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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은화령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배. 그것도 강에 둥둥 떠 있는 배였다.
커다란 강을 끼고 있는 도시 유한에서 나고 자란 그녀였지만 은하호에 자주 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배에 발을 내딛기만 하면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배가 강 위를 움직이면 눈앞이 아찔해졌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갔다.
‘령아야. 너는 뱃멀미가 있구나.’
은가장의 모든 식솔들과 유람선을 타고 축제를 즐기던 중 구역질을 억제하지 못하는 화령을 향해 은무적은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말했었다.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자신으로 인해 화가 나 몇 번이고 배를 타서 멀미를 고쳐 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령은 그 날 이후로 가급적이면 은하호 쪽으로는 발길도 돌리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은하호 구경을 가자는 율의 제안은 엄청난 번뇌를 하게 만들었다.
‘왜 그러시오, 은 소저? 낯빛이 좋지 않구려.’
짧은 시간 동안 화령은 고민했다. 과연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님 말아야 할 것인가. 멀미를 참을 수 있을 것인가, 참지 못할 것인가. 배에 발을 내딛는 것은 율과의 인연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었지만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화령은 그의 앞에서 뱃멀미를 할 수도 있었다.
‘은 소…….’
‘좋아요!’
엄청난 기로에 놓였던 그녀의 고민은 의외로 길지 않았다. 화령이 배와 상극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아주 어릴 적의 일. 지금 다시 도전해 보면 상황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녀는 서문율이라는 왕건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야말로 완벽한 그녀의 낭군 후보 1순위였으니까.
‘끄응…….’
하여 지금 은화령은 은하호 한가운데 둥둥 떠 있는 배의 한 모퉁이에서 뛰어난 절경을 보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는 율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멀미를 참고 있는 중이다. 이래 봬도 무공깨나 하는 여인이건만 이렇게 멀미가 심한 이유는 도통 알 수가 없다.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율에게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억지로 서 있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이젠 괜찮아졌을 거라 생각했던 뱃멀미가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눈앞이 뱅글뱅글 돌아갔고 머리가 깨질 듯 어지러웠다. 설상가상으로 속까지 울렁거려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으으. 망할…… 왕건이 자식…….’
자꾸만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구역질에 화령은 괜히 즐거워 보이는 율을 원망하고 있었다.
“아하하하. 역시 명성대로요! 아름답소! 정말로 아름답소!”
그는 힘들어하는 화령을 아직 보지 못했는지 연신 두리번거리며 호수 위에서 펼쳐지는 주변의 절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듯했다.
“은 소저. 소저도 얼른 보시오. 정말 아름답기 짝이 없소!”
귀가 웽웽 울렸다.
“저기 저 봉우리는 대체 무엇이지? 저곳에 가 본 적은 있으시오?”
아침에 먹은 것이 올라오려는 것 같다. 안 되는데…….
“저 배는 무엇이오? 유람선보다는 작은데?”
빌어먹을 왕건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귀에 들어오질 않는다.
“여긴 강태공들이 많구려! 저자가 낚은 고기를 보았소?”
아아, 시끄러워.
“은 소저. 저것 좀 보시오!”
“은 소저!”
“소저!”
“은…….”
“웩!”
그것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누구도 막을 틈도 없이, 숨 가쁘게.
은화령의 입 사이에서 노란 액체가 쏟아져 내린 것은 계속해서 그녀를 흔들며 화령의 대답을 요구하던 율의 행동 때문이었다.
“웩! 으웨엑!”
화령은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놀란 율의 옷에 대고 시원하게 식도를 막고 있던 모든 음식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율은 그런 화령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며 얼이 빠진 듯 한참이나 서 있었다.

* * *

‘치욕이야!’
그것도 아주 큰 치욕.
열아홉. 평생을 떠받들어지며 살아온 그녀의 찬란하게 빛나는 인생에 있어서 이런 굴욕은 난생처음이었다. 유한제일미라 불리던 화령이 외간 남자의 몸에 구역질을 했다는 소문은 아마 지금쯤이면 유한성 내의 모든 이들의 귀에까지 들어갈 정도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제기랄.’
