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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먼저 안 갔어?”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게 기어들어갔다.
“지하철, 버스?”
“어?”
“고르라고. 뭘 타고 갈지.”
“버스…….”
“……그래, 가자.”
“어! 야!”
지훈이 옆을 스쳐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으며 자신의 손을 낚아챘다. 커다란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이 작고 힘없이 보였다. 반면 손을 타고 올라온 온기에 가희의 뺨이 붉어지고 있었다.
“야, 놓고 가, 이거.”
걸음을 멈춘 지훈이 돌아보자 가희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같은 집에 사는 게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 사람들이 봐…….”
지훈이가 남들을 의식해 손을 놓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악력이 가해지고 지훈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뛰어.”
“뭐?”
“버스 왔으니깐…… 뛰라고. 내 손잡고.”
몸이 앞으로 튕기듯이 끌려 나가는 순간 가희는 눈을 감고 말았다. 심장은 가슴에 있지 않고 손끝에 매달려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2회> 점점 신경이 쓰인다, 네가
똑같다. 지하철에서 서 있던 자리와 같은 포지션. 지훈은 이번에도 자신의 뒤에 서서 타인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복잡한 버스 안에서 사람에게 치이지 않고 서 있다는 묘한 우쭐함 뒤로 설렘이 찾아들었다. 가희는 이런 자신의 감정이 낯설어 입술 안쪽 살을 깨물었다.
끼이익.
버스 운전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 번 출렁이듯 움직였다.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지훈이 뻗은 손에 붙잡혀 심하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중심 잡아.”
낮게 속삭이는 지훈의 목소리에 가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많아 신경이 쓰였다.
툭.
가희의 시선이 반사 작용처럼 버스 손잡이로 향했다. 그 순간 자신의 눈에 보인 건 손잡이가 아니라 지훈의 살짝 기울어진 얼굴이었다. 같은 버스 손잡이를 잡은 지훈을 보며 가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맞닿은 손가락에서 열기가 피어나는 것 같아 슬그머니 손을 풀고 좌석 등받이에 있는 손잡이를 잡았다. 이제 곧 도착이니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려.”
“어!”
정차한 버스 문이 닫히기 전에 가희는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아직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학교였다. 그런데 지훈의 손에 이끌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내리게 된 상황이었다.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쟤들, 왜 저기서 내려?’라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버스는 그대로 둘을 남겨 두고 떠나 버렸다.
“내리는 곳 아니잖아?”
“…….”
“야!”
자신의 말을 묵살한 지훈이 학교 방향으로 걸음을 떼자 가희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적어도 10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인데 부연 설명도 하지 않다니.
“아침 공기 좋네. 저기 벚꽃도 보고.”
이미 꽃잎이 떨어져 파릇파릇한 새싹이 나 있는 벚나무였다. 가희는 벚나무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다 지훈의 뒤통수를 째려봤다. 평소 운동이라면 질색인 가희는 아침부터 본의 아니게 걷게 돼 짜증이 났다. 이렇게 되면 분명 더 피곤함을 느낄 것이고 수업 시간에 잠이 쏟아질 것이다.
“엄마야! 야, 이거 안 놔!”
불퉁한 표정으로 지훈을 앞질러 걷는 순간 몸이 뒤로 쑥 당겨졌다. 가방 고리를 손가락으로 당겨 버린 지훈에게 질질 끌려가는 꼴이었다.
“야, 놓으라…….”
“벗어.”
“뭐!”
가희는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도대체 뭘 벗으라고!
“가방 벗으라고.”
왜, 하고 물어야 하는데 가희는 입이 딱 달라붙어 버렸다. 벗어, 라는 말을 오해한 순간을 지우고 싶었다. 왜 이상한 생각이 먼저 떠오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들어 줄 테니 벗고 가볍게 걸으라고.”
가희가 가방을 벗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지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됐고. 다음부터는 제발 같이 다니지 말자.”
가희는 지훈의 손을 탁 쳐내고는 앞서 걸었다. 뭐라고 대꾸할 줄 알았던 지훈이 아무 말도 안 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괜히 앞서 걸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지훈이 오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남자가 얼마나 가볍게 걸으면 발소리도 안 들리는 것일까.
