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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혼례를 올리기 전에는 절대로 화령을 유한성 밖으로 보낼 생각이 없었던 은무적에게 있어선 요 며칠의 일은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예쁜 막내딸을 자신이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웠던가!
괜한 녀석에게 그녀의 소중한 딸을 함부로 주지 않기 위해 제 얼굴만 보면 자신들의 자제들과 화령을 혼인시키자고 졸라 대는 무림의 명망 높은 인사들과의 만남도 피했던 그였다. 갖은 초청에도 불구하고 은가장 내에만 칩거하며 지내던 은무적. ‘무적불패’라는 칭호 외에도 ‘천하제일 딸바보’라고도 불리는 그의 막내딸 사랑은 무림 세계에선 꽤 유명한 편이었다.
그러나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녀석의 말 한마디에 험난하기 짝이 없는 무림행을 허락해야만 한다니. 너무나 태연하고 어쩌면 방자하게까지 느껴지는 율의 말을 듣고 기가 차서 멍청하게 서 있을 때, 율과 이야기를 나눈 은무열이 제게 해 준 말을 듣고 은무적은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태자 전하의 뜻대로 하여라.’
처음부터가 수상쩍었던 사내였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얼굴을 심하게 밝히는 기질이 있었던 화령이 너무나 좋아할 법한 얼굴을 하고 은무열과 함께 은가장에 나타났을 때부터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았어야만 했다.
태자라니.
다른 누구도 아닌, 태자 전하라니!
은무열의 귀빈인 그가 ‘성은 밝힐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첫 인사에 덧붙일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만 했다. 뒤늦게 화령으로부터 그의 성이 ‘서문’이라는 것을 듣게 되어 경계의 끈을 놓아 버렸던 것이 은무적의 실수라면 실수였을까.
율이 황도의 명문가인 서문세가의 자제인 줄로만 알았던 은무적은 체념했다는 얼굴로 말하는 은무열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진율.
황제의 장자이자 나라의 태자.
황위에 오르게 된다면 분명 백성들에게 큰 힘이 되어 줄 거라 칭송받는 명성이 자자한 그 태자가 은무열의 귀빈이었단 말인가! 은무적은 은무열이 율에게 존대를 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고도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했다.
좋든 싫든, 은무적은 결국 화령의 무림행을 막을 수 없었다.
태자가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데, 그를 막을 수 있는 백성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후우.”
은무적의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걱정 마세요, 아버님! 소녀가 누굽니까? 은가장의 막내, 은화령 아니옵니까! 그깟 무림 따위, 소녀가 평정하고 오겠나이다! 저만 믿으시라니까요!’
자신만만하게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던 화령의 마지막 모습이 은무적의 눈앞을 스친다. 사랑스럽지만 왈가닥 성향이 짙은 제 딸이 무림에서 어떤 사고를 치고 다닐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큰일이로군…….’
은무적은 이제 하나의 점으로 변해 버린 화령과 율이 탄 마차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나마 화령보다 분별력 있고 냉정한 화령의 시비, 소미가 그녀를 잘 제어해야 할 테지만 화령의 제멋대로인 성격 때문에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무림맹에 있는 큰 아들, 은적월에게 서신을 보내야 할 것 같다.
“너무 걱정 말거라.”
얼마 전만 하더라도 꽃이 만개한 것마냥 활짝 웃고 다니던 제 아들의 얼굴이 며칠 새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변하자 찜찜한 기분이 들던 은무열은 고개를 떨어뜨리는 은무적의 어깨를 두드렸다.
“태자 전하는 생각이 깊으신 분이니 크게 소란을 피우고 다니시진 않을 거다.”
“아버님…….”
“전하와 함께하는 무사, 무영은 웬만한 문파의 장문인 정도의 무공 실력을 가진 이이니 령아의 안위 또한 무사할 것이고.”
은무열은 은무적을 위로한답시고 말을 던졌으나 애석하게도 그의 말은 씨알도 먹히질 않는다.
“하아아.”
은무적은 말없이 은무열을 바라보다 다시 크게 한숨을 내뱉는다. 은무열은 그런 아들의 모습을 흘깃거리며 멀어져 가는 마차를 지켜보았다.
