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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가희야, 잘 쳤어?”
“아니, 망쳤어. 머릿속에 든 망나니 때문에.”
“뭐어?”
효진이 우습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자 가희는 울고 싶었다. 중요한 과목인 수학, 과학을 망쳐 버린 것이다.
“그 망나니가 누군데?”
“있어. 지지리도 제멋대로인.”
가희는 커피 자판기 앞에 멈춰 서서 주머니를 뒤졌다. 커피 한 잔에 300원인데 동전이 네 개뿐이었다.
“아, 동전이 모자라.”
“나도 동전 있…… 아, 동전을 가방에 넣어 두고 왔네. 먼저 뽑고 있어 교실에 금방 갔다 올게.”
효진이 다급하게 교실로 가는 것을 보며 가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서관은 시험기간이라 자리가 없을 것이다. 집에 가면 지훈과 부딪쳐야 할 것 같아 효진과 학교에 남아 교실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딸깍. 딸깍. 딸깍.
동전을 넣은 가희는 자판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빈속에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릴 것 같았다. 매점도 덩달아 시험 기간인지 일찍 문을 닫았고 학교 개방은 오후 3시까지였으니 나중에 효진과 늦은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삑.
코코아를 선택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손이 불쑥 들어오더니 커피를 눌러 버렸다. 놀라 고개를 휙 돌린 가희의 눈에 지훈이 들어왔다.
“시험 잘 쳤어?”
학교에서는 알은체를 하지 않기로 해 놓고 먼저 말을 걸다니. 가희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창가 쪽에 여학생들이 몇 명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묻지 마.”
“왜 망쳤어?”
가희는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훈 때문에 망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 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잘못이었으니까.
“떨어져.”
“…….”
“저리 가라고.”
“…….”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요지부동인 지훈을 흘겨본 가희는 네가 안 가면 내가 갈게, 라는 의미로 등을 돌렸다. 그런데 지훈에게 교복의 소매 부분이 붙들렸다.
“빈속에 커피 마시지 말고 이거 먹어.”
“……!”
지훈이 자신의 손을 살짝 받치더니 무엇인가를 놓아주었다.
“간다.”
종이컵을 한번 들어 보이던 지훈이 씨익 웃고는 멀어지자 가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초코바가 손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툭. 손가락으로 툭 지차 초코바가 책상 위에서 반원을 그리다 멈췄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내 이 녀석 때문에 집중이 안 되었다.
착착착.
가희는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기다 책을 덮어 버렸다. 내일 치를 국어 과목을 다시 집중해서 봐야 하는데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아…… 커피나 한 잔 마시고 하자.”
피곤함이 몰려들 때는 커피만한 것이 없었다. 가희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언니?”
지영이 커피를 젓다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얼굴로 입가에 픽하는 웃음을 지으며 돌아봤다.
“넌 그 언니 소리가 참 쉽다?”
“…….”
자신을 향한 적대감에 가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래서 쥐 죽은 듯이 살다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네요.”
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의 입으로 언니라는 말을 내뱉었으니 안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게 쉬워 내뱉었든 어렵게 내뱉었든 자신의 입을 통해 상대의 귀로 들어간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넌 잘 받아들이는 것 같네.”
어딘지 체념 같은 지영의 말에 가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견디는 것이었다. 이 집에서 사는 것을 선택한 것은 엄마였지 가희의 선택이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태연할 수 있어?”
가희는 그제야 지영에게서 술 냄새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 자신과 눈도 잘 안 마주치더니 오늘따라 말을 건다 싶었더니 이거였구나.
“태연한 것이 아니에요.”
“뭐?”
지영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가희는 시선을 피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받은 상처도 컸지만 엄마의 재혼은 더 힘들었다. 겨우 엄마와 둘이 사는 것에 적응하고 있었는데 재혼한다는 말에 어안이 막혔었다. 화가 나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캐나다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때 자신을 달래며 하신 아버지의 말씀.
“내 인생이 아니니까요.”
“무슨 말이야?”
지영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엄마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없듯이 내 인생이 아니라고요.”
“…….”
커피 잔을 든 지영의 손이 미세하게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괜한 말을 했나?”