가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돌아볼까, 하는 생각이 한번 들기 시작하자 자신과 지훈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지훈이 오고 있기는 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다 혼자 고개를 저었다. 확인한다고 달라질 것이 있냔 말이다. 하지만 설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거라면 어쩌지. 같이 다니지 말자고 해서 상처받은 거면 어떡하지.
“으왓!”
“엇!”
가희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돌아서다 그대로 지훈의 가슴에 머리를 부딪쳤다. 딱 한 발자국 떨어진 바로 뒤에서 지훈이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에 타는 순간부터 남인 듯 남이 아닌 관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런데 차가 크게 흔들리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어 가희를 잡았다. 이쯤 되면 시선이 한 번 마주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집스럽게 외면하고 있어 불만스러웠다. 같은 학교 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있다지만 이렇게 표 나게 외면하며 서 있어야 하냔 말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도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할 상황인데.
‘쯧.’
언짢아졌다.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하지만 막무가내로 가희를 데리고 버스를 내려 버렸다.
‘야!’
서지훈이라고 딱 한 번 부르고는 그다음부터는 자신을 ‘야.’, ‘너.’로만 불렀다. 물론 자신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누나라고 부르지 않아 불만은 없었다. 신경질이 났음을 여실히 드러내며 자신을 앞질러 가는 가희를 잡아야 했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싫어 한 정거장 전에 내렸는데 이대로 또 모른 체하며 가기는 싫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퉁퉁거리는 가희가 우스웠다. 아침부터 바락거리지 말고 여유 좀 가지라고 말하려는데 같이 다니지 말자는 말에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앞서 걷는 가희의 머리칼이 찰랑거리는 것을 보며 걷고 있었다.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지훈아, 뭐 해?”
은열이 기지개를 켜며 다가왔지만 지훈은 창틀에 걸터앉아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을 잔잔하게 간질거리는 진동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뭐 재미난 거 있어?”
“어, 있어.”
“뭔데?”
은열이 지훈이 보는 운동장으로 시선을 꽂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
“있잖아…….”
“응?”
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은열을 쳐다봤다.
“꽃이 품에 안기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
“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은열이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자 지훈은 입꼬리를 둥글게 말아 올렸다.
무방비하게 걷다 휙 뒤돌아서는 가희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얇고 여린 꽃잎이 가져다주는 향에 취해 머리가 아찔해졌다. 가슴을 스치는 감촉에 심장이 제자리에서 높이뛰기라도 하는지 심하게 벌렁거렸다.
“기분이 어떤데?”
은열이 눈썹을 일그러트리자 지훈은 검지로 아랫입술을 만지며 피식 웃었다. 기분이 어떤지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폭 안기는 꽃이 얼마나 약하고 부드러운지 알아 버린 지금 다시 그 감각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시 품으로 떨어졌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뿐이었다.
“지훈아!”
혜원이 교실 입구에서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자 지훈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혜원의 호들갑에 고이 담아 놓은 떨림이 부서질 것만 같아 달갑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너 말고 지훈이한테 볼일 있거든.”
혜원이 은열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자 지훈은 창틀에 올렸던 다리를 내리고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농구나 하러 가자.”
“어? 어. 그래.”
“야! 서지훈, 오늘 학원에서 단어 암기 시험…….”
“내가 언제 공부하는 거 봤어?”
지훈은 혜원을 향해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일갈하고는 은열과 교실을 나섰다.
“혜원이 째려본다.”
“무시해.”
“그나저나 꽃이 누군데?”
“……!”
지훈은 은열의 예리한 질문에 휘청했다. 녀석 눈치 하나는 겁나 빠르네.
“뭔 소리야?”
지훈은 능청을 떨었다.
“너 좀 이상하다?”
“이상하긴. 꽃이 꽃이지, 누구냐 묻는 네가 더 이상해.”
퍽.
지훈은 은열을 향해 힘을 실어 농구공을 던졌다. 더 캐묻지 말고 농구나 하자는 뜻이었다.
