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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울먹이는 화령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자 율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다. 거의 반쯤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가 되어서야 제 행동을 눈치채고는 얼른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만약, 무심코 뻗어나가는 손을 쳐다보지 못했더라면 자신은 이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리라.
‘이상하군.’
그녀가 흑심을 품고 자신에게 지나칠 정도로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낭군 후보에 올려놓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단지 얼굴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고선 말이지.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자신이 그 낭군 후보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불쾌해졌다는 말이 더욱 정확하리라. 말 많은 것 빼고 내가 부족한 게 어디 있냔 말이지. 한 나라의 제왕의 자리에 오를 예정인 데다 덕도 많지, 배려심까지 넘치는 자신이 뭐가 어때서?
‘제길.’
평생을 함께할 낭군감을 고르는 데 있어서 외모가 전부는 아니건만 이 소녀는 멋도 모르고 미래의 반려를 정하려 하고 있었다. 인품, 환경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철부지 소녀의 조금 많이 어설픈 결혼관. 율은 그것이 무척이나 탐탁잖았다.
“유한에서 찾을 수 없다면, 다른 곳에서 찾으면 되질 않소?”
하여, 저도 모르게 꺼낸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어디 남자가 유한에만 있겠소? 더 큰 세상에서 소저의 낭군을 찾으란 말이오.”
결국은 그녀의 인생뿐 아니라, 그의 인생마저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그 말을.
화령은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표정을 짓는 율을 보고 되물었다.
“공자께서 말하는 더 큰 세상이 어딘데요?”
율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음, 글쎄. 예를 들자면…… 무림!”
……무림?
화령은 자신이 말을 내뱉고도 놀란 눈을 하고 있는 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왕건이 이 자식은 무림이 누구 애 이름인 줄 아나.’
명색이 무림세가의 자제라면서 무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는 듯한 그의 번지르르한 얼굴을 흘깃거리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이라고 하셨어요?”
율은 저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화령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다. 어휴.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으며 화령은 천천히 그를 불렀다.
“서문 공자. 공자는 무림이…… 정해진 어느 지역 이름을 가리키는 건 줄 아세요?”
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이 아니오?”
내가 미쳐.
“당연하죠. 무림武林은 어느 곳이나 될 수가 있어요. 무인들의 세계를 가리키는 말이 무림이라구요. 지역 따위를 가리키는 게 아니에요.”
그녀의 말을 듣던 율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물론 무림인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무림맹武林盟이 있는 예천叡天을 무림이라고 칭하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극히 드물죠.”
율은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화령이 해 준 말은 그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무림이라는 세계가 황궁 밖에 있다는 사실을 듣고 신기해하며 한 번은 경험해 보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으니까.
사람이 신선이 된다고는 말도 전해지고 각종 영물도 만날 수 있다는 환상 속의 세계가 궁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 그에게 있어선 낯설게만 느껴졌다. 대체 그곳은 어떤 곳이냐 물어도 아무도 시원한 답변을 들려주지 않았다. 무림은 황궁과 미묘하게 대치 상황을 이루고 있었던 곳이었으니 말이지.
참다못해 과거 잘나가던 무림 고수였다는 소문이 들리는 무영에게 물어도 ‘위험한 곳입니다. 태자 전하께선 관심을 가지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란 무뚝뚝한 답변만 들려와서 더 묻지도 못했다.
하여 율은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수 없이 서책으로 접했다. 황궁 서고에 들러 하루 종일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들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글로 접하는 무림이라는 세계는 신비로웠다. 더 이상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자신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일 것이라고.
그러나 화령의 말을 들어 보면 그가 알던 지식은 광대한 무림의 새 발의 피나 다름없었다. 충격과 동시에 스스로가 우스워지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황궁이라는 새장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였다. 자유로운 한낱 무림 소녀보다 아는 것이 없는.
화령은 굳어진 율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제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겠어요?”
물론 율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이 좁은 유한성에서 은화령이 원하는 완벽한 낭군감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 몇 번의 조사로 인해 유한성 내의 사내들에 대한 정보를 대부분 얻어 냈던 화령의 마음에 드는 이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오죽하면 외지의 인물이었던 율을 유혹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내숭을 부렸겠는가. 좁다면 좁다고 할 수 있는 유한성 내에서 제 낭군감을 찾기는 힘들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유한 밖에서 제 낭군을 구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화령이 유한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만 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소란을 떨어 대는 아버지를 넘어설 수 있는 묘책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은가장의 가주 은무적은 지나칠 정도로 제 여식들을 아꼈다. 해서 그녀들을 유한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전부 들어주었던 은무적일지라도 그것만큼은 단호했다.