은화령은 얼굴이 참을 수 없이 화끈거린다는 것을 느끼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잠깐의 소동 후 얼른 배에서 내린 두 사람은 선착장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청화루로 들어갔다. 방 하나를 빌려 그곳에 자리를 잡고는 숨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을 발견한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얼른 겉옷을 벗으라는 소미의 명을 따랐다. 율의 백의는 결국 뱃멀미를 참지 못한 화령의 구토에 의해 헌신짝처럼 버려졌고, 화령 역시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소미가 두 사람의 옷을 사러 밖으로 나간 사이, 율은 제게 구토를 쏟아 낸 후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화령의 눈치를 살폈다.
‘이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화령의 낯빛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진작 알아챘어야 하건만 은하호에서 펼쳐지는 주위의 절경에 시선을 빼앗겨 그것을 놓쳐 버린 것이 오늘 일의 시작이었음이라.
그녀가 그에게 토악질을 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는 화령을 보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그녀의 상태를 살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율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화령을 향해 입술을 열었다.
“으, 은 소저. 괘, 괜찮소?”
오늘의 일로 화령은 태자에게 토악질을 한 여인으로 후일 역사서에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화령을 달래 주기 위해 율이 말을 건네자 그녀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율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뭐,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고 저런 일도 생기는 것이 아니겠소? 다행히 옷이야 갈아입음 되니 문제가 없을 것이오.”
화령은 웃는 율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흠흠. 물론 소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본 사내들이 꽤 많긴 했지만…… 그깟 토악질 한 번에 소저를 흠모하는 수많은 사내들이 마음을 돌리지는 않을 거요.”
자존심이 세 보이는 화령이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을 달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율은 성심성의껏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내 장담하지. 소저의 오늘 모습을 보고 은 소저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낀 사내들이 많을……!”
“때려치워.”
……뭐?
율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화령은 음산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러곤 화령은 탁자 옆에 세워 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으, 은 소저?”
율은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스릉!
“다…… 끝났다고!”
그녀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고 율을 향해 겨누었다.
“으, 은 소……!”
“이제 당신의 비위는 그만 맞출 거야!”
라고, 버럭 외치는 화령의 눈은 용암보다 뜨겁게 이글거렸다.

제4장. 왕건이의 제안은 참으로 쏠쏠하구나


황제의 장자로 태어나 태자로 책봉 받고 후계 교육을 받으며 이십 년을 살았다. 그런 와중 단 한 번도 그의 목에 검을 겨눌 만큼 간이 큰 자를, 율은 본 적은 없었다. 태자를 위협하는 일은 일어날 수도, 그리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일을 벌인 당사자는 목표를 향해 검을 뻗기도 전 태자를 호위하는 절정의 무공을 지닌 황궁 고수들에게 저지당할 것이고 사지가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는 처참한 죽음을 맞게 되었을 테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 다음으로 제일가는 권력을 가진 신분.
장차 황제의 뒤를 이어 진을 다스릴 태자라는 신분은, 더할 나위 없이 고귀했다.
문제는 부들부들 떨며 살의를 불태우는 화령이 율이 진나라의 태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취한 행동이 이 얼마나 불경한 일인 줄도 모르고 감히 나라의 태자인 율에게 칼끝을 대고 있는 화령은 그를 서문세가의 막내인 서문율로만 알고 있다.
게다가 현재 그녀의 사고회로는 얼마 전 있었던 ‘토악질 사건’으로 인해 정지되어 버려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했다. 모든 일은 눈앞의 이 작자로 인해 발생하였다! 라는 생각 하나로 율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화령은 율에 대한 살심을 전혀 숨기지 않고 있었다.
‘풋!’
그러나 이상한 것은 분명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건만 지금의 상황이 그리 위협적이지 않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었다. 태자의 옥체에 흠집을 남길지도 모르는 화령의 검이 제 목을 향하고 있는 이 상황이 율은 재밌었다.
입술을 파르르 떨며 분노하고 있는 눈앞의 소녀가 아니면 감히 누가 그에게 검을 겨누겠냔 말이다. 저에게 못 볼 꼴을 보인 걸로도 모자라 그 모습을 무마하기 위해 검까지 겨누는 여인이라니. 율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전하.]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는 대치 상황.