“이상한데…….”
뒤에 선 은열이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있는 걸 알지 못한 지훈은 천천히 농구 코트 안으로 걸어갔다.
* * *
“가희는?”
“새벽에 나갔어요.”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대화를 듣던 지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직 내려오지 않아 늦잠을 잔 거라고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뭐, 새벽?”
“가희는 시험 기간만 되면 학교를 한 시간이나 빨리 가더라구요.”
“아! 오늘부터 시험이라 그랬지?”
아버지가 자신을 힐끗 돌아봤다. 그 시선이 ‘넌 아직 학교를 안 가고 뭐 하고 있는 거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밥은 먹고 갔어요?”
지훈은 아버지의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고는 새어머니에게 물었다.
“시험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지 아침을 안 먹고…….”
“그래도 밥은 먹고 가든지 할 것이지.”
아버지가 혀를 차며 안타까운 듯 말하자 지영이 숟가락을 소리 나게 탁, 내려놓았다.
“새어머니도 별로 신경을 안 쓰는데 아버지가 그러는 건 좀 오버 아닌가요?”
지영이 신랄하게 말하고 나오자 인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훈은 더 있어 봐야 좋은 꼴을 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나 학교까지 좀 태워 줘.”
“…….”
아버지와 눈싸움을 하던 누나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지훈은 “얼른!” 하며 재촉했다.
“그, 그래. 지훈이도 시험이니 빨리 가야겠네.”
두 사람의 사이에 끼여 눈치를 보던 새어머니 민경이 멋쩍은 얼굴로 자신을 챙기고 나섰다. 그 모습이 어딘지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너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시동을 걸며 지영이 날선 목소리로 묻자 지훈은 등받이를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귀찮아서.”
집은 편해야 하는 곳이다. 집이 싫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지겹고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뭐가?”
“집이 시끄러워지면 귀찮다고.”
“집이 시끄러워지는데 왜 귀찮아?”
누구의 편을 든다는 것은 꽤 귀찮은 일이다, 특히 가족들 간에는.
“분위기가 나빠지면 눈치를 봐야 하니 귀찮지.”
“귀찮아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가족인데 안 그래?”
지훈은 지영을 한번 쳐다보고는 눈을 감았다. 누나가 가시 돋친 말을 하면 새어머니가 무안한 얼굴로 난감해한다는 것을 왜 모르냐고 묻고 싶었다.
“야, 서지훈. 안 그러냐고?”
“출발 안 해? 나 오늘부터 시험이라고.”
지훈은 손을 휘휘 저으며 지영의 말을 묵살해 버렸다.
“쳇, 상전이 따로 없네.”
지영이 눈을 흘기더니 핸들을 돌렸다. 지훈은 차창을 열고 턱을 괴고는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도 불만이 많은 지영이 툭하면 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다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말리려다 말았다. 저렇게라도 말하지 못하면 그 화가 집안으로 뻗칠 테니까. 새어머니를 향한 불만이 점점 가희에게도 뻗칠지 모를 일이었다.
“시끄러운 건 귀찮은 거야.”
지훈은 다시 한번 혼잣말을 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아!”
가희는 수학 문제가 풀리지 않아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OMR카드 체크 잘못했어?”
“……네.”
가희는 선생님이 건네주는 새 답지 카드를 받아 이름과 학년, 반, 번호를 기재하고 과목 코드를 다시 체크했다.
시험 첫날 첫 시간이 수학이었다. 시험 시간표는 학년에 상관없이 전체가 동일했기 때문에 지훈도 지금쯤 수학 시험을 치고 있을 것이다. 잡생각이 든 머릿속으로 겨우 푼 문제의 답을 체크하다 실수를 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자꾸 생각이 분산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늦었네.’
야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골목길을 지나가야 하지만 가로등이 밝은 편이라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마중 나온 지훈을 보는 순간 긴장이 됐다. 그의 가슴에 안겼던 것이 고의가 아닌 실수였다지만 난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훈을 더 의식하는 계기가 되어 버려 당황스러웠다.