가희는 주방에 홀로 남아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듯한 지영의 얼굴을 보자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비난을 받아 주고 말았다면 지영이 좀 통쾌한 얼굴을 했을 텐데.
“괜한 말 뭐?”
“……!”
가희는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지훈 때문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는 대신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놀랐어?”
가희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지훈을 향해 신랄하게 말했다.
“인기척을 좀 내든지, 소리라도 좀 내든지. 둘 중 하나는 해.”
그때도 뒤에서 따라오는지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느냔 말이다. 가희는 신경질적으로 잔에 물을 붓고 커피를 휘저었다.
“괜히 심술이네. 내 거도 한 잔 타.”
네가 타 먹어!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가희는 심호흡을 하며 믹스 커피 봉지를 뜯었다. 그러다 아차, 하는 얼굴로 지훈을 돌아봤다.
“믹스…… 먹을 거지?”
물어보지 않고 멋대로 봉지를 뜯어 버려 난감했다.
“그런 얼굴로 물으면 믹. 스.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뭐?”
내가 무슨 얼굴로 물었는데? 가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훈을 째려봤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자신의 신경을 긁어대는 데는 지훈만한 사람이 없었다.
“믹스로 줘. 깜찍한 얼굴로 묻는데 원두 달라고 했다간 한 대 맞을 것 같아.”
“쳇.”
가희는 커피를 휘휘 저어 지훈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그런데 지훈이 잔을 받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왜?”
“너 올라갈 거지?”
“응.”
“그럼 내 거도 들고 가자.”
“뭐?”
지훈이 팔짱을 끼고는 어서 가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가희는 어이가 없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지훈을 째려보다 이내 포기를 했다. 자신은 지금 내일 치를 시험공부가 우선이었다. 그러니 지훈과 이런 걸로 실랑이를 벌이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내일은 아침 먹고 가. 아침을 먹어야 두뇌 회전력이 좋고…….”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아?”
가희는 차반에 커피 두 잔을 들고 가다 훈계하는 지훈의 말에 토를 달았다. 이제껏 아침 안 먹고 다닌 지훈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험 기간이잖아.”
지훈이 그렇긴 하지만 특별한 날이니 자신의 말이 맞다는 듯 대꾸했다.
“자, 들고 네 방으로 가.”
“이왕 들고 온 김에 내 방까지 배달해 줘.”
지훈이 눈을 접고 웃으며 자신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 야!”
지훈에 의해 방으로 들어선 가희는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보고 놀랐다. 남자의 방은 어딘지 모르게 정돈이 안 되어 있고 엉망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방 정리…… 네가 해?”
“그럼 누가 해?”
“엄마가…….”
엄마가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다 가희는 입을 다물었다. 쓸고 닦는 정도야 엄마가 할 테지만 책꽂이에 꽂힌 책 정리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왜, 마음에 들어?”
지훈이 책상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기대는 것을 보며 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깔끔해서…….”
방을 둘러보던 가희는 지훈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자, 배달 끝.”
“……!”
책상에 커피를 내려놓고 나가려던 가희는 지훈에게 손목이 붙잡혔다. 어정쩡한 자세로 지훈에게서 떨어지지 못한 가희는 놀라 입술을 벌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입술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빛이 애잔하고 다정해 보여 심장이 쿵쿵거렸다.
“내가 전교 30등 안에 들면 내 이름 불러 줘.”
뭐. 가희는 눈만 커다랗게 뜬 채 지훈을 쳐다봤다.
“애정을 듬뿍 담아서.”
뭐 그런 억지를, 이라는 말이 생각과 달리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튀어나왔다면 지훈의 부탁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알려 줄 수 있었을 텐데.
“내 이름이 서지훈인 건 알지?”
가희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지훈의 손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빨리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지훈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했다?”
가희는 또 고개만 끄덕였다. 눈짓으로 손목을 놓으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 * *
“오늘 게시판에 전교 등수가 붙는다. 다들 확인하고 점수에 이의가 있는 학생은 교무실로 오도록.”