율과 화령이 서로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다물곤 숨 막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을 때, 그의 귀에 무영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무공 고수들 중에서도 절정의 경지에 오른 이들만 사용한다는 전음술 중 하나인 전음입밀傳音入密이란 무공을 무영이 시전했던 것이다.
[저지할까요?]
율은 이 방 어딘가에 숨어 있을 무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저었다. 잠시 이성을 잃어 이런 돌발적인 행동을 하기는 했으나 화령이 그를 해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화령의 할아버지인 은무열의 귀한 손님이었고 그녀 역시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갖은 아양을 떨어 왔으니까. 아마 곧 정신을 차리게 된다면 성급했던 제 행동을 탓하게 되겠지.
율은 여유로운 눈빛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는 화령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봐, 서문율! 대체 어딜 보는 거야? 내가 지금 말하고 있잖아!”
화령은 율의 태연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화령은 날카로운 검날을 율에게 들이밀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율은 시선을 느릿하게 화령에게 옮기며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은…… 소저. 일단…… 검을 치우고, 얘기하도록 합시다. 진……정하시오.”
율이 말을 쉽게 잇지 못한 것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것을 오해한 화령은 더욱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이 왕건이 자식아!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왕건이?
“혹, 날 가리키는 말이오?”
화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율을 보며 소리쳤다.
“그래, 이 자식아! 당신, 아니 네가 바로 왕건이다!”
왕건이……라.
거, 이상한 별명이군.
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이나 그 단어를 되뇌었다. 화령은 상념에 빠진 율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너 때문에…… 내가…… 흐으…… 왕건이 너 때문에!”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고작 이틀 새에 일어난 일이 너무 많아 감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늘 높이 쌓아두었던 그녀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발톱의 때만도 못할 정도로 무너져 버렸다는 사실은 화령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여전히 검을 그의 목에서 떼지 않고 한탄하듯 외쳤다.
“내가 배는 다음에 타자고 그렇게 말했건만…… 굳이 타고 싶다고! 유람선 한 번 안 타 봤다고!”
“으, 은 소저.”
“한월에 호수가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유람선 한 번 못 타 봤다는 게 어찌 말이나 되냐고! 배 처음 타냐고! 차마 뱃멀미가 있다는 말을 하지 못한 내 심정은 어땠겠냐고!”
뱃멀미가 있었다면 미리 말해 주면 좋았을 것을.
율은 아직도 하얗게 질린 화령의 얼굴을 흘깃거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좋아. 배 타는 것까지는 내가 이해하지. 이해는 안 가지만 진짜 처음 탈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사람이 좀 아파 보이면 말은 그만 시켜야 할 거 아니야! 어찌 사내가 그리 말이 많냐고! 남자가 좀 진중한 맛이 있어야지! 그렇게 말이 많아서야 어디 쓰겠냐고!”
뭔가 묘하게 어긋한 것 같은 그녀의 말은 율을 충격에 빠뜨렸다.
‘내가…… 말이 많았던가?’
그러고 보니 그녀 앞에서 쉬지 않고 입술을 움직였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쏟아 낸 말을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의도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를 괴롭힌 꼴이 되어 버린 율은 다시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은 소…….”
챙!
바락바락 소리를 내지르고 숨을 크게 들이쉬던 화령이 돌연 그에게 겨누었던 칼을 거두자 율은 그녀를 부르려다 말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검의 마찰음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흑.”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율이 잠시 당황하는 사이 화령은 끝내 닭똥 같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다 끝났어…….”
어떻게 해 볼 도리도 없이 좔좔 흘러내리는 화령의 눈물을 보고 율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여인의 눈물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참고 있기 힘들 정도로 안쓰러운 마음이 든 적은 없었으니까.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저 눈물을 닦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을 만큼 그는 크게 동요했다.
“으, 은 소저. 우, 울지 마시오.”
율은 주저앉은 그녀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가 말했다. 화령은 그런 율의 행동에도 아랑곳 않고 울먹였다.