‘……왜 나와 있어?’
‘왜일 것 같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지훈의 눈빛에 장난기가 어리는 것을 알았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마중을 나오지 않던 지훈이 하필 오늘 마중을 나와 더 난처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라고 말하기도 뭣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아침의 일을 거론하는 것이 더 이상하게 보일 것이라 여겼다.
‘가자.’
‘어?’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는 지훈을 멀뚱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얼른 오라는 손짓을 했다.
‘집에 안 가?’
‘가야지. 편의점 먼저 갔다가.’
그가 편의점으로 간다는 말을 했을 때 지훈이 마중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고 생각했다. 편의점 갈 일이 있으니 겸사겸사 나온 것이라고.
‘계산.’
계산하라는 지훈의 말에 주섬주섬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얜 누구야?’
계산을 마치고 지갑을 닫으려는 순간 지훈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야! 이리 줘.’
지갑을 낚아채 간 지훈은 지갑 안에 넣어 둔 자신의 어릴 때 사진을 보며 키득거렸다. 가희는 키가 큰 지훈의 손에서 지갑을 찾아올 수 없었다.
‘눈만 커다랬네.’
‘달라고.’
폴짝 뛰어오르면 다시 낚아챌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깡총 뛰었는데 헛수고였다. 넘어지지 않으려다 지훈의 가슴에 손을 짚어 버렸다.
‘또 안기려고?’
‘……!’
화들짝 놀라며 움츠러들자 지훈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 아침의 일은 실수라는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알지 않느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미치겠네.”
가희는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두어 번 젓고는 다시 문제에 집중하려 했다. 지금 중요한 이 순간에 왜 잡생각이 드느냔 말이다.
“먼저 안 갔어?”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게 기어들어갔다.
“지하철, 버스?”
“어?”
“고르라고. 뭘 타고 갈지.”
“버스…….”
“……그래, 가자.”
“어! 야!”
지훈이 옆을 스쳐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으며 자신의 손을 낚아챘다. 커다란 손에 잡힌 자신의 손이 작고 힘없이 보였다. 반면 손을 타고 올라온 온기에 가희의 뺨이 붉어지고 있었다.
“야, 놓고 가, 이거.”
걸음을 멈춘 지훈이 돌아보자 가희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같은 집에 사는 게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사, 사람들이 봐…….”
지훈이가 남들을 의식해 손을 놓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악력이 가해지고 지훈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뛰어.”
“뭐?”
“버스 왔으니깐…… 뛰라고. 내 손잡고.”
몸이 앞으로 튕기듯이 끌려 나가는 순간 가희는 눈을 감고 말았다. 심장은 가슴에 있지 않고 손끝에 매달려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2회> 점점 신경이 쓰인다, 네가
똑같다. 지하철에서 서 있던 자리와 같은 포지션. 지훈은 이번에도 자신의 뒤에 서서 타인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복잡한 버스 안에서 사람에게 치이지 않고 서 있다는 묘한 우쭐함 뒤로 설렘이 찾아들었다. 가희는 이런 자신의 감정이 낯설어 입술 안쪽 살을 깨물었다.
끼이익.
버스 운전기사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 번 출렁이듯 움직였다. 자신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지훈이 뻗은 손에 붙잡혀 심하게 흔들리지는 않았다.
“중심 잡아.”
낮게 속삭이는 지훈의 목소리에 가희는 돌아보지 않았다.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많아 신경이 쓰였다.
툭.
가희의 시선이 반사 작용처럼 버스 손잡이로 향했다. 그 순간 자신의 눈에 보인 건 손잡이가 아니라 지훈의 살짝 기울어진 얼굴이었다. 같은 버스 손잡이를 잡은 지훈을 보며 가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맞닿은 손가락에서 열기가 피어나는 것 같아 슬그머니 손을 풀고 좌석 등받이에 있는 손잡이를 잡았다. 이제 곧 도착이니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려.”
“어!”
정차한 버스 문이 닫히기 전에 가희는 버스에서 내려야 했다. 아직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학교였다. 그런데 지훈의 손에 이끌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내리게 된 상황이었다.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쟤들, 왜 저기서 내려?’라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버스는 그대로 둘을 남겨 두고 떠나 버렸다.