‘만일 허락해 주시지 않으신다면, 은 소저를 비어 있는 제 태자비 후보에 올려 달라고 황상께 간청할 것입니다. 제 말엔 껌뻑 죽는 황상이시니 어쩜 바로 은 소저를 태자비로 간택하실 지도 모르겠군요. 무림인이긴 하나 은사부의 손녀니 말입니다. 물론 반대하는 대신들도 있겠지만 저는 밀고 나갈 것입니다. 은 사부도 아시겠지요. 태자비 후보에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골치가 아픈 일인지. 며칠간 지켜본 은 소저의 성격상, 그런 귀찮고 힘든 일에 말려들고 싶어 할 것 같지는 않군요.’
‘저, 전하!’
‘허니 선택하시지요. 은 소저가 직접 집을 나가시는 모습을 보시겠습니까, 아님 저와 함께 여행을 다니게 허락하시겠습니까?’
‘……!’
‘물론 선택은 사부님 몫입니다만 제가 보기엔 후자 쪽이 서로서로 상부상조하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영악한 줄은 알았지만 설마 아직까지 공석인 태자비를 핑계 댈 줄은 예상치 못했다.
불의의 일격이었다. 태자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정말 태자의 말대로 화령이 태자비에 간택된다면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그녀는 황궁이라는 곳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며 앞뒤 가리지 않고 가출을 할 것이 틀림없었다.
사랑하는 손녀딸이 원하는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었던 은무열은 빙긋 웃던 율의 모습을 떠올렸다.
‘태자 전하…….’
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확실히 은무열에게 있어서 좋은 쪽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 으스스한 바람이 은무열과 은무적의 몸을 감싼다.
부디 그들의 무림행이 순탄했으면 좋으련만…….
* * *
‘진짜…… 이 남자, 정체가 뭐야?’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9년 동안이나 유한에서 저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던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그녀를 무림으로 보내 주겠다는 허락을 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봤지만 은화령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루가 지나도 그때 느꼈던 얼떨떨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무림행.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기만 해도 벅찬 감동이 밀려오는, 꿈과 모험이 가득한 세계로 발을 내딛는단 사실에 화령은 밤잠을 설쳤다. 어딜 가더라도 반드시 소미만은 데려가라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그녀와 함께 짐을 꾸리며 얼마나 행복해했던가! 화령은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율의 모습을 흘끔거렸다.
고작 말 몇 마디를 나눈 것이 다이건만 황소고집보다 더 세다던 할아버지의 기를 꺾어 버린 율의 정체가 문득 의심스럽다. 그의 말로는 태자와 함께 은무열에게 그림을 배우고 있다고 하던데 과연 그 말이 사실일는지도 의문이 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그로 인해 그녀가 유한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 하나만큼은 그에게 감사해도 모자라겠지.
“왜 그러시오?”
꿈에 그리던 무림으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탄 이후로 줄곧 말이 없었던 화령이 자꾸만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율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응시했다. 화령은 화들짝 놀라며 딴청을 부리며 중얼거렸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만 많고 실속이 없는, 얼굴이 빼어난 것 말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밉상인 줄 알았는데 어제 이후로 왠지 모르게 율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개똥도 잘만 쓰면 보약이라더니. 은근히 도움이 되네.’
그녀는 낮게 웃으며 혼자 키득거렸다.
“아가씨, 왜 웃으세요?”
그녀의 옆에서 짐 꾸러미를 들고 있던 소미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화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군.”
율이 그런 그녀를 힐끔거리다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연 것은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무영.”
응?
덜커덩!
“부르셨습니까.”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갑자기 움직이던 마차가 덜컹거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달리는 마차 문을 열고 웬 검은 무복의 복면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 어머!”
놀란 소미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화령 역시 기척을 숨기고 있었던 그를 알아차리지 못해 놀라 입을 벌렸다. 율은 두 여인을 흘깃거리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소개하겠소. 여긴 내 호위무사, 무영이라 하오.”
화령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체 어디 숨어 있었던 거야?’