“흡. 흐윽. 다 끝났다구…… 당신 때문에, 난 이제 끝이야.”
“소저……. 그만 우시오…….”
그 딴엔 달랜다고 건넨 위로의 말이었지만 이미 심기가 뒤틀린 화령의 귀에는 짜증나는 목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율을 노려보며 버럭 외쳤다.
“흑. 우, 울든 말든 내 맘이야! 당신이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 그냥 입 닫고 있어!”
그 말에 율은 진짜로 입을 다물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은근슬쩍이라도 그에게 책임을 전가할 계획을 품고 있었던 화령은 제게서 멀찍이 물러나는 율을 보며 다시금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 나쁜 왕건이 자식, 이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며.

* * *

화령이 세상이 무너져라 터뜨리던 울음을 그친 것은 포목점에서 화령과 율이 입을 의복을 사온 소미가 당도하고 나서였다.
‘아, 아가씨!’
바늘로 찔러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것 같은 독하디독한 제 아가씨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소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율을 의심했다. 그가 자신이 울린 것이 아니라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어도 소미는 믿지 않았다.
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한 번 터진 울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아 한참이나 고생하던 화령은 반 시진 만에 겨우 안정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당혹스런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율의 모습을 발견하곤 그와 이야기할 것이 있다며 소미를 방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마치 언제 울었냐는 듯,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탁자 앞 의자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숨을 골랐다.
율은 급작스런 그녀의 변화에 신기해하면서도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화령의 눈치를 살폈다. 화령의 눈빛이 잠잠해지자 그가 입을 열었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되시오?”
화령은 들고 있던 찻잔을 천천히 탁자로 내려놓았다.
“아니요. 아직도 화가 납니다.”
율은 입은 웃으면서도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화령을 보고 굳어 버렸다. 화령은 말을 이었다.
“당장이라도 공자의 목을 비틀어 버려 이 분노를 삭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더 이상의 추태를 보이기는 싫어 참고 있는 중이랍니다. 호호호.”
“……!”
“그러니 공자께선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심기가 뒤틀리면 할아버님의 귀빈이고 뭐고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요. 아까 보시었죠? 소녀는 힘이 꽤 세답니다.”
섬뜩한 말을 내뱉는 화령의 눈은 결코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다. 주르륵. 등 뒤로 굵은 식은땀이 살짝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질 만큼 오싹하다. 율은 어색하게 그녀를 따라 웃었다.
“어찌 되었든…… 서문 공자.”
“마, 말하시오, 은 소저.”
화령은 서둘러 대답하는 율을 바라보았다.
“오늘, 이 방에서 있었던 일을 밖에서 발설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
“아.”
“만약 제가 공자께 칼을 겨누고 난리를 부렸다는 이야기를 이 방 밖에서 듣게 된다면…… 정말로 그때는 공자도 죽고, 나도 죽는 거지요. 아시겠습니까?”
화령은 다시 한 번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무척이나 살벌한 협박이었지만 그것이 꽤 귀엽게 느껴져 율은 한참이나 그녀를 응시했다.
“뭘 봐요. 내 말, 못 들었어요?”
화령이 멍한 얼굴로 저를 응시하는 그를 향해 톡 쏘자, 율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반 시진 전 일어난 일은 하나도 기억하고 있지 않소.”
화령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흥. 그럼 다행이네요.”
“저…… 은 소저.”
“왜요.”
토악질을 한 사실만으로도 찬란하게 빛나던 그녀의 명성에 흠집을 낼 일이건만 여기에 사내를 협박했다는 소문까지 떠돈다면 정말로 유한성 내에서 그의 낭군감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미 율을 낭군으로 삼겠다는 희망은 가차 없이 내던졌던 화령은 더 이상 그에게 내숭을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율은 그런 화령의 틱틱거리는 목소리에 조금 놀란 눈빛을 띠더니 아까부터 줄곧 머릿속에 머물던 말을 내뱉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오.”
“말하세요.”
“그 끝났다는 말…….”
응?
“대체 뭐가 끝이 났다는 거요?”