여기저기서 한숨에 한탄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가희는 자신의 등수보다 지훈의 전교 등수가 더 궁금했다. 영우의 말대로 중학교 2학년 때 전교 1등이었다면 지금도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지훈의 방에 갔을 때 수학 문제집의 낡은 정도를 보고 짐작을 했다. 그저 몇 번 펴보았다고 책의 모서리 부분이 낡아지지는 않는 것이다.
“가 보자.”
효진이 얼른 가 보자며 자신을 일으켜 세우다시피 했다. 자신도 빨리 확인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지훈이 약속대로 전교 30등을 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지훈의 이름을 불러야 했다. 이제까지 편하게 야, 라고 불렀는데 새삼 이름을 불러달라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어색하고 민망하며 낯간지러운 일이 될 것 같았다.
“와우! 이가희. 12등? 너 공부 잘하는 애였구나?”
“넌 8등이네. 나보다 공부 잘하는 애였구나?”
가희는 효진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농담을 건네고는 2학년 게시물로 고개를 돌렸다. 이름 중에서 성만 확인을 하며 아래로 아래로 시선을 움직였다. 박, 김, 이, 강, 한, 최, 안, 임, 조, 남, 류, 문, 손, 하, 황보, 배, 백……. 우리나라에 저렇게 많은 성씨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이런, 전교 28등이네.”
등 뒤에서 지훈의 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가희는 움찔 놀랐다. 게시물에서 시선을 주욱 건너뛰어 확인을 하자 28등이라는 글자 옆에 서지훈 이름이 있었다.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싶은데 이름 옆에 반도 기재가 되어 있어 우길 수가 없었다.
“나 약속 지켰다.”
속삭이듯이 말하는 지훈을 돌아보지 못한 가희는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내가 약속을 지켰으니 너도 네가 한 약속을 잊지 말라는 압박 같았다.
“불러 봐, 내 이름.”
가희는 여기서? 하는 표정으로 지훈을 돌아봤다. 승리에 도취된 미소가 지훈의 얼굴에 한가득이었다. 가희는 낭패감을 느끼며 웃고 있는 지훈을 째려봤다.
<3회> 기울다, 마음이
“가희야, 그만 가자.”
효진의 부름에 가희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을 느끼며 눈을 살짝 접고 지훈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안타깝지만 여기서는 안 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쉽네, 다음에.”
지훈만 들리게 낮게 읊조린 가희는 효진에게 손을 뻗어 팔짱을 꼈다.
“그래, 가자.”
등 뒤로 허, 하며 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탄성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가희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효진과 교실로 향했다.
“너희들 확인했어?”
뒤늦게 온 영우가 둘을 스치며 빠르게 묻자 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면서 돌아보는데 지훈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삐딱한 자세로 이쪽을 집요하게 바라보면서.
“참, 영화 다시 예매했는데…… 공포 영화, 괜찮지?”
시험이 끝나는 날 가려고 효진이 예매했던 표는 갑자기 학교에서 오후에 수업 일정을 진행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었다.
“응, 상관없어.”
지훈을 쳐다보던 가희는 효진의 말에 시선을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몇 걸음을 걷던 가희는 신경이 쓰여 다시 힐끔 돌아봤다. 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가희는 입을 비죽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집에 가면 좀 성가시겠다고.
“넌 어느 대학 무슨 전공을 택할 거야?”
효진의 물음에 가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졸업하면 바로 아빠가 있는 캐나다로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국내의 대학은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글쎄다.”
“뭐냐, 그 시큰둥한 반응은?”
“그러게.”
가희는 겸연쩍은 얼굴로 웃고는 교실로 들어섰다.
“어? 뭐지?”
효진의 반응에 고개를 돌리던 가희는 숨을 멈췄다. 칠판에 커다랗게 ‘오늘 야자 없음!’이라고 써져 있었다.
“와, 좋아라!”
효진이 좋아하는 것과 달리 자신은 좋아할 수가 없었다. 저녁에 야자를 하지 않고 가면 지훈과 맞닥트리고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가희야, 잘 쳤어?”
“아니, 망쳤어. 머릿속에 든 망나니 때문에.”
“뭐어?”