“내리는 곳 아니잖아?”
“…….”
“야!”
자신의 말을 묵살한 지훈이 학교 방향으로 걸음을 떼자 가희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적어도 10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인데 부연 설명도 하지 않다니.
“아침 공기 좋네. 저기 벚꽃도 보고.”
이미 꽃잎이 떨어져 파릇파릇한 새싹이 나 있는 벚나무였다. 가희는 벚나무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다 지훈의 뒤통수를 째려봤다. 평소 운동이라면 질색인 가희는 아침부터 본의 아니게 걷게 돼 짜증이 났다. 이렇게 되면 분명 더 피곤함을 느낄 것이고 수업 시간에 잠이 쏟아질 것이다.
“엄마야! 야, 이거 안 놔!”
불퉁한 표정으로 지훈을 앞질러 걷는 순간 몸이 뒤로 쑥 당겨졌다. 가방 고리를 손가락으로 당겨 버린 지훈에게 질질 끌려가는 꼴이었다.
“야, 놓으라…….”
“벗어.”
“뭐!”
가희는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도대체 뭘 벗으라고!
“가방 벗으라고.”
왜, 하고 물어야 하는데 가희는 입이 딱 달라붙어 버렸다. 벗어, 라는 말을 오해한 순간을 지우고 싶었다. 왜 이상한 생각이 먼저 떠오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들어 줄 테니 벗고 가볍게 걸으라고.”
가희가 가방을 벗지 않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지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됐고. 다음부터는 제발 같이 다니지 말자.”
가희는 지훈의 손을 탁 쳐내고는 앞서 걸었다. 뭐라고 대꾸할 줄 알았던 지훈이 아무 말도 안 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괜히 앞서 걸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지훈이 오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남자가 얼마나 가볍게 걸으면 발소리도 안 들리는 것일까.
가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돌아볼까, 하는 생각이 한번 들기 시작하자 자신과 지훈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지훈이 오고 있기는 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다 혼자 고개를 저었다. 확인한다고 달라질 것이 있냔 말이다. 하지만 설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거라면 어쩌지. 같이 다니지 말자고 해서 상처받은 거면 어떡하지.
“으왓!”
“엇!”
가희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돌아서다 그대로 지훈의 가슴에 머리를 부딪쳤다. 딱 한 발자국 떨어진 바로 뒤에서 지훈이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버스에 타는 순간부터 남인 듯 남이 아닌 관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런데 차가 크게 흔들리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어 가희를 잡았다. 이쯤 되면 시선이 한 번 마주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집스럽게 외면하고 있어 불만스러웠다. 같은 학교 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있다지만 이렇게 표 나게 외면하며 서 있어야 하냔 말이다. 전혀 모르는 사람도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할 상황인데.
‘쯧.’
언짢아졌다. 심술을 부리고 싶었다.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하지만 막무가내로 가희를 데리고 버스를 내려 버렸다.
‘야!’
서지훈이라고 딱 한 번 부르고는 그다음부터는 자신을 ‘야.’, ‘너.’로만 불렀다. 물론 자신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누나라고 부르지 않아 불만은 없었다. 신경질이 났음을 여실히 드러내며 자신을 앞질러 가는 가희를 잡아야 했다. 모르는 척하는 것이 싫어 한 정거장 전에 내렸는데 이대로 또 모른 체하며 가기는 싫었다. 그런데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퉁퉁거리는 가희가 우스웠다. 아침부터 바락거리지 말고 여유 좀 가지라고 말하려는데 같이 다니지 말자는 말에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앞서 걷는 가희의 머리칼이 찰랑거리는 것을 보며 걷고 있었다. 만져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지훈아, 뭐 해?”
은열이 기지개를 켜며 다가왔지만 지훈은 창틀에 걸터앉아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을 잔잔하게 간질거리는 진동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뭐 재미난 거 있어?”
“어, 있어.”
“뭔데?”