오직 그녀들이 유한 밖을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혼례를 올려 낭군과 함께 유한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방법이었다.
“저도 무림을 겪어 보고 싶다구요. 하지만, 허락을 하지 않으시는 걸 어떡해요.”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화령의 모습은 안아 주고 싶을 만큼 그의 본능을 자극했다. 뒤늦게 충격에서 벗어난 율은 그런 화령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은가장의 가주가 못 말리는 딸바보라고 했었지.’
생기 없는 그녀의 말에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른 생각에 그의 눈빛이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화령은 갑자기 저를 바라보며 씨익 웃는 율의 화사한 미소를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척 보기에도 수상쩍어 보이는 그를 향해 화령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율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은 소저. 소저는 무림에 가 보고 싶소?”
화령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무림세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무림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것은 치욕 중의 치욕이에요!”
“그럼, 내가 소저를 도와준다면…… 함께 가겠소?”
뭔 소리래.
그녀는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율은 얼굴에서 당혹감을 지워 내고 유려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소저를 무림에 데려가겠소.”
“…….”
“은 소…….”
“……정말이에요?”
화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로, 공자께서 절 무림에 데려가 주겠다구요?”
토끼 눈을 뜨고 있는 그녀는 아주 귀엽다. 율은 놀라는 그녀의 모습에 제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율은 미소를 지으며 화령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 정도면 그녀가 많은 이들의 앞에서 토악질을 한 일을 위로할 수 있으려나. 율은 그녀의 반응을 기대하며 화령을 응시했다.
“……공자.”
그러나 화령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못 미더운 눈으로 율을 노려보더니 입술을 움직였다.
“혹시, 저한테 관심 있어요?”
화령은 당황해 말을 잃은 율을 몰아붙였다.
“이상하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세상의 어떤 남자가 관심도 없는 여자한테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을 해요? 안 그래요?”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엉겁결에 제안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말은 자신조차도 놀랐던 말이었으니까. 화령은 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이제 공자한테 아무 관심도 없어요. 아니, 관심을 끄기로 했어요. 이미 공자는 제 낭군 후보에서 제외됐다니까요?”
“으, 은 소저! 그게 아니오!”
“그게 아니면 뭔데요? 왜 저랑 단둘이서 여행을 가려고 하는 거죠?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사람들은 전부 공자가 제게 흑심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말할 거라구요!”
“나, 난…….”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단지 그녀의 결혼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율은 식은땀이 등 뒤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 여인은 그를 아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흥’, 하는 화령의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율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하는 수 없이, 진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나도 그 기분을…… 알기 때문이오.”
율과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 나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던 화령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곧, 제 귀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율의 목소리에 거짓말처럼 행동을 멈추었다. 율은 쓰게 웃으며 화령을 바라봤다.
“새장에 갇힌 새처럼, 바깥을 구경하고 싶어도 구경할 수 없는 소저의 마음을…… 아주 잘 알기 때문이지.”
그는 흔들리는 화령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대에게 기회를 주고 싶소. 나와 함께, 세상을 구경할 기회를.”
율은 진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화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령의 보석 같은 눈동자는 크게 요동쳤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할까. 이왕이면 함께 갔으면 좋으련만. 왠지, 심심하지도 않을 것 같고. 율은 화령과 함께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즐거운 시간이 될 것이다. 그녀와 함께하는 여행은. 그렇게 한동안 긴장한 얼굴로 율이 화령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
“서문 공자!”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율의 손을 화령이 덥석 잡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공자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내였군요!”
다 죽어 가는 불씨마냥 꺼져 가던 화령의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율은 화령의 등 뒤로 눈부신 후광이 비친다고 생각했다.
“흐, 흠.”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인과의 갑작스러운 접촉은 흔치 않은 일이었으니까. 율은 쉴 새 없이 뛰는 심장으로 인해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 말을 더듬을 뻔했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곤 평생의 구원자를 바라보는 눈동자로 저를 올려보고 있는 화령을 향해 짐짓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단, 조건이 있소.”
율에 대한 의심을 거둔 화령은 다급히 물었다.
“뭔데요?”
율은 화령의 부담스러운 눈빛에 픽,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소저가 무림에 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 낸다면, 소저는 무림에 나가는 동안 나의 안내원이 되어 주어야 하오.”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화령을 향해 율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소저와 함께하는 유한 관광은 내겐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소. 조금 불친절하기는 했지만 소저의 설명은 내 의구심을 충분히 만족시켜 주었거든.”
“어머.”
“해서 난 은 소저가 내 무림을 여행하는 길잡이가 돼 주었으면 하오. 적어도 나보다는 많이 아는 듯하니까.”