효진이 우습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자 가희는 울고 싶었다. 중요한 과목인 수학, 과학을 망쳐 버린 것이다.
“그 망나니가 누군데?”
“있어. 지지리도 제멋대로인.”
가희는 커피 자판기 앞에 멈춰 서서 주머니를 뒤졌다. 커피 한 잔에 300원인데 동전이 네 개뿐이었다.
“아, 동전이 모자라.”
“나도 동전 있…… 아, 동전을 가방에 넣어 두고 왔네. 먼저 뽑고 있어 교실에 금방 갔다 올게.”
효진이 다급하게 교실로 가는 것을 보며 가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서관은 시험기간이라 자리가 없을 것이다. 집에 가면 지훈과 부딪쳐야 할 것 같아 효진과 학교에 남아 교실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딸깍. 딸깍. 딸깍.
동전을 넣은 가희는 자판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빈속에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릴 것 같았다. 매점도 덩달아 시험 기간인지 일찍 문을 닫았고 학교 개방은 오후 3시까지였으니 나중에 효진과 늦은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삑.
코코아를 선택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손이 불쑥 들어오더니 커피를 눌러 버렸다. 놀라 고개를 휙 돌린 가희의 눈에 지훈이 들어왔다.
“시험 잘 쳤어?”
학교에서는 알은체를 하지 않기로 해 놓고 먼저 말을 걸다니. 가희는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창가 쪽에 여학생들이 몇 명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묻지 마.”
“왜 망쳤어?”
가희는 한 발 뒤로 물러나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훈 때문에 망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한 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잘못이었으니까.
“떨어져.”
“…….”
“저리 가라고.”
“…….”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요지부동인 지훈을 흘겨본 가희는 네가 안 가면 내가 갈게, 라는 의미로 등을 돌렸다. 그런데 지훈에게 교복의 소매 부분이 붙들렸다.
“빈속에 커피 마시지 말고 이거 먹어.”
“……!”
지훈이 자신의 손을 살짝 받치더니 무엇인가를 놓아주었다.
“간다.”
종이컵을 한번 들어 보이던 지훈이 씨익 웃고는 멀어지자 가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초코바가 손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툭. 손가락으로 툭 지차 초코바가 책상 위에서 반원을 그리다 멈췄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내내 이 녀석 때문에 집중이 안 되었다.
착착착.
가희는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기다 책을 덮어 버렸다. 내일 치를 국어 과목을 다시 집중해서 봐야 하는데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아…… 커피나 한 잔 마시고 하자.”
피곤함이 몰려들 때는 커피만한 것이 없었다. 가희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언니?”
지영이 커피를 젓다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얼굴로 입가에 픽하는 웃음을 지으며 돌아봤다.
“넌 그 언니 소리가 참 쉽다?”
“…….”
자신을 향한 적대감에 가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래서 쥐 죽은 듯이 살다 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네요.”
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의 입으로 언니라는 말을 내뱉었으니 안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게 쉬워 내뱉었든 어렵게 내뱉었든 자신의 입을 통해 상대의 귀로 들어간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넌 잘 받아들이는 것 같네.”
어딘지 체념 같은 지영의 말에 가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견디는 것이었다. 이 집에서 사는 것을 선택한 것은 엄마였지 가희의 선택이 아니므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태연할 수 있어?”
가희는 그제야 지영에게서 술 냄새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평소 자신과 눈도 잘 안 마주치더니 오늘따라 말을 건다 싶었더니 이거였구나.
“태연한 것이 아니에요.”
“뭐?”
지영이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가희는 시선을 피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받은 상처도 컸지만 엄마의 재혼은 더 힘들었다. 겨우 엄마와 둘이 사는 것에 적응하고 있었는데 재혼한다는 말에 어안이 막혔었다. 화가 나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캐나다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때 자신을 달래며 하신 아버지의 말씀.
“내 인생이 아니니까요.”
“무슨 말이야?”
지영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엄마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없듯이 내 인생이 아니라고요.”
“…….”
커피 잔을 든 지영의 손이 미세하게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괜한 말을 했나?”
가희는 주방에 홀로 남아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듯한 지영의 얼굴을 보자 자신이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비난을 받아 주고 말았다면 지영이 좀 통쾌한 얼굴을 했을 텐데.