은열이 지훈이 보는 운동장으로 시선을 꽂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지만 운동장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
“있잖아…….”
“응?”
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은열을 쳐다봤다.
“꽃이 품에 안기는 기분이 어떤지 알아?”
“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은열이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자 지훈은 입꼬리를 둥글게 말아 올렸다.
무방비하게 걷다 휙 뒤돌아서는 가희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얇고 여린 꽃잎이 가져다주는 향에 취해 머리가 아찔해졌다. 가슴을 스치는 감촉에 심장이 제자리에서 높이뛰기라도 하는지 심하게 벌렁거렸다.
“기분이 어떤데?”
은열이 눈썹을 일그러트리자 지훈은 검지로 아랫입술을 만지며 피식 웃었다. 기분이 어떤지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폭 안기는 꽃이 얼마나 약하고 부드러운지 알아 버린 지금 다시 그 감각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시 품으로 떨어졌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뿐이었다.
“지훈아!”
혜원이 교실 입구에서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자 지훈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혜원의 호들갑에 고이 담아 놓은 떨림이 부서질 것만 같아 달갑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너 말고 지훈이한테 볼일 있거든.”
혜원이 은열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자 지훈은 창틀에 올렸던 다리를 내리고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농구나 하러 가자.”
“어? 어. 그래.”
“야! 서지훈, 오늘 학원에서 단어 암기 시험…….”
“내가 언제 공부하는 거 봤어?”
지훈은 혜원을 향해 쓸데없는 짓 좀 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일갈하고는 은열과 교실을 나섰다.
“혜원이 째려본다.”
“무시해.”
“그나저나 꽃이 누군데?”
“……!”
지훈은 은열의 예리한 질문에 휘청했다. 녀석 눈치 하나는 겁나 빠르네.
“뭔 소리야?”
지훈은 능청을 떨었다.
“너 좀 이상하다?”
“이상하긴. 꽃이 꽃이지, 누구냐 묻는 네가 더 이상해.”
퍽.
지훈은 은열을 향해 힘을 실어 농구공을 던졌다. 더 캐묻지 말고 농구나 하자는 뜻이었다.
“이상한데…….”
뒤에 선 은열이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있는 걸 알지 못한 지훈은 천천히 농구 코트 안으로 걸어갔다.
* * *
“가희는?”
“새벽에 나갔어요.”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대화를 듣던 지훈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직 내려오지 않아 늦잠을 잔 거라고 짐작했는데 아니었다.
“뭐, 새벽?”
“가희는 시험 기간만 되면 학교를 한 시간이나 빨리 가더라구요.”
“아! 오늘부터 시험이라 그랬지?”
아버지가 자신을 힐끗 돌아봤다. 그 시선이 ‘넌 아직 학교를 안 가고 뭐 하고 있는 거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밥은 먹고 갔어요?”
지훈은 아버지의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고는 새어머니에게 물었다.
“시험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지 아침을 안 먹고…….”
“그래도 밥은 먹고 가든지 할 것이지.”
아버지가 혀를 차며 안타까운 듯 말하자 지영이 숟가락을 소리 나게 탁, 내려놓았다.
“새어머니도 별로 신경을 안 쓰는데 아버지가 그러는 건 좀 오버 아닌가요?”
지영이 신랄하게 말하고 나오자 인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훈은 더 있어 봐야 좋은 꼴을 보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나 학교까지 좀 태워 줘.”
“…….”
아버지와 눈싸움을 하던 누나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지훈은 “얼른!” 하며 재촉했다.
“그, 그래. 지훈이도 시험이니 빨리 가야겠네.”
두 사람의 사이에 끼여 눈치를 보던 새어머니 민경이 멋쩍은 얼굴로 자신을 챙기고 나섰다. 그 모습이 어딘지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너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시동을 걸며 지영이 날선 목소리로 묻자 지훈은 등받이를 뒤로 젖히며 중얼거렸다.
“귀찮아서.”
집은 편해야 하는 곳이다. 집이 싫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지겹고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뭐가?”
“집이 시끄러워지면 귀찮다고.”
“집이 시끄러워지는데 왜 귀찮아?”