왠지 모르게 수상쩍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화령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바, 반가워요.”
그러나 마차 밖에 있었던 무영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만 까딱일 뿐 그녀의 손을 맞잡지 않았다. 율이 무영을 향해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무표정한 눈으로 화령을 응시하던 무영은 화령에게 눈인사를 하곤 언제 눈앞에 있었냐는 듯, 사라져 버렸다. 화령과 소미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무영의 흔적을 좇으며 입을 쩍 벌렸다.
“원래 그런 이이니 이해하시오.”
“아.”
“무영이 앞으로 우리의 여행에 동행하게 될 거요. 그가 있어 꽤 든든한 여행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소.”
율의 말대로 무영은 확실히 화령도 그 내공을 가늠할 수 없는 절정의 고수 같았다.
그나저나 왕건이 이 자식은 정말로 백면서생인 건가?
보통 무림세가의 자제들. 특히 그중에서도 무武에 있어선 명성이 자자한 서문세가의 자제이건만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것 같은 율의 정체가 더더욱 의심이 된다.
“은 소저.”
“예, 예?”
의문투성이인 율의 정체를 짐작하며 입술을 살짝 물어뜯고 있을 때 그가 다시 그녀를 부르자 화령은 흠칫거렸다. 율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뭘 그리 놀라시오?”
“제가 언제 놀랐다고 그래요?”
속마음을 들켜버린 화령이 딴청을 부리자 율은 입을 다물었다. 화령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대되네요.”
쿵쿵, 하고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감이 화령의 온몸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율은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화령은 희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기다려라, 무림이여! 내가 간다!’
제6장. 왕건이와 함께하는 미공자 관찰 도감
기대하고 고대하던 무림행을 시작한 첫날. 생애 첫 여행이라는 사실에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았던 화령의 기분은 유한성을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서면서 하강하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지속되자 따분함을 느꼈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멀어지는 유한성을 향해 손까지 흔들던 화령은 차라리 마차에 앉아 가는 것보다 경공을 시전하여 움직이는 것이 더 속이 편하다는 생각을 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답답할 정도로 짜증이 나는 침묵의 시간이 계속되었지만 그녀는 율에게 말을 붙이진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화령이 먼저 말을 건넨다면 물 만난 고기마냥 율이 입술을 움직일 것 같아서였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화령은 하품을 꾹꾹 참으며 은가장을 벗어난 걸 조금 후회했다. 그러나 그런 화령의 후회는 예상외로 오래가지 않았다. 따분했던 그녀의 여행이 첫 번째 암초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은 소저. 아무래도 이곳에서 멈춰 서야 할 것 같소.”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 밑에서 마차를 세우곤 무영이라는 이름의 남자와 몇 마디를 주고받던 율이 그를 기다리는 화령에게 다가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화령이 ‘왜요?’라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율은 그 이유를 읊기 시작했다.
“무영이 그러는데, 이 근처에는 객잔이 보이지 않는다 하오. 날이 너무 어두워졌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대충 잠을 때우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는데…… 소저 생각은 어떻소?”
한마디로 이곳에서 노숙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화령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겨우 억누르며 입술을 열었다.
“여기서 잔다구요? 이 산에서?”
율은 난감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
“후우. 여태껏 귀하게 자라 온 소저에게 있어서 당혹스러운 일일 거라 예상은 하오. 노숙이라니. 당치 않겠지. 만약 소저가 원치 않는다면 계속해서 움직이긴 하겠소. 안전은 걱정하지 마…….”
“괜찮아요! 여기서 자요!”
화령은 율의 말을 끊어 버리고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야, 야외취침이라니! 서문 공자. 제가 원하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요! 노숙! 얼마나 멋져요! 안 그래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축 처져 있던 화령의 어깨가 돌연 으쓱거리기 시작했다. 율은 화령의 예상치 못했던 답변에 당황한 듯 가만히 그녀가 웃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화령은 그런 율을 흘깃거리더니 입술을 길게 찢으며 외쳤다.
“얼른 소미에게 알려 줘야겠다. 공자, 그럼 준비할게요!”