화령은 율의 말을 곰곰이 되짚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가 공자보다 조금 더 아는 것 같긴 하네요.”
율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만일 내가 소저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된다면, 소저는 그렇게 원하는 무림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고 나도 좋은 안내원을 한 명 얻게 되겠지. 또 소저는 여행 도중 소저의 마음에 드는 낭군을 찾으면 되는 것이고, 나는 소저가 좋은 낭군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구경을 하면 되겠지. 이것이 바로 누이 좋고 매부까지 좋은 일 아니겠소?”
화령은 자신에 가득 찬 율의 얼굴을 보며 입가를 매만졌다.
‘안내원……이라니. 그럼 이 왕건이의 수다를 다시 들어 주어야 한다는 말이야?’
아무리 잘난 얼굴도 금세 질려 버릴 만큼 수다스러웠던 율을 떠올리며 화령은 뒤이어진 그의 말에 딴죽을 걸었다.
“어머. 왜 내 낭군을 찾는 걸 서문 공자가 구경한다는 거예요? 그건 재밌는 게 아니라 심각한 거라구요!”
낭군 찾기가 얼마나 힘든데 말이야!
왕건이 자식, 너 그거 알기나 해?
율은 싸늘한 화령을 달래기 위해 어색하게 웃었다.
“아, 뭐. 그런 뜻은 아니었소. 용서하시오.”
“흥.”
“…….”
“그렇지만…… 나쁜 제안은 아니군요.”
확실히 솔깃한 제안이긴 하다.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닌. 그녀는 화색이 도는 얼굴을 하는 율을 탐탁잖다는 눈으로 바라보다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요! 서문 공자의 말대로 하죠! 제가 당신의 무림 안내원이 되어 드리죠. 대신, 정말 절 무림으로 보내 주신다는 약조는 지키셔야 해요. 아셨죠?”

제5장. 기다려라, 무림이여! 내가 간다!


청화루에서의 모종의 논의를 끝내고 그녀와 함께 은가장으로 돌아온 후.
율은 별채 앞 정원을 거닐며 몇 시진 전 있었던 화령과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재미있는 오늘의 일들로 인해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는 제게 신신당부하는 화령을 향해 걱정 말라며 손사래를 치던 제 모습을 떠올리곤 걸음을 멈춘 채 중얼거렸다.
“너무…… 자신만만했나?”
20년 평생을 계획적으로 살아온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내린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이 여인과 함께 무림이라는 곳을 경험해 보고 싶다는, 아주 작은 욕심에서 일어난.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어쩌면 태자라는 신분으로 즐길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유람을 그는 적어도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과 다니고 싶었다. 그것이 어제 처음 만난 화령이라는 것은 확실히 충동적이기는 했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사람이니 아마 그의 생각대로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거다.
‘무림. 그리고 낭군 찾기라…….’
화령과 함께하는 무림행은 단언컨대, 심심하고 따분하지만은 않으리라. 게다가 내심 마음에 걸렸던 그 ‘낭군감’에 대해서 지적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은근히 마음이 놓이기까지 하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녀에게 신경이 쓰였던 그는 화령의 낭군감을 그녀뿐 아니라 제 마음에까지 드는 남자로 고르고 싶어졌다.
‘재밌겠어.’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선 내일 은무열을 찾아가 직접 말하기로 정했다. 처음엔 반대를 하겠지만 아마 결국 그들은 그의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벌써부터 화령과의 무림행을 확정지었다는 듯 웃고 있는 그의 눈에선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 * *

율이 무슨 생각에서 그리도 자신만만한 건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 은화령은 마음에 걸렸다.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저만 믿으라고 하는 율과 헤어진 후 화령은 하룻밤을 꼴딱 새며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
어제 일어난 선상에서의 ‘토악질 사건’ 이래로 아마 유한성 내에서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낭군감을 찾기는 힘들 거다. 그렇다면 율의 말대로 유한을 벗어나 찾는 수밖에 없다.
화령은 거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율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잃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지!
“은 소저. 준비됐소?”
율은 별채에서 아침 식사를 끝내자마자 화령의 방으로 건너왔다. 작심하고 계략을 꾸민 이래로 왠지 모르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그를 흘깃거리던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마음을 품은 두 사람은, 이윽고 집안의 어른인 은무열과 은무적을 찾아 은가장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 안채 쪽 정원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곤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령아? 공자까지?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은무적과 함께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일을 상의하던 은무열은 그의 앞에 서서 흠흠, 하고 낮게 기침하는 율의 모습을 발견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화령은 약속이라도 한 듯 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율이 먼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지?’