누구의 편을 든다는 것은 꽤 귀찮은 일이다, 특히 가족들 간에는.
“분위기가 나빠지면 눈치를 봐야 하니 귀찮지.”
“귀찮아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가족인데 안 그래?”
지훈은 지영을 한번 쳐다보고는 눈을 감았다. 누나가 가시 돋친 말을 하면 새어머니가 무안한 얼굴로 난감해한다는 것을 왜 모르냐고 묻고 싶었다.
“야, 서지훈. 안 그러냐고?”
“출발 안 해? 나 오늘부터 시험이라고.”
지훈은 손을 휘휘 저으며 지영의 말을 묵살해 버렸다.
“쳇, 상전이 따로 없네.”
지영이 눈을 흘기더니 핸들을 돌렸다. 지훈은 차창을 열고 턱을 괴고는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도 불만이 많은 지영이 툭하면 할머니께 전화를 걸어 미주알고주알 다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 말라고 말리려다 말았다. 저렇게라도 말하지 못하면 그 화가 집안으로 뻗칠 테니까. 새어머니를 향한 불만이 점점 가희에게도 뻗칠지 모를 일이었다.
“시끄러운 건 귀찮은 거야.”
지훈은 다시 한번 혼잣말을 하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 *
“아!”
가희는 수학 문제가 풀리지 않아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OMR카드 체크 잘못했어?”
“……네.”
가희는 선생님이 건네주는 새 답지 카드를 받아 이름과 학년, 반, 번호를 기재하고 과목 코드를 다시 체크했다.
시험 첫날 첫 시간이 수학이었다. 시험 시간표는 학년에 상관없이 전체가 동일했기 때문에 지훈도 지금쯤 수학 시험을 치고 있을 것이다. 잡생각이 든 머릿속으로 겨우 푼 문제의 답을 체크하다 실수를 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왜 자꾸 생각이 분산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늦었네.’
야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골목길을 지나가야 하지만 가로등이 밝은 편이라 그리 무섭지는 않았다. 그런데 자신을 마중 나온 지훈을 보는 순간 긴장이 됐다. 그의 가슴에 안겼던 것이 고의가 아닌 실수였다지만 난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훈을 더 의식하는 계기가 되어 버려 당황스러웠다.
‘……왜 나와 있어?’
‘왜일 것 같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지훈의 눈빛에 장난기가 어리는 것을 알았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마중을 나오지 않던 지훈이 하필 오늘 마중을 나와 더 난처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은 잊어버리라고 말하기도 뭣한 상황이었다. 오히려 아침의 일을 거론하는 것이 더 이상하게 보일 것이라 여겼다.
‘가자.’
‘어?’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는 지훈을 멀뚱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얼른 오라는 손짓을 했다.
‘집에 안 가?’
‘가야지. 편의점 먼저 갔다가.’
그가 편의점으로 간다는 말을 했을 때 지훈이 마중 나온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고 생각했다. 편의점 갈 일이 있으니 겸사겸사 나온 것이라고.
‘계산.’
계산하라는 지훈의 말에 주섬주섬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얜 누구야?’
계산을 마치고 지갑을 닫으려는 순간 지훈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야! 이리 줘.’
지갑을 낚아채 간 지훈은 지갑 안에 넣어 둔 자신의 어릴 때 사진을 보며 키득거렸다. 가희는 키가 큰 지훈의 손에서 지갑을 찾아올 수 없었다.
‘눈만 커다랬네.’
‘달라고.’
폴짝 뛰어오르면 다시 낚아챌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깡총 뛰었는데 헛수고였다. 넘어지지 않으려다 지훈의 가슴에 손을 짚어 버렸다.
‘또 안기려고?’
‘……!’
화들짝 놀라며 움츠러들자 지훈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 아침의 일은 실수라는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알지 않느냐고 말하려다 말았다.
“미치겠네.”
가희는 혼잣말을 하며 머리를 두어 번 젓고는 다시 문제에 집중하려 했다. 지금 중요한 이 순간에 왜 잡생각이 드느냔 말이다.