꾸만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차는 율의 모습에 또 다른 매력을 느끼며 다시 고민에 휩싸이던 화령은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어찌합니까. 공자께 유한의 당과를 맛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소란을 피워 버렸으니…….”
“아, 괜찮소. 당과는 다음 기회에 먹으면 되니.”
“공자님…….”
“그나저나 은 소저.”
화령은 그를 보며 눈을 반짝거리는 자신을 향해 말을 건네는 율의 얼굴을 직시했다. 율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소저를 기다리는 동안 하고 싶은 일이 생겼소.”
“하고 싶은 일이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화령을 바라보며 율은 힘차게 대답했다.
“은하호銀河湖에 가보고 싶소.”
뭐?
“유한을 관광할 목적이라면 은하호를 빼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하더이다. 마침 은하호 주변을 도는 유람선이 하나 있다고 하던데……. 어떻소? 소저도 나와 함께 가시지 않겠소?”
별빛처럼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 화령의 속은 문드러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