율은 마침 마차 밖에 나가 있던 소미를 향해 달려가는 화령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예? 노숙이요?”
한편, 마차가 멈춘 사이 따분해하는 화령의 흥미를 돋울 수 있는 것이 없나 살펴보고 있던 소미는 율과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더니 제게로 달려와 ‘오늘 우리 여기서 잘 거야!’라는 말을 내뱉는 화령을 보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령은 밤하늘의 달덩이만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지 않니, 소미야? 우리, 항상 이런 걸 꿈꿔 왔잖아!”
화령은 드디어 꿈이 실현됐다며 즐거워했다.
‘아가씨 혼자 꿈꾸셨던 거겠지요. 제길…….’
소미는 좋아 죽을 지경이라는 얼굴로 말하는 화령에게 차마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지는 못했다.
“후우우.”
황소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까만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별무리들이 아무리 반짝거려도 그녀의 심란한 마음은 달래질 기미가 없었다. 노숙이라니. 그것도 고작 침낭 하나에 의존한!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대체!
“그냥 유한에 계셨으면 좋았을 것을. 무림은 갑자기 왜…… 하아아.”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열아홉 소녀 은화령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야산에서 잠을 자게 된 불쌍한 그녀의 시비, 소미는 복잡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가련하다 못해 연약해 보이기까지 한 천상 여인의 얼굴을 하고선 사내들 못지않게 왈패처럼 굴고 다니는 제 아가씨를 뒷바라지 해 온 지 어언 십수 년. 언제부터인가 사내들의 얼굴을 평가하고 또 기록하겠다며 받으라는 신부 수업도 받지 않고 저잣거리를 배회하는 것을 쫓아다니는 것도 힘들었건만 이젠 그 영역을 확장하기까지 하다니 미칠 지경이다. 물론, 화령 덕분에 소미 역시 유한성 밖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는 했으나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너만 믿는다, 소미야. 우리 령아를 잘 부탁한다.’
은가장을 떠나기 전, 가주인 은무적이 그녀에게 단단히 부탁했던 것을 소미는 기억하고 있었다. 화령이 행여나 바깥에서 사고를 치지 않도록 잘 감시해야 한다며, 소미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던 가주님의 걱정의 가득한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아!’
소미는 은무적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묵묵히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무영의 모습이 들어온다. 소미는 잠깐 고민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봐요.”
그러곤 무영의 곁에 서선 그를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댁도, 주인님 모시기…… 힘들죠?”
무영은 갑작스런 소미의 행동에 꽤 당황한 눈치였다. 소미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화령과 율을 흘깃거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켜보니 그쪽 주군도 우리 아가씨처럼 만만하지만은 않아 보이던데.”
“……!”
“우리, 힘내요.”
무영은 마치 ‘이 소녀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라는 얼굴로 소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미는 그런 무영을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앞날이 걱정되네……. 어휴.”
작은 체구의 소녀는 저를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무영에게서 시선을 돌리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모닥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밤의 찬 공기와 비교했을 때 모닥불 주위의 공기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본격 무림행의 첫날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 * *
산성傘星.
진의 초대 황제인 진성월振星팟이 이곳에 처음 들러 우산의 모양을 닮은 별자리를 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을 가진 도시. 진에서 각종 이색 대회가 많이 열리기로 소문나 있는 산성은 유한과 더불어 관광 도시로 유명하다.
천하제일 미녀 대회, 천하제일 미공자 대회, 천하제일 미각 대회, 천하제일 독서 대회 등등. 무림맹에서 주최하는 천하제일 무술 대회를 제외하고는 대회란 대회는 모두 주최하고 있는 산성은 언제나 그 대회를 참가하거나 참관하려는 사람들로 붐벼 났다.
마침 화령과 율 일행이 도착했을 시기는 천하제일 미공자 대회로 인해 진을 비롯한 주변의 나라인 송頌, 현炫, 은銀 등등의 나라에서 조각 같다고 칭송하는 수많은 미남 참가자들로 성내가 북적거리는 때였다.