은무열은 지나칠 정도로 가까워 보이는 화령과 율을 바라보고 굳어 버렸다.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질 않는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그가 먼저 운을 떼기 위해 입술을 벌리기도 전, 율이 빙긋 웃으며 은무열을 바라봤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태자의 눈이 저렇게 빛나는 것은 불길함의 징조다. 물론 미래의 제왕이라 그런지 제 나이답지 않게 진중한 그지만 가끔은 짓궂은 경향이 있었던 율에게 몇 번 당했을 때의 눈빛과도 같았다. 갑자기 섬뜩한 예감이 들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스윽, 닦던 은무열은 이어진 율의 말에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태자가 미동조차 하지 않는 덤덤한 눈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다.
“이제, 은가장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유한이 아닌 다른 곳으로요. 이를테면, 예천과 같은.”
“그, 그게 무슨?”
“조금이라도 제게 여유가 있을 때 무림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무림이라뇨!
은무열의 가슴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분명 황궁을 떠나올 때 태자는 황제와 제게 유한에서 잠시 머물다 돌아간다는 말을 했다. 태자를 끔찍이 아끼는 황제가 이 바깥나들이를 허락해 준 것은 태자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율은 처음의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태자 전하!’
은무열은 차마 부르지 못하는 그의 호칭을 속으로 외치며 입을 벌렸다. 율은 그런 은무열의 문드러지는 마음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은 소저와 함께, 말이지요.”
평화로운 은가장에 청천벽락이 떨어졌다.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라고 은무열은 외쳤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어느새 은무열의 앞에 다가온 율은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작게 속삭였다.
“사부께서 말리셔도 저는 갈 것입니다.”
율은 단호했다. 그는 여전히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은무열은 갑자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율을 불렀다.
“공자!”
율은 은무열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았다.
“처음 집을 나설 때부터 마음먹었던 일입니다.”
은무열은 울상을 지었다.
“제, 제게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율은 말했다.
“사부께 해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 일을 대비하여 미리 황…… 아버님께 서찰을 보냈습니다.”
“공자!”
“아마 지금쯤이면 제가 은가장을 떠났다고 알고 계실 겁니다.”
“공자!”
“그러니 말릴 생각을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제가 한 번 결심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낸다는 사실은 사부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거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율의 모습은 은무열에겐 야차처럼 보였다. 은무열이 황궁에서 지내는 동안 율의 화사부로 지냈기에 그가 대충 어떤 사내인지 잘 알고 있다.
부드럽고 선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진율이라는 남자는 독한 구석이 있는 남자였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질 만큼 독점욕이 있었고, 하고자 하는 일은 얼마가 걸려도 해내는 끈기도 있었다. 그러다 일이 틀어진다면 그 일을 실패하게 만든 이를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약간의 악랄함도 지니고 있었다. 해서 지금까지 살벌한 황궁에서 끄떡 않고 태자라는 자리를 유지한 건지도 모른다.
‘제길…….’
그래. 은무열에게 있어서 율을 막을 방도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태자가 원한다면 나중에 황제께 꾸중을 듣더라도 그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하지만 화령은 다르다.
금지옥엽같이 아끼는 은무적의 막내이자 열아홉밖에 되지 않은 손녀딸을 태자의 말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무림에 던져 버릴 수는 없었다. 곁에 있던 은무적이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은 태자의 요구가 너무 터무니없어서였으니, 말은 다했지.
“좋……습니다. 이미 결정을 내리신 것 같으니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대신 저도 보고를 해야 하니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나 화령인 안 됩…….”
“사부. 일단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예?”
율은 은무열의 말을 끊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한편 두 남자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귀를 쫑긋 세워 가며 서 있던 화령은 율이 은무열에게 속닥이는 말이 무엇인지 들을 수가 없었다. 내심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녀는 은무적과 은무열에게 향하기 전, 자신을 향해 ‘나만 믿으시오!’를 거듭 외치던 율을 믿어 보기로 했다.
‘어?’
한참이나 은무열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던 율이 대화를 마치고 뒤로 물러나자 은화령의 가슴은 쿵쿵 뛰었다. 화령은 복잡한 얼굴로 그녀와 율을 번갈아 응시하던 할아버지의 한숨을 발견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고뇌하는 은무열의 모습에 그녀는 은근한 기대감마저 가지게 되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화령은 왠지 허락이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은무열은 웃고 있는 율을 내버려 두고 살심을 숨기지 않은 채로 율을 노려보고 있는 은무적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은무적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이내 화령을 보며 싱긋 웃는 율에게 돌아와서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였다.
“약조해 주십시오.”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은무열은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령아와 부디 무탈하게 다녀오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