“괜한 말 뭐?”
“……!”
가희는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지훈 때문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는 대신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놀랐어?”
가희는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지훈을 향해 신랄하게 말했다.
“인기척을 좀 내든지, 소리라도 좀 내든지. 둘 중 하나는 해.”
그때도 뒤에서 따라오는지 발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느냔 말이다. 가희는 신경질적으로 잔에 물을 붓고 커피를 휘저었다.
“괜히 심술이네. 내 거도 한 잔 타.”
네가 타 먹어!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가희는 심호흡을 하며 믹스 커피 봉지를 뜯었다. 그러다 아차, 하는 얼굴로 지훈을 돌아봤다.
“믹스…… 먹을 거지?”
물어보지 않고 멋대로 봉지를 뜯어 버려 난감했다.
“그런 얼굴로 물으면 믹. 스.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뭐?”
내가 무슨 얼굴로 물었는데? 가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훈을 째려봤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자신의 신경을 긁어대는 데는 지훈만한 사람이 없었다.
“믹스로 줘. 깜찍한 얼굴로 묻는데 원두 달라고 했다간 한 대 맞을 것 같아.”
“쳇.”
가희는 커피를 휘휘 저어 지훈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그런데 지훈이 잔을 받지 않고 쳐다보기만 했다.
“왜?”
“너 올라갈 거지?”
“응.”
“그럼 내 거도 들고 가자.”
“뭐?”
지훈이 팔짱을 끼고는 어서 가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가희는 어이가 없었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지훈을 째려보다 이내 포기를 했다. 자신은 지금 내일 치를 시험공부가 우선이었다. 그러니 지훈과 이런 걸로 실랑이를 벌이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내일은 아침 먹고 가. 아침을 먹어야 두뇌 회전력이 좋고…….”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아?”
가희는 차반에 커피 두 잔을 들고 가다 훈계하는 지훈의 말에 토를 달았다. 이제껏 아침 안 먹고 다닌 지훈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험 기간이잖아.”
지훈이 그렇긴 하지만 특별한 날이니 자신의 말이 맞다는 듯 대꾸했다.
“자, 들고 네 방으로 가.”
“이왕 들고 온 김에 내 방까지 배달해 줘.”
지훈이 눈을 접고 웃으며 자신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 야!”
지훈에 의해 방으로 들어선 가희는 깔끔하게 정리된 방을 보고 놀랐다. 남자의 방은 어딘지 모르게 정돈이 안 되어 있고 엉망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방 정리…… 네가 해?”
“그럼 누가 해?”
“엄마가…….”
엄마가 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다 가희는 입을 다물었다. 쓸고 닦는 정도야 엄마가 할 테지만 책꽂이에 꽂힌 책 정리까지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왜, 마음에 들어?”
지훈이 책상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기대는 것을 보며 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보다 깔끔해서…….”
방을 둘러보던 가희는 지훈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자, 배달 끝.”
“……!”
책상에 커피를 내려놓고 나가려던 가희는 지훈에게 손목이 붙잡혔다. 어정쩡한 자세로 지훈에게서 떨어지지 못한 가희는 놀라 입술을 벌린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
뭐냐고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입술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빛이 애잔하고 다정해 보여 심장이 쿵쿵거렸다.
“내가 전교 30등 안에 들면 내 이름 불러 줘.”
뭐. 가희는 눈만 커다랗게 뜬 채 지훈을 쳐다봤다.
“애정을 듬뿍 담아서.”
뭐 그런 억지를, 이라는 말이 생각과 달리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튀어나왔다면 지훈의 부탁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지 알려 줄 수 있었을 텐데.
“내 이름이 서지훈인 건 알지?”
가희는 자신의 손목을 잡은 지훈의 손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빨리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지훈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했다?”
가희는 또 고개만 끄덕였다. 눈짓으로 손목을 놓으라는 신호를 보내면서.
* * *
“오늘 게시판에 전교 등수가 붙는다. 다들 확인하고 점수에 이의가 있는 학생은 교무실로 오도록.”