야산에서 취침을 하고 새벽녘에 서둘러 마차를 타고 달려온 화령 일행은 날이 밝을 무렵쯤 산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성의 성문을 지나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가고 있는 마차 안에서 화령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바깥 풍경에 연신 실실거리는 중이다.
쿵쿵― 하고 심장이 요동친다. 기대감을 주체할 수 없어 입 근처가 부들부들 떨렸다. 화령은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창문에 들러붙어 있었다.
‘좋다, 좋아! 이거 예상외로 빨리 찾을 수도 있겠는걸?’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백의, 흑의, 청의 등을 입은 사내들이 전부 다 그 대회에 참가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청화루에서 눈에 불을 켜고 미남을 찾아다녔을 때와는 달리 지금 이곳은 거의 별천지나 다름없다.
무림행을 시작한 지 겨우 이틀째 되는 날에 어쩌면 제 낭군님을 찾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부푼 화령은 입은 길게 찢으며 침까지 흘릴 정도로 히죽거렸다.
“그렇게 좋소?”
율은 산성성 내로 들어서자마자 눈을 빛내는 화령을 재밌다는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화령은 그런 율을 흘깃거리더니 이내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돌리며 귀찮다는 듯 그를 향해 손을 휙휙 저었다.
“말시키지 마요. 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요?”
길거리를 배회하는 미남자들의 얼굴을 바라보기에도 바빠 이미 낭군 후보에서 제외시켜 버린 왕건이의 물음에 답해 줄 시간 따위는 없다고 여겼다. 그들의 외모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각인시켜야 할 사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참!’
집중을 하기 위해 두 눈을 크게 뜨며 지나가는 사내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화령은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그제야 창문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고 보니, 서문 공자도 황도에 계셨죠?”
“……!”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화령의 모습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꽤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쿡쿡거리던 율은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크게 당황했다. 화령이 거의 반쯤은 길가의 사내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렸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그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화령은 순식간에 평정을 찾은 그를 향해 물었다.
“정말 한월엔 미남들이 많나요? 이곳처럼 미공자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던데. 그게 사실이에요?”
“아…….”
율은 그녀에게 무어라 대답해 주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는 평생 황궁에 기거하며 궁 밖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황궁 뒤편에 위치한 강백산姜栢山에 황실 사냥 대회를 빌미로 잠깐 나가 본 적은 있었지만 그 이외의 경우는 전혀. 오랜 지기인 서문휘와 함께 궁 밖을 몰래 나가려는 시도를 해 본 적도 있었지만 그전에 무영에게 들켜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던 경우가 허다했다.
“서문 공자?”
화령은 머뭇거리는 율을 보고 얼른 대답을 해 달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율의 머릿속엔 ‘한월엔 미인美人들이 많다’란 서책 속의 글귀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글귀 속 미인은 남자를 가리키기도 했고 여자를 가리키기도 했다. 그런 문구가 책에 적혀 있을 정도니 아마 그녀가 원하는 답변을 들려줄 수 있으려나. 잠시 더 고민하던 율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요.”
그 나름엔 아주 깊이 생각하여 한 대답이건만 화령은 그런 율의 답변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럴 거요……라뇨? 그렇다면 그런 거고, 아님 아닌 거죠.”
“……!”
“확실히 말해 주세요. 나중에 들를 수도 있으니까. 어때요? 정말로 산성만 하나요? 이 정도로 미공자들이 많을까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제게 다가오는 화령의 돌발적인 행동에 율은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그, 그렇소.”
이렇게 몸을 밀착시키다니! 이 여인이 제정신인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율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화령은 율의 변화를 여전히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좋아. 마지막 목적지는 황도로 정했다!”
율은 결심하는 화령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다.
히이잉!
그때였다.
율의 입술이 열리기도 전에 마차가 멈추어 버렸다. 산에서 하루를 묵었으니 오늘은 기필코 객잔에서 자야 미용에 좋을 거라 주장하던 화령의 말에 의해 마차를 움직이던 무영이 호화 객잔을 발견한 것 같았다.
“아가씨! 도착했어요!”
문이 열림과 동시에 무영이 율을 바라보며 눈짓을 했고 소미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