궁금해 죽겠다는 눈빛으로 저를 직시하고 있는 율을 보며 화령은 말을 잃었다. 그에게 그녀의 본심을 말해 주어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율이 다시 그녀를 부른다.
“은 소저?”
“좋아요.”
화령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를 바라봤다.
“일이 이렇게 된 거, 말하도록 하죠.”
구토에 위협에 살기까지.
더 이상 그에게 숨길 것이 없을 만큼 본색을 드러냈고, 또 그를 제 낭군 후보 순위에서 제외한 이 마당에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만약 지금 털어놓지 않는다면 이틀에 걸쳐 그녀 나름대로 파악한 율의 성격으로 보아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그녀를 괴롭힐 것이 틀림없었으니까.
어차피 내일부터는 이 작자와 함께 다니는 일은 없을 것이라 여긴 화령은 마지막 인심이라도 쓰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저는 현재 낭군님을 찾고 있어요.”
“낭군?”
“네. 그것도 절세미남 급의 외모를 가진 낭군님을요. 그러던 와중에 어제 서문 공자를 보았죠.”
율은 크게 놀란 눈으로 화령을 쳐다보았다. 화령은 말을 이었다.
“공자를 처음 보는 순간, 저는 공자가 제 낭군이 되어 주었으면 했어요.”
“코, 콜록콜록!”
뭘 그리 놀라.
“차 마실래요?”
“괘, 괜찮소.”
율은 화령의 일격에 크게 당황한 듯 컥컥거렸다. 차마 그녀를 바라보지 못하고 빨개진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봐. 이젠 아니라니까?’
화령은 수줍어하는 그를 흘깃거리다 입술을 씰룩거렸다.
“했어요, 란 말은 이제 아니란 말이오?”
그녀의 입에서 저리도 직설적인 이야기가 새어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율은 그런 제 모습을 미동 없는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화령을 발견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화령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저는, 얼굴이 아무리 잘생겨도 말 많은 데다 절 피곤하게 만드는 사내는 싫거든요.”
“윽.”
똑 부러지는 그녀의 말에 왠지 가슴이 욱신거려 율은 멍한 눈으로 그녀의 입술을 응시했다.
‘원래 말이 많은 것은 아니오.’ 라는 말이 이상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질 않는다. 율은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하고 화령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그것과 끝났다는 말이 대체 무슨 상관이오?”
화령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율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모르시겠어요? 전, 낭군감을 구하고 있다구요.”
“그래서?”
“헌데 제가 오늘 유람선에서 차마 못 볼 꼴을 보이고 말았잖아요!”
“아…….”
수긍하는 율을 보자니 가슴이 더욱 쓰리다. 화령은 토악질을 하던 제 모습에 기겁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유한제일미라 불리며 칭송받는 저를 보며 사내들은 환상을 갖고 있었다구요. 그런데 오늘 그 망할 배에서 발생한 일 때문에 사내들이 제게 품고 있던 환상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단 말이에요!”
“그건 어, 어쩔 수 없는…….”
“하아. 그래요.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죠. 그렇지만 못 보셨어요? 공자의 몸에 토악질을 하는 저를 보며 굳어지는 그들의 얼굴을?!”
율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화령은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삭이며 말했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멋진 낭군과 혼례를 올리는 것이 제 유일한 목표였는데, 이러다가 유한에서 저와 혼인하고 싶어 할 이가 하나도 없을까 두렵다구요!”
“서, 설마 없겠소?”
율이 서둘러 말하자 화령은 버럭 외쳤다.
“아무나랑 혼인하겠다는 것도 아니란 말이에요!”
“그럼?”
“제 낭군 될 사람은 서문 공자 저리 가라 할 미남이어야만 해요! 아님 주장미랑 이소영 고것들에게 복수를 할 수 없…… 아, 뭐, 이건 공자가 몰라도 되는 일이니 그냥 넘어가요.”
말을 얼버무리는 화령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율을 바라보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하여간…… 망했어요. 망했다구요.”
“…….”
“괜히 내숭을 떨어 가지곤.”
“흠흠.”
“하아……. 이제 유한성 내에서 미공자는 찾기는 글렀어.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