여기저기서 한숨에 한탄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가희는 자신의 등수보다 지훈의 전교 등수가 더 궁금했다. 영우의 말대로 중학교 2학년 때 전교 1등이었다면 지금도 가능성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지훈의 방에 갔을 때 수학 문제집의 낡은 정도를 보고 짐작을 했다. 그저 몇 번 펴보았다고 책의 모서리 부분이 낡아지지는 않는 것이다.
“가 보자.”
효진이 얼른 가 보자며 자신을 일으켜 세우다시피 했다. 자신도 빨리 확인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지훈이 약속대로 전교 30등을 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지훈의 이름을 불러야 했다. 이제까지 편하게 야, 라고 불렀는데 새삼 이름을 불러달라는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어색하고 민망하며 낯간지러운 일이 될 것 같았다.
“와우! 이가희. 12등? 너 공부 잘하는 애였구나?”
“넌 8등이네. 나보다 공부 잘하는 애였구나?”
가희는 효진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농담을 건네고는 2학년 게시물로 고개를 돌렸다. 이름 중에서 성만 확인을 하며 아래로 아래로 시선을 움직였다. 박, 김, 이, 강, 한, 최, 안, 임, 조, 남, 류, 문, 손, 하, 황보, 배, 백……. 우리나라에 저렇게 많은 성씨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이런, 전교 28등이네.”
등 뒤에서 지훈의 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가희는 움찔 놀랐다. 게시물에서 시선을 주욱 건너뛰어 확인을 하자 28등이라는 글자 옆에 서지훈 이름이 있었다. 동명이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싶은데 이름 옆에 반도 기재가 되어 있어 우길 수가 없었다.
“나 약속 지켰다.”
속삭이듯이 말하는 지훈을 돌아보지 못한 가희는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내가 약속을 지켰으니 너도 네가 한 약속을 잊지 말라는 압박 같았다.
“불러 봐, 내 이름.”
가희는 여기서? 하는 표정으로 지훈을 돌아봤다. 승리에 도취된 미소가 지훈의 얼굴에 한가득이었다. 가희는 낭패감을 느끼며 웃고 있는 지훈을 째려봤다.
<3회> 기울다, 마음이
“가희야, 그만 가자.”
효진의 부름에 가희는 구세주를 만난 기분을 느끼며 눈을 살짝 접고 지훈을 향해 웃어 보였다. 안타깝지만 여기서는 안 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쉽네, 다음에.”
지훈만 들리게 낮게 읊조린 가희는 효진에게 손을 뻗어 팔짱을 꼈다.
“그래, 가자.”
등 뒤로 허, 하며 지훈이 어이없다는 듯 탄성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가희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효진과 교실로 향했다.
“너희들 확인했어?”
뒤늦게 온 영우가 둘을 스치며 빠르게 묻자 가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면서 돌아보는데 지훈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삐딱한 자세로 이쪽을 집요하게 바라보면서.
“참, 영화 다시 예매했는데…… 공포 영화, 괜찮지?”
시험이 끝나는 날 가려고 효진이 예매했던 표는 갑자기 학교에서 오후에 수업 일정을 진행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었었다.
“응, 상관없어.”
지훈을 쳐다보던 가희는 효진의 말에 시선을 돌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몇 걸음을 걷던 가희는 신경이 쓰여 다시 힐끔 돌아봤다. 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가희는 입을 비죽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집에 가면 좀 성가시겠다고.
“넌 어느 대학 무슨 전공을 택할 거야?”
효진의 물음에 가희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졸업하면 바로 아빠가 있는 캐나다로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국내의 대학은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글쎄다.”
“뭐냐, 그 시큰둥한 반응은?”
“그러게.”
가희는 겸연쩍은 얼굴로 웃고는 교실로 들어섰다.
“어? 뭐지?”
효진의 반응에 고개를 돌리던 가희는 숨을 멈췄다. 칠판에 커다랗게 ‘오늘 야자 없음!’이라고 써져 있었다.
“와, 좋아라!”
효진이 좋아하는 것과 달리 자신은 좋아할 수가 없었다. 저녁에 야자를 하지 않고 가면 지훈과 맞닥